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인 가운데 어떤 희망의 지점

 

지난 12월 6일 장 뤽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 상영 후,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고다르가 이야기하는 표현의 자유, 소유권, 디지털, 이미지, 영화에 대한 이 날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영화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게 무슨 얘기지?’ ‘곧 알게 될거야.’ 3부에선 ‘바르셀로나가 우리를 환대할 것이다’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약간 미래식으로 주어져있다. <필름 소셜리즘>이라는 영화 안에 ‘필름’과 ‘소셜리즘’ 은 없다. 영화의 모든 이미지들은 디지털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형으로 얘기하는 부분은 있지만 소셜리즘 그 자체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없다. 필름과 소셜리즘은 이미 20세기에 지나가버린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향수를 그리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것은 알게 될 것이거나 환대하게 될 것이며, 미래에 놓여있다고 생각된다. 2부의 마르탱 가족의 이야기에서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선거에 나갈 수 없다고 말하자 재밌는 얘기를 한다. 나중에 프랑스 부채의 30%는 아이들이 다 짊어지게 될 텐데 왜 아이들은 선거를 할 수 없느냐고 이야기한다. 미래형의 형태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아이들이 갖고 있는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들이 계속 얘기하는 것이 ‘be동사를 쓰는 사람과 이야기하지 마라’이다. 그것은 존재형으로서의 지금의 아이, 입후보의 권리도 없고, 선거도 할 수 없는 그 안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표현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들은 현재엔 아니지만 미래를 짊어지게 된다. 존재형으로서는 여기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성의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은 이런 ‘아이’라는 생각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표현과 권리의 문제들이 있다.

먼저 디지털 시대로 갈수록 표현의 자유가 없어진다는 표현이 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직전의 고다르의 행보를 보면, 표현의 자유, 디지털, 소유, 소셜리즘과 관계된 부분들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 프랑스 사회 내에서 아도피법이 논란이 되었다. 인터넷 상에서 불법으로 다운로드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으로, 이 법이 올해 프랑스 대선에도 논란이 되면서 올랑드 후보의 경우 ‘문화적 예외 2막’을 선언하면서 이 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겠다는 선거공약을 내세웠고, 당선이 됐기 때문에 이 법은 아마 폐기될 가능성이 있다. 고다르 역시 이 아도피법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많이 했었고, 그러한 뉘앙스가 이 영화의 마지막에 삽입된 FBI 경고 문구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한 청년이 엄청난 양의 MP3 파일을 다운로드해서 재판에 기소된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청년에게 고다르가 재판비용에 사용하라며 돈을 붙였다고 한다. 상징적인 돈이다. 고다르는 인터뷰에서 필름의 소셜리즘이라는 것은 지적 소유권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기도 했었다. 물론 액면 그대로 모든 저작권을 부정해야만 예술적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말하는 저작권에 대한 부정성은 몇 가지 의미가 있다. 고다르는 예술가에게는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무만 있을 뿐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했다. 또한 작품의 권리는 예술가가 갖는 것이 아니다. 고다르는 프랑스영화사 100주년 기념작품에서도 그런 말을 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멜리에스 영화를 복원해 상영하려고 했을 때, 멜리에스의 후손들이 저작권을 주장하면서 엄청난 돈을 요구했었고 이에 대해 고다르는 비난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떤 이미지를 다른 사람들이 가져다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작권의 문제로 인해 타인의 이미지를 가지고서 예술가가 재창작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게 된다. 고다르와 같이 이미 50~60년대부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남의 영화를 보고 남의 영화를 무차별적으로 인용한 작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카피에 대한 것, 농담처럼 얘기하는 것이지만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는 입장인 것이다. 소유권에 대한 강고한 설정에 대해 고다르는 아주 부정적인 입장이다. 필름과 소셜리즘이 연결되어지는 지점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이런 저작권과 관련된 부분이다.

