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저녁, 친구들 영화제의 마지막 시네토크를 장식한 전계수 감독과 배우 공효진이 함께 추천한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린> 상영이 있었고, 상영 이후에는 씨네21 전문위원인 김혜리 영화평론가의 진행 하에 전계수 감독과 공효진 배우와 영화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러브픽션>의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 열린 이날 시네토크는 자연스럽게 <클린>과 <러브픽션>을 오갔다. 또한 <클린>하면 빼놓을 수 없는 배우 장만옥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여배우로서 공효진이 느끼는 고민도 함께 나누는 자리였다. 그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혜리(영화평론가, 씨네21 전문위원): <클린>을 선택하셨는데 이번 영화는 두 분 중에 어느 분이 주도적으로 선택하셨고, 다른 분은 어떤 점에서 공감하셨나?
공효진(배우): <러브픽션> 작업 초반에 감독님께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함께 참여하자는 제안을 받은 후 어떤 영화를 고를까 생각하다가 2006년에 <가족의 탄생>을 촬영하면서, 김태용 감독님이 이 영화를 꼭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이 났다. 그래서 추천하긴 했는데 사실 이 자리는 시사회 때보다 더 떨렸다. 내가 추천한 작품인데 관객 반응이 안 좋으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혹시 지루하지는 않을까 싶어 걱정을 많이 했다.
전계수(영화감독): 추천작 중에는 우디 알렌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도 있었다. 사실 나는 <클린>을 못 본 상태였는데, 공효진 씨가 추천을 했고, 평소에도 장만옥을 좋아해서 좋다고 했다. 봤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안 봤던 것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을 것 같더라.

김혜리: <가족의 탄생>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왜 그 영화가 생각이 났을까 생각을 해봤다. 보통 주류영화에서는 감정을 대화를 통해서 많이 드러낸다. 그런데 <클린>은 그게 아니라 고독한 여자가 혼자 있는 장면이나 유동하는 장면, 남들이 도와주지 않을 때 외로운 인간은 어떻게 하고 있나 이런 것들을 보여준다. <가족의 탄생>을 봤을 때에도 공효진 씨가 연기한 ‘선경’이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집에 돌아와서 혼자 설거지 하는 장면을 보고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두 분은 <클린>에서 어떤 장면이 기억나시는지 궁금하다.
전계수: 오프닝이 가장 좋았다. 해밀튼이라는 도시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장만옥이 약을 하고 잠들 때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카메라의 바운스, 움직임은 <가족의 탄생>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영어, 불어, 중국어까지 여러 언어가 나오고 그걸 잘 소화하는 배우도 매력적이었다.
공효진: 친구 집 침대에서 리를 그리워하며 우는 게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그녀가 괴로워할 장치들이 많다 보니까 그게 특별히 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대사로 직접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우는 모습을 보니까 힘들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 씬이 마음에 닿았다.


