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은 21세기 들어 재평가의 목소리가 가장 높은 작가 중 한명일 것이다. 좋은 의미로서의 재평가는 아니다. 이를테면 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큐브릭은 작가가 아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적이 없고, 대부분의 영화가 소설 각색물이며, 또한 어떤 이야기가 가장 센세이셔널할 것인가를 고민했기 때문에 오히려 스튜디오 시스템에 가장 적합한 감독이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작가'라는 이름 자체에 거품이 지나치게 낀 시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큐브릭은 오히려 테크놀로지 미학 자체를 이야기에 융합시키거나, 둘의 불균질함을 영화적 해법으로 이용하는 감독이었다. 그리고 그 큐브릭 특유의 영화적 특징이 가장 먼저 막을 올린 영화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다.

피터 조지의 소설 <적색 경보>를 느슨하게 영화화한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는 핵에 대한 공포로 지구가 구역질을 해대던 시대의 우화다. 미국의 한 공군장군이 수소폭탄을 싣고 운항중인 모든 폭격기에 소비에트를 공습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폭격기들이 소비에트를 향해 날아가는 동안 패닉 상태가 된 백악관과 국방부는 즉각 철수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에는 문제가 있게 마련이고, 한대의 폭격기가 통신두절로 인해 철수 명령을 듣지 못한 채 모스크바를 향해 날아간다. 미국 대통령은 소비에트 서기장과 통화를 하지만 소비에트의 무인자동시스템은 이미 자동으로 미국을 향해 핵폭탄을 날린 후다.


만약 누군가가 커트 보네커트의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그건 아마도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가장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큐브릭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그리고 싶었던 것이 "인간 특유의 부조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부조리는 인간을 멸망시키고 있으며,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재미있게도 큐브릭이 그려낸 부조리한 지구 멸망의 희극은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지금도 여전히 지속중인데, 그건 위험천만한 1960년대의 시대정신에 속해있으면서도 세월의 흐름에 빛이 바래지 않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운명과 똑 닮아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오로지 비뚤어진 유머감각 하나만으로 고전의 지위에 오른 건 당연히 아니다. 테크놀로지 미학 자체를 이야기에 융합시키는 큐브릭 특유의 화법은 여기서도 이르게 발현되고 있다. 특히 병사의 시선으로 핸드헬드 촬영한 전투장면이나, 당대의 새로운 영상문체를 창조하던 초창기 TV의 미학을 적극적으로 영화 속에 끌어들인 부분은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젊고 의기양양하고 아이디어로 넘치던 전성기 큐브릭의 우화를 좀 더 즐기고 싶다면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를 이어서 감상하시길 권한다.

글|김도훈 씨네21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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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가 내리던 저녁, <평양성>의 이준익 감독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지난해에 <몬티 파이튼의 성배>를 추천한 이준익 감독은 올해는 평소에도 자신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곤 했던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선택했다. 이준익 감독은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영화에 담긴 의미가 여전히 새롭다며, 전쟁과 이념 대결구도를 풍자한 큐브릭의 작가적 행보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시네토크 현장을 소개한다.



이준익(영화감독): 이 작품은 호불호가 갈리는 극단적인 작품이다. 내게는 중요한 영화라 이 작품을 추천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선택했는데 많이 와주신 것 같아 다행이다.

허남웅(영화칼럼니스트) : 작년<평양성> 연출 후 상업영화계 은퇴를 선언 하셨다. 그 이후로 힘들게 보내실 줄 알았는데, 좋게 보내신다고 들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준익 : 조심성이 없는 사람이라 평생의 반을 실수하며 산다. 감정적인 인간이라 욱하는 바람에 말실수를 했다. 인간은 실수로 비극을 맞이하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웃음).

허남웅 : <황산벌>을 연출할 때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가 모범이 되는 영화였다고 말했었다. 추천한 이유를 듣고 싶다.

이준익 : 이 영화는 미국 냉전 이데올로기를 비꼬는 블랙 코미디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경쟁 속에서 과대망상이 만들어졌고, 과학의 힘을 빌어서 핵무기를 생산해 놓지 않았나.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심화되었을 때 큐브릭은 이 영화를 만들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은 핵무기의 냉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전쟁이나 이념 대결 구도 자체가 일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이 영화가 나에겐 매우 중요하다. 1964년에 이런 생각을 한 큐브릭은 50년이 지난 이 자리에서도 공론화 할 수 있는 철학자다. 이 작품은 반영웅주의 영화며 미국의 군사중심주의마저도 풍자한 영화다. 간단한 미학이지만 상징적 비유가 있는 블랙 코미디라서 이 작품을 추천했다.

