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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

클로드 샤브롤의 누벨바그

지난 12월 23일 <미남 세르쥬> 상영 후에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의 영화사 강좌가 열렸다. ‘클로드 샤브롤의 누벨바그’란 제목으로 표면과 심층사이의 관계, 아메리칸 시네마에 대한 경도와 장르 영화에 대한 애호가 깊었던 누벨바그리언 샤블로의 세계에 대하여살펴보았던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샤브롤은 굉장히 전략적인 위장전술을 구사했던 작가가 아닌가 싶다. 그의 영화와 관련해서 몇 명의 다른 작가들을 떠올릴 수 있는데, 역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히치콕이다. 두 번째로는 프리츠 랑이 있다. 랑의 미국시절 영화는 위장영화였다. 그는 독일에서 대단한 예술가로 인정받으며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히치콕의 3분의 1도 안 되는 급료를 받으며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위장을 해야만 했다. 위장된 영화에는 언제나 표면과 심층이 있다. 미국시절의 랑은 표면적인 위장과 심층적인 동력이 같이 작동하는 독특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사실은 5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 전체가 그것을 겪어야만 했다. 사회적 환경의 문제나, 자본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작가들이 고안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전술이었다. 마찬가지로 표면과 심층사이의 관계는 샤브롤의 영화를 대단히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동시에 아메리칸 시네마에 대한 지나친 경도와 장르 영화에 대한 애호라는 맥락으로 그의 영화를 평가절하 당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는 표층 가운데 심층적인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샤브롤 영화에서 핵심적인 부분인 것 같다.


샤브롤의 영화에서는 지표나 물리적인 흔적들이 중요하게 나타난다. 표면에 드러난 지표나 흔적들과, 그것에 의해서 추론되는 입장들 혹은 거짓들이 있고, 그런 외면 아래 은폐되어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어가는 과정이 샤브롤 영화의 전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샤브롤 영화의 기본적인 특징들이 등장하게 된다. 샤브롤은 앞서 열거한 요소들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줄 수 있는 지리적 공간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바닷가나 시골, 지방이다. 샤브롤 영화에서는 도시보다도 지방이나 외곽지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훨씬 더 흥미롭다. 고요하고 평온한 가운데 그 지역의 사람들이 맺고 있는 관계들이 수수께끼처럼 펼쳐지며 숨겨져 있던 것들이 점차 드러나게 된다. 두 번째로, 거기에서 파생되는 공간성이 있다. 그것은 주로 미장센의 영역에서 드러난다. 그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 중에 하나는 집인데, 그것이 갖는 폐쇄적이고 한계적인 성격들이 있다. 세 번째로, 샤브롤은 도덕적인, 혹은 윤리적인 부분들에 대한 선험적인 판단을 피하는 작가다. 내러티브적인 영화를 만듦에도 불구하고 누가 악인이고 누가 범죄자냐 하는 문제의 해결 뿐만 아니라, 누가 어떤 일을 왜 하게 되느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조차 완벽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네 번째로, 샤브롤의 인물들은 사회적인 관계망 안에서 구축되어간다. 다시 말해서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이 인물들을 악이나 범죄나 위험으로 몰아가고, 동시에 그 인물들 스스로가 범죄적 관계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상호교환성이 샤브롤 영화의 특징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사실 샤브롤 영화 안에서 악인이나 범죄자는 모두이거나 혹은 아무도 아닌 인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스미 시게히코가 샤브롤에 대해 했던 말은 굉장히 흥미롭다. “샤브롤은 영화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했다. 그것은 모두가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평등성이다.” 차별이 없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그 범죄에 대한 책임성을 갖고 있을 수도 있으며 죄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악을 체현하고 있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구현되지 않는다면, 관계 안에서 공생과 타협의 지점들을 잡아나가야 한다. <미남 세르쥬>에서도 세르쥬와 프랑수아는 공생하고 있는 것이지, 세르쥬가 프랑수아에 의해서 구제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인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미셸 셰르가 말했던 ‘기식자’라는 표현이 샤브롤의 영화에 아주 적절하게 연결될 수 있는 것 같다.