김혜리: 생각해보면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시원하게 울지 못하는 것 같다. 실제로는 슬픔에 집중할 겨를이 없을 때가 많다. 일단 오늘 하루 살아야 하니까. 아사야스 감독은 에밀리의 슬픔을 표현할 때도 아마 어떤 상황이 닥친 사람의 방식을 보여주는 식으로 리듬을 잡지 않았나 생각한다. 외국어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올리비에 아샤야스 감독의 특징 중 하나가 다국어가 구사된다는 거다. 아사야스 감독은 한 인터뷰 중에서, 우리는 외국어를 이야기 할 때 훨씬 모호하고 거칠게 이야기하는 반면 모국어로는 결코 쉽게 이야기 하지 않을 감정 같은 것들을 불쑥불쑥 이야기 한다고 했었다. 한편 이 영화는 장만옥이라는 배우를 빼놓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이 영화로 칸에서 상을 받기도 했었는데, 두 분에게 장만옥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 배우인가?
전계수: 가장 먼저 어떤 영화를 봤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가장 좋아했던 영화는 <화양연화>다. <클린>과 같으면서도 다른 게 많다. <클린>은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소리 지르고, 우는 감정표현이 주였다. 반면에 <화양연화>는 감추고, 절제하고, 외면하고, 뒤돌아서는 느낌이 훨씬 많았다. 굉장히 양식적으로 보이고 장만옥이 입었던 치파오도 양식적인 느낌이 강했다. 내게는 <화양연화>에서의 고독이 훨씬 더 가슴 미어지게 다가왔다. 하지만 절제하지 않고 드러내고, 알아달라고 요구하는 이런 느낌도 장만옥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만옥은 여러 가지 얼굴을 영화에 맞춰서 그때그때 변신할 수 있는 배우같다.
공효진: 나는 <화양연화>도 좋았지만 <소살리토>도 너무 좋았다. 여자들이라면 다 좋아했던 <첨밀밀>도 좋았다. 어렸을 때 많이 동경했던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이 멋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배두나 씨가 떠올랐다. 배두나 씨가 연륜이 쌓이면 저런 모습이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카리스마가 있다는 것은 꾸며서 될 일이 아닌데, 두 배우는 무심한 듯 연기를 하면서도 그런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김혜리:
의상은 <화양연화>의 치파오가 장만옥의 옷으로 가장 많이 기억에 남긴 하지만 이 영화의 의상도 만만치 않다. 공효진 씨는 알아주는 패셔니스타이시니 연기의 일부로서 그런 것들도 눈에 들어왔을 것 같은데.
공효진: 영화 중반쯤부터 목걸이가 눈에 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목걸이를 보면서 저 여자가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한 때 뚜렷한 락스타의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영화들 보면 이미 한물 간 락스타 할아버지가 아직도 웨스턴 부츠를 신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걸 보면 이미 저 사람은 스타가 아닌데 아직도 의상을 고수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시절에 아직도 젖어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런 것과 비슷하게 에밀리의 목걸이나 옷차림이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 작업한 <러브픽션>에서도 감독님과 의상이나 스타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헤어스타일도 <최고의 사랑> 구혜정의 이미지가 아직 강해서 짧은 머리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또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은 붉은색 립스틱이다. 영화에서 이희진이라는 캐릭터가 처음부터 끝까지 붉은 립스틱을 바르는데,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남들의 시선과 상관없이 고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계수: 이번에 작업한 영화를 통해서 의상과 분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전까지는 관객들은 눈빛만 본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오해 속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었다. 공효진 씨의 의상에 대해 어떻게 할지 개념이 없었다. 내가 감히 어떻게 공효진 씨와 의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겠나. (웃음) 너무나 다행스러운 것은 공효진 씨가 캐릭터를 드러내는 데에 옷을 입고 있는 자세 하나만으로도 캐릭터의 겹을 느끼게 했고, 그게 의상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김혜리:
분명히 아사야스와 장만옥도 어떻게 입을 것인가를 고민 많이 했을 것이다. 에밀리의 옷은 과거 잘나가던 시절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로 하여금 추정하게 하는, 흔적을 보여주는 의상이다. 캐릭터의 고집과 껍데기가 남아있는 옷이라서 배우로서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만옥을 보면 본인이 살았던 환경이 여러 문화를 거쳤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 수 있지만 다른 아시아 영화의 스타들 보다 답답해 보인다. 영화 속에서 분명히 동양인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사야스의 <이마베프>나 <클린>에서 장만옥이 가지고 있는 아시아 여성의 모습이라는 것은 오리엔탈한 이미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전계수 감독님이 음악에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다. <삼거리 극장>이 뮤지컬 영화이기도 하지만 <러브픽션>에서도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클린>에서 음악을 쓰는 방식은 어떻게 보셨나?
전계수: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든 것이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갑갑한 곳에 갇혀 있다가 결정점을 지나면서 밖으로 나오는 넓은 공간의 느낌이 사운드로 잘 전달됐다. 음악도 지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윤리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화면으로 담아내지 못했던 것을 음악으로 메우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음악이 나오는 지점과 나오지 않는 지점의 호흡 같은 것이 리드미컬하게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뮤지션이나 아티스트들의 자기표현에 대해 고민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캐릭터인데, 그런 느낌들이 카메라 호흡과 음악의 이상적인 쓰임을 통해서 잘 전달됐다고 생각한다.