 

 

동시에 몇 가지 지점들이 더 있다. 이를테면 모든 이미지가 디지털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특히 1부는 고다르의 이전 작업들과 어느 정도 연결점이 있어 보이는 2,3부에 비해 이미지도 굉장히 다르고 이미지들의 연결 방식도 굉장히 다르다. 복잡다단한 이미지들이 무차별적으로 아무 연관성 없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1부에는 비교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모든 장면들이 하나와 다른 하나 사이의 연결점이 전혀 안 보인다. 이미지의 연결에서 몽타주적 감각이 전무하다. 1부의 이미지는 최소한 5,6명 정도의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찍은 것 같은데, 핸드폰에서 고화상 카메라까지 여러 다양한 디지털 장비로 찍은 것이다. 음식을 먹고, 춤을 추고, 수영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찍은 이미지들은 대체 누가 찍는지, 그리고 왜 찍는지,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모호한 형태로 촬영되어 있다. 말하자면 디지털적인 세계로서 구현된 현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1부에 대해 자본주의의 풍경을 담아낸 이미지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첫 대사에서 말하듯 돈은 공공재이고 그런 의미에서 물 같은 것이라면, 지중해의 크루즈라는 것은, 공공재라고 하는 물 위에 떠 있는 자본주의이며 이 자본주의는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것이 1부와 3부를 연결하는 것 같다. 크루즈라는 하나의 거대한 배 안에 다국적의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그들 전체가 모두 엑스트라처럼 등장한다. 이 배는 <타이타닉> 같은 배가 아니다. <타이타닉>은 위와 아래를 계급적으로 분리시켜놓고 그 분리된 계급성을 드라마로 구성한다면 이 영화는 그러한 위계성 자체를 철폐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인물들의 중심성, 주체가 대상을 찍는 관계의 중심성, 이미지의 위계성이라는 것이 없다. 이미지의 위계가 없다는 것은 디지털이라는 것 안에서 모든 이미지들을 무차별적으로 배치했다는 것이다. 디지털은 모든 이미지를 무차별적인 평등성 안으로 집어 넣어버린다. 이것은 누가 찍는가의 기원도, 근원도 존재하지 않는 무차별성이다. 드팔마는 <리댁티드>라는 영화를 찍을 때, 모든 장면을 영화에 등장하는 군인이 들고 다니던 캠코더로 찍은 영상과 CCTV 영상을 수평적으로 연결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방식으로 찍혀진 이미지들이다.

이 영화에는 그럼에도 인간적인 개입이 있는 촬영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사진이다. 디지털적으로, 동영상적으로 구성되어있는 이미지들은 평등한 형태의 무차별적인 이미지로 구성되는데, 그 행위 내부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손이라는 것을 빌어 구성해나가는 측면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영화 안에서 사진과 동영상 간의, 촬영한다는 것과 이미지로 구성되어져 있는 것 간의 충돌성이라는 지점이 있다. 3부에서 팔레스타인 작가에 의해 사진과 관련해서 팔레스타인에 언제 처음 사진이 등장하게 됐는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어떤 이미지를 찍는다는 것, 고유의 무언가를 촬영한다는 것, 그것이 갖는 보편화된 이미지에 대한 저항성의 측면이 사진과 관련해 등장하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부의 디지털 이미지는 위계성이 없어 평등해 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무차별화시키는 지점 안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글로벌화라는 것이 부각되고 있다. 고다르는 자주 ‘국가의 꿈은 하나이고, 개인의 꿈은 둘이 마주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국가는 하나를 원한다. 국경의 철폐라는 것, 지금으로 말하자면 신자유주가 극단적으로 일자를 추구해나간다. 국가가 하나를 꿈꾸는 반면 둘을 원하는 개인들의 꿈, 그것은 사랑을 원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개인으로서의 둘을 전제한다. 게다가 국가라는 말이 불어에서는 존재라는 것과 연결된다. be동사를 쓰지 말라고 하는 건 국가로서의 하나라는 존재로 전제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유럽의 위기라는 것이 지중해에 떠있는 크루즈호라는 설정 안에서 최근의 그리스 위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의 위기와 유럽의 문명적 위기라는 것이 1부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아마도 스페인 내전 당시에 사라진 황금에 대한 이야기와도 연결되고 있다. 유럽사회 내에서 고다르가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 보자면 프랑스 혁명, 그리스적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또 하나가 스페인이다. <작은 병정>을 만들 당시 고다르는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겐 스페인 인민전선의 투쟁도 없다. 우리는 전쟁과 박물관의 자식일 뿐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스페인 인민전선을 언급하면서 언제나 회답처럼 나오는 것이 앙드레 말로다. 말로가 스페인 내전과 관련해 썼던 책의 제목이 ‘희망’이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스페인 내전을 얘기하면서 ‘필름’과 ‘소셜리즘’이 없는 가운데 기다리게 하는 것이 희망일 것이다.

