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상영 후 김곡 감독 시네토크 지상중계

 

지난 8월 10일 존 카펜터의 <괴물> 상영이 있던 날, 국내 최고의 카펜터 팬이라 직접 시네토크를 자청했다던 김곡 감독이 극장을 찾았다. 이날의 시네토크는 그가 존 카펜터에게 바치는 애정만큼, 카펜터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자리였다. 그 이야기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곡(영화감독): 제가 마치 이 영화를 만든 감독처럼 나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다. 제가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에게 연락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카펜터 팬은 나인 것 같다’라고 하면서, 예정되지 않았더라도 꼭 좀 초대해달라고 떼를 써서 나오게 됐다. (웃음) 근데 저는 이 영화를 만든 사람도 아닐뿐더러 이 자리는 GV도 아니고, 솔직히 제가 뭔가 대답해드릴 건 없다. 여러분처럼 한명의 팬으로 와 있을 뿐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존 카펜터를 처음 만난 건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취미가 엄마가 외출했을 때 김선 감독이랑 같이 라면 끓여먹으면서 몰래 빌린 비디오를 보는 거였다. 그때도 좋아하던 작가가 몇 명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존 카펜터였다. 기억하기론 <괴물>을 보고 먹고 있던 라면을 반 넘게 남겼던 것 같다. 살이 갈라지고 하는 게 너무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제 인생을 이렇게 사로잡을 줄은 몰랐다. 그 이후 저도 모르게 친구들한테 <괴물>이란 영화 봤냐고 묻고 다녔고, 애들이 그게 뭐냐고 하면 꼭 보라고 계속 말하고 다녔다. 그때 같은 시기에 본 영화가 <비디오드롬>(1983)이었다. 그것도 아마 같은 날에, 아니면 이틀간 연달아 봤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크로넨버그와 카펜터의 팬이 됐다. 국민학교 5학년 때 크로넨버그와 카펜터가 만든 영화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 유년시절은 몇 명의 작가에게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게 존 카펜터, 데이빗 크로넨버그, 브라이언 드 팔마였다. 그중에서도 카펜터의 <괴물>이란 영화는, 그 영화가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마음속 깊이 나를 사로잡는, 매순간 나를 따라다니는 영화다. 그런 영화는 당연히 몇 편 안 된다. <괴물>은 그런 영화들 중 한 편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도둑이 될 수 있다면 세상에서 훔치고 싶은 단 하나의 네거티브 필름은 <괴물>이다. 저한테는 우상 같은 영화고, 거의 종교나 다름없다. (웃음)

 

 

존 카펜터 감독은 UCLA 영화학교 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각본가로도 활동했고, <다크 스타>(1974)라는 황당무계한 영화를 첫 번째 장편으로 만들었다. 이후 1978년 <할로윈>이라는 영화로 전 세계를 강타한다. <할로윈>은 촬영을 2주 만에 끝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찍은 영화다. <할로윈> 다음에는 <안개>(1980), <이스케이프 프롬 뉴욕>(1981) 등의 작품이 있다. 존 카펜터는 공포영화 전문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렇진 않다. 카펜터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는 하워드 혹스다. 그리고 하워드 혹스가 제작하고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1951년도의 <괴물>이 있다.

혹스와 카펜터의 <괴물>은 존 캠벨의 <Who Goes There>이라는 단편 소설이 원작이다. 50년대 매카시즘 열풍 때문에 이런 소설들이 무더기로 나오기 시작한다. 혹스는 이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를 만든 것이다. 카펜터는 혹스의 <괴물> 팬이었는데, 시나리오를 받고 고민을 했다. 혹스의 영화처럼 그대로 만들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혹스의 <괴물>은 카펜터의 <괴물>과는 달리 믿음의 분기에 대한 성찰이 이분법적이었다. 외계인이 한명 떨어지는데, 그 외계인은 우리의 과학적인 발견이니까 보호해야 한다는 과학자 측, 그래도 죽여야 한다는 군인 측, 양자의 구도로 나뉜다. 전형적인 좀비적 구도다. 재밌는 건 혹스의 <괴물>은 괴물에 대한 연출이 굉장히 클래시컬하다는 점이다. 키 큰 거인처럼 묘사되는 게 전부다. 하워드 혹스와 크리스찬 니비는 공포물을 만들기보단 폐쇄 공간 드라마를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다. 카펜터의 <괴물>과 혹스의 <괴물>은 크리쳐에 대해서도 많이 다르다. 혹스의 영화는 아마 돈 시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혹스의 영화에선 크리쳐가 수동적인 식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복제라는 개념이 없었다. 피를 빨리면 그냥 죽어버린다. 근데 존 카펜터는 많은 해석을 가해서 공기감염을 접촉감염으로 바꾸고, 식물에는 없는 흡수의 내장을 만들었다. 정리하자면, 혹스의 <괴물>을 원작으로 봤을 때 카펜터의 <괴물>에서는 인물들의 내분이 여러 갈래로 붕괴되고, 흡수, 동화, 피와 내장의 개념이 들어온다. 즉 카펜터는 인간의 분열에 더 집중하고, 인간의 분열을 가속시키는 복제 개념을 들여와 진정한 전염병을 만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느낌은 눈에서 온다. 하얀색의 가장 차가운 눈, 우리의 시야를 불투명하게 가리고 모든 걸 희미하게 만드는 설원, 그곳에서 고립된 사람들. 이걸 제일 좋아한다. 그리고 가장 차가운 것 속에 가장 뜨거운 것이 있다. 대표적인 장면이 노르웨이 캠프에서 피가 얼어붙은 장면이다. 가장 뜨거운 것이 동결되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녹는 순간,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차가움이 인간의 불신을 이끌고 뜨거움이 괴물의 모방을 이끈다. <다크 스타>부터 최근작까지 카펜터의 영화는 항상 내부와 외부의 구도로 진행된다. 혹스의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구도다. 내부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있고 외부에서 무언가가 침입하는데, 둘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이 없어도 내부에서 뭔가 교란이 일어난다. 마치 뚜껑을 열지 않아도 냄비 안의 물은 흔들리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은 아니다. 밖에서 안으로 세균이 침투해오고 잔상이 남지만, 그것을 어떻게 추적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체들이 서로를 파괴한다. 자가전염, 자가면역증세 같은 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건 매카시즘 열풍에 저항했던 많은 공포영화 작가들이 선호했던 구도이기도 하다. 여기선 심지어 밖에 뭐가 있는지조차도 몰라야 자가면역이 세진다. 항원 식별이 안 되니까 항체끼리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다. 맥크래디, 클라크, 차일즈의 삼파전에서 괴물은 그저 보조를 맞출 뿐,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인간의 불신이다. 존 카펜터는 까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에이즈나 바이러스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바이러스를 목전에 둔 인간성에 대한 영화라고 이야기했다. 자기가 진짜로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문제는 어디 있는가’, 즉 문제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문제가 어디 있는지를 못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클라크 같은 경우인데, 클라크는 사람보다 개를 좋아하는, 따뜻하면서도 한편으론 적대적인 캐릭터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클라크는 사람이었고, 맥크래디는 살인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자가면역에 빠진 면역계이기 때문에 법은 무너지고, 살인도 무색한 상황이다. 또한 차일즈라는 캐릭터도 재밌다. 맥크래디와 대립을 이루면서 끝내 살아남는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너무 좋다. 혹스의 원작 영화는 신나게 끝나는 반면, 존 카펜터는 우수에 찬 엔딩으로 끝난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뭔 일이 일어나는지 보게.”