김혜리:
장만옥은 여성관객에게 사랑받는 여성배우다. <이마베프>에서도 장만옥의 캐릭터가 레즈비언의 구애를 받는 장면이 있다. 공효진 씨도 여성 팬이 많은 배우인데 여성관객들이 장만옥이나 공효진의 어떤 점에 끌린다고 생각하나?
공효진: 일단은 절대 미녀가 아니면 된다. 장만옥도 사실은 개성과의 미녀다. (웃음) 장만옥은 여리여리한 이미지 보다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남자 못지않은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다. 여자들은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전계수: 내가 느끼기엔 공효진 씨처럼 여성스러운 여자를 못 봤다. 효진 씨의 장점은 그 여성성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쿨하게 느껴지는 거고 멋지다.


관객1: <러브픽션> 개봉을 앞두고 계신데 배우들의 연기를 연출할 때 어떤 방식으로 하시는지?
전계수: 윤종빈 감독과도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감독은 캐스팅만 잘하면 된다. 그리고 환경을 만들어주고 배우가 자신의 매력과 요구받은 것들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들어주면 된다. 이후에는 처음의 안목을 믿고 가면 된다. 그래서 하정우 씨와 공효진 씨를 캐스팅 했을 때, 내 영화에 대한 태도는 이미 결정이 됐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현장에서도 동선 이야기 정도는 나누지만, 주로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근본적인 것을 많이 이야기 한다.

관객2: 공효진 씨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오셨는데, 이번 캐릭터는 어떤 생각과 고민으로 하셨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연기하는지 궁금하다.
공효진: 내 연기방법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얼렁뚱땅 연기하기도 하고, 어떤 상황이 닥쳐서 연기할 때의 긴장감과 현장감으로 연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 긴장감으로 연기할 때 가장 힘이 있고 잘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카메라가 내게 가까이 들어올수록 집중도가 높고, 그런 긴장감과 불안함이 뭔가를 일으킨다. 그리고 <러브픽션>은 감독님께서 혼자 쓰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좋은 소문이 자자한 시나리오를 만나고 읽으면서 완벽하단 생각이 들었다. 개봉할 때가 되니까 활자로 되어 있었던 대본보다 우리가 더 재미있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고, 아쉬운 점도 있기도 하다.

정리: 김고운(관객 에디터) | 사진: 최용혁(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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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B의 뮤즈 혹은 페르소나’라는 표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두 단어 모두 주로 대중문화에서 자주 쓰는 표현으로 뮤즈는 작가나 화가 등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사람을, 페르소나는 주로 영화에서 많이 쓰이는데 감독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배우를 의미한다. 최근에는 이 단어가 갖는 무게에 비하여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누가 보아도 그 관계가 ‘페르소나’로 표현 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왕가위와 장국영, 양조위’를 빼놓을 수 없다. 누군가는 왕가위의 페르소나는 장국영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양조위, 누군가는 장국영과 양조위라고 말한다. 페르소나가 다른 배우로 옮겨가는 경우는 간혹 있는데, 이들의 관계에 유독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장국영의 죽음(2003)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왕가위의 페르소나가 양조위로 대표되는 시점은 <화양연화>(2000)도 있지만 장국영의 죽음 전후로도 나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조위는 조연이었음에도 그만의 색깔을 담은 연기로 왕가위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왕가위가 그에게 <중경삼림>(1994)의 주연을 주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감독의 신뢰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만약 장국영이 살아 있었다면, 그 이후의 작품들에서 양조위와 장국영이 각각 어떤 캐릭터를 구축했을지 여러 가지 변수를 생각해보게 된다.