허남웅 : 한국에서 이런 영화를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준익 : 과거 한국의 목표는 학생들이 권력에 의해 순종적 인간이 되어 고도성장을 이룩하는 거였다. 그런데 현재는 그 사회 시스템이 건강한지를 의심하는 시대다. 내가 20대였을 때에는 정보가 차단되어 의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미국은 60년대에 이 시기를 건너갔다. 이 작품을 통해서 이 사회가 다른 나라들처럼 집단 소통이 잘 이뤄졌는지를 가늠해봤으면 좋겠다. 우리가 시네마테크에서 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30년 전 재밌게 봤던 영화 속에 담긴 의미가 여전히 새롭기 때문이다. 지금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이 시간도 내겐 매우 행복하다.

허남웅 : 이 영화를 접했을 때가 언제인가?

이준익 : 남들처럼 처음에는 할리우드 상업 영화를 열심히 봤다. 데뷔작도 <키드 캅>인데, 당시 <나홀로 집에>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흉내 냈다. 첫 영화가 망한 후, 10년 동안 감독 대신 외화 수입 및 영화 제작 일을 했다. 나중에야 내가 알고 있는 기준과 다른 작품들을 시네필 친구들에게 추천 받았다. 30대 중반 넘어 본 영화들은 내가 모르던 세상이었다. 100년을 넘어 장르를 지탱해 온 영화사에 남아있는 영화들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런 영화들을 관람한 뒤 <황산벌>을 만들었다.

허남웅 : <황산벌> 같은 사극을 제작한 것은 이런 식의 코미디를 현대극으로 만들기엔 사회가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들었다. 지금 현대극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할 의향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준익 : 물론이다. 하지만 아직 대한민국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경직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젊은 세대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박이 적지만 중년층 이상은 바뀌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일상의 많은 부분을 대결 구도가 지배하고 있다.



관객1 :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봤는데, 가진 자들의 횡포를 빗대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세상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나 비꼬는 방식을 많이 사용했는데, 감독들이 이렇게 세상을 비꼬는 방식을 선택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이준익 : 이상하게도 영화를 찍으면 신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세상을 버즈아이로 보려한다. 제일 윗선에 있는 우두머리들의 뒤통수를 위에서는 볼 수 있다. 관객 전체가 이러한 시각을 가져야한다. 감독은 이를 풀어서 관객들도 똑같이 권력자들의 뒤를 보라고 이야기한다. 채플린이 말했던 것과 반대로,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근엄해 보이고 과도한 의미가 부풀려지지만, 카메라를 가까이 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걸 통렬하게 찔러서 보여주고, 관객들을 대리만족 시켜주는 역할을 이 영화가 한다. 그래서 영화는 돈의 가치만이 아닌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관객2 : 배우들이 과장된 연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감독님 영화에서는 과장되어있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자연스러운 것 같다. 어떻게 과장을 절제 하는지 궁금하다.

이준익 : 얼마 전 중국 아카데미에 초청을 받아 특강을 했는데, 중국 배우들은 연기가 너무 과장되었다고 일침을 놓았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중 돌아가시기 전 작품들, 예를 들어 <아이즈 와이드 셧>을 보면 과장이 하나도 없다. <풀 메탈 자켓>도 다큐멘터리적으로 찍은 최초의 베트남전 영화로 생각된다. 1964년도의 연기법이 바로 이건데, 연기 톤이 저 정도면 과장이 아닌 거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과장이지만, 그때 기준으로 보면 과장이 아니라 생각한다.

허남웅 : 이 작품이 칼라로 찍으려다가 제작비 때문에 흑백으로 진행했다고 들었다. 선악의 이분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알 맞는 형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전 인터뷰 때 세상 자체를 흑백으로 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이준익 : 칼라는 같은 색을 오래 보면 식상해서 그것보다 다른 고급의 색을 찾게 된다. 그게 눈의 사치를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이다. 차라리 흑백이라면 비교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질 것 같다. 흑백 논리가 아니라, 담백하고 조촐한 일상이 행복 지수를 키우는데 유리할 것 같다. 지혜로울 수 있는 방법은 심플하고 가식 없이 사는 거다.

허남웅 : 다음에는 그런 가치관을 갖고 변화한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지?

이준익 :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문을 열어야하는데 너무 사회적, 역사적, 공동체로서의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영화만 만든 것 같다. 영화 미학을 포기하는 서투름이 있었는데, 이젠 영화 미학도 추구하고 싶다.

 
관객3 : 자본주의 사회의 과열 경쟁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어떤 예술이든 제작자가 대중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것 같다. 감독은 관객들을 계몽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 추측하는데, 요즘 사람들한텐 어떤 계몽을 하고 싶은지.