 

카펜터는 몽타주를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빠르게 가면서 뿜어내는 소비에트 몽타주고, 또 하나는 어둠속으로 묻히게 하고 서스펜스를 주는 독일 표현주의 몽타주다. 그리고 자기가 <할로윈>에서 썼던 것은 독일 표현주의 몽타주라고 한다. <할로윈>은 존 카펜터를 전 세계에 알린 영환데, 살인이 일어나는 장면은 여타 지알로 필름과 비슷하다. 슬래셔 필름과 그다지 다를 바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말로 무서웠던 건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카메라였다. <할로윈> 같은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카펜터는 진짜 공포의 성질은 단지 피가 많거나 잔인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작가는 정말 별로다. 우리가 공포영화 거장이라고 생각하는 감독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다들 심오한 피의 철학, 본다는 것과 안 본다는 것, 외부와 내부에 대한 철저한 존재론을 갖고 작업한다. 마리오 바바, 다리오 아르젠토, 존 카펜터 등의 작가들에게서 강력하게 나타나는 시간관이 있는데, 카펜터의 경우는 안 보인다는 것이다. <할로윈>의 마이어스가 딱 좋은 옌데, 안 보인다는 게 단지 어두워서 안 보인다는 게 아니다. 안 보이는 건 보이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다.

 

 

<할로윈> 바로 다음 작품 <안개>에서는 불투명한 안개가 나오는데, 거기에다가 존 카펜터가 추가했던 건 안개가 빛이 난다는 거였다. 안개는 너무 잘 보여서, 눈이 부셔서 안 보인다. 가장 불투명한 것이 뭔가를 숨기고 있지만 사실은 숨기고 있지 않은 거다. 왜냐면 그 자체로 발광하기 때문이다. 안개는 그 자체로 너무나 빛이 나고, 우리는 그 빛을 따라가야 악의 실체를 알게 된다. 이 관념이 카펜터의 후기작을 점령하는데, 영화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빛’에 악마가 숨어 다니게 된다. 존 카펜터의 인터뷰에 의하면, 인간에게 가장 크게 운명 지워진 건 우리는 우리의 신체 안에 갇혔다는 것이며, 그리고 진짜 악마는 어둠이 아니라 빛에 갇혔다고 하는 것이다. 괴물의 주제도 우리 시선 속에 있는 악마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괴물은 우리 바깥에 있지 않다. 내가 저 괴물을 쳐다보는 순간 내 시선은 감염된 것이다. 어둡다고 생각한 것은 우리 시선 안쪽에 있다. 만약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저는 이 개념을 ‘투명하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투명하다는 건 안 보이지만 너무나 잘 보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다. 82년도는 카펜터에게 악몽 같은 해로, 관객도 비평가도 모두 <괴물>에 등을 돌린다. 이후 카펜터는 몇 년을 방황하고, 그 사이에 빛 속에 있는 악마를 표현하는 좋은 영화들이 나오게 된다.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1987), <매드니스>(1994) 등이 그렇다.

 

존 카펜터는 다른 공포영화 작가들과 달리 피에 별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 그리고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지각의 차원을 깊이 고민했던 작가가 존 카펜터다. <다크 스타> 때부터 그런 것 같다. 오히려 마리오 바바 같은 작가들이 피에 정말로 관심이 많았다. 두 감독의 피의 사용 방식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카펜터는 <괴물>에서 피를 단지 테스트의 용도로만 들여온다. 제작자 래리 프랑코와 존 카펜터가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가장 공들였던 것이 피 혈청 테스트 장면이다. 반드시 잘 찍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고 들어갔던 장면이고, 혹스의 원작엔 없는 장면이다. 공포 영화에선 정말 드문 장면이기도 하고, 카펜터가 피를 쓰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생각이란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카펜터를 사랑하는 비평가들도 버린 <저주받은 도시>(1995)라는 영화가 있다. 어느 날 시간이 정지하고 마을의 여성들이 동시에 임신하는데 태어난 애들이 다 외계인이다. 이 외계인들은 사람들의 생각을 조종한다. <화성인 지구 정복>(1988)에서도 외계인이 우리 생각을 조종한다. <투명인간의 사랑>(1992) 같은 경우도, 나의 존재를 정의하는 나의 생각이 투명해질 때 느껴지는 공포가 있다. 카펜터는 한 축으론 전염에 대해 다루지만 다룬 한 축으론 생각에 대해 다룬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뇌란 무엇인가’라는 주제가 카펜터의 필모그래피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정리: 송은경(관객 에디터) | 사진: 김윤슬(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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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네바캉스 서울’ 영화제가 시작된 첫 주 주말이었던 지난 7월 29일 오후, 존 카펜터의 <괴물> 상영에 이어 변영주, 이해영 두 영화감독이 진행자로 나선 세 번째 오픈토크가 열렸다. 이번 토크의 주제는 ‘우리 시대의 불안과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고 초대손님으로는 공포영화에 대한 식견이 풍부한 허지웅 영화평론가와 <습지생태보고서>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만화가 최규석 작가가 함께했다. 그 날의 이야기를 일부 옮긴다.