고다르와 절친한 사이인 알랭 베르갈라의 표현에 따르자면, <필름 소셜리즘>은 가장 절망적인 영화이다. 아무것도 없고, 뭔가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어떤 희망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희망의 한 지점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들이다. 고다르 영화 중에 이렇게 동물이 많이 나오는 영화는 처음인 것 같다. 특히 2부에 등장하는 라마가 특이하다. 알랭 베르갈라는 고다르의 현재의 위치가 이 라마 같다고 말한다. 라마는 원래 유목적인 동물인데, 이 영화에서는 언제나 묶여있고, 움직임이 없다. 대신 귀만 쫑긋 세우고 사람들 주변에 있다. 마치 라마처럼 고다르가 스위스의 자기 집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듣고 있는 그런 예술가적 위치를 얘기하는데 그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 고다르의 영화에서 동물과 아이의 등장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영화의 1부에는 사실 대화라는 것이 없다. 말은 있는데, 일반적인 의미에서 A컷과 B컷으로 대화가 연결되는 씬이 없다. ‘사상은 우리들을 나누고, 꿈은 우리들을 합친다’는 대사가 나온다. 고다르는 이 영화로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얘기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꿈이 우리를 합치게 만든다고 말한다. 사상, 이데올로기는 다 언어에 기초해 있는데, 이 영화에는 언어에 대한 부정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아이와 동물은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그들은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되는 언어 이전의 언어로 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 이후에 고다르가 만들고 있는 영화의 제목은 <안녕, 언어여>이다. 인간적 대화라고 하는 것이 갖는 불충분성과 어려움이라는 것을 넘어서는, 다른 언어의 방식으로서의 대화, 소통 혹은 관계 맺기. ‘하나 안에 또 다른 타자가 있고 타자 안에 또 다른 하나가 있어서 결국 우린 셋이다’라고 대사, 또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감명 깊게 들었던 ‘진보는 우리들을 타자에게로 이끈다’는 표현이 있다. 마찬가지로 동물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목인 필름과 소셜리즘은 영화 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뭔가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절망적인 느낌도 있지만 그럼에도 말로의 책의 제목을 빌어 어떤 희망의 지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알게 될 거야, 도래하게 될 거야, 라는 것이 영화이거나 소셜리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 사진: 정지은(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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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혹은 행복의 기억

 