이준익 : 나는 계몽이란 단어를 싫어하기 때문에 계몽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영화를 하다보면 우월한 심리가 스며든다. 감독이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대로 스태프들이 실행해주니까. 여러 편을 찍으면서 메시지 전달이 부정확한 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모하다. 그래서 더 올바른 가치에 대한 다음 행보는 무엇인가? 찾아야 하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관객4 : 비행기 안에서 폭탄이 작동 안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작동되어 멸망한다. 관객들이 해피엔딩을 원할 텐데, 죽여서 참담함을 안겨주는 감독의 심리가 궁금하다.

이준익 : 당시 대부분의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는 질문하신 분이 원하는 그런 결말대로 찍었다. 그래서 큐브릭은 반대로 촬영했다. 좋은 결말을 다 알고 있고 그걸 충족시키면, 그것도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지금도 할리우드는 폭발을 멈추는 해피엔딩으로 만들고 있다. 30살 전까지 할리우드의 권선징악에 도취되어서 살았는데, 30대 중반 넘어가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입된 그 사고방식을 따를까봐 두렵다고 느꼈다. 반대가치에 대한 발견을 추구하는 것이 작가적 행보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 작가가 못되었지만, 큐브릭은 초지일관 작가적 관점에서 끝까지 밀고 간 거다. 나는 큐브릭이 인류에 진정 이바지한다고 본다.

허남웅
: 앞으로의 방향은 어떻게 되는지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이준익 : 계획의 희생자였다(웃음). 너무 계획하고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젠 인생을 계획 없이 살려고 한다.

정리: 윤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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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이준익 감독이 추천한 테리 길리엄과 테리 존스의 <몬티 파이튼의 성배>

지난 10일 저녁, 중후반에 들어선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영화의 즐거움’이란 모토에 딱 맞는 영화 <몬티 파이튼의 성배>의 상영이 있었다. 끊임 없이 웃음을 자아낸 극장 안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다그닥 다그닥’ 코코넛 말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이 영화를 추천한 이준익 감독과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역사에 대한 풍자와 해학을 논한 시네토크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전한다.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몬티 파이튼의 성배>를 꽤 오래 전에 비디오로 자막 없이 처음 접했다고 들었다. 오늘 스크린에서 자막과 함께 본 소감이 어떤가?
이준익(영화감독): 너무 재밌게 봤다. 영어를 못하면서도 자막 없이 봤는데, 그때 내가 추측했던 내용 그대로여서 내 상상력에 놀랐다.

허남웅: 친구들 영화제에 '몬티 파이튼' 시리즈를 세 개 다 추천할 정도로 굉장한 팬이신 것 같다. 시리즈를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는 있는가?
이준익: 감독이 되기 전, 10여 년 동안 영화 수입사에서 일을 하며, 외국 필름 마켓에서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었다. 마침, '몬티 파이튼' 시리즈에 관한 얘기를 접해 듣고, <몬티 파이튼의 성배>, <몬티 파이튼: 브라이언의 삶>, <몬티 파이튼: 삶의 의미> 세편을 모두 다 찾아보게 되었다. 이들의 세계관에 반했고 나름의 충격을 받았다. 내 영화 <황산벌>에 영감을 준 작품들이다.

허남웅:
BBC의 코미디 프로로 시작한 '몬티 파이튼'이란 그룹의 당시 인기는 비틀즈의 인기와 비교될 정도로 대단 했다고 한다. 이 그룹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이준익: 이 영화에서 보았듯 이들은 권력에 대한 조롱과 제도권에게 비판의 돌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회에 또 다른 대안적인 시각을 제공하는데, 머리 아픈 철학책으로서 썰을 푸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미학적 방식으로 웃음을 이용한 조롱과 풍자를 한다. 영화라는 도구를 통해 세상을 조롱하는 대단한 철학자들이다. 이들은 <몬티 파이튼: 브라이언의 삶>으로 기독교를 비판하고 <몬티 파이튼: 삶의 의미>로 자본주의의 모순, 인간의 욕망을 통렬히 비판한다. 이들이 구현한 영화의 깊이는 보는 사람의 눈높이에 따라 영화의 의미를 달리하게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다.

