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9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칼 드레이어의 <뱀파이어> 상영 후 “유리 속의 어둠 <뱀파이어>”라는 제목으로 세계적인 영화사가 고마츠 히로시 초청 특강이 열렸다. 이 날의 특강은 서울아트시네마와 영상원 트랜스아시아 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것이었다. 고마츠 히로시에 따르면, <뱀파이어>는 논리적 인과관계를 벗어나 몽롱한 분위기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뱀파이어>의 몽롱한 세계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그날의 현장을 전한다.


김소영(트랜스아시아 연구소 공동소장, 영상원 교수): 오늘 강의를 해주실 고마츠 히로시 선생님은 스웨덴에서 공부하셨다. 와세다대학교 영화과 교수이자 영화사가로서 일본과 유럽의 초창기영화, 희귀영화에 대한 식견이 굉장히 뛰어나시다. 오늘 강연에서는 <뱀파이어>의 소상한 제작과정과 칼 드레이어 감독에 대해서 상세한 말씀을 해주실 것이다.

고마츠 히로시(영화사가, 와세대학교 교수): 먼저 <뱀파이어>에 대한 제 개인적 체험부터 말씀드릴까 한다. 70년대 도쿄 필름센터에서 화재가 일어나기 전, 칼 드레이어의 <뱀파이어> 상영이 몇 번 있었다. 그때 자막은 이중인화된 옛날 일어 문자로 표현이 돼 있었다. 아마 일본에서는 변사가 공연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외견상 이 영화는 무성영화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고, 이미지 자체나 자막, 음악이 주는 느낌 때문에 오래된 극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뱀파이어>의 매력은 뿌옇고 낡은 영상이 주는 인상이다. 이는 프린트가 오래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드레이어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건 매우 놀랄만한 일이다. 당대에 사운드가 개발되고 사운드의 박진성을 향해 기술이 발전하는데, 드레이어는 이와 역행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에서는 시각적, 청각적인 것이 애매하게 그려져 있다. 이는 마치 셰리든 르 파뉴 소설집의 제목일 것 같은 ‘유리 속에 음침하게’ 잠복하고 있는 세계이다.

드레이어의 독립 프로덕션

1927년 <잔 다르크의 수난>이 예술영화를 넘어 전위예술로 받아들여지면서, 드레이어 주변에 전위 예술가들이 모여들게 된다. 이후 1929년 에티엔느 드 보몽 백작의 저택에서 무도회가 열렸는데, 드레이어가 초대 되었다. 이 무도회에는 러시아계 귀족 리콜라 드 귄쯔부르크도 참석했는데, 그는 당시 배우로서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드레이어는 사교계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인데 빅토르 위고의 증손 부부가 귄쯔부르크 남작을 소개시키기 위해 드레이어를 초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무도회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귄쯔부르크 남작은 드레이어에게 자신이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꿈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당시 드레이어는 <잔 다르크의 수난>의 제작사와 분쟁이 있어서 제작사의 의향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작업을 하고 싶었다. 드레이어는 파리에 자신의 독립 프로덕션 ‘칼 테오르드 드레이어 영화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남작은 자신이 자금을 조달하는 대신에 배우로 출연하는 조건을 걸었다. 귄쯔부르크 남작은 줄리안 웨스트라는 이름을 써서 <뱀파이어>에 출연하게 된다.