<아녜스의 해변>은 바르다가 유년기를 보낸 브뤼셀 근처의 해변에서 시작한다. 해변에 설치된 거울은 세계를 비추는 영화의 비유이지만 동시에 그녀의 자화상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일종의 설치작품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바르다가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의 의뢰로 2006년에 했던 ‘섬과 그녀’라는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왜 해변인가? 바르다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반드시 심상의 풍경이 있다. 나의 경우 그것은 해변’이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해변에서 시작해 그녀의 삶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보낸 기억들을 더듬어가는 자화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징 뤽 고다르가 <JLG/JLG>에서 말하듯이 자화상은 회화에서는 비교적 많이 있는 장르이지만, 문학에서는 자전, 회상, 회고록과 같은 형태로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는 영화에서 자화상이란 실제로는 불가능한 장르라 말했다. 하지만 영화가 일종의 거울이라면 어떤 의미로든 영화작업은 작가의 자전을 반영할 것이다. 바르다는 이미 그의 경력에서 수다한 여인들의 초상화 작업을 해왔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의 샹송 여가수에서 시작해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의 여성운동가, <방랑자>의 모나, <아녜스에 의한 제인 버킨>의 유명한 무명인 제인 버킨, 그리고 <이삭 줍는 여인>에서의 그녀 자신까지. <아녜스의 해변>에서 자화상 작업은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이중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작업의 대상이 자신이며, 스스로 자신을 촬영해야만 한다. 바르다는 <아녜스에 의한 제인 버킨>에서 이미 카메라를 거울로 취급하며 화가나 감독의 초상화 작업이 일그러진 변형의 형상이라는 점을 말했었다. <이삭 줍는 여인>에서는 자신을 이삭 줍는 여인을 뒤쫓는 영상의 이삭 줍는 여인이라 칭한다. 그녀는 주름진 손과, 얇아진 머리카락 등 늙어가는 자신의 몸을 감자가 썩어가는 장면들과 연결하며 예술적 작업을 죽음과의 싸움으로도 묘사했다.

<아녜스의 해변>은 그런 자화상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첫 장면은 바르다가 해변에서 뒷걸음질을 하며 “나는 작은 늙은 여인의 역할을 한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우리는 그녀의 많은 역할중의 몇 가지 상들만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가족사진들, 영화의 클립들, 인터뷰들, 만남들, 풍경들, 그리고 설치작업 등, 다양한 질료들의 콜라주가 그녀 삶의 연대기를 불연속적인 시네마틱한 자서전으로 구조화한다. <아녜스에 의한 제인 버킨>에서처럼 여기서 자화상이란 내부로 지향된 시선을 외부로 향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상태에 질문을 던지고, 자아의 거울을 활용해 타자를 촬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다의 내적인 풍경은 바다를 포함한 지리학적 공간들로 정의되어 기억들이 그 각각의 장소에 자리를 잡는다. 거울은 프레임 바깥의 타자를 내부화하는데 활용되어 그녀의 삶에서의 만남들과 경험들을 시각화한다. 바르다의 자화상이란 그러므로 거울에 반사되어 끊임없이 변형을 거듭하는 외면일기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녀의 작업실 '시네 타마리스'에거 동료들과 함께하는 80회 생일의 축하연이다. 바로 전에 그녀는 필름으로 만들어진 방의 내부에 앉아 영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했었다. 어디선가 새어 들어오는 빛 속에서, 어떤 흑백과 칼라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 그것이 그녀에게 영화의 정의이다. 바르다는 영화가 자기의 집이었고 늘, 그 속에서 살아왔다 말한다. 이제 그 모든 것은 작품과 더불어 과거의 이미지로 남았다. 유목적인 생을 살았던 그녀 또한 뒷걸음질 치며 집의 내부로 들어간다. 그럼에도 기억이 존속하는 한 느낌은 살아 남아있을 것이라 말한다. 고다르의 독존과 달리 바르다의 자화상은 타인과의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글/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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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은 카르멘의 전성시대였다. 프란체스코 로지, 카를로스 사우라, 피터 브룩이 마치 경연이라도 하듯이 카르멘을 영화로 만들었던 것은 당시 비제의 오페라가 저작권 소멸상태가 됐기 때문이었다. 고다르 또한 작업에 착수했다. 다른 작가들과 달리 그는 비제의 오페라를 느슨하게 차용만 했을 뿐 그 유명한 음악을 쓸 생각이 없었다. 오토 프레민저의 <카르멘 존스>(1954)처럼 이야기를 현대로 옮겨왔고, 처음엔 이자벨 아자니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었다. 아자니의 바쁜 일정 탓에 당시 신인이었던 마루츠카 데트메르스가 최종적으로 카르멘 역에 캐스팅되었다(그녀는 국내에는 <한나의 전쟁>(1989)으로 잘 알려진 배우다). 고다르의 계획은 급진적이었다. 그는 음악을 따라가는 이야기, 혹은 음악이 이야기의 전체가 되는 영화를 구상했다. 카르멘은 음악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음악이 카르멘의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비제의 음악을 대신한 것은 엉뚱하게도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이다. 고다르는 비제의 음악이 바다와 밀접하게 연결된 지중해의 음악이라 여겼고, 자신에게는 그 바다가 브르타뉴의 해변에서 들었던 베토벤의 현악 4중주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결합은 작위적인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지만, 사실 1980년대 고다르의 성과중의 하나는 독창적인 사운드 몽타주를 고안하는 것이었다. 다이얼로그, 모놀로그, 음악, 효과음, 소음 등의 여러 가지 소리들을 과격하게 콜라주하는 것인데, 이는 나중에 <영화사>(1998)라는 작품에서 사운드의 거대한 리믹스 실험으로 만개한다.