허남웅: <몬티 파이튼의 성배>는 아더 왕 이야기라는 역사의 한 부분을 다루는데, 힘 있는 자들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기 보다는 그들만의 해석을 더했다. <황산벌>과 <평양성>도 그런 시도였나?
이준익: '몬티 파이튼' 시리즈를 처음 접했을 때 서양 문명의 구조적 해석력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천 년 전 이야기인 아더 왕 이야기를 이용해서 자기 나라, 영국의 역사는 물론 서양 역사에 대한 해학 있는 풍자를 했다. 정치적 이념과 문화적 토양, 과거 역사를 조롱할 수 있는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력이 너무 부러웠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풍자와 비판이 구현 가능한가를 가름하기위해 <황산벌>과 <평양성>을 만든 것이다. 자기네 문명과 역사를 해체해 낼 수 있다는 문화와 예술의 힘을 부러워하면서도 경탄한다. 영국문화에 해박하지 못해서 정밀한 해석은 못해내지만 '영화가 역사 속 이야기를 이용해 비판해내는 상황들이 현실에도 대입될 수 있다'는 영화의 현재성 또한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허남웅: <몬티 파이튼의 성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준익: 코코넛 두들기는 소리로 말을 타는 장면과 성 밖으로 동물을 던지는 장면 등이다. 특히 동물 던지는 장면은 이미지적 쇼크였다. 이 장면을 <평양성>에서 써 보았다. 이 영화를 10년 후에 떠올렸을 때, 아마도 생각 날 것은 코코넛 소리로 말을 타는 기사들이다. 나도 <황산벌>에서 그런 식으로 말을 타게 하고 싶었다. 영화 <도그빌>이 선만 그어 놓고 벽이 있는 듯 극을 진행해 나가듯, 나 또한 천막과 나무판으로 성을 대신하고 종이 갑옷으로 실제 쇠 갑옷을 대신하도록 설정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중 관객들이 아직은 그런 비약과 상징을 받아드리기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 하에 돈이 많이 든 사극들을 만들었다.

허남웅:
이 영화는 짜임새 있게 잘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영화의 구조적인 것보다는 어떠한 것을 이야기하느냐를 더 중점적으로 한 것 같다.
이준익: 그렇다. ‘무엇’에 관해 얘기하느냐가 ‘어떻게’ 보다 중요한 작품이다.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개인의 통로를 많이 만들어서 끊임없는 재생성으로 대안적인 방향을 제시한 작품들이 많다. 대중이 인정하는 가치들에 질문을 던지는 의심체계를 만들어내는 B급 영화집단들이 많고, <몬티 파이튼의 성배>도 그런 작업으로 이뤄진 영화 중 하나다. '흑기사는 죽지 않는다'라는 관념을 손발이 잘려나가도 죽지 않는 흑기사들을 통해 조롱한다. 이 영화 속 모든 캐릭터는 조롱의 대상이다. 관념체계에 대한 해체와 재해석이다. 구조적 문제 ‘How' 보다는 'What' 이 더 인정을 받는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우선시 된다. 예술영화나 대안영화가 나오기 힘든 환경이다.

관객1: 오늘 본 <몬티 파이튼의 성배>와 <황산벌>, <평양성>에서 비슷한 점들을 많이 발견했다. 이 영화에서 트로이 목마가 등장하는데 혹시 <평양성>에서 나오는 새 머리가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것인가?
이준익: 영화 속 트로이 목마는 말이 아니라 토끼다. 그리스 문명의 패러디랄까. <평양성>의 새 머리는 이것을 딴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상징인 세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를 나타내는 것이다. 트로이 목마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영화는 이를 풍자하는 듯하다. 나는 우리의 정체성이 드러난 문명을 비판하고 싶다. 우리의 신화를 읽지 않고 그리스 신화를 많이들 읽는데, 그 점이 아쉽다. 사극을 많이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인데, 이게 꽤 힘들다.

관객2: 영화는 '즐길 거리'이기도 하지만 문화와 예술의 한 장르이기도 하며 사회를 보여주는 창이기도 하다. 최근에 이슈화 된 최고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나?
이준익: 민감한 이슈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간단히 얘기를 해보겠다. 단순히 말해 상업영화는 돈이 없이는 만들어 질 수 없다. 내가 1986년에 영화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영화계는 자급자족이 이뤄지는 시대였다. 관객이 극장에 와서 쓴 돈으로 새 영화가 제작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외부 자본이 유입되며, 자본주의 정신을 가진 기업들이 영화계의 돈의 경로를 바꾸면서 자급자족의 시대는 끝이 났다. 이제 영화가 기업들의 투자를 통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기업들은 예측되지 않는 시장에는 과감히 투자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크기와 언어, 문화상 시장이 확장되는 데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고 생산단계에서의 문제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천만 관객 시대가 도래 했더라도 영화 스태프들의 파이 분배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다. 제작사의 횡포 보다는 한국영화계의 구조적인 속성과 자본주의적 시장의 지배가 한 몫 했다고 본다. 자국영화 점유율이 세계 6위로 높은 편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영화 인력과 바뀌지 않는 파이 분배는 큰 문제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와 함께, 영화를 평론과 감상보다는 숫자와 점수로만 평가 내리려는 우리나라의 풍토가 영화판을 더 각박하게 만든 것 같다. 나도 피부로 느낀다. 해가 거듭 될수록 연출부와 제작부에 지원하려는 젊은 영화 인력들이 줄어들고 있다. 이상을 좇아 온 영화판의 현실을 못 견뎌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들이 우리나라 영화계를 괴롭히고 있을 때, 최고은 작가 사건이 일종의 경종을 울린 것 같다.