왕가위는 <열혈남아>(1988)로 시작하여 <아비정전>, <동사서독>, <중경삼림>, <타락천사>, <해피투게더>, <화양연화>, <2046>, <마이블루베리나이츠> 까지 장르의 변화는 있어도 주제는 올곧다. 언제나 ‘사랑’에 대해 말한다. 주인공은 사랑이 부족하고, 사랑을 모르고, 사랑을 받고 싶고, 하고 싶고, 떠나보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그의 영화에서 중요 캐릭터들을 보면 ‘버림받기 전에 먼저 떠나는 사람’과 ‘실연을 극복하고 변화를 통해 새로 출발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전자가 바로 <아비정전>(1990)과 <동사서독>(1994)의 장국영이다. 이 두 영화 속의 장국영은 모두 사랑받지 못했거나 사랑하지 못해서 불행하다. 왕가위 감독은 자신의 작품들에 전반적으로 60년대의 홍콩 중국 반환의 불안한 심리를 허무주의와 유한성에 대한 순응으로 표현해내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장국영이 두 영화에서 맡은 역할은 감독의 가치관을 담아내는 매개체, 페르소나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아비정전>에서 아비 역할의 장국영은 과거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은 물론 정착도 하지 못한 채 버림받기 전에 먼저 여자를 떠나간다. 여자에게조차 꿈에서 만나자고 하는 그는 ‘날개 없는 새’로 살기 위하여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부유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이러한 결말은 감독이 바라보는 당시 홍콩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중국으로 반환된 역사를 볼 때, 홍콩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비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방황하는 홍콩 젊은이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 캐릭터는 <동사서독>의 동사, 구양봉으로 이어진다. 이 역할 또한 장국영이 맡았는데, 반복되는 성격으로 등장해 장국영이라는 배우에 캐릭터를 입혀서 받아들이기는 훨씬 더 수월했을 듯싶다. 구양봉 역시 아비처럼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이다. 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그는 영화가 끝나갈 무렵 “거절당하기 싫으면 먼저 거절하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는 흡사 아비의 독백처럼 느껴진다. <해피투게더>(1997)에서 보영 역할의 장국영은 뒤늦게 사랑을 깨닫고 떠난 아휘의 방에 ‘돌아와’ 통곡한다는 점에서 아비와 구양봉보다 더 진전해있는 캐릭터이다. 허나 여전히 큰 골격에서는 사랑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 전작들의 캐릭터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왕가위의 또 다른 페르소나로 꼽히는 양조위는 장국영이 왕가위의 영화에서 처음부터 주연으로 성장한데에 비하여, 장국영이 주연인 영화에 조연으로 참여했다가 주연으로 성장한 경우이다. <아비정전>의 본 내용이 모두 마무리 된 후, 약 2분 남짓한 시간 동안 양조위는 대사도 클로즈업도 없이 묵묵히 손톱 다듬고, 멋 내고, 돈과 카드를 챙기고 외출하는 모습으로 양가위의 영화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민다. <아비정전2>에서 주인공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영화 제작이 무산됨으로써 안타깝게도 아비정전에서 양조위가 어떤 역할이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동사서독>에서 눈먼 무사 역할의 양조위는 구양봉처럼 과거 사랑에 대한 상처를 안고 있다. 하지만 눈먼 무사는 친구와 정을 통한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눈이 멀기 전에 복사꽃에 다가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인물이다. 눈먼 무사처럼 구양봉 역시 복사꽃을 보러 가고 싶어 하지만 더 이상 그곳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둘은 다른 성격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양조위는 왕가위 영화 중 <중경삼림>에서 첫 주연으로서 실연당한 경찰 663 역할을 맡았다. 경찰 663은 비록 실연당해 방안의 사물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이를 극복해내고 해피엔딩으로까지 나아가는 긍정적인 인물이다. 또 <해피투게더>의 보영으로서의 양조위 역시 이와 비슷하다. 아휘 역할의 장국영이 아휘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반복해서 떠나가는 데에 반하여 보영은 아휘를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보살핀다. 그리고 후에 보영과 헤어졌을 때에도 실연의 아픔을 극복해나가며 새롭게 출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까지 왕가위 작품 속의 장국영과 양조위의 역할을 비교해보았을 때, 둘의 캐릭터는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해피투게더> 이후 왕가위의 페르소나였던 장국영의 자리를 처음으로 양조위가 대신한 작품은 <화양연화>(2000)이다. <화양연화>는 장국영의 죽음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 때문에 양조위가 왕가위의 새로운 페르소나가 되었다고 단정하기에는 다소 어렵다. 허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양조위가 왕가위의 영화에서 맡게 된 캐릭터의 변화이다. <화양연화>에서 차우 역할의 양조위는 처음으로 사랑에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화양연화>는 <아비정전>, <2046>(2004)과 ‘60년대 홍콩3부작’으로 이어지는 영화이다. <화양연화>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움으로 놓치고 뒤늦게 후회하던 차우는 <2046>에서 그 상처로 진정한 사랑보다는 육체적 사랑에만 빠져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마치 <아비정전>의 아비 역할인 장국영과 같다. 게다가 양조위가 왕가위의 페르소나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는 바로 <화양연화> 이후이다. 양조위가 <중경삼림>과 <동사서독>, <해피투게더>에서 연달아 보여주었던 사랑에 상처받았지만 긍정하는 캐릭터에서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투게더>에서 사랑하지 못하고 먼저 떠나가는 장국영의 캐릭터로 처음 옮겨온 작품이 바로 <화양연화>인데, 그렇다면 왕가위의 페르소나가 갖는 고유의 특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공통점을 찾아보면 첫째로,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결핍된 성격이며 둘째로,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자신이 먼저 떠난다는 것, 하여 외로운 사람이다.