이 영화는 사실상 내러티브나 주제와는 하등의 상관없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사건과 두 공간이 밧줄의 매듭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 하나가 이야기의 층위를 그나마 가늠할 수 있는 카르멘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음악가들이 베토벤 현악 4중주곡을 연주하는 장면들인데, 사실 연주장소가 어디인지 조차 알 수 없다. 게다가 베토벤의 음악은 거의 맥락 없이 몇 번이나 흘러나오다 끊어지는 것을 반복한다. 소리의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은 이미지와 불협화음을 만들고 오페라의 음악과 달리 이러한 음악은 극적인 상황과 필연적인 연결점이 없다. 인물과 그들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은행 강도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음악의 진행과 강탈 시퀀스 간에는 기묘한 결합의 원리가 숨어있다(고다르는 배우의 연기지도를 하면서 언제나 ‘음악을 들으면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것이다’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 영화에는 다양한 소리들, 특히 타이프를 치는 소리, 인간의 몸이 사물에 부딪혀 발생하는 소리, 다양한 소음들이 음악 이상의 빈도로 영화에 출몰한다. ‘이것은 정당한 이미지가 아니다,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라 말하는 고다르에게 소리의 레벨에도 서열은 없고 중요한 취급을 받아야만 하는 중심 소리란 없다. 모든 소리는 이미지와 더불어 동등한 권리로 작품 내부에 삽입되어야만 한다. 게다가 이러한 소리들은 불협화음이나 변박자로 하모니와 리듬이 깨져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이미지와 소리의 배치의 중심은 비어 있다. 이는 영화의 제목이 상기시키듯이 ‘이름 이전에 무엇이 존재 하는가’라는 고다르의 질문과도 연결된다. 이름이 주어지기 전의 사물의 모습, 혹은 카르멘이라는 여성의 위대한 신화가 주어지기 전에 여자와 남자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장 지로두의 ‘일렉트라’에서 빌려온 말인데, 그건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워뮤직>(2004)에서 고다르가 했던 말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빛으로 향해 그 빛으로 우리의 어둠을 비추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음악이다.

글/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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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의의(意義)는 그것에 내재된 의미들의 무덤 위에 피어난다. 의의를 얻을 때라야 비로소 작품은 잊혀 지지 않고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남아 보존 된다. 즉 디테일들이 무시되고 몇 개의 특징만이 간명하게 정리될 때 우리는 그 정리된 문장을 기억하고 인용한다.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Pierrot le fou>(1965)의 모든 장면들은 이 의의에 맞서는 의미들의 투쟁 같다. 영화는 미이라로써 살아남길 거부한다. 장면들 간에 도무지 개연성이 없다. 한 가지 맥락으로 정리될 수도 없다. 내레이션을 통해 작품 스스로 고백하듯 '사랑, 액션, 범죄 영화'의 범주에 놓인 '복잡한 영화'이지만 그렇기에 결국 어떤 영화도 아니며 동시에, 어떤 영화로도 불릴 수 있다.