관객3: 영화의 즐거움이라는 주제에 걸 맞는 좋은 영화였다. 이 영화의 즐거움은 마녀사냥이라든가 지배층의 모순을 풍자하고 비판하면서 나오는 코미디로부터 온다. 어떤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적 현상을 조롱할 때 가장 희열을 느끼시는지?
이준익: 많다. 한 20여개 정도는 아예 목록을 적어 놓았다. 할 소재는 너무 많지만 이해관계가 얽힌 근현대사는 다루기 힘들어서 오래된 황산벌이나 평양성 속의 역사적 배경을 통해 사회에 돌을 던지려고 노력했다. 내 시대 사람들은 자기검열이 아직 몸에 배어있다. 아무리 근현대사의 꼬임을 비판하려해도 한계가 있다. 젊고 힘이 넘치는 내 후배들이 근현대사 속의 사건들을 알맞게 비판하고 풍자하며 부딪혀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정리 : 배준영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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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몬티 파이튼의 성배>가 공개되었을 때, ‘몬티 파이튼’은 TV 시리즈를 통해 이미 하나의 컬트 현상이 되었다. 골계미마저 느껴지는 풍자와 비틀린 유머로 점철된 저예산 소모성 코미디인 ‘몬티 파이튼’ 시리즈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 코미디 역사의 전위로 불리고 있다. <몬티 파이튼의 성배>는 그 중에서도 이 우상파괴적인 코미디 시리즈의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특히 여기에는 시리즈의 골수팬들이 열광하는 전설적인 장면들이 수두룩하게 들어가 있다.

<몬티 파이튼의 성배>는 TV 시리즈에서부터 이어진 코믹한 패러디 각본을 모델로 삼고 있다. 왕 중의 왕이 되기 위해 성배를 찾으려는 아더 왕의 이야기를 패러디 한 스토리는 특별한 중심 모티프 없이 제멋대로 전개된다. 서기 932년 잉글랜드, 아서 왕(그레이엄 채프먼)은 카멜롯으로 성배를 찾기 위해 용맹한 기사들을 물색 중이다. 속이 빈 코코넛을 딱딱거리면서 말 소리를 내는 황당한 아서의 여정은 우여곡절 끝에 베드비어, 갈라하드, 란슬롯, 로빈 등의 기사와 한 패를 이루게 된다. 정상인이라고 볼 수 없는 얼뜨기 성배 기사단의 행로는 아나키즘에 경도된 노동자들과 마녀 사냥에 열중하는 농부들을 경유해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괴물 토끼에게로 이어진다.

그래엄 채프먼, 존 클리시, 에릭 아이들 등 ‘몬티 파이튼’ 패밀리가 각본, 주연을 맡고 테리 길리엄, 테리 존스가 힘을 합쳐 연출한 이 영화에서는 4차원 유머와 화장실 코미디, 부실한 신체 개그가 혼연일체를 이룬다. ‘자막 담당자를 잘랐다’는 농지거리로 시작하는 도입부가 마음의 채비를 위한 맛보기처럼 깔리더니 가공스러운 컬트 코미디의 향연이 스크린을 채우기 시작한다. 존 클리시는 예의 바보 같은 걸음걸이로 비웃음을 사고, 좀비와 같은 중세의 농부들, 허세의 절정을 보여주는 얼빵한 흑기사, 공포의 만렙토끼, 괴상한 질문을 쏟아내는 성문지기 등 안드로메다에서 온 것 같은 캐릭터들이 숨 가쁜 릴레이를 벌인다. 몬티 파이튼 시리즈를 상징하는 두 개의 노래 ‘원탁의 기사들'과 '로빈 경의 발라드'가 삽입되어 있으며, 테리 길리엄이 삽입한 애니메이션 장면들도 한 몫을 한다.


개연성을 내팽개친 탈 중심화된 내러티브는 중구난방으로 널을 뛰고, 밑도 끝도 없이 출몰하는 사건들은 TV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활력과 에너지를 영화에 돌려주면서 창조적인 코미디를 펼칠 수 있는 멍석을 깔아줬다. 시종일관 여기에는 통제되지 않는 혼종의 에너지가 가득하다. 불손한 조롱과 잔혹 유머, 절로 어깨가 들썩거리는 춤과 노래, 막장 코미디, 조야한 특수효과, 애니메이션의 두서없는 믹스로 얼을 빼 놓는 것이다. 화급한 전투에서 돌 대신 소나 돼지, 오리, 염소를 던지는가 하면, 극중 인물이 자신이 출연하는 장면에 대해 논평을 하고, 유명 역사학자가 등장해 성배 기사단의 행적을 설명하다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몬티 파이튼의 성배>에서 테리 길리엄이 구사하는 유머는 신랄하다. 정치와 종교에 대한 날 선 풍자는 허다하게 많은 여타의 코미디들과 이 영화를 근원적으로 구별하는 특징이다. 허술해 보이는 이미지들은 어떤 총체화의 인상도 거부하기 위해 디자인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예컨대, 흥겨워야 마땅할 뮤지컬 장면들은 빈약한 스펙터클과 쓸쓸하고 음울한 분위기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된다.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즐길만한 유머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폭소를 유발하는 궁극의 괴작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Cine-Talk
2월 10일(목) 19:00 상영후 이준익 감독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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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pair iphone 2011.06.16 2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퍼가도 될까요?