샤브롤은 기본적으로 고전적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는데, 이때 두 가지의 충돌적 요소들을 같이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는 사건이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내러티브적 요소다. 말하자면 법과 질서 같은 것인데, 플롯을 따라가는 선들을 잘 지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본적 욕망과 장르적인 부분들을 잘 끌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미지, 카메라 움직임, 미장센 같은 다른 부분들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내러티브적 요소를 중단시키거나, 사건의 의미를 변화시켜간다. 샤브롤은 이 두 가지를 충돌시키고 동시에 결합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나갔다. 이는 앞서 말씀드렸듯 5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부분이며, 샤브롤은 프랑스적인 맥락 내에서 그것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샤브롤은 <사촌들>을 데뷔작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제작비 문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 환경적 문제들 때문에 자신의 고향에서 무명 배우들을 기용해 <미남 세르쥬>를 먼저 만들게 되었다. 사실 당시의 프랑스 영화계에는 도제 시스템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영화를 만드는 데 많은 제약이 있었다. 이를테면 길드에 소속되어있는 배우들을 써야 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샤브롤이 무명 배우를 쓴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세르쥬는 알콜중독자로 묘사되는데, 원래의 설정도 있었겠지만 그 부분이 좀 더 많이 극화가 되었던 것은 알콜퇴치위원회에서 제작비를 받기로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샤브롤은 굉장히 영리하게 영화를 찍은 작가이며, 영화의 절약성을 구현한 작가기도 하다. 누벨바그 작가들 가운데서 저평가 받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경제적이고 산업적인 근거들이나 새로운 제작방식을 구현했던 가장 선구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미남 세르쥬>의 경우 영화제에서 수상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바로 <사촌들>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노하우를 고다르나 트뤼포, 리베트 등에게 전수해주며, 그들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미남 세르쥬>는 지방이라는 공간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영화이다. 지방을 배경으로 선택했던 데는 앞서 언급했던 환경적 문제도 있었지만, 지리적 공간 설정에 대한 샤브롤의 영화적 태도 역시 작용했으며, 동시에 개인사적인 연관성도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프랑수아라는 인물에는 샤브롤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촌들>로 넘어가게 되면 샤를르라는 인물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쌍생아 같은 작품으로, 세 명의 중심인물들이 배치된 방식 역시 동일하다. 이 두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라스트에는 몇 가지의 기묘한 지점들이 숨어있는데, 거기에서 모호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굉장히 샤브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남 세르쥬>에서는 빛과 어둠이라는 기본적인 충돌점이 있고, 눈이 내리는 밤, 어둠, 길,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인물들은 굉장히 물리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뛰어다니는 프랑수아, 세르쥬를 끌고 가는 모습. 그리고 눈 내리는 시골집의 내부 공간에서 미장센을 구축하는 방식들이 있다. 그런 요소들로 구성된 이 영화의 모호한 라스트를 설명하는 몇 가지의 패턴이 있다. 가장 많은 평자들은 프랑수아가 결국 세르쥬를 구제했다고 해석한다. 그는 예수처럼 고행을 거친다. 일단 세르쥬의 아이의 탄생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정상적으로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서 의사를 데려온다. 일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아이의 탄생에 입회해야한다는 식으로 세르쥬를 찾아 질질 끌고 집으로 데려온다. 그 과정을 거쳐 세르쥬가 마지막에 밝게 웃게 되는 것이다. 모든 물리적인 여정을 통과해 갱생과 구제에 도달하게 된다는 해석이다. 또 다른 일군의 해석은 그것이 위장된, 정해진 엔딩이라는 것이다. 제작비를 위한 위장이기도 하고, 그런 교훈적 결말을 만들어 가는 것이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의 완결점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질질 끌려갔던 세르쥬가 돌연 그런 미소를 보인다거나, 의사를 보내주는 글로모의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에는 여전히 애매한 부분들이 남아있다.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 해석은, 그 라스트 전체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라스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몇 가지 장치들이 있다. 예를 들어 라스트가 진행되기 바로 전 단계의 장면에서, 프랑수아의 클로즈업 숏 안에 갑자기 눈이 내린다. 그리고 이 시퀀스의 마지막에 세르쥬를 보여줄 때도 포커스 아웃이 된다. 이 두 가지의 기술적인 장치는 라스트 전체를 프랑수아의 상상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영화에서 진행된 구제라는 것은 프랑수아의 공상과, 망상과, 유토피아적 상상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 장면 전체가 꿈의 시퀀스인 것이다. 세르쥬에게 두들겨 맞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프랑수아가 자신의 방에서 마치 갇힌 존재처럼 망상에 빠져들었다고 볼 수 있다. <지옥>이 그렇듯이, 이 영화의 라스트 역시 미결정과 부유의 상태로 끝나버리는 느낌이 있다. 앞서 말씀드렸던 고전적 스토리텔링과 스타일이 충돌하는 지점이 이런 것이다. 이런 부분이 샤브롤의 영화를 모호하게 만들어 가는데, 그 모호함 가운데 숨겨져 있는 것을 파헤치는 데 다각적인 시각이 필요하지 않나 한다. 그래서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샤브롤 영화의 표면과 심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지점이 샤브롤 영화를 독특하게 만들어가는 것 같다. 그의 영화들이 범작과 태작과 걸작을 넘나드는 가운데에서도 그런 경향은 꾸준히 지속되어왔다.


누벨바그 작가들 중에서 현 시점에 탐구의 대상으로 놓아야 할 작가가 바로 샤브롤이 아닐까 한다. 지금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 상당 수가 결국은 위장전술을 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고다르 같은 작가처럼 표면까지도 모던하고 래디컬하게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이전의 것을 답습하듯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을 유지해나가면서 그 안의 관계들에서 충돌적인 요소들을 만들어가는, 그를 통해 동시적인 만족들을 어떻게 구현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샤브롤이 평생에 걸쳐 했던 작업이다. 그런 면에서의 현실성과 실용성, 생산성이나 또 다른 영역에서의 창조성 같은 면들을 탐구의 대상으로 놓고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년에 개최하게 될 2차 샤브롤전에서 좀 더 많은 작품들을 보시면서 다시 그에 대한 진단을 해본다면, 그나마 이 미지의 작가를 조망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리: 박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