<뱀파이어>의 제작


드레이어는 초자연적인 주제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셰리든 르 파뉴의 소설집 중 <카밀라>라는 소설을 소재로 취했다. 그러나 여성 뱀파이어가 나온다는 걸 제외하면, 원작 소설과 영화의 내러티브는 전혀 다르다. <뱀파이어>는 처음부터 독일, 프랑스, 영국 3개국어판이 제작될 예정이었다. 각본에도 3개 국어로 대사가 기입되었고, 대사 장면은 각 국어별로 여러 번의 테이크로 촬영되었다. 이 영화의 제작 당시는 유성영화가 처음 등장한 시기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감독들은 대사를 많이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드레이어는 대사를 억제하려고 했다. <뱀파이어>는 유성영화로 설계되었지만 촬영 자체는 무성으로 촬영을 했고, 스튜디오에서 후시녹음을 했다. 입을 더빙할 때는 3개 국어로 후시녹음을 했다.
이후에 드레이어의 유성영화가 배우들에게 고도의 연기를 요구하는 것에 비해, <뱀파이어>는 연극적인 연기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뱀파이어>의 등장인물이 무성영화의 등장인물과 같은 것도 아니다. 드레이어는 유리 속의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등장인물의 연기를 요구했다. 이 영화의 배우는 모두 아마추어들이다. 드레이어는 배우들을 일상에서 배역의 신체적인 특징에 맞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1930년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잔 다르크 수난>이 전부 세트 안에서 촬영되었던 반면에, <뱀파이어>는 드레이어의 독립프로덕션이 제작을 맡았기에 예산이 부족해서 로케이션 촬영을 했다.
<뱀파이어>를 보면 뿌옇고 몽롱한 질감의 영상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질감을 내기 위해 촬영자 루돌프 마테는 고심 끝에 렌즈 앞에 검은 천을 걸고 태양광선을 통과시켰다. 정작 귄쯔부르크 남작은 모든 효과가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나 자신이 실험한 결과 천이나 필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드레이어는 <뱀파이어>를 백일몽처럼 표현하고자 했다. 앨런 그레이의 혼이 빠져나가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한편, 앨런 그레이와 지젤이 배를 타고 숲을 탈출하는 장면은 남작의 말대로 안개가 껴서 특수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드레이어의 전작 <잔 다르크의 수난>은 리얼리티를 강화하기위해 팬크로마틱 필름으로 촬영됐지만, <뱀파이어>는 리얼리티를 줄이는 방향으로 촬영된 것이다.

<뱀파이어>의 미적 특징

뱀파이어는 극영화이긴 하지만 이야기 요소가 희박하다. 드레이어의 전작들이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에 비해 이질적이다. 이에 영향을 준 것은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가 아닐까. <뱀파이어>가 <노스페라투>를 차용한 것으로 생각되는 결정적인 특징은 고서적의 페이지를 중간자막으로 도입하는 장면이다. 책의 페이지를 중간자막으로 넣는 건 무성영화적인 특징인데, 유성영화로 기획, 제작된 <뱀파이어>가 이렇게 촬영된 건 의아한 일이다. 무르나우의 영화와의 차이점은, <노스페라투>는 고서적 페이지가 비밀을 폭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반면에,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능을 더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고서적 페이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없다면, 내러티브를 알기 어려울 것이다. 페이지 자막과 더불어 중간자막 또한 무성영화적인 느낌을 준다. 이것도 유성영화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방법이다. 중간자막은 드레이어가 문자로 내러티브를 사용하는 걸 선호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뱀파이어>의 영상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에 이런 문자적인 설명이 있어야만 했고, 문자는 애매모호한 영상을 분명하게 규정해준다.
<뱀파이어>는 문자의 사용이 굉장히 독립적이며, 문자가 내러티브를 전달한다. 극영화의 경우 보통 액션이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문자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뒤바뀌어 있다. 시각적인 것들은 막연히 분위기를 만드는 쪽으로 진행이 된다. <뱀파이어>는 분위기만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뱀파이어>를 1인칭 영화로 파악할 수 있는 이유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앨런 그레이가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앨런 그레이가 프레임에서 보이지 않을 때조차 잠재적으로 그가 보고 있는 장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창문 밖에서 집 안을 들여다보는 쇼트가 나오는데, 이 쇼트가 상징적으로 제시하듯 앨런 그레이는 어쨌든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드레이어가 무성영화 시기에도 자주 사용하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근거는, 영화의 무대가 현실과는 먼 불가사의한 광경이라는 것과 연관된다. 첫 시작 자막에서 앨런 그레이는 몽상가로 기술된다. 현실과 초자연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다. 이후에 그려지는 장면은 몽상가 앨런 그레이의 내적 세계로 볼 수 있다. 자기가 자신의 내적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불가사의한 체험은 앨런 그레이 내면의 수수께끼에 의해 초래된다. 그곳에선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월경하게 된다.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자기가 보고 있다는 점에서 뱀파이어는 일인칭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드레이어는 영화의 본질을 추구하는데, <뱀파이어>에선 초자연과 현실을 탐구한다.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 드레이어는 입체파처럼 공간을 분해하는 실험을 했다. 그러나 <뱀파이어>에서는 공간을 통합하여 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카메라 워크를 보인다.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요소(빛, 미장센, 색조 등)들은 영상의 무늬 같은 것이 된다. 이러한 무늬가 합쳐져 앨런 그레이의 내면세계를 만들어낸다. 어디도 현전하는 편재적 인물 앨런 그레이가 중심축이 되고, 주변 인물들이 그의 내적인 세계에서 액션의 앙상블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앨런 그레이가 계속 나오는 건 두루마리 그림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 이와 병렬적으로 대응하는 청각적인 걸 생각해보면, 볼프강 젤러가 만든 음악이 어디서나 들린다. 물론 이것은 음악이 반주로 사용되던 무성영화시대의 발상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앨런 그레이를 축으로 다른 사람들의 액션이 앙상블이 이루는 것처럼 음악도 영상의 일부분으로 파악될 수 있다. 즉 음악이 액션을 보조하는 비유적 표현이기보다는 영상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방앗간에서 의사가 죽는 장면과 앨런 그레이와 지젤이 탈출하는 장면이 교차편집 될 때의 사운드는 청각적인 차원에서 영상을 만들고 있다.

