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작은 몸짓과 시선이 전하는 통렬함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가 말하는 시네마테크 선택작 ‘내일을 위한 길’

 

지난 1월 30일, 시네마테크의 선택작인 레오 맥커리의 <내일을 위한 길> 상영 후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이 영화는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작품 중 하나'라는 소회로 시작된 강연은 영화의 감흥을 곱씹을 수 있도록 한 시간이었다. 그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시네마테크의 선택작을 고르며 고민하던 중 문득 생각했던 작품이 레오 맥커리의 <내일을 위한 길>이었다. 노년이 되신 분들이 시대의 흐름에서 느끼는 고립감을 다룬 작품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 있지 않나.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영화의 목록들도 있지만, 삶의 마지막에 아마도 보고 싶은 영화들도 있다. 예를 들어 파스빈더는 삶의 마지막에 죽어가면서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를 봤다고 한다. 나에게는 바로 이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후반부가 아주 인상 깊다. 부부가 작별을 고하기 위해 허니문을 떠났던 도시를 다시 방문하는 부분이다. 앞으로 서로를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마지막을 어떻게 정리해 가는지,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뭉클하다. 영화가 아주 정갈하다.

이 영화에 대해 할 말은 많지 않다. 다만 몇 가지 사전적인 정보를 말씀드리고 싶다. 이 영화를 만들었던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경제 불황이 계속되던 때다. 그렇기 때문에 은행의 차압이나, 일자리 부족 같은 문제가 많았다. 시기적으로만 보자면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와 비슷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또한 루즈벨트에 의해 사회보장제도가 처음 마련되던 시기였다. 영화의 후반부, "젊은 때 저축하라"는 표어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이 보장제도에 대한 것이다. 사회적인 맥락에서만 보자면, 이 시대에 노년의 부부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은 결혼 생활동안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주다 보니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불행인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레오 맥커리의 개인적인 사정이다. 1936년에 레오 맥커리는 상한 우유를 먹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경험이 맥커리에게 죽음에 대한 불안과 민감성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개인적인 사연 때문인지 맥커리의 영화 인물들은 동시대 비고되는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 속의 인물들보다 어둡고 자기비하적이거나 불안, 혹은 민감함이 더 커 보인다. 비슷한 스크루볼 코미디를 찍어왔음에도 이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로, 1936년에 맥커리가 건강을 회복 한 후에 정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와 관련해 영화 속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1937년에 노인을 다루는 영화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레오 맥커리는 로렐과 하디, 막스 브라더스와 함께 코미디 영화를 찍어왔던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이렇게 슬픈 멜로 드라마를 만든 것이다. 노년의 멜로드라마, 이것은 장르적으로도 특별한 경우다. 이 영화가 맥커리의 가장 웃긴 영화라고 하는 <놀라운 진실>과 같은 해에 나왔다는 것은 놀랍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영화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와 비슷하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레오 맥커리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 장면 편집, 카메라 워킹에는 화려한 부분이 전혀 없다. 하지만 한 장면 안에서 인물들을 위치시켜놓고 찍어 나가는 그 순간,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통렬함이 잘 표현되어있다.

 

공간 속에 있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아주 작은 표정, 시선, 몸짓들이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브리지 게임을 하는 중, 헤어진 아내에게 남편의 전화가 걸려오는 장면을 보자. 카메라는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그 아내를 관객들이 정명으로 보게끔 만든다. 이 영화의 많은 장면들은 중심인물들을 정면으로 보도록 만들거나 반대로 거꾸로 등져 보이도록 한다. 마치 중심인물들이 무대의 객석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남편이라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서 아내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브리지 게임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소리가 커져가자 게임을 중단하고 그 모습을 바라본다. 이 장면이 지속되는 내내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관객들은 그 장면을 보며 그녀가 이 장면에서 초래하는 결과들, 그녀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런 것이 멜로드라마적인 통렬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영화 속에 많이있다. 양로원에서 온 편지를 보는 장면, 이 장면은 아주 심플하게 구성되어 있다. 양로원에 가겠다고 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자 아들의 표정에는 잠깐 미소가 번지다가 다시 평소의 상태로 돌아온다. 하나의 장면 안에서 감정의 미묘한 상태가 변해가는 미니멀한 부분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위치와 시선, 몇 개 정도의 짧은 컷들이 복합되어 감정을 컨트롤 해 나간다. 특히 관객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며 구성해 나가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17살 손녀딸 로다와 할머니가 이야기 하는 장면을 보자. 할머니는 손녀딸에게 17살 때는 모든 게 아름답게 보였고, 70살이 되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짐짓 그런 것인 척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받아들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편의적으로 3막으로 보자면, 영화의 초반에 주인공의 집이 저당 잡히는 순간으로부터 모든 파국이 발생한다. 사실 이 출발점은 작은 사건에 불과해 보인다(아마도 얼마 후에 부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라는 대사처럼). 이후의 이야기는 작은 헤어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알 수 없는 일로 흘러가는 것이다. 2막에서 부부는 헤어졌다가, 3막에서 다시 만난다. 1막과 2막은 가족의 이야기다. 그런데 3막이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는 이야기가 가족에서 소셜한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짐짓 그런 것인 척 한다'는 태도가 사회적인 영영에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장면을 보자. 노부부는 1막에서부터 '짐짓 그런 것인 척 한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3막에서 노부부에게 차를 판매하려던 사람 역시 차를 태워주며 그런척한다. 결국 부부가 차를 자랑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며 차를 살 형편은 아니다 라고 말 했을 때, 그 또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호텔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가족 관계에서는 잘 기능하기 힘들었던 일이사회적인 규모로 확장되어 진행된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정작 노부부는 대우를 받고 있다. 3막의 부분은, 감독이 생각하는 가족을 넘어선 사회적 관계에 의한 대우랄까, 관계성의 회복에 대한 사회적 비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감정을 분명히 토로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간다. 이 영화의 세계는 잘 구성된 세계인 것 같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이유가 다 있지 않나. 부모도, 자식들도 (부모를 모실 수 없는) 이유가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 내에서 조그만 하나의 변화가 어떻게 이 전체를 교란시켜나가는가를 보여준다. 조화로운 질서의 파괴가 어떻게 작은 것에서 번져나가는지를 보게 된다.