개인적인 추론이기에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장국영의 죽음이 양조위가 왕가위의 페르소나로 자리 잡는 데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다. 물론 양조위가 장국영의 부재로 스타덤에 올랐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장국영이 지금까지 왕가위의 페르소나로서 연기하고 있다면 왕가위와 양조위의 관계가 지금처럼 ‘페르소나’라는 말로 명확하게 표현이 될 수 있었을까 라는 궁금증이 있다. 동시에 왕가위의 페르소나가 변화해가는 과정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왕가위 감독의 페르소나는 장국영과 양조위 중 한 명만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장국영의 죽음이 주는 안타까움 때문에 그가 왕가위의 유일한 페르소나여야 한다고 하지만, 장국영과 양조위, 두 배우는 왕가위 감독이 영화마다 그려내고 있는 결핍된 자들의 순수함을 제대로 표현해낸다. 장국영이 아직은 젊은 남자의 허무를 담아내고 있다면, 양조위는 세상을 적당히 경험하여 고독한 중년 남자의 외로움을 연기한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주인공들의 연령이 <해피투게더> 이후로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갔음을 짚어본다면, 장국영에서 양조위로의 페르소나의 변화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장국영과 양조위에게는 배우로서 공통점이 있다. 바로 ‘말’보다는 ‘눈’으로 연기한다는 것. 이러한 점 때문에 왕가위 감독에게는 장국영과 양조위가 서로 다른 배우이면서 하나의 페르소나로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양조위는 왕가위의 영화에서 형성된 캐릭터가 다른 감독들의 영화로까지 이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화양연화> 이후, 장이모 감독의 <영웅>(2002), 맥조휘, 유위강 감독의 <무간도>(2002)와 <상성>(2006), 이안 감독의 <색, 계>(2007)가 그렇다. 이 영화 안에서 양조위는 장르와 역할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혼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영웅의 파검은 연인과 서로 검을 맞대는 운명이었고, 무간도에서는 9년 동안 경찰이면서 조직원의 스파이로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고, 상성에서도 과거의 일로 장인과 아내를 죽이는 암살자였으며, 색, 계에서는 사랑을 느꼈던 자도 정치적인 입장으로 인해 죽여야 했다. 대표작들 속의 양조위들은 강인하면서도 홀로 고통을 인내해야하는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는 공통점이 또 있다. ‘존 웨인’이 ‘존 포드’만의 페르소나가 아니라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페르소나일 수도 있다는 말처럼, 양조위 역시 왕가위만의 페르소나가 아닌 홍콩 영화의 ‘고독’과 ‘외로움’의 페르소나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왕가위를 만나 비로소 배우로서의 얼굴을 찾은 장국영에 대해 안타까움이 남는다. 그도 지금까지 연기할 수 있었다면, 아마 상처받은 현대인의 페르소나로서 자리 잡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으로 이어져서이다.

페르소나는 존 레논의 표현처럼 ‘예술적 온도’가 맞는 예술인들의 관계를 잘 드러내주는 단어 같다. 페르소나인 배우와 감독의 관계는 누가 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 한곳에 섞어도 온도가 변하지 않는 커피와 같다. 내가 상대방이고 상대방이 내가 될 수 있어서 말보다는 ‘눈’으로 이끌어가는 좋은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꼭 영화뿐이랴. 나를 그대로 표현해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왕가위는 페르소나라고 부를 수 있는 배우가 둘이나 있으니 참 운이 좋다. 부러운 일이다.


김휴리(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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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randcouu 2015.03.12 1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