<뱀파이어>의 프린트 문제

<뱀파이어>는 3가지 언어로 촬영되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약간씩 다른 버전의 <뱀파이어>가 전쟁 전에 개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 전후까지 남은 건 완결된 프린트인 독어판과 프랑스어판, 영어판의 단편들이었다. 가장 많이 상영된 건 스위스의 로하워가 복원한 버전인데, 그때까지 남아있었던 독일어판을 원판으로 사용했고 부족한 건 나머지에서 가져오는 방식이었다. 이 프린트는 당시로서는 가장 긴 버전이었고, 이후 16mm나 비디오로 만들어져 가장 많이 상영되는 판이 되었다. 한편, 로하워의 복원판과 별개로 덴마크 영화박물관은 <뱀파이어>의 덴마크어판 자막 버전을 만들었다. 이 프린트에는 로하워판과 다른 누락된 쇼트가 포함되어 있다.
<뱀파이어>는 완성된 후에 당분간 상영되지 않다가 1932년 UFA 극장에서 프리미어 상영되었다. 이 때 필름의 길이는 2271m였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3개국어판 모두 재편집되어 길이가 짧아졌다. 전후까지 남겨진 <뱀파이어>의 어떤 버전을 보더라도 누락된 쇼트가 있다. 로하워 복원판도 영화의 복원이라기보다는 액션의 보완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즉 액션 자체가 이야기를 많이 전달하지 않는 이 영화는 쇼트의 결함으로 영화 의미가 불명확해졌다. 그러나 현존하는 어떤 판을 보더라도 내러티브는 불명확하며, 원래 드레이어는 그러한 것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고스필모폰드에 보존된 독어판 <뱀파이어>는 2004m로 현존하는 가장 긴 프린트이다. 볼로냐 시네마테크 복원판은 독일어판을 기반으로 복원한 현 최상의 필름이다. 오늘 여러분이 보신 크라이테리언 DVD는 이 프린트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조차도 드레이어가 재편집하기 전의 필름보다 270미터 가량이 짧다. 액션이 명확히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은 <뱀파이어>의 내러티브 자체가 주관적인 망상 같은 것이고, 액션의 인과관계에 얽매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관객1: 당시 1930년대에 나라별로 흐름, 사조가 있었다고 들었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영향이나 독일의 표현주의 계열 같기도 하고, 이 영화의 사조적 정체성이 뭔지 궁금하다.
고마츠 히로시: <뱀파이어>는 1930년에 제작되었고 2년 뒤에 공개되었는데, 어떠한 예술 경향도 수용하지 않았다. 드레이어는 어떤 당시의 예술 사조에 소속된 적이 없었다. 대신 그는 유파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은 하고 있었다. 이 작품도 유파나 사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 어렵다. <잔 다르크의 수난>은 드레이어가 프랑스에 살고 있어서 초현실주의자하고는 교류하던 시기의 영화다. 그러나 <잔 다르크의 수난>도 초현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 영화는 전위적이기는 하나 어떤 경향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관객2:
뱀파이어라는 소재는 당대의 사회적 두려움을 포함하고 있고, 또한 인간이 영생을 영위하기 위한 욕망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영화는 뱀파이어 소재를 사용함에 있어서 어떤 목적 혹은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고마츠 히로시: 본질적으로 뱀파이어 영화는 말씀하신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생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건 유니버설이 호러 장르영화를 만들 때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 미라 등등 그것들 자체가 죽은 인간을 되살리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즉 인간이 사후세계를 얼마나 추구하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앙드레 바쟁이 말했듯, 영화 자체가 미라와도 같다. 