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만나다] '소름'의 윤종찬 감독

9월의 ‘작가를 만나다’는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그리고 있는 영화 <소름>의 개봉 10주년을 맞아 10주년 기념상영을 하고, 상영 후에는 이 작품을 연출한 윤종찬 감독과 함께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첫 데뷔작이었던 <소름>의 제작기부터 최근의 근황까지 들려준 윤종찬 감독과의 시네토크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소름>은 10년 전에 개봉했던 영화이면서 감독님의 첫 데뷔작이기도 하다. 그 전에는 외국에서 공부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데뷔작으로 <소름>을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윤종찬(영화감독): 외국에서 공부하던 중에 당시 이 영화의 모티브를 구성했었고 먼저 단편영화로 외국 배우들과 함께 영어 버전으로 <메멘토>를 찍게 되었다. 당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아내를 잃게 되었는데, 지내던 뉴욕의 아파트에서 새벽까지 잠이 안와서 눈 내리는 것을 보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순간 여기에 있는 것이 과연 운명일까 아니면 아무런 의미 없이,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에 그저 내던져진 걸까 하는. 그날 밤 새벽부터 그 모티브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소름>의 주인공이 아파트에 들어오게 된 게 운명일 수도 있고 우연일 수도 있는데 그 모티브가 가장 컸던 것 같다. 당시에 삼풍백화점 사고가 있기 전에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사건이 있었다. 그날 아침에 아내와 남의 일처럼 뉴스를 봤다. ‘저 사람들 정말 운도 없다. 희박한 확률을 뚫고 그 시간 그 곳을 지나다 사건을 겪다니’하며 얘길 나눴는데 그리고 몇 달 후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서 ‘삶이란 것이 굉장히 불안정하구나’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영화 작업에 있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뀔 정도로 충격이 컸었다.

김성욱: ‘가족의 파괴’라는 점이 영화의 큰 모티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종찬: 그런 부분도 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굉장히 예측불가능하고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인 것 같다. 우리 마음의 한 부분은 때때로 사람을 믿지 못하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그런 나쁜 생각을 한번 쯤 하게 된다. 그런 분노와 어두운 면이 마음 한구석에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어떤 면에서 보면 굉장히 나약하다. 개인적으로 <소름>에서 쓸 때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소름>의 아파트와 결코 멀리 살고 있지 않다는 것,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남의 얘기처럼 했지만 사실 나도 그 안에 있었던 것처럼 언제든지 재앙이 올 수 있다는 것, 혹은 나도 어떤 사람을 오해하거나 실수로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비정상적인 인물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이 아닌가 생각했다.

김성욱:
영현(김명민)의 캐릭터가 굉장히 특이하다. 영현은 갑자기 이소룡 흉내를 내곤 하는데, 그러한 설정은 어떻게 구상하신건지?
윤종찬: 영현이란 인물은 이소룡과 동시대성을 갖지 않는다. 인물에게 별 의미 없는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지만 자기도, 다른 사람도 모른다는 것, 달리 말해, 우리가 집착하는 것이 때로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일 수 있다는 얘기다.

김성욱: 선영(장진영)과 영현의 관계는 여러 층위에서 만나면서 조응관계를 이룬다. 선영의 캐릭터는 어떻게 구상하신건가?
윤종찬: 선영의 캐릭터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구상했다. 첫 번째는 팜므파탈적인 이미지와 용현의 비극성과 대칭적으로 구성해보고 싶었던 부분이 있고, 두 번째는 지극히 영화적인 면에서 그 전까지 한국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의 여성 캐릭터들에 가장 불만이었다. 남자들의 상상 속에 나온 것 같고, 여성이 동의할 수 없는 여성 캐릭터가 많았다. 선영은 적어도 살아있는 느낌을 최대한 주려고 노력 했다. 그래서 가꾸어지고 조작된 이미지가 아니라, 금방 어디선가 튀어나온 듯 꿈틀거리는 캐릭터다.

김성욱: 영화에서 소설가는 아파트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실에 근거해서 픽션을 구성해나가는데, 중후반에는 좀 더 깊숙하게 들어가서 설명적인 부분을 맡게 된다. 그가 과거에 있었던 일을 계속해서 얘기하고, 그것이 나중에는 현실화되는 과정이 영화에서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윤종찬: 영화 속의 소설가는 전형적인 소설가로서 다룬 것은 아니고, 내레이터나 고대희랍연극에서의 코러스,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선지자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난해하다보니 거기에 약간의 설명을 부여하는 역할이었다.