 

 

변영주(영화감독): 오늘 이 자리는 구성이 재밌다. 공포영화 전문가 허지웅 평론가와 현재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이해영 감독, 그리고 공포영화를 잘 안 보고, 안 좋아하는 최규석 작가와 제가 함께 하게 됐다. (웃음) 최규석 작가님은 <괴물>을 어떻게 보셨는지.

최규석(만화가): 재밌게 봤다. 외계인 얘기는 왜 나오며 괴물들의 목적은 대체 뭔지, 안 풀리는 떡밥들이 너무 많아서 헷갈리긴 했다.

허지웅(영화평론가): 공포영화는 늘 그 시대의 가장 무서운 것들을 끌어온다. 존 카펜터의 <괴물>(1981) 이전에 하워드 혹스의 <괴물>(1951)이 한 편 더 있다. 이 두 영화는 둘 다 존 캠벨의 「거기 누구냐?」는 중편소설이 원작이다. 하워드 혹스의 영화가 다루는 것이 외부로부터 온 우리와 다른 것, 당시로서는 공산주의, 즉 레드 콤플렉스에 대한 메타포였다면, 존 카펜터의 영화는 우리 사이에 언젠가부터 같이 존재해왔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어떤 다른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피아를 식별할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공포라고 할 수 있다.

이해영(영화감독):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존경한다. 초반에 괴물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와 긴장감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 교과서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변영주: 이 영화에서 신기했던 건, 보통의 신체강탈자가 굉장히 공격적인 반면 이 영화에서의 변이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시치미를 떼거나, 자신들도 전혀 모르고 있다.

허지웅: 캠벨의 원작 소설에서 인물은 외계인에게 자기 몸을 뺏기고 나면, 자신이 외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인간일지,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이해영: 최규석 작가님은 공포영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셨다. 이런 식의 신체강탈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최규석: 어렸을 때는 필립 K. 딕 소설 처럼, 과거 S.F.소설들에서 자기 정체성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에 많이 공감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현실이 아닌 요소에 대해선 흥미를 느끼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영화를 보면서 놀래지 않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공포영화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의 기복보다 훨씬 더 담담하게 본다.

이해영: 워낙 작가님의 만화가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작가님의 작품 성향과는 정반대에 있는 것일 수 있겠다.

최규석: 오히려 침입으로 인한 공포 같은 것 보다, 굉장히 작은 실수로 인해서 편하게 살고 있던 자신의 인생이 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런 것이 제겐 가장 큰 공포인 것 같다.

허지웅: 개인적으로 끔찍한 장면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나 대사에서 공포를 느낄 때가 많다. <신체강탈자의 침입>(1956)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에 ‘그들이 여기에 있다’고 끊임없이 외치는 장면이 있다. 갑자기 화면을 향해 달려오면서 관객을 바라보며 소리 지르기 시작하는데, 너무 소름끼쳤다. 약간 초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변영주: 저는 타임슬립이 무섭다. 내가 가고 싶은 시대로 가면 상관없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는 공포다.

이해영: 요즘 유독 타임슬립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지금 복고라는 코드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 시대에 소외 받거나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것을 과거의 낭만이나 추억으로 보상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는 것 같다.

허지웅: 원래 사람들이 불행하면 과거를 끄집어낸다. 반면 행복하면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공간, 우주 같은 곳에 가보자는 프런티어 정신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요즘 한국 사회는 굉장히 불행한 것 같다.

이해영: 타임슬립이라는 코드는 굉장히 슬픈 것이다. 현재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지웅: 70년대 후반 이전까지는 영화에서 괴물이 카리스마를 가진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70년대 후반 갑자기 좀비라는, 군중으로서의 괴물, 무리로서의 괴물이 나타났다. 그게 한 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텍스트 속에서 변형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부분이 의미심장하다. 사실 어느 사회든 괴물은 소수이기 때문에 지탄을 받게 된다. 그런데 만약에 괴물이, 좀비가 절대다수가 되고 나 혼자 사람으로 남게 된다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누가 괴물일까. 이번 상영작 중 하나인 <지상 최후의 사나이>라는 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규석: 카리스마적인 괴물이라고 한다면 위에서 군림하는 권력 혹은 외부의 적일 수 있는데, 이후에 누가 괴물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상황은 그만큼 민중들 사이에서의 신뢰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뭔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는 불신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허지웅: <괴물>에서 피아식별이 안 되는 것에서 오는 공포도 그렇고,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더 많이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주변에 적, 또는 적은 아니더라도 나와 생각이 너무 많이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이 느슨한 계율에 의해서, 이를테면 같은 정당이라는 이름으로 묶여버리고 그러다 이제 와서 어떤 식의 커밍아웃에 의해 굉장히 큰 분쟁을 만들어내게 된다.

최규석: 그런 것 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형태의 공포인 것 같다. 어떤 지역사회에서 사람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을 때가 아닌, 도시에 나와서 따로따로 살게 되면서 갖는 타인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가 생겨난 것이다. 예전에는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는 식의, 집단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존재했었는데, 그런 신뢰 자체가 깨져버린 상황이 아닐까.

 

 

허지웅: 그런데 그런 신뢰라는 것이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

변영주: 그런 신뢰라는 것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영화로 보면 <마더>가 굉장히 상징적으로 느껴진다. 공동체, 관계, 신뢰, 혈연이라는 것들이 폭력적인 것이고, 원시적이고 괴물 같은 것, 무서운 것을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줬던 것 같다.

허지웅: 갈수록 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신념을 현실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야기 속에서 찾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다크 나이트> 3부작 같은 경우도 내내 공동체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해, 매번 어떤 신념이 깨어졌을 때 다른 신념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래서 좀비영화 같은 경우 급진적인 대안으로서의 공포물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싶다.

 

허지웅: 이 영화의 특수효과는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날로그 특수효과를 사용했다. 얼마 전에 나온 <괴물>의 프리퀄 영화에서는 괴물을 CG로 처리했는데, 정말 너무 안 무서웠다.

이해영: 영화에서 시각효과의 날이 무뎌지기 시작한 건 영화인들이 CG가 만능이라고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시각효과는 실제로 어떤 물건을 만들어 놓고 찍은 것이기 때문에 가상의 그래픽이 절대 대체할 수 없다.

최혁규: 특수효과 보다도 디자인이 정말 훌륭한 것 같다.