인간이 생명을 보존하려는 데에서 영화 미디어의 특징이 있다. 말씀하신 것과 이 작품을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뱀파이어라는 소재 자체는 불사에 대한 욕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관객3: 유성영화 기술이 발전하고 세계를 자연에 가깝게 재현할 수 있게 된 시기에, 드레이어는 이와 반대로 가려고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후에도 드레이어가 제작한 영화에도 그러한 경향이 있는지, 그것이 드레이어의 어떤 생각에 의한 것인지 궁금하다.
고마츠 히로시: 드레이어를 작가로 봤을 때 그의 모든 작품이 각각 다르다. 대부분의 예술가는 작품만 봐도 이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고, 일관적인 스타일이나 세계관을 보여준다. 하지만 드레이어에게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이 때문에 재밌기도 하다. 데뷔작부터 유작 <게르트루드>까지 모든 양식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뱀파이어>같은 경우에도, 그의 작품으로서 그 전까지도 다르고 그 이후에도 이런 작품은 없다. 드레이어는 당시 지배적 무드와는 반대된 영화를 만들었다. 초기부터 그런 건 아니고, <잔 다르크의 수난>을 만들었던 시기부터 그랬던 거라고 생각한다. <잔 다르크의 수난>도 동시대 할리우드나 유럽의 어떤 영화와도 다르다. 따라서 드레이어의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당대의 지배적인 것과는 다른 영화였기 때문에 보통의 관객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한편, 당대 지배적인 것에 반한다는 데에서 아방가르드 내지는 전위적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 전위영화에도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이 분명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드레이어를 지칭하면서 쓰기엔 저어된다. 드레이어의 마지막 작품 <게르트루드>는 당대의 영화와 다르다는 점에서 드레이어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드레이어가 또 새로운 걸 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김소영: <뱀파이어>를 중심으로 상세하면서도 포괄적인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몰락해가는 귀족이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과정, 영화 속에서 보이는 쇠락의 기운, 드레이어 영화의 상반되면서도 통합적인 경향들 등, <뱀파이어>를 통해서 많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던 강의였다. 여러분들이 좋은 질문을 해주셔서 저도 많이 배운 것 같다. 감사드린다.

정리: 송은경(관객 에디터) 사진: 최미연(자원 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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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선택,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 시네토크

2월 6일 토요일 오후, 홍상수 감독의 선택작 <오데트>의 상영 이후 허문영 평론가의 진행 하에 관객과의 대화가 펼쳐졌다. 느린 트래킹으로 시작한 영화는 보는 이를 유혹하기 위해 현란한 재주를 부리는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적의 순간에 가닿기 위해서는 긴 기다림이 필요했다. 하지만 영화가 마지막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우리 모두는 잉거의 부활을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20년 만에 <오데트>를 다시 보게 되어 너무 좋았다는 홍상수 감독의 애틋한 목소리에서도 마지막 순간의 떨림이 그대로 이어졌다. 허문영 평론가 역시 과도한 설명을 아끼려는 모습이었던 그 현장을 전한다.