18일 개막, 누구 추천작 볼까? 즐거운 고민의 시작

연초가 되면 어김없이 열리는 성대한 영화 축제가 있다. 영화인들과 관객들이 어깨동무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 축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올해로 제 여섯 번째를 맞이한다.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는 1월 18일 개막하여, 2월 27일 까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진행된다. '영화의 즐거움'이라는 큰 테마로,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상영작과 많은 부대 행사들이 마련되어 있으니, 관객들은 올해 벌어지는 첫 영화축제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여한 친구들의 명단과 그들이 선택한 영화들을 공식적으로 처음 소개하는 자리인 기자 간담회가 2011년 1월 5일 오전 11시에 서울아트시네마 인근 카페인 '카페 신'에서 열렸다. 이준익, 김태용, 이해영 감독이 참여한 현장의 분위기를 전하고 ‘2011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전반적 테마와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송승민(서울아트시네마 사무국장):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기자 간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서울아트시네마 사무국장 송승민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기자 간담회에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올해는 영화인들에게 몇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영화에 있어 즐거움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2010년 많은 영화인들과 관객 분들이 상당히 괴로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2011년은 그 괴로운 시간을 넘어서서, 영화의 즐거운 시간들을 누려보자, 영화의 즐거움을 낙원에서 누려보자. 이것이 2011년 서울아트시네마의 모토입니다. 영화의 즐거움이란 것은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을 누려보는 것입니다.
올해는 친구들의 선택 이외에도 지난 한 해 동안의 시네마테크를 둘러싼 활발한 논의들을 이어나가는 차원에서 특별히 두 기관의 시네마테크에 카르트 블랑슈, 일종의 백지수표를 위임하는 편지를 보냈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함께 하게 됐습니다. 지난 2010년 2월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대표인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님으로부터 서울아트시네마의 응원의 메시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운영에 있어서의 독립성, 안정적인 재원의 확보, 안정적인 전용관의 확보가 시네마테크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이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올해에는 특별히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역사와 함께 했던 12편의 프랑스 영화가 소개됩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복원하고 발굴한 영화들, 시네마테크에서 꿈을 키웠던 고다르의 영화, 그리고 누벨바그 이후의 장 으스타슈, 필립 가렐 등의 영화들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램 디렉터인 장 프랑수아 로제가 2월에 서울 아트시네마를 방문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역사와 지금 시네마테크가 어떤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좌담과 포럼이 열릴 예정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영상자료원에서 새롭게 복원한 한국영화 네 편이 상영됩니다.
시네마테크는 지난해부터 우리 시대의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를 벌였습니다. 올해는 특별히 이탈리아 문화원의 협조로 마테오 가로네의 작품들이 소개됩니다. 그동안 <고모라>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는데, 이번에 가로네의 3편의 영화를 구매해 상영하고, 이전 작품들도 소개합니다. 또 하나 시네마테크가 사랑하고 또 시네마테크를 사랑했던, 지난해 타계한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 여섯 편이 상영되는 '오마주 에릭 로메르' 행사가 열립니다. 동시에 영화가 허락한 욕망 중의 하나는 영화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망도 포함되어 있는데, 6명의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젊은이들과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네클럽' 행사가 열리게 됩니다. 지난 10년의 한국영화를 되돌아보는 아주 특별한 행사도 있습니다. 