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도피>는 <400번의 구타>를 시작으로 <앙투안과 콜레트>, <도둑 맞은 키스>, <부부의 거처>를 지나 근 20년 동안 그려낸 앙트완 드와넬의 마지막 기록이다. 이 연작에는 한 남자의 반생이 담겨 있다. 극 중 인물이 성장하는 배우인 장 피에르 레오 역시 나이를 먹었다. 앙트완 드와넬의 긴 여정을 갈무리하는 영화답게 <사랑의 도피>에는 전작의 요소가 골고루 등장한다. 지나온 삶에 대한 회상인 것이다. 전작을 보지 않았더라도 크게 불편함은 없으나 가능하면 보는 것이 좋다. 앙투안을 앙투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의 성장을 같이 지켜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도피>의 앙투안만 본다면 그는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인 철없는 남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과거를 따라가다 보면 왜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400번의 구타>에서 어린 앙투안은 엄마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마음에 영영 채워지지 않을 공허가 생겨버렸다. 모성애의 결핍을 느끼는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그래서 탈이지만) 소중한 것을 지킬 줄 몰라 스스로를 망가뜨린 다음, 이내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의 서투른 소통방식은 <부부의 거처>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내이고 싶었다던 크리스틴에게 ‘넌 나의 누이이자, 딸이자, 엄마’라고 말했던 앙투안. 그런 그에게 우연히 만난 새아버지가 “엄마는 너를 사랑했었다”고 말하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앙투안이 붙들고 있던 과거를 하나씩 놓아주는 과정을 보여준다. 새로운 삶에 한 발 내딛기 위한 도움닫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해야만 한다. 그래서 위태로운 사빈과의 관계는 고질적인 그의 한계를 넘기 위한 숙제인 셈이다.

<사랑의 도피>는 많은 것을 충실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서로를 오랜 시간 지켜본 후에야 나올 수 있는 함축적인 표현이 이 영화의 힘이다. 대신 여러 사건들이 층층이 쌓인 후, 시간이 흘렀을 때 어떤 미래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우연들이 만들어낸 운명에 관한 영화이다. 흔들리는 앙투안의 삶에 안정이 찾아왔을지 알 수는 없다. 설령 그렇지 않는다 해도 앙투안이 얄미운 구석은 있지만 싫어할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는 예술가의 모습의 그의 매력이었으니까. 트뤼포 역시 앙투안처럼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끝내 친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으며, 여성편력으로도 유명했다. 과거는 트뤼포에게 평생에 사라지지 않은 멍울이었다. 그럼에도 <사랑의 도피>는 표면적으로나마 그의 유년시절을 정리하고 떠나보내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한 편의 송가이다.(김휴리: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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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드는 것은 역마차 여행과 같다. 처음엔 유쾌한 여행을 기대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린다. … 촬영 시작 전엔 아름다운 영화를 찍고 싶지만, 문제가 생기면 야망은 수그러들고 그저 촬영을 끝낼 수 있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영화 속 영화, <파멜라를 소개합니다>의 감독 페랑(프랑수아 트뤼포)의 극중 내레이션이다. 페랑은 영화를 찍는 일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제작자는 영화 촬영이 빨리 끝나기를 재촉한다. 배우로 활약해야 할 고양이는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술에 취한 배우는 대사를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 영화 제작기간 동안 같은 호텔에 묵어야 하는 배우와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난잡한 스캔들이 일어난다.

 

 

페랑의 영화촬영기가 비록 험난할지라도, ‘영화에 대한 영화’인 <아메리카의 밤>이 트뤼포의 ‘영화찬가’임은 분명해 보인다. ‘릴리언 기쉬와 도로시 기쉬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자막으로 시작한 <아메리카의 밤>은 영화에 대한 사랑고백으로 넘쳐난다. 페랑이 밤마다 꾸는 꿈은 (아마도 그의 유년시절인 듯한) 꼬마가 영화관에 걸린 <시민 케인>의 스틸 사진을 훔치는 것이다. 영화 속에 부뉴엘, 드레이어, 루비치, 베리만 등의 감독들에 대한 책이 등장하는 것은 그들 영화에 대해 트뤼포가 바치는 존경의 표현이다.

 

 

한편으로 <아메리카의 밤>은 영화란 곧 관객들의 눈을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가령 촛불 속에 숨겨진 전구,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부분만 지어놓은 세트 등에서 관객들은 영화의 환영적인 속성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밤>은 스튜디오 시스템의 은폐된 영화 제작 과정을 폭로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구조적, 정치적 비판의 태도는 결여하고 있다. 즉 <파멜라를 소개합니다>의 촬영 현장은 자본과 예술이 충돌하는 장소가 아니라, 즐거운 유희가 벌어지는 놀이터에 가까운 것이다(로버트 스탬에 의하면, ‘한 말의 신비화를 위한 한 되의 탈신비화’). 결국 영화 촬영 도중 발생하는 애환은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비유와 함께 낭만적으로 해결된다. 실제로 트뤼포는 지방에서의 흥행이 저조하자 공동제작자에게 ‘영화 속 영화’라는 문구 보다는, ‘사랑과 모험에 관한 영화’라는 점을 강조하길 요구했다. 고다르가 <아메리카의 밤>을 보고 분개하며 트뤼포와 결별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밤>은 고다르뿐만 아니라 좌파 평론가들로부터도 ‘지나치게 타협적’이라는 가혹한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이에 대해 트뤼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든 나쁘든 나의 영화는 내가 만들기를 원했던 것일 뿐이며, 그 이외에 어떤 것도 아닙니다. 나는 이 영화들을,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내가 선정하고 사랑했던 배우들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즉 트뤼포에게 <아메리카의 밤>은 “체제 속에 투항해버린 것이 아니라, 체제 안에서 나의 방식대로 작업”했던 것이다.

 

 

트뤼포는 영화와 삶 중에서 영화를 택했다. 그에게 영화는 삶에 더해지는 무언가가 아니라, 삶 전체를 대신할 대체물이었다. 트뤼포는 영화가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았을 사람이다. 그를 마냥 낙천적인 시네필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알퐁소(장 피에르 레오)에게 “너나 나 같은 사람들은 영화를 찍을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페랑은 체제 안에서 작업하며 자신의 존재성을 붙잡으려는 트뤼포의 현실 속 모습과 겹쳐 보인다. 이 장면은 영화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한 명랑한 분위기에 쓸쓸한 얼룩을 남겨놓는다.(송은경: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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