허문영(시네마테크부산 원장, 영화평론가): 이 영화를 보신 많은 분들도 그렇게 느끼시겠지만, 다시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신비로운 영화인 것 같다. 먼저 감독님이 이 영화에 대해서 느끼시는 바가 궁금하다.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과 이 영화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신지.

홍상수(영화감독): 사실 관객 분들이 어떻게 보셨는지가 더 궁금하다. 이 영화를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 추천했고, 같이 볼 수 있게 돼서 좋았다. 스물일곱인가 스물여덟에 처음 봤고, 오늘 두 번째로 봤다. 대학원 다닐 때였는데, 소위 말하는 클래식이란 영화들을 찾아보고 있던 시기였다. 그 때 보자마자 평생 기억하고 있을 만한 영화라고 생각했고, 이후로도 가끔씩 생각했던 영화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학생으로서 중요한 레퍼런스 포인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게 이상적 표본이 된 영화 중 하나다. 이후에 가끔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면 카메라의 수평운동, 계속되는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과 긴 기다림이 기억난다. ‘긴 기다림이 있어야만 이 결말이 믿어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카메라 움직임부터 여기 나오는 인물들, 그들의 성격이나 인품, 단순한 세팅,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서 우리를 자꾸 어떤 믿음으로 몰고 가고 준비시킨다. 그리고는 아주 한참 걸려서 우리는, 물론 만들어진 그림이고 연기한 것이지만, 마지막 장면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것임을 믿게 된다. 다른 영화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정도의 기적은 많이 만들어지지만,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나 정말 믿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마지막 장면을 믿고 싶었고, 기적이 일어나길 기다렸고, 실제로 며느리가 다시 살아났을 때는 정말 믿었던 것 같다.

영화의 힘을 느꼈다. 이 영화에는 눈으로 기적을 볼 수 있게 만들고, 그것을 믿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영화는 만든 사람의 영악함이나 계산이 아니라, 만든 사람이 영화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이었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를 통해서 이런 것을 할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영화의 모든 부분들, 리듬이나 대사의 깨끗함, 인물들의 인품을 만들어낸 과정에서 만든 사람의 진지함, 충실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점들이 좋아서 칼 드레이어가 쓴 책을 읽어봤는데, 책은 좀 답답하더라. 좀 답답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충실함에 대한 바람, 관심, 열정이 있었던 사람인 것 같다. 충실한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우리는 그런 충실함으로부터 왜 멀어졌나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런 진심을 갖고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영화를 보고나면 내가 믿고 있는 헛된 잡소리들, 내가 쌓아놓은 관념적인 탑들, 사람들한테 잘 통한답시고 습관처럼 하는 제스처들, 과잉된 자의식 같은 것들 때문에 움츠러들어서 제대로 사랑해 주지 않은 내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봐도 이 영화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기독교 영화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이런 진지함과 충실한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영화다. 그런 중요한 문제를 환기시키고 건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화라 생각한다.

허문영: 말씀하신 것보다 더 나은 설명을 덧붙이기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몇 가지 질문을 드리긴 해야 할 것 같다. 기독교적인 부분들 때문에 얼핏 이 영화는 감독님과 안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굉장히 경건하고 금욕적인 분위기의 영화처럼 보여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 영화를 종교와 신앙 문제에 관해 고뇌하는 영화로 받아들이고, 잉거의 부활을 종교적 신앙의 실현, 믿음의 실현으로 이해하곤 한다. 기독교 영화로 보지 않으셨다면, 어떤 측면에서 이 영화를 보셨는지 궁금하다.