장현수 감독의 <라이방>과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2001년도에 개봉했던 영화입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와라나고'라고 해서 한국영화에 있어서의 예술영화, 그리고 이런 영화들에 대한 제작의 활성화, 그리고 이런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예술영화 상영공간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던 영화들입니다. 지원이 중단되고 예산이 50% 정도 삭감된 상태이긴 하지만, 반대로 올해의 친구들 영화제는 예년에 비해 더 많은 작품들과 영화인들이 참여한 행사가 됐습니다. 영화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해영(영화감독): 늘 관객으로서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친구들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저는 <매드 맥스>를 골랐습니다. 그동안 '친구들 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영화들이 주로 영화인으로서, 감독으로서 애정을 가졌던 작품들이었다는 느낌이 있었다면, 저는 이번에는 좀 더 순수하게 관객 입장에서 '가장 순수하게 좋아했던 영화가 어떤 것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그 시절에 열광했던 영화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영화의 원초적 즐거움을 줬던 영화들에 대한 상기가 자연스럽게 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당시에는 불법 비디오로 밖에 볼 수 없었던 작품을 필름프린트로 극장에서 보면 꽤 특별하고 신선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저도 매우 기대되고 설레고 있습니다. 시네마테크가 형식적인 예술영화만 상영하는 곳이 아니라, 뭔가 영화의 원초적인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인들, 관객들 문턱 없이 모두가 다 어깨동무하고 이 모든 즐거움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흔쾌히 재미있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준익(영화감독):
모든 인간이나 동물은 고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자기가 자란, 그런 어떤 생리적인 고향이 있습니다. 저 같이 영화로 밥을 먹는 사람들은, 제가 밥벌이 하는 영화라는 문화적인 한 장르의 고향이 있겠죠. 근데 저 뿐이 아니고, 현대인들은 태어나서 TV든 극장이든 어떤 매체를 통해서, 영화라는 문화적인 자신만의 추억과 어렸을 때 혹은 젊었을 때 그 영화를 보면서 이식되었던 어떤 영혼이 있습니다. 그 영혼의 고향 같은 게, 저에게는 이 시네마테크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고향에서 태어나서 모든 인간은 고향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저 역시 멀리 도망가려고 달려갔지만, 가끔 문득 영화라는 문화적 영혼이 저의 뒤통수를 간지럽힐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시네마테크가 아니고서도, DVD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고향에 있던 추억의 영화를 볼 수는 있겠죠. 하지만 모든 인간이 고향에서는 혼자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가족도 있었고,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있었죠. 그것처럼 영화의 고향인 시네마테크에서는, 이제는 자주 만나지 않는 친구를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합니다. 그 안에는 동료도 있겠지만, 또한 영화 속에 담겨져 있는, 영화 속의 인물들의 갈등과 관계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인간의 관계성도 있죠. 이런 것들이 저의 심리 구조나 뇌 구조 안에 영향을 주었어요. 인간의 관계성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던, 그리고 지금도 그 연장선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세상을 보는 눈, 인간을 보는 눈이 계속 자라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저 뿐만이 아니라 지금 시네마테크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감독의 생각이나 인물들이, 미래에 또 다른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영혼에 영감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영혼의 가장 아름다운 액체인 눈물을 흐르게 해주고, 또 이를 넘어서는 것으로 신의 가장 위대한 선물인 웃음을 짓게 하고, 이런 것들에 대한 고향이 바로 시네마테크라고 생각합니다. 영혼의 고향의 가치를 사랑하는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곳, 그래서 아마 이런 자리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젊은이들이 영화를 관람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좋은 고향의 향기를 유지시켜주는 것이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을 사랑합니다.