허지웅: 특수효과와 디자인을 모두 롭 보틴이 담당했다. 상대적으로 이름은 덜 알려져 있지만, <로보캅>이나 <세븐>, <파이트 클럽> 등의 영화를 했었다. 훌륭한 장인이다.

최규석: 특히 개가 갈라지는 장면은 정말 인상 깊었다. (웃음) 보통 괴물이라고 하면, 원래 존재하는 생물의 디자인을 변형하거나 결합하는 형태로 만들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던 맥락과 전혀 다른 형태가 나온다. 창조적이다.

 

관객1: 이런 장르의 영화들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다. 혹시 추천하는 공포영화가 있나.

허지웅: 가장 좋은 건, 영화의 원작들을 찾아보면서 비교해보는 방식이다. 만약 오늘 존 카펜터의 <괴물>을 보셨다면, 하워드 혹스의 이전 작품을 찾아보시고, 두 영화의 원작 소설을 같이 찾아본다면 정말 재밌다. <신체강탈자의 침입>의 경우, 50년대 돈 시겔 감독과 70년대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버전이 있고, 최근에는 다니엘 크레이그와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 <인베이젼>이 있다. 원작 소설인 잭 피니의 『바디 스내쳐』도 번역이 되어 나와 있다.

 

관객2: 최근 공포 영화의 경향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변영주: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 소설에서 주인공 여자아이는 원한을 가진 영혼이 누군가에게 들려져 있는 상태를 해결하는데, 그녀에게 어떤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일본사회는 이제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듣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최근에 영미권 장르작가들의 단편을 모아 펴낸 책을 읽었는데, 종말을 묘사하는 방식이 특징적이다. 이전과 같은 거시적인 방식이 아니라 아주 내밀하고 사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정리: 장지혜(관객 에디터) 사진: 황초희(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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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드리치, 남성적 허세와 유희

‘2011 시네바캉스 서울’이 한창인 지난 8월 7일 오후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피닉스> 상영 후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현대성’이란 제목의 영화사 강좌 두 번째 시간이 이어졌다. ‘로버트 알드리치, 남성적 허세와 유희’를 주제로 열린 이 날 강좌에 강사는 오승욱 감독이 자리하였고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가 함께 진행하며 흥미로운 대담을 펼쳤다. 다채로운 이야기를 진행은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가 맡았다. 남성 영화에 대한 애호와 <피닉스>에 대한 흥미로운 지점들을 앞 다투어 이야기하며 열띤 대화의 장을 펼친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올해 초에도 로버트 알드리치의 영화 <북극의 제왕>을 추천해서 상영했고 <피닉스>도 함께 추천해주셨지만 당시에는 상영하지 못했다. 대신 여름에 <피닉스>가 걸맞을 것 같아 이번에 틀게 되었다. 오승욱 감독을 소개한다. 말씀하신 대로 정말 초등학교 2학년 때 이 영화를 보셨는지?
오승욱(영화감독): AFKN에서 봤고, 김산이라는 만화가가 있는데 이걸 ‘불사조 날아오르다’라는 제목으로 만화화하기도 했다. 주인공 소년이 헹글라이더를 만들어서 탈출하는 것으로 나온다.

김성욱: 영화는 남성의 몰락을 얘기하고 있다. 여러 유형의 남자들이 등장하는 것과 사막이라는 공간이 흥미로웠는데 어떠셨는지?
오승욱: ‘남성의 허세와 유희’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60년대 중반 이후 알드리치의 영화는 50년대 영화와 다르게 ‘남성들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한다.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남성을 얘기하는 미국 영화감독이 둘 있다. 물론 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남성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감독들도 있다. 하워드 혹스와 존 포드가 대표적인데 존 포드는 남성들의 얘기를 할 때 그들의 존엄성을 얘기한다. 그는 결정적인 클로즈업을 한두 번 밖에 안 쓴다. 남성이 윤리적 결단을 내렸을 때 그 존엄성에 대한 존경을 담으려 한다. 한편 하워드 혹스는 주인공들의 관계 속에서 남성의 섬세한 면을 다룬다.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담아낸다. 50년대까지 미국영화의 이러한 남성상을 샘 페킨파와 로버트 알드리치가 바꿔놓는다. 이 영화에서 결정적인 클로즈업은 부조종사인 리처드 아덴보로가 기장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싸우면서 무식함을 지적할 때 쓰인다. 굉장히 중요한 것이고 알드리치의 남성상에 방점을 찍는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알드리치는 남성으로서 버텨왔던 세계가 무너질 때 그 남성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를 얘기하고 싶어 한 것 같다. 페킨파의 경우 남자를 아름답게 보여줄 때는 남성들이 제정신이라면 도망가야 하는데 무언가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해서 죽으러 갈 때다. 용기 있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는 게 아니라 바보짓하는 남성들에게 만가를 바친다고 해야 할까. 알드리치와 페킨파는 그 이전과 다르게 남성들의 비애를 담았던 것 같다.

김성욱:
이 남성들만이 등장하는 영화에 특이한 장면 중 하나가 후반부에 신기루처럼 여자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다리를 부상당했던 친구가 부인 사진 한 장을 떨어뜨리고 죽는 장면과 더불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게 부인 사진 가졌던 사람이 죽고 중사는 여자의 신기루에 사로잡히고 플레이보이 잡지를 보던 사람과 기타 치던 사람은 초반에 죽어버린다. 이런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오승욱: 남성 얘기를 하다보면 여성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좋아하는 남성 영화들에는 남성이 여성을 학대한 것에 대한 죄의식과 그 여성이 언제든지 자신을 박살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그것이 남성의 동력이 되고 폭발한다. 레오네와 페킨파, 마틴 스콜세지의 70~90년대 영화가 그렇다. 여성에 대한 죄의식과 두려움을 다룬 이들 작품들에서 여성이 부재하더라도 그 여성의 귀기라는 것이 남성들을 계속 괴롭힌다.