홍상수: 이 분이 어떤 배경에서 이 영화를 만드셨는지는 모르겠다. 기독교적 신앙이 있는 분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에서는 저 빌딩을 돌아서면 적이 있고, 적들을 죽이려면 오른쪽으로 돌지 왼쪽으로 돌지를 고민한다. 전쟁 얘기면 전쟁가지고 얘기하는 것이고, 연애얘기면 연애가지고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다루는 문제가 어느 정도의 현실 속 리얼리티를 갖고 있느냐하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이 영화도 기독교와 상관없이 봐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분이 정하신 주제의식과 환경, 재료들이 있는 것이고, 그것들로 만들어낸 인물들과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것들이 부딪히면서 어떤 작용을 일으키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너무 잘 만들어진 영화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음속의 충실함이란 것에 도달하려는 사람들이 회의를 느끼는 모습들이 여러 인물들에 잘 나뉘어져 있다. 첫째아들과 아버지, 반대편에 있는 재단사, 그 모두를 다 사랑하는 며느리, 미친 사람 취급받는 남자에 잘 나눠져 있다. 그들이 믿음에 관해 하는 얘기도 전혀 교조적이지 않다. 아마 영화를 보시면서 충분히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계속해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여하고 있는데, 작년에는 에리히 본 스트로하임의 <탐욕>, 재작년에는 장 비고의 <라탈랑트>, 그 앞에는 브뉘엘의 <절멸의 천사>를 고른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 추천작들을 보면 <오데트>를 포함해서 모두 무성영화거나 무성영화 시대에 자신의 이력을 시작한 감독들의 영화다. 무성영화의 자장 안에 있는 영화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본인은 유성영화시대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난 뒤에 영화를 시작해서 유성영화를 만드는 감독인데, 무성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호가 있는 것 같다.

홍상수: 무성영화를 많이 보지는 못했다. 추천작들이 오래된 영화들이기는 하다. 보신 분들은 어떠실지 몰라도, 그 무렵의 영화들이 좋다. 보고 진짜 훌륭하다고 느끼는 영화들은 이런 옛날 영화들이더라. 자연스럽게 나에게 박힌 영화들이 있다. 굳이 얘기하자면 뤼미에르 형제가 맨 처음에 만든 짧은 단편들을 좋아한다. 영화관에서 틀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쇼트들인데, 보고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안개 낀 부둣가에서 남자들이 배타고 가는 것을 찍은 쇼트가 있는데, 움직임 자체가 주는 느낌만으로도 예쁘고 아름다웠다. 영화의 원류가 된 분들의 영화에 많이 끌린다. 물론 초기 영화감독들도 전시대의 화가나 소설가에게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들이 영화적 완성도에 도달하면서 영화의 위치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계속 다시 보고 싶다고 느끼는 영화들은 대부분 그런 분들의 영화다. 그 이후의 감독들은 시기적으로 늦게 태어나서 할 수 없이 그 전의 것들을 흡수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단지 흡수한 것을 여러 가지로 섞을 때 자신의 태도가 반영되고 재능이 표현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은 공교롭게도 ‘말’이라는 뜻의 <오데트>다. 이 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은 우리가 보통 접하는 유성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런 점에서는 감독님의 영화에서 대사를 다루는 방식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듣기에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조화의 느낌이 있다. 대사가 정보 전달이나 의미 전달의 기능을 한다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육체로, 혹은 배우라는 육체에 부착된 물질적 음성으로서 감각된다. 듣고 있으면, 저 음성과 저 방식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말의 물질성, 육체성을 중시하는 점이 공통적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드레이어는 영화를 찍을 때 현장에서 음성을 매치시켜 보고 잘 안 맞다 싶으면 대사들을 빼버렸다고 한다. 감독님은 이 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셨는지.