김태용(영화감독): 친구들 영화제에 몇 번 참여를 했었지만, 작년에는 영화작업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고 올해 참여하게 됐습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준익 감독 말씀대로 고향에는 혼자 있지 않았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던 세대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골방에서 비디오를 보면서, 그 비디오를 친구들에게 추천해 주고, 어떤 친구가 재밌다고 하면 그 영화를 다시 보고 그러면서 영화를 좋아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영화를 보는 가장 좋은 방식은, 누군가의 추천을 받거나 제가 봤던 영화를 누군가에게 추천해 줄 때였어요. 시네마테크는 친구들이 계속 무언가를 추천해 주고, 추천받은 영화를 와서 봤더니 그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는, 그런 공간인 것 같아요. 영화를 본다는 게 생각보다 굉장히 즐거운 일이고, 그리고 외로운 일이 아니라는 걸 계속 알려주는 게 시네마테크인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는 다양한 방식들이 앞으로도 계속 생길 텐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끝까지 남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는 방식일 것 같아요. 누군가를 계속 만나고 영화를 통해 확장되는 세계라는 생각에 매년 참여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번에 선택한 영화는 <수쥬>라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즐거움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뭐가 즐거울까 생각했더니 별로 즐거운 일이 없더라고요. 옛날처럼 버스터 키튼 영화를 봐도 별로 안 웃기고, 개인적으로 요즘 즐거움을 잘 못 느껴서, 오히려 처절한 사랑 영화를 하나 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10년 전에 잠시 개봉했다가 사라진 영화인데, 상하이에 흐르는 수주라는 강에서 살고 있는 한 아름다운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동시대 아시아 영화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가를 같이 느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 같아서 절절한 사랑 영화를 꼽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와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성욱:
가장 궁금해 하는 문제가 있으실 것 같아서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건립, 공간 확보와 재정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2010년에 시네마테크에 대한 일시적인 지원 중단과 예산 삭감이 있었습니다. 지난해에는 사실 극장의 임대료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영화인들과 배우들의 후원 광고 촬영 덕에 2010년을 잘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준익 감독님도 광고를 촬영하셨는데, 아마 영화가 개봉할 즈음에 나올 것 같습니다. 두 차례의 후원광고 촬영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잡지나 화보, 그리고 직접적인 후원들이 영화인들을 통해 있었고, 2010년의 운영은 그런 후원들로 진행이 됐습니다. 동시에 2010년 말미에 삭감된 예산을 복원하려고 하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국회를 방문해 삭감된 지원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벌였지만, 잘 아시다시피 지난 해 예산안이 그냥 통과되어 버리는 사태가 있었습니다. 시네마테크 예산을 복원하는 문제는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2011년에는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구체적인 청사진과 공간 확보와 예산 조정과 관련된 일들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문화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 그리고 서울시의 협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월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관계자가 방문해 시네마테크와 관련된 좌담과 포럼이 진행되고, 3월에는 시네마테크 지원정책과 관련된 포럼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해외 시네아스트 초청 방한 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기업의 후원으로 매년 한두 번 진행될 예정입니다. 2012년은 서울아트시네마가 개관 십 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2012년에는 일 년 내내 십주년의 기념행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준익: 맥주 광고에 출현을 했는데, 작년에 많은 감독들과 배우들이 시네마테크 기금 조성을 위한 촬영이 있었고, 저도 요청이 있어서 흔쾌히 찍었습니다. 목표는 "돈을 모으자. 그 돈으로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건립을 해내자"였는데,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말을 들어보니 그것으로는 부족하고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영화가 지극히 상업주의로 획일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기 있는 두 젊은 작가정신이 투철한 감독들이 점점 가난에 찌들어가고 있습니다.(웃음)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의 더 많은 젊은이들이 영화에 꿈을 갖고 자신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희망과 꿈을 제시할 수 있는 근원이 필요합니다. 그 근원 중의 하나가 여기서 상영되는 영화들이죠. 당시엔 그다지 주목받거나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나, 영화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그 가치가 식지 않는 영화들이 시네마테크에서 상영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기본이 되는 상영관의 조성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든 선진국에서는 굶어가는 예술가들의 영혼이 부패되지 않도록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후원을 합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같은 경우는 가장 좋은 모델이 되겠는데, 젊은 영혼들이 상업주의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거기서 획득되지 않는 어떤 소외된 영화적 가치, 어떤 정서나 사상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외로운 영혼의 필수 아미노산 같은 양분이 되는 것들이 시네마테크를 메카로 해서 파생되어 일상의 따뜻함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모두가 상업 영화에 열광할 때, 남들과 다르고 싶은 인간 객체의 자존심과 욕망을 달래줄 수 있는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자본주의의 미덕도 있지만, 그 미덕이 유지되기 위해선 그 해악들을 메우는 활동도 필요합니다. 이 세상의 모순을 메우는 데 참여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해영: 요즘 많이 잊고 있었던 게 영화의 즐거움이 아니었나 싶어요. 시네마테크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결국 단순하지만 영화를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란 것이 막연하게 설레게 만들고, 왠지 좋은 책을 받아서 첫 장을 넘길 때의 설레임이나 좋은 음반의 재킷을 처음 뜯을 때의 쾌감이 있습니다. 영화에도 그것에 못지않은 굉장히 설레는 순간들, 원초적인 즐거움 같은 것이 있죠. 영화인으로 살든 비영화인으로 살든 마찬가지입니다. 제 영화가 시장에서 크게 환대를 받진 못했지만(웃음), 영화의 즐거움과 영화를 만드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굉장히 즐거운 일이구나, 하고 다시 깨달은 시간이었죠. 이번 친구들 영화제의 참여도 시의 적절하게 영화의 즐거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김태용: 개봉할 영화가 외면 받고 소외받는 영화가 될지 사랑받는 영화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매 순간에 친구들을 만나는 느낌이 저한테는 영화를 작업하는데 굉장히 큰 힘이 됩니다. 영화 작업하는 사람들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데, 그 시간을 보상받고 싶을 때 극장에 오면 사람들을 만나고, 무언가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느낌은 보통 극장에서는 받기 힘들고, 시네마테크에 오면 받는 거 같아요. 그런데, 매년 시네마테크의 안정적인 지속을 위해 노력하지만,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2012년을 원년으로 삼고 조금씩 힘을 모아야 할 것 같고, 올 해가 매우 중요할 것 같아요. 안정적인 공간에서, 세상에 생각보다 재미있는 영화도 많고 생각보다 좋은 사람도 많은데, 이런 것들이 의미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삶이 보다 윤택해지는 걸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정리 : 박영석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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