[리뷰]허구의 허구성을 탐구하는 작품 - 마틴 맥도나의 <세븐 싸이코패스>

2015. 3. 24. 13:48특별전/낯선 기억들 - 동시대 영화 특별전

허구의 허구성을 탐구하는 작품

- 마틴 맥도나의 <세븐 싸이코패스>




<세븐 싸이코패스>의 오프닝은 충격적이다. 두 명의 ‘어깨’가 볕 좋은 날 다리 위에서 긴 수다를 떠는데, 우리는 그들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대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헌데 어느새 스크린 안에 들어온 복면을 쓴 킬러가 그들의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와 - 스크린의 정중앙까지 와서 - 그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다.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쓰러진 둘 위로, 킬러는 자신의 표식인 양 다이아몬드 잭 카드를 뿌린다. 이 킬러의 모습이 정지되면서 ‘1번 싸이코패스’라는 자막이 박힌 후 곧이어 ‘세븐 싸이코패스’라는 이 영화의 제목이 뜬다. 그러니까 이런 끔찍한 살인자의 모습을 앞으로 6명을 더 봐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후 전환되는 장면은, ‘세븐 싸이코패스’라는 작품을 구상 중인 시나리오 작가 마티의 일상이다. 그러니까 오프닝의 급작스러운 살인 장면은 마티가 구상하고 있는, 그러나 잘 풀리지 않는 시나리오의 한 장면인 것처럼 제시된다. 과연 그럴까?


마티에게는 빌리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는 개를 유괴한 뒤 개의 주인이 보상금을 내걸면 개를 찾아준 선한 사마리아인인 양 보상금을 타는 것으로 돈을 버는 사기꾼이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한스라는 동업자가 있다. 빌리가 마티의 시나리오를 돕겠다며 신문에 살인범을 찾는 광고를 내면서, 그리하고 하필이면 마피아 조직 보스의 개를 유괴하면서, 마티의 평범하고 지리멸렬하던 삶이 급박한 전환을 이룬다. 광고를 보고 찾아온 자크한테서 평생의 연인이었던 매기와 함께했던 연쇄살인 행각의 이야기를 듣는다던가, 개를 찾기 위해 무장하고 들이닥친 마피아 갱들에게 목숨을 위협받으며 혼비백산이 된다던가, 그 와중에  ‘다이아몬드 잭’ 킬러와 조우해 그가 쏜 총에 맞은 마피아들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다던가. 단지 킬러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을 뿐인데, 이제 그의 주변에는 거짓말처럼 싸이코패스들과 그들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그는 이 이야기들을 시나리오에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그의 각본 속 이야기들은 차례로 마치 플래시백처럼 영화에 군데군데 장면화되어 삽입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가 빌리 및 한스와 ‘구상’한 이야기들이 다시 현실에 그대로, 혹은 닮은꼴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현실이, 현실은 이야기가 되고 픽션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시나리오 속 에피소드인 줄 알았던 오프닝은 실은 신문에 실린 실제 이야기이고, 그가 구상했다고 믿은 이야기는 빌리가 들려준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는 알고 보니 누군가의 실제 경험담이다. 게다가 영화 속 마티가 쓰던 각본과 이 영화의 각본을 쓴 마틴 맥도나 감독의 영화 <세븐 싸이코패스>의 플롯도 중첩되고 섞인다. 이제 우리가 보는 것이 실제 감독의 각본인지 혹은 영화 속 마티의 각본인지, 영화 속 장면이 이 영화의 장면인지 마티의 각본 속 장면인지 구분이 모호해지는 지경에 이른다.


영화 초반, 마티는 빌리에게 “할리우드에 넘쳐나는 그 살인과 학살의 바보 같은 이야기들을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사랑과 평화에 대해 쓰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일곱 명의 싸이코패스를 등장시키면서도 ‘최후의 총격전’ 따위는 쓰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물론 그의 이야기에 홀딱 빠져 있는 빌리는 이게 더없이 못마땅하다. 그에게 마티는 출중한 작가이자 더없이 소중한 친구이며, 각본 ‘세븐 싸이코패스’는 자랑스러운 친구의 훌륭한 역작이 될 작품이다. 동시에 빌리에게는 이 작품에 자신도 공헌을 하고 싶은 욕망, 그러니까 공동 각본가로서 자신의 생각과 구상대로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이끌어가고 싶은 욕망이 있다. 현실과 픽션이 섞이는 것과 더불어, 이제 영화 속 각본이 어디까지 마티의 이야기이고 어디서부터 빌리의 이야기인지도 모호해진다. 그들의 갈등이 적당히 균형을 이루며 피범벅의 대결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마티와의 ‘우정’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빌리의 헌신, 그리고 보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렇다면 좋은 이야기, 좋은 영화는 과연 무엇일까. 마틴 맥도나 감독이 노골적으로 오마주를 바치는 대상이 영화 <택시 드라이버>와 키에슬롭스키 감독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조심스레 이 영화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방향, 그리고 실패하고야 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 실패가 마틴 맥도나 감독의 실패가 아니라,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실패라는 점, 그리하여 마틴 맥도나 감독이 애초에 그리고자 한 실패라는 점이다. 위대한 영화들을 보고 자란 시네필 후예들이 필연적으로 부닥치는 벽인 동시에, 이제껏 영화들이 그려온 인물들이 겪는 노정들, 그러니까 자신만의 윤리적 태도를 지향하나 그 도달에 필연적으로 겪는 좌절, 혹은 반어적 방법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아이러니이다. 사실 <택시 드라이버>야말로 세상을 구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싶어했던,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성취하는 싸이코패스의 이야기 아니었던가. <세븐 싸이코패스>의 빌리가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과 성을 공유하며 그 유명한 거울신(“나한테 말하는 거야?”)을 흉내내는 노골적인 특징들만이 <택시 드라이버>의 영향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세븐 싸이코패스>에 등장하는 싸이코패스들이 대체로 끔찍한 살인범들을 찾아 ‘처단’하는 연쇄살인범이거나, 어린 소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범에게 정의를 실현하고 싶어하는 싸이코패스거나, 폭력 조직의 중간급 이상 갱들만을 처치하는 복면의 살인마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영화들 역시 대체로 종교와 세속적 제도의 틈새에서 윤리를 고뇌하던 인물들의 이야기였다.


감독이 허구와 실제 사이, 장르와 탈-장르 사이의 경계와 갈등을 탐험하는 사이, 주인공 마티의 삶에 침범해 들어온 인물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윤리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리고 이는 ‘세븐 싸이코패스’라는 영화 속 마티의 각본을 통해 형상화된다. 마치 마틴 맥도나 감독 자신을 형상화한 듯한 주인공인 마티는 바로 자신이 쓴 작품, 그러나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없는 바로 그 작품을 통해 스스로의 삶에서도 변화를 맞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어쩌면 이상하고 거대한 농담인 동시에 ‘허구의 허구성을 탐구하는’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숙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