김성욱: 택시에서의 장면은 굉장히 영화 전체의 톤과 앞으로의 부분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윤종찬: 사실 <소름>이라는 영화가 공간이 굉장히 한정된 영화다. 아파트나 방, 편의점, 택시회사 정도가 중요한 공간이다. 택시 장면을 설정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외부세계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시나리오 상에서는 야식 배달부가 아니라 폭주족들이 등장하는데 당시 제작 여건 때문에 설정을 바꾸게 되었다. 여러분들도 경험을 했겠지만 우리의 몸 속에는 굉장히 나쁜 피가 흐르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어떤 상황을 직면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흥분하게 되어서, 뭔가 확 배설되었을 때 소위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게 되는데,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굉장히 잔인한 면이 있는 것이다. 때때로 광적이기도 한 그런 면을 다들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관객1:
영현은 고아로 자라면서 살아남기 위해 본인 앞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지만 선영을 만나 사랑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캐릭터가 상반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윤종찬: 누군가를 처음 만나 사랑했고, 온통 그 사람만 생각하고, 수없는 맹세를 하고, 헤어졌다. 그랬을 때 처음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란 굉장히 힘들다. 사랑이 끝났을 때 그 감정은 증오로 바뀌어 있거나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 영현이 선영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모성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선영을 죽이게 되는 것은 오해에서 온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지만, 그만큼 그의 감정이 절실하고 컸기 때문에, 과거의 여자처럼 자신을 이용하기만하고 떠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공포가 된다. 결국 자신의 목을 따뜻하게 감싸줬던 그녀의 목도리로 그녀의 목을 죽이는 끔찍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랑이라는 비유로 표현을 한 것이지만, 우리가 겪는 불행의 상당 부분이 그런 오해나 증오로부터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 우리를 나약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일까, 그런 생각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설정하게 되었다.

관객2: 영화의 배경이 된 아파트도 또 하나의 주인공인 것 같다. 어떻게 장소를 선택하셨는지, 촬영할 때는 어떠셨는지 궁금하다.
윤종찬: 시나리오를 쓸 때 아파트 복도에 대한 이미지를 많이 생각했었다. 그래서 복도 씬이 많다. 영화의 배경이 된 금호아파트는 서대문의 경기대학교 뒤편에 있던 것인데,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빈민촌을 밀어내고 70년대에 과시용으로 지은 아파트였다. 구조 자체가 특이하고 지을 당시엔 고급 아파트였지만, 영화를 찍기 위해 갔을 때는 재건축 직전의 재개발 아파트였다. 고생을 많이 했다. 주민들은 생존권 때문에 투쟁을 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그곳에서 영화를 찍기 위해선 그 분들을 설득해야했고, 촬영할 때는 복도가 좁고 바람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스태프들이 고생했다.

관객3: <소름>을 보기 전에는 공포영화인 줄만 알았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다른 느낌이었다. 영화를 만드실 때 공포영화로서 새로운 미학이나 경향을 염두하고 만드셨는지, 아니면 개봉 당시 마케팅을 위해서 공포라는 부분이 부각되었던 것인지 궁금하다.
윤종찬: 부모를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존경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삶의 의욕이 없어지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여러분이 어느 날 귀신을 봤다고 해서 그것 하나로 인생이 바뀌진 않는다. 이 영화에서 귀신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고, 그 원인에 대해 얘기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얘기를 보여주겠다는 욕심으로 만들지 않았다. 앞으로 더 영화를 만들지 않게 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찍겠다고 생각 했다.


관객4: 영화의 사운드를 굉장히 공들여 작업하신 것 같다. 선영이 영현의 신발 끈을 묶을 때 비행기 소리가 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윤종찬: <소름>이 다루는 것은 부조리함이다. 세상은 불합리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부조리하다. 부조리한 것은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소름>을 만들면서 가장 현실적인 화면에 가장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찍어보고 싶었다. 영화를 공부하면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영화적 관성들을 버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맘껏 찍었던 영화이다. 신발 끈을 묶을 때 나는 비행기 소리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굉장히 쉬운 장면인데 사운드 때문에 NG가 계속 났었다. 근처에 비행장이 있어서 계속 비행기가 지나가니까 사운드 맨은 참지 못했던 것이다. 감독으로서의 생각은 그 장면에서 비행기 소리가 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멀리 들리는 소리인데, 믹싱 작업에서 아예 가장 좋은 비행기 소리를 넣은 것이다. 이런 부류의 영화를 볼 때 장면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며 보게 되는데, 사실 매 장면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의미를 생각하며 담을 수는 없다. 때때로는 관객들에게 공간을 주고 싶었다.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방금 질문하셨듯이 그런 식으로 질문을 떠올리게 되는 공간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객5: 영화에서 영현은 사람들을 죽이고 매장하는 일을 반복하는데, 그런 설정에 대해 궁금하다.
윤종찬: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실 많은 영화에서 다뤄지는 부분이다. 사실 액션 영화 같은 것을 보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지만 우리에게 그 사람들의 죽음이 전달되진 않는다. 한번이라도 영화를 보면서 죽는다는 것, 죽인다는 것에 대해 끔찍하다고 느낄 수 있다면, 우리를 소름 속에 몰아갈 수 있을 테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 주원탁(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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