김성욱:
몇몇 배우들은 그들의 내력과 영화가 연동되는 것 같다. 하디 크루거는 어릴 때 히틀러 소년단이었고 2차 대전에 참전했고 이후 영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도 2차 대전 때 비행기 조종사로 활약했고 초반에는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에 나오다가 나중에 안소니 만이나 히치콕의 영화에서 굉장히 히스테릭한 인물로 등장한다. 또 젊은 세대인 크루거를 보면서 “앞일을 이끌어가겠지만 미래를 못 볼 것 같다”고 한다. 한편 중사는 이런 식의 재난 영화에선 곧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캐릭터다. 내러티브의 도덕적 논리로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중사를 비겁하다고 할 수 있지만 대위를 아버지로서 바라봤다는 느낌이 든다. 어머니가 생일에 팬케이크을 만들어줄 때 아버지는 자기를 군대에 보냈다. 그래서 중사가 대위 앞에서 가부장성에 대한 반항을 표출한다고 보았다. 군인으로서는 비겁하지만, 아버지에 반항하는 아들의 입장에선 강한 모습이다. 속 내용은 결국 자기 죽기 싫다는 건데, 다른 한편으론 ‘그 때는 반항 못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오승욱:
50년대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는 남성을 얘기할 때 아버지 아들 손자 이렇게 얘기한다. 60년대 들어서 알드리치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없다. 아들도 없다. 알드리치도 자기 아들을 플레이보이 보는 배우로 출연시켜서 곧바로 죽이지 않나. (웃음) 아버지 아들 손자 이 얘기는 60년대 남성을 다룬 영화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다. 알드리치나 페킨파에서 남성들의 관계는 일 때문에 혹은 싸움 때문에 전장에서 맺는 관계이다. 횡적인 관계다. 70년대에 보수로 돌아선 영화가 <대부>이다. 코폴라는 아버지 세대를 복원한다. 관계 속에서 남자를 다루는 것이 진보라고 하긴 그렇지만, 아버지 없고 아들한테 물려주는 것 없고 자기들끼리 놀다가 자기들끼리 폭사하는 것이 <대부>나 폰다 가족들이 찍은 <황금 연못>보다 인상적이다. 알드리치의 이 영화도 그런 점에서 대단히 매력적이다. 허세라고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온갖 허세가 총출동한다. 대표적인 것이 ‘괜찮아 잘 될 거야’ 식이다. (웃음) 위기를 위트 있게 표현한다. 리처드 아덴보로와 제임스 스튜어트가 싸우는 장면이 있다. 서로 삐지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아 루... 루... 미안해’ 하면서 후회하고, 루는 축 처진 어깨로 가고 있고, 그 다음 혼자 있는 아덴보로한테 스튜어트가 가서 아무도 안 웃을 농담 하면 서로 용서하는. 이 영화는 그런 것의 총집합이다. 지금 봐서는 비웃음 밖에 안 된다. 싸우면 그 다음날 안 보지 않나. 상처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진 않지 않나. 알드리치 영화에선 둘이 힘을 합쳐서 가야하니까 그렇게 한 거고 또 그런 식의 화해 직후에 안 좋은 일들이 터진다. 서푼짜리 위안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없는 것을 곳곳에 배치한 게 좋았다. 특히 영화 다 끝날 때 와서야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을 하디 크루거가 모형 비행기 만들던 사람이라는 말로 다 무너뜨려버린다. 노동자들도 비웃음거리로 그려지는데, 남성이 노동으로 존재한다는 가치가 일차 대전 후부터 서서히 없어져버렸다. 남성 노동의 가치가 당대 미국에서 의심받고 있었고, 우리나라도 이천 년대 들어서 계속 해서 의심받고 있지 않나. 자본가와 서비스하는 사람만이 의미 있을 뿐이다. 흙을 파내고 엎는 것과 무엇을 만드는 것에 가치가 없다고 보고 있다. 당시 미국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의 가치를 잃어버린 그 사람들이 노동하고 있다. 다들 구조되고 나서도 특별히 희망이 없는 것 같다. 중사는 구속될 것이고 하디 크루거는 앞으로 모형 비행기를 만들고 있을 것이고 여태 그나마 가치 있었던 노동 역시 우스갯거리가 되어버렸다. 영화 마지막에 그들은 살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운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물을 향해 찾아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 놈들 술 처먹었냐’고 한다. 알드리치가 생각하는 갱생을 해봤자 술주정뱅이로 살거나 요행히도 육백 미터 가서 살고, 그러고 나서도 물 먹는 것 말고 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비웃음이 드러난다. 동시에 감동적이기도 하고.


김성욱: 그 부분을 보고 유희적으로 반응한다고 생각했다. 탈출 후를 과장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들이 큰일이지만 하나의 장난을 치렀던 정도의 수준으로 담백하게 뽑아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생존자들이 특이한 것 같다. 하디 크루거는 새로운 것 창조해낼 수 잇는 사람이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과거의 전투 조종사인데 리처드 아덴보로는 이 둘을 엄마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또 다른 한 명, 회계사는 신실한 종교심이 있는데 자비심이 없다. 두 명의 건달 같은 노동자들은 돈도 제대로 못 받고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대위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탈영병에 가까운 중사가 살아남는다. 거기에다 조그만 하천 같은 것에도 기뻐하는 그 정도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알드리치식의 미국의 새로운 세계에 진입했다고 본다.
오승욱: 이후의 영화 <더티 더즌(1967)>을 봐도 정상인이 하나도 없다. 미국이라는 가치가 진짜 옳았는지 모르겠지만 원래는 프런티어 정신, 청교도 정신, 남자의 명예 이런 것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인상 깊었던 것이 대위가 죽는 장면이었다. 다른 영화에선 그들의 죽음에 값진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렇지 않고 다리를 절어 쓸데없기 때문에 놔둔 낙타만 있고 그것을 향해 제임스 스튜어트의 총구가 불을 뿜는다. 무덤에 묻어주지도 않고. 어네스트 보그나인도 막노동으로 쓰이지만 쓸모없어지자 버려진다. 왜 버려졌는지 이유도 모르고 버려지고, 이 사회에 대해서 뭔가 기여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고장 나서 버려진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것 아무 것도 없다, 남자로 산 것에 프라이드를 가지는 것이 별 가치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남성의 명예, 프라이드, 관계 돈독하기 위해 농담 던지고 받아주고 서로 웃고 떠드는 것은 사막의 일이 벌어지고 나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자기들의 가치를 다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히스테리를 부리는 사람들의 영화는 많지 않다. 몰락해가는 남성의 히스테리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안소니 만도 보여주고는 있지만 남성들을 아예 집단으로 절망하게 만들고 히스테리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정리: 최용혁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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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가 거대 에픽에 현혹되어 있을 당시, 하워드 혹스도 왕과 왕비와 유사 역사가 뒤섞인 이야기에 도전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이자 혹스의 친구인 윌리엄 포크너를 비롯해 수많은 혹스 사람들이 동원됐고, 이집트 로케이션을 감행한 영화엔 막대한 물적 자원이 투입됐으며, 만 명 가까운 엑스트라가 출연한 어마어마한 장면까지 연출됐다. 그러나 장르영화를 주물러온 혹스라 한들 모든 장르의 걸작을 만들 수는 없었다. <파라오의 땅>은 흥행에 실패한데다 평단의 혹평까지 들었다. 데뷔 이후 1년 이상 쉰 적이 없던 혹스가 4년이란 긴 시간을 할리우드와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던 이유는 그러하다. 유럽, 그 중에서도 프랑스 평단들의 애정 공세로 그나마 마음을 달랜 혹스는 1958년 봄에 드디어 애리조나의 촬영 현장으로 복귀한다. 그가 예상 밖으로 서부영화를 선택하자, 코미디나 액션영화를 기대한 워너 측은 당황했다. 혹스가 서부영화를 선택하게 된 데는 TV의 영향이 컸다. 유럽에서 돌아온 혹스는 그 사이에 TV가 미국인들 생활의 중심에 자리 잡았음을 알게 되었고, 유심히 지켜본 결과 그들이 서부극을 즐겨 본다는 걸 파악했다. 마침내 잭 워너가 혹스의 의견에 동의함에 따라 <리오 브라보>에 착수할 때에도 그의 불안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며칠이 더 흐른 뒤에야 혹스는 현장에서의 자신감을 회복했다고 전해진다.