 

정리: 김경민(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주원탁(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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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개막작 소개: 영화를 사랑한 영화

-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

 

 

 

 

 

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개막작은 관객들의 선택작이기도 한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이다. ‘영화를 사랑한 영화들’이란 주제의 10편의 작품들 가운데 관객들이 최종 선택한 작품이기도 하다. 고다르의 <경멸>, 버스터 키튼의 <카메라맨>, 페데리코 펠리니의 <8 1/2>을 제치고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다. 영화 관람이 대중적인 오락거리이자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영화관을 가던 1930년대 대공황기를 배경으로 한 유쾌하면서도 통렬한 사랑이야기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떠오를 때 우리 귀에 들려오는 것은 뮤지컬 영화 <톱 햇>(1935)에서 프레드 아스테어가 부르는 노래 “칙 투 칙(Cheek to Cheek)”이다. “천국에, 나는 천국에 있어요”라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이 노랫말은 아마도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여주인공 세실리아(미아 패로)가 영화를 볼 때의 기분과 같을 것이다.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콤비가 출연했던 <톱 햇>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얼어붙은 관객들의 마음을 달래주었고, 세실리아 역시 그런 관객들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1930년대 뉴저지에서 시작한다.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세실리아는 실직한 남편의 구타와 음주, 외도에 못 견디고 집을 나선다. 그런데 직장에서의 잦은 실수 때문에 결국 해고당하고 만다. 앞길이 막막해진 세실리아는 눈물을 훔치며 늘 그랬듯 극장으로 향해 영화 속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관람한다. 그때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세실리아가 좋아하는 영화 속 캐릭터인 톰 벡스터(제프 대니얼스)가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와 말을 걸고,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감독 우디 앨런은 영화 속 허구의 인물이 현실세계로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긴급한 상황에서 닥치는 대로 잡아탄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고, 조명은 로맨틱한 순간에 알아서 꺼져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는 영화와 현실이 같은 세계에서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하지만 영화와 현실의 양립불가능성이 현실 앞에서 영화가 쓸모없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정을 불어넣어 현실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세실리아는 남편에게 얻어맞는 벡스터를 보고 소극적이었던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대항한다.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해지는 건 영화와 현실의 중간 단계, 즉 톰 벡스터를 연기한 배우 길 셰퍼드가 개입하면서부터다. 그는 자신의 복제인간이 영화 밖으로 튀어나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할리우드에서 곧장 뉴저지로 달려온다. 셰퍼드는 세실리아에게 사랑 고백을 하면서 벡스터와 자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요구한다. 세실리아는 벡스터가 아닌 현실에서 살아가는 셰퍼드를 택한다. 허구와 현실 가운데 허구를 선택하는 일은 우디 앨런의 말을 빌자면 ‘정신 나간 짓’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을 선택한다는 것은 ‘상처를 받는 것’이기도 하다. 셰퍼드는 혼자 할리우드로 떠나버리고 세실리아는 버림받는다. 그녀는 다시금 허구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즉 극장으로 향한다. 우디 앨런은 영화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낙관도,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냉소도 하지 않는다. 다만 스크린을 응시하는 세실리아의 얼굴을 우리로 하여금 마주하게 만든다.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세실리아의 표정은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보는 우리의 표정과 닮았다. 영화와 현실이 서로를 거울처럼 마주보는 통렬한 순간이다.

 

송은경 /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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