의의를 거부한 대신 영화가 더욱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이를테면 “영화언어의 새로운 알파벳”같은 것. 영화는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에 대한 책을 낭독하며 시작한다. 화가는 말년에 더 이상 구체적인 사물을 그리지 않고 공기와 빛, 시간과 색, 형태와 색조를 포착해 '고요한 교향곡의 보이지 않는 중심'을 그려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구체적인 사물’은 이미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고정관념으로써 굳어진 형태의 사물이다. 이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는 것. 구상에서 벗어나 추상의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명확히 감각할 수 없으나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본질을 더 정확히 묘사해내려는 시도. 이 영화는 이와 같은 실재의 도상화, 더 나아가 기호화를 형식적으로 시도하는 동시에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내러티브상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페르디낭(장 폴 벨몽도)에게 환멸감을 줘서 결국 그가 마리안느(안나 카리나)와 달아나게 만드는 공간인 파리는 사람들이 상품들과 광고문구로 대화하는 단색의 세계, 실체는 없고 자본의 기호들만 부유하는 세계이다.


사실 영화의 표면적인 줄거리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청춘 범죄영화다. 알제리에서 온 정체불명 무리의 추적과 비밀스런 여인, 의문의 거금이 관련 된 도피 그리고 배신. 허나 이는 플롯에 불과할 뿐 스크린에서 재현되는 작품 자체는 전혀 딴판이다. 영화는 때로 뮤지컬이며, 가장 느와르적인 사건들은 모두 환한 대낮에 벌어진다. 무엇보다도 페르디낭과 마리안느 사이의 긴장감은 범죄물의 그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말하는 남자’와 ‘느낌으로 말하는 여자’간의 소통의 결핍에서 온다. 이를테면 마리안느가 “다 지겨워. 난 살고 싶어”라고 외칠 때, 페르디낭은 “누군가의 삶이 아닌 그냥 삶 전체”가 담긴 소설쓰기를 시도한다. 즉 여자에게 삶은 ‘살다’라는 동사이고 남자에게 ‘삶’이란 명사다. 살아있음을 느끼면 그만인 여자의 삶은 늘 현재 변화 중이어야 하고, 노트에 적혀야만 하는 남자의 삶은 언어로써 과거에 고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누벨바그의 이론가라 불리는 고다르는 1970년의 한 인터뷰에서 “과학자와 에세이스트는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론가와 시인 역시 등치가 성립될 수 있지 않을까. <미치광이 피에로>는 이론가가 쓴 시다. 작품의 형식적 실험은 내용 및 아름다움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 증거로 이 영화의 배우들은 마네킹이 아니며 주어진 공간과 역할 속에서 제 몫의 존재감을 쏟아낸다. 현실적 상황의 영향 하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 영화언어의 고정된 의미로부터 자꾸 탈주한다는 점에서, 시청각적으로 아름답다는 점에서 시적이다. 의의를 부여받고 설명되기를 거부한 시는, 그 대신 질문들로 남는다. 답 없는 질문은 늘 현재진행형이므로 영화는 과거에 편입되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다. 한층 채도 높은 지중해의 빛 아래, 빨강, 파랑, 노랑, 하양 기본색들이 선명히 생생하다. (백희원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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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클럽] 개봉 50주년 기념 장 뤽 고다르 <네 멋대로 해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영화를 선정해 상영하고, 상영 후 영화에 대한 강좌와 함께 관객들과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대화를 나누는 ‘시네클럽’ 행사를 하고 있다. 지난 6월 20일에는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발표된 지 50주년을 기념하여 누벨바그의 혁명을 일으킨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특별 상영하고 고다르의 작품 세계와 그가 일으킨 누벨바그 혁명을 추억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상영 후에는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의 강연도 이어졌다. 극장이 거의 만석일 정도로 큰 호응을 얻은 시네클럽 행사는 고다르의 저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반증했다. 그 특별했던 시간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올해는 <네 멋대로 해라>의 개봉 50주년이 되는 해다. 이 영화를 80년대에 극장이 아닌 문화원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데, 90년대에 들어서는 비디오를 통해 접했다. 90년대 비디오떼끄에서 고다르영화들 불법 복제본을 형편없는 자막번역으로 보면서 무슨 말인지 궁금했는데, 그때 막연하게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여전히 고다르의 영화는 미스테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다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영화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하는 게 어떤 의미있는 일인가를 덜 생각했을 것 같다. 그 덕분에 영화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 <네 멋대로 해라>를 상영한건 개봉 50주년 기념, 그리고 그가 만든 '프랑스 영화의 역사 100년'이란 작품에서 말하듯이 이 영화의 의미를 기념하는, 다시 말해 잊고 지낸 걸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기념하는 게 <네 멋대로 해라>의 시작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계급보다 세대적 문제를 더 중요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영화의 개봉 시기에 누벨바그와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다르란 작가가 등장한 세대적 문제라는 것이다. 영화적 문화유산을 소비하는 것으로 그는 관객, 시네필이 되었다. 1950년부터 1960년까지 고다르는 영화 만들 궁리를 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장편을 만들 권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아 절치부심했었다. <네 멋대로 해라>는 1959년 8월에 촬영을 시작해서 4주 만에 당시 영화제작비 절반 밖에 안 되는 돈으로 제작했다. 영화를 보면 초두부분에 미셀이 '나는 해야만 해'라며 조급하게 무언가를 향해 가는 것, 정확하게 모르는 성급, 조급의 느낌이 고다르 자신의 절박함과 같지 않나싶다. 1959년이란 시점을 보면, 당시 까이에 뒤 시네마 비평가들 모두가 영화를 만들고 있었고, 샤브롤은 3번째, 트뤼포는 1959년에 <400번의 구타>로 칸에서 수상하며 난리가 났었다. 고다르의 주변 친구들이 영화를 만들고 그 이후 고다르가 가장 늦게 영화작업에 참여했는데, 고다르는 20대 중반에 들어서 자신이 작가로 데뷔하는 나이를 손꼽아 계산했다고 한다. 웰즈가 26세 이전에 첫 장편을 찍고 에이젠슈타인도 그러했는데, 26세 이전에 찍어야만 한다는 고다르의 강박관념이 상당했다고 한다. 결국 고다르는 다른 누벨바그리언들과 달리 제작사를 끼고 영화를 찍고, 시나리오도 당시 이미 주가를 올리던 트뤼포가 폐기처분한 걸(웃음) 가져다가 만들기로 결심했다. 고다르가 영화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도합 10년으로, 그는 글을 쓰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을 동등하게 생각했다.