<리오 브라보>는, 몇 편의 서부영화에 거부감을 품은 혹스가 그러한 영화에 대응한 결과물이다.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1952)과 델머 데이브스의 <유마행 3:10분 열차>(1957)는 인물의 심리와 영웅의 변화를 심도 깊게 그려 향후 서부영화의 방향 짓기에 큰 역할을 해낸 작품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서부 영웅을 예찬해온 사람들은 두 영화의 주인공에 거부감을 느꼈다. <하이 눈>에서 여주인공 ‘에이미’는 갓 결혼한 상대인 ‘윌 케인’에게 “영웅이 되려고 애쓰지 말아요. 나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어요”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윌의 대답 - “난 영웅이 되려는 게 아니오. 내가 좋아서 이런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미친 거요” - 은 의외의 것이다. 그리고 윌은 그것도 모자라 영화 내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구하러 돌아다닌다. <하이 눈>은 주인공을,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한 행위를 구걸이라고 판단한 혹스가 두 영화를 용납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하이 눈>이 가식적이어서 싫다. 그 주인공은 프로페셔널이 아니다”라고 대놓고 말했다. 영웅은 아마추어의 도움을 오히려 거절해야 하며, 오직 프로페셔널과 함께 자신의 일을 수행해야만 한다, 고 혹스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리오 브라보>를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신은, 도와주겠다고 제안하는 평범한 친구의 선의를 주인공 챈스가 시원하게 거절하는 부분이다. 안소니 만이 <서부의 사나이>(1958)에서 게리 쿠퍼를 다시 불러내 악당과 당당히 맞서는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영웅을 되살렸다면, 혹스는 <하이 눈>과 유사한 소재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시킴으로써 영웅의 진정한 자세를 재확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9년이란 격변의 시간과 전통 서부극인 <리오 브라보> 사이엔 결코 작지 않은 틈이 자리한다. 그 해, 프랑스에선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발표했고, 미국에선 존 카사베츠가 <그림자>를 내놓았다. 영화가 일대 변혁의 시기에 돌입할 즈음, 서부영화 또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서부극의 장인 존 포드의 사정도 다르지 않아서, <수색자>(1956)로 정점을 찍은 그조차 몇 년 후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를 연출함으로써 서부극에 작별을 고할 터였다. 그런 시점에 혹스는 전통 서부극의 세계로 재진입하기로 결정했다. 왜 그랬을까? ‘웨스턴 백과’의 저자 허브 페이건은 <리오 브라보>를 ‘악에 맞선 선을 그린 서부극의 거의 완벽한 예’라고 표현했다. <하이 눈>의 결말에서 주인공 ‘케인’이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던 마을을 버리고 떠나는 것과 반대로, <리오 브라보>의 ‘챈스’는 프로페셔널과 영웅으로서의 자아와 공동의 선의 가치를 재확인한다. 인간 본연의 순수한 감정을 사랑했기에 혹스는 장르를 의심하거나 뒤틀린 인물의 지옥을 그리기보다 선을 지키려는 자유로운 영혼의 인물과 함께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선이 승리함으로써 정의가 성취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주변상황에 연연하지 않고, 여유가 넘치고, 우정을 간직하고, 자신감과 정의감에 찬 인물을, 혹스는 추구했다. 프로정신과 자부심을 지닌 반면 전통적이고, 그러면서도 사회의 인습에 저항하는 그들이 어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런 까닭에 혹스의 서부극은 호탕하고 유머가 흐르며, 종래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 게 특징이다. 단적인 예로, 존 웨인은 혹스의 웨스턴에서 더 많은 미소를 짓는다. 사실 포드의 서부극에서 간혹 이상화되고 신경질적이며 경직되어 있는, 그래서 아메리칸 히어로의 피곤함에 지친 듯 보이는 웨인은 혹스의 서부극으로 이동할 때마다 훨씬 경쾌한 인물로 탈바꿈한다. 물론 혹스의 인물들이 시작부터 완벽한 프로페셔널로 행세하는 건 아니다. 난관을 극복하고, 인간적인 결점을 보완하며, 서로 협조하는 과정을 거쳐 각 인물들은 성숙한 프로페셔널로 거듭 태어난다. 혹스의 첫 서부극인 <레드 리버>에서 그랬고, 변형된 서부극인 <빅 스카이>에서도 그랬듯이, <리오 브라보>는 프로페셔널과 영웅이 일체가 되는 지점을 지향하는 영화다. 실연의 고통과 알코올 중독을 딛고 주인공의 동반자로 성장하는 <리오 브라보>의 ‘듀드’는 혹스식 프로페셔널의 대표적 인물이다. 혹스가 꿈꾼 프로페셔널의 원형이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1939)라면, <리오 브라보>는 혹스가 평생 희구했던 가치를 꽃피운 작품이라 하겠다.