홍상수: 개인적으로는 말들이 듣기에 너무 좋았다. 귀가 편했다. 내용은 자막을 통해서 이해했지만, 말들 한 마디 한 마디가 딱 있을 것만 있는 느낌이다. 인물들의 인품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하나도 거슬리는 것이 없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음악 같다고 할까. 쓸데없는 것이 붙은 곳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인물들도 무척 좋았다. 저런 시대나 장소가 실재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하나의 가치관 속에 묶여 살면서 그 속에서 서로 더 충실하려고 애쓰고, 가끔은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부닥치기도 하는 커뮤니티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오즈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도 현실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쁘지 않나. 하나의 큰 가치관 속에 묶여 있으면서 서로 충실하려는 사람들이고, 어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걸 극복하려는 애씀 자체가 예쁜 인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말하셨듯이, 물결이 조용히 흐르는 것 같은 카메라의 수평 트래킹과 롱테이크가 특히 인상적이다. 물론 롱테이크나 트래킹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이 영화에서는 각별한 느낌을 자아낸다. 드레이어는 영화사상 가장 격렬한 몽타주 영화 중 한 편인 <잔 다르크의 수난>을 만든 사람이지만, 전체 필모그래피에서 <잔 다르크의 수난>은 좀 예외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이 영화에서와 유사한 카메라 워크와 롱테이크를 더 선호했었던 것 같다. 드레이어 본인도 인터뷰에서 “나는 롱테이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다”고 밝힌 바가 있다.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청년시절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트래킹과 롱테이크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궁금하다.

홍상수: 처음 봤을 때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 그 답답함도 필요했었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 보면서는 훨씬 편했다. 나이 탓도 있겠고, 생각이 달라진 탓도 있을 것 같다. 그 때 놓친 것이 많았던 것 같다. 오늘은 인물들도 구경하고, 인물들이 만들어나가는 관계도 봤다. 사이사이에 구경하고 쳐다볼 게 너무 많아서 답답함을 못 느꼈다.

 

관객1: 영화를 본다는 체험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주는 위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신이 있나 없나를 따지기 보다는,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어떻게 관객이 체험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트래킹과 긴 호흡을 통해 보여준 좋은 영화인 것 같다. 보면서 베르히만의 <처녀의 샘>이 계속 떠오르더라. 그 영화도 굉장히 호흡이 길면서 마지막에 큰 울림을 주는 영화였는데, 보셨다면 어떤 느낌이셨는지.

홍상수: 그 영화도 봤지만, 이 영화를 훨씬 좋아한다.

허문영: 실제로 드레이어가 좋아했던 영화 중 한 편이 <처녀의 샘>이었다.

 

관객2: 작년에 필름포럼에서 <오데트>로 강연하실 때 마지막 키스가 주는 육체적 느낌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오늘 보니 훨씬 더 이상하고, 훨씬 더 육체적인 느낌이 든다. 마지막에 신을 부르는 대신 삶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이상하게 다가온다.

허문영: 마지막에 나오는 잉거의 키스 장면은 너무 외설적일 정도로 적극적이다. 아기가 네 동강이 나서 죽었다는 끔찍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다시 애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동물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 느낌까지 드레이어가 계산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이 영화에는 관능적이고 외설적이면서 육체적인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3: 진심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데, 믿음은 이성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순수한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 일어나야 가능한 것 같다. 공통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비슷한 것 같다. 영화에서 어린 딸이 신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엄마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라는데, 그런 순수함이 기적을 가능케 한 것 고, 거기서 오는 감동이 있다.

홍상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고, 그렇지만 잡으려면 잡을 수 없고, 또 있으면 엄청난 힘을 얻고 너무 편안해 지는 것이 믿음인 것 같다. 믿음은 특권 같다. 특권은 권리가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분석을 통해 믿음을 확보하는 방법을 찾거나, 증거가 있으니까 믿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제일 온전한 상태일 때 자기가 느낀 것, 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한다. 내가 본 것과 느낀 것을 통해서 이미 생각하기도 전에 내가 그것을 믿고 있는 거다. 하지만 내가 불안하고 흐트러져 있을 때는 온갖 잡것들이 낀다. 그러면 온전한 상태에서 느끼고 본 것을 자꾸 분석하려고 든다. 증거를 대야 믿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있어서 결국 못 믿게 만드는 거다. 믿음은 확고하거나 자물쇠로 채워놓은 것도 아니고, 내가 딴 생각이나 딴 짓거리 하고 다녀도 그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믿으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온전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내 속에 계속 믿음이 있을 수 있다. 믿음은 너무 많은 것을 주는 큰 행복이기 때문에 그것에 증거를 댈 필요도 없고, 그것을 남에게 자랑하고 팔고 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정리: 이후경)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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