고다르가 관객, 비평가의 입장에서 영화를 시작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1950년대 말의 조건으로 보자면 이탈리아는 네오리얼리즘시기를 겪고 난 후였고 이후 프랑스의 뒤늦은 격동은 이전 세대가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제도와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후 세대가 새롭게 영화를 만들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시기였다. 영화를 본다는 것, 그리고 비평을 한다는 것은 누벨바그리언들이 전 세대를 공격하는 수단이었다. 고다르는 나중에 <영화사>라는 작품에서 ‘애매한 물결’이라는 표현으로 누벨바그리언들이야기를 담아냈다. 시작이라 생각했는데 끝물이었던, 애매한 새로움, 뭔가 혁명을 꿈꿀 수 없는, 물려받은 관객세대에서 시작해서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려고 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고다르는 자신에게 부여받지 못한 권리를 획득하려 작업을 했던 사람이다. 전 세대의 영화들을 탈취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는 엄청난 영화들을 봤고 그 영화들 안에서 미래에 대한 비평작업을 했었다. 영화를 탈환하기 위한 수순이었다. 고다르라는 작가가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들었을 때 그가 느낀 세대적 고민은 이전 세대들이 가진 영화를 자기 손으로 획득해나가는 것, 레지스탕스의 필요성이었다. 그가 당시 미국범죄영화, 특히 강탈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획득하는 게 없다고 느낄 때 뭔가를 도둑질하고 싶은 생각. 에티카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제대로 된 자리에 갖다 놓기 위해 훔치는 것. 이것은 극장에 갇혀서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10여년을 살아온 시네필 사이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었고, 비단 그것만이 아니라 박물관, 시네마테크 같은 곳에서 영화들을 발견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영화 속 미셀이라는 인물은 끊임없이 도둑질을 자행한다. 자동차, 특히 미제자동차를 훔치고 미국산 여배우를 등장시키는 것, 중간 중간에 미국산 소설가들의 생각들을 인용하는 것은 고다르와 아메리카니즘의 문제였다. 그는 이것들을 철저하게 훔쳤다는 것을 명백하게 표출하고 등장시켰다.