후반부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 전까지, <리오 브라보>의 대다수 장면은 설정 상 텍사스 주와 멕시코 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한정된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포위의 드라마이기에 혹시 빡빡하게 직조된 구성을 예상했다면, 틀렸다. 혹스는 긴박한 전개를 보여주려고 애쓰지 않거니와 유별난 스타일을 뒤쫓지도 않는다. 어느덧 익숙해진 존 웨인의 걸음걸이처럼, 언제나 눈높이에 맞춘 카메라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위치에 머문다. 꼭 맞는 때에 꼭 맞는 곳에서 꼭 봐야 할 것을 보여주는 게 <리오 브라보>의 스타일이다. 그래서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지만, 거기엔 고전적인 우아함이 빛난다. 당당하고 서두르지 않기에 <리오 브라보>의 전개 속도는 오히려 느린 편이다. <리오 브라보>는 극중 주요 지점인 보안관 사무실, 호텔, 초소 사이를 오가는 인물들의 행동으로 구성된 영화다. 간간이 몇 개의 중요한 액션 신이 삽입되어 있으나, 혹스는 그 밖의 장면을 코미디와 로맨스 (그리고 뮤지컬) 등으로 채워놓았다.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 신에서 <소유와 무소유>를 재연하고, 딘 마틴과 리키 넬슨의 인기를 살려 기이할 정도로 긴 노래 장면을 끼워 넣는 등, 혹스는 자신의 장기를 아끼지 않고 선보였다. <리오 브라보> 속에서 발견되는 서너 가지 장르의 영화는, 서너 편의 TV쇼를 동시에 안으려는 혹스의 의도를 따른 것이기도 하다. <리오 브라보>가 혹스의 최고 걸작일까? 모르겠다. <리오 브라보>가 최고의 서부극일까? 역시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리오 브라보>가 재미로 치면 으뜸가는 서부극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영화를 재미있어 하는지 알고 있던 혹스는 아는 바대로 <리오 브라보>를 만들었으며, 그의 판단은 옳았다. <리오 브라보>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고, 지금도 가장 사랑받는 서부극으로 손꼽힌다. (개봉 당시 평론가들만 이 영화를 과소평가했을 뿐이다) 진실로 즐겁고 재미있는 영화는 구식의 때를 타지 않는 법이다. (이용철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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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최동훈 감독이 추천한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

지난 22일 오후,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1959)를 상영한 후 이 영화를 추천한 최동훈 감독과 관객이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리오 브라보>의 감칠맛 나는 대사와 위트 넘치는 연기를 보면서 관객들은 '영화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서부극에 대한 장르의 즐거움부터 이 영화를 선택한 최동훈 감독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주제가 화기애애하게 오간 그 현장을 여기에 담았다.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서부극의 어떤 점이 감독님을 매료시켰는지?
최동훈(영화감독): <타짜>를 만들 때 기존 도박 영화를 닮기 싫었고 어차피 대결의 영화니까 서부영화를 굉장히 많이 봤다. 내 생각에도 <타짜>는 서부 영화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항상 "너는 왜 그런 영화만 만드냐. <리오 브라보>나 <나바론 요새> 같은 영화를 찍어야지" 하셨다. (웃음) 또 서부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이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혹스 영화의 남자들은 되고 싶고 닮고 싶은 부분들이 있다.

허남웅: <리오 브라보>에서 존 웨인과 딘 마틴은 마치 스승과 제자처럼 등장한다. 감독님 영화 세 편에서도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많다. <타짜>의 백윤식 선생님과 조승우 씨나 <전우치>의 백윤식 선생님과 강동원 씨가 그런데 <리오 브라보>와의 연관성이나 혹스의 영향이 있었는지?
최동훈: 영향은 많이 받은 것 같다. 빌리 와일더나 하워드 혹스 같은 감독을 굉장히 좋아한다. 혹스는 "당신의 영화는 예술인가"하는 질문에 콧방귀를 뀌는 사람이고 "나는 한 명의 영화감독일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한 명의 영화감독이 갱스터부터 코미디, 심지어 뮤지컬까지 걸작을 만들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리오 브라보>의 영향을 받은 게 있다면 첫째는 대사다. 대사가 너무 훌륭하다. 맞받아치는, 이를테면 존 웨인과 리키 넬슨이 처음 만나서 대화하는 부분은 보고 또 본다. 혹스가 한 씬을 만드는 과정을 유심히 보고 있으면 영화감독에게 씬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된다. 제일 좋아하는 씬은 첫 장면인데 완전히 무성 영화 같이 찍혔다. 대사가 없고, 그래서 오히려 더 빨려 들어간다. 딘 마틴은 술을 원하는데 돈이 없다. 타구에 돈을 던져 모욕을 주는 것을 보고 다툼이 벌어지고 살인이 발생하며, 이 때 존 웨인이 하는 첫 대사가 "너를 체포하겠다."이다. 그 다음에 제일 중요한 장면은 딘 마틴이 천장에 있는 범인을 총으로 쏘는 술집 신인데 콘티를 짤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한 씬은 저렇게 구성되어야한다는 교과서와도 같은 것이다.

허남웅:
원래 딘 마틴이 맡았던 듀드 역은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먼저 제안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존 웨인을 싫어했다고 한다.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동성연애자였고 존 웨인에게 마초적인 느낌이 있어서 싫어했다고 하는데, 존 웨인은 감독님이 느끼기에 어떤 배우인지도 궁금하다.
최동훈: 배우는, 좋은 배우에 한해서인데, 역할을 맡아서 스스로 그 역할을 하는 배우가 있다. 흔히 말하는 연기파 배우, 어떤 영화에서든 그 역할에 맞는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언제나 그 사람인 배우가 있는 것 같다. 존 웨인은 수많은 영화에 나와도 언제나 그 사람인 배우다. 존 웨인은 서부극의 아이콘이기도 하고, 이 영화에서 존 웨인을 보고 "저 돼지 같은 사람이 연기를 처음 하네"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영화에서 존 웨인의 연기는 기존의 존 웨인 식이라고 할 수 있는, 과묵하고 언제나 고독한 그런 캐릭터라기보다는 코미디도 좀 하는 것 같고 좀 열려 있는 캐릭터다. 개인적으로 존 포드의 존 웨인보다 <리오 브라보>의 존 웨인을 더 좋아한다.