뒤늦다는 조건, 행위 안에서 고다르의 영화 만들기는 당시 불가능한 조건에서 영화를 꿈꾸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모노그램 픽쳐스 바친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걸 눈여겨 보아야 한다. 고다르는 예술영화를 만든게 아니라 새로운 B급 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는 도제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 고다르는 ‘나의 영화학교는 극장’이라는 말을 즐겨했다. 영화를 배우는 것을 도제시스템을 거치지 않고도, 글을 쓰는 것만으로 이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고다르는 자신이 이전 세대의 영화를 탈환하기 위한 시기를 기다리며 영화의 본질이 제대로 구현될 수 있는 장소로 시네마테크와 까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실을 생각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새것을 창조한다는 것만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재활용을 잘 하는가의 기술이라 생각된다. 훔쳐오는 건 기존 존재의 물건을 가져오는, 달리 말하자면 재활용의 기술인 것이다. 소비를 생산적으로 미덕화 하는 것. 영화를 많이 봤던 고다르는 과거의 영화들이 폐기처분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꼴라주, 브리꼴라주, 남들이 썼다가 버리게 되는 것들을 모아서 재활용해서 만드는 것이다. 고다르는 그런 식의 영화들, 제대로 카메라에 담겨지지 않았던 현실들,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거리, 공간들을 담고 재활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일종의 영화넝마주의 같은 것이다(웃음).


고다르는 스스로 이 영화에 출현한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거리를 걷는 밀고자가 바로 고다르다. 밀고자는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고 그대로 고발하는 사람이다. 고다르가 제기하는 건 모럴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었다. 밀고자는 왜 밀고를 하고 연인들은 왜 배반을 하는가, 파트리샤가 계속 미셀에게 제기하는 건 이런 물음들이다. 왜, 무슨 의미인가라는 것. 하지만 고다르의 대답은 단순하다. 동어반복이지만 밀고자는 밀고를 한다. 연인들은 사랑을 나눈다. 고다르가 밀고자인 동시에 감독인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평가되기 이전에 눈으로 본걸 그대로 소상하게 전달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되어 그는 당시 기법들, 테크닉 등 모든 것들을 위반하면서 새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 <네 멋대로 해라>를 지금 기념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 이 영화는 ‘영화’라는 것이 존재한 상황들에 대한 면밀한 인식과 그 자체가 제대로 ‘영화’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을 탈환하는 기획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저항적 행위를 했었고 그런 시도를 담아내는 것이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 새로움을 꿈꾸려는 세대들은 불가능의 조건 안에서 타인의 손에 소유된 자신들의 것이라 믿는 영화를 탈환했다. 영화를 탈환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들을 담아낼 권리를 획득하는 것과 같다. 시각에서의 정당함을 찾는 것, 윤리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 판단 이전에 존재하는 사물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찍으면서 하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이 뤼미에르, 멜리에스로부터 출발되는 것이었다. 수많은 테크닉과 재활용을 재단되고 판단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 것, 그게 진정한 시작점이 아닐까. 영화를 가져오는 것, 내 것으로 가져온다는 말의 진정성이라는 건 영화를 삶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네 멋대로 해라>는 여전히 가치 있고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정리: 강민영)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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