허남웅: 잘 아시겠지만 하워드 혹스는 게리 쿠퍼가 나온 <하이 눈>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리오 브라보>가 한편으로 보면 '전문가의 영화'이기도 한데, 그에 반해 <하이 눈>은 게리 쿠퍼가 마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는 모습이 있다. 그 점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서 하워드 혹스와 존 웨인이 의기투합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감독님은 이 영화를 언제 처음 접하셨고 오늘 다시 보신 후 느낌은 어땠는지?
최동훈: 어릴 때 TV로 보진 않았고 DVD로 발매되고 나서 보기 시작했다. 혹스는 정말 프레드 진네만을 싫어했다. 게리 쿠퍼는 마을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사정하지만 버림받고 결국 혼자 싸우게 된다. 물론 그것도 멋진 영웅의 모습이겠지만. 프레드 진네만은 언제나 인간의 고뇌, 고독감, 남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을 담았었는데 하워드 혹스의 영화는 약간 잡탕이다. 서부 영화이기는 하지만 서부영화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역마차나 존 포드처럼 모뉴먼트 벨리 같은 거나 인디언, 기병대 이런 요소들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서부 영화하면 흔히 나오는 아주 멋진 풍광, 말을 타고 달려가는 질주 같은 것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좁은 세트장에 모든 배우를 처박아놓고 그 안에서 코미디도 하고 노래도 하고 어떻게 보면 가족 영화 같은 느낌도 든다. 스템피는 할아버지 같고 존 웨인은 아버지 같고 딘 마틴은 아들 같고 리키 넬슨은 조카 정도랄까. (웃음) 존 포드의 서부 영화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상하고 비틀린 서부 영화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하워드 혹스의 이 영화뿐 아니라 <엘도라도>라는 영화도 구조가 되게 비슷하다. 전통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오히려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서부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허남웅:
이 영화는 클로즈업이 거의 없는 영화다. 자료를 보면 클로즈업이 두 장면 있는데, 딘 마틴이 담배를 물 때 손을 보여주는 장면이고 존 웨인이 장총을 잡을 때 클로즈업을 잡는다. 서부극은 풀숏의 영화라는 느낌이 든다. 풍광의 영화이기도 하고. 이 영화는 세트에서 많이 찍었는데 그럼에도 클로즈업이 거의 없다.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최동훈: 감명 깊게 생각한다. (좌중 웃음) 이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다. 영화를 찍을 때 숏 사이즈를 정하는 게 민감한 부분이다. '니 숏', 할리우드 숏이라고 하는, 사람 두 명 이상 나올 때 무릎 위에서 자르는 숏을 좋아하는데, 사실 그걸 찍기가 정말 애매하다. 화면으로 보면 애매한 것 같고. 혹스가 그 '니 숏'을 가장 자유롭게 쓰는 감독이기도 하고, 커트를 많이 하지 않는 성향의 감독이기도 한다. 그게 왜 그런지 생각해보면 하워드 혹스는 정말 관객을 위해서만 영화를 찍은 사람이다. 관객이 어떻게 하면 재밌을까만 생각한 사람인데, 관객이 영화를 편히 보게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예전에 읽었던 글에서 로만 폴란스키가 ‘숏 사이즈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무조건 관객이 편하게 찍을 뿐’이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하워드 혹스 본인도 어려운 숏을 구사하거나 최고의 테크니션은 아닌 것 같다. 클로즈업이란 건 "이 배우의 눈빛을 보세요"라고 강요하는 건데 하워드 혹스는 그런 강요를 하지 않는다.

허남웅: 존 웨인과 앤지 디킨슨의 러브 스토리가 나오는데 당시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존 웨인은 쉰 두 살이고 앤지 디킨슨은 열아홉 살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존 웨인이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다고 한다. 그런 것들이 클로즈업을 잡는 데 거부감을 일으킨 것 아닐까? (좌중 웃음)
최동훈: 백윤식 선생님과 문근영도 러브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좌중 웃음) 개인적으로 혹스 영화에 나오는 여자 캐릭터를 정말 사랑한다. 혹스 개인도 게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건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다. 혹스는 주로 남자들 간의 우정을 다룬다. 그 남자들 간의 우정이 약간 티는 안 나지만 너무 너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들끼리 남자로서. 그런데 영화에 여자 캐릭터가 들어올 때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순종적이지 않고 언제나 남자와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마지막 씬을 빼놓고는 울지도 않는다. 남성들 간의 우정, 이 남성들이 해야 할 일이 영화 속에 있는데 그걸 방해하지 않으면서 도와주면서 남자를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정말 놀라운 여성상이다. 최근에 혹스의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를 봤는데 그 영화의 여성 캐릭터는 지금 한국 영화의 여성 캐릭터로 떼어놔도 여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좋은 역할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로맨스는 로맨스인지 아닌지 아무도 속마음을 밝히지 않은 채 진척이 되어간다. 마지막에 여성이 물어본다. 마음을 밝혀라.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고 하지만 체포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 아주 훌륭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관객1: 이 영화는 팀플레이가 잘 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쓸모가 없어 보이는 노인도 제 역할을 하고 네 명이 서로 보완해가는 느낌이 있다. 감독님의 차기 영화가 공모하는 내용의 영화라고 들었는데 혹시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셨는지. <타짜> 보실 때 서부영화 많이 보셨다고 했는데 요새 즐겨보거나 영감을 받는 영화가 있는지?
최동훈: 그 할아버지는 정말 감초 역할을 한다. 할아버지라는 존재가 일차원적인 남성 캐릭터들만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화를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리얼해보이려면 가족이 등장하거나 노인이 등장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단독 캐릭터보다는 여러 명의 캐릭터가 있는 건데 가장 빛나는 건 그 노인이라고 생각한다. 그 노인이 없으면 영화가 무미건조해졌을 것 같고. 노인이 웃기니까. 내가 지금 준비하는 영화 역시 도둑들에 대한 영화다. 그래서 <리오 브라보>를 보자고 한 것도 있는 것 같다. <리오 브라보>에 나오는 환상의 팀플레이가 나의 다음 작품에서도 필요하다. 이번 달에 아트시네마에서 했던 <리피피> 같은 작품도 너무 좋아한다. 지금도 <리피피>를 세 달에 한 번씩은 본다.

(정리: 최용혁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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