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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19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펼치는 젊은 날의 초상

[영화읽기] 엘리아 카잔의 <초원의 빛>

터키 이민자 출신으로 자신의 영화작업을 지속시키기 위해 ‘밀고자’라는 낙인이 찍힌 엘리아 카잔은 자신을 옹호한 영화 <워터프론트>(1954) 이후 끊임없이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듯하다. 젊은 날의 초상, 청춘은 아름다웠다고 회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워터프론트> 직후인 1955년에 만든 <에덴의 동쪽>이 그렇고, 1961년 작 <초원의 빛> 역시 그러하다. 두 영화 모두 당시의 시대가 아닌 1930년대 이전의 시기를 다루고 있고, 풋풋한 젊은이들의 방황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편에서 제목을 따온 <초원의 빛>은 대공황기 직전인 1928년 미국 캔사스의 작은 마을과 고등학교를 무대로 펼쳐지는 비운의 사랑 이야기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 많은 부잣집 도련님인 버드(이 영화로 데뷔한 워렌 비티)와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모범적인 디니(나탈리 우드)는 서로 좋아하지만, 주변 시선과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혈기왕성한 버드는 디니의 육체적 관계를 원하지만, 순결교육을 엄하게 받은 디니는 이를 두려워한다. 성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버드는 다른 여학생과 관계를 갖고, 사랑하는 버드를 뺏길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떠는 디니는 심한 히스테리와 우울증을 앓게 되며, 급기야 자살을 기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짧은 재회를 하지만, 환경은 변해있고 결국 작별을 고하며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아름다운 청춘 남녀의 사랑이 환경에 의해 변형되는 과정을 담은 영화 <초원의 빛>은 일종의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라 불릴법한 수작이다.

영화는 버드와 디니가 마을 인근 폭포 옆에 세워둔 차 안에서 키스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이 첫 장면은 두 사람이 겪게 될 고민과 갈등적 요소를 압축적이고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개인의 열정, 호기심과는 별개로 어쩔 수 없이 지켜야만 하는 사회적, 도덕적 질서와 통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젊은이의 초상. 남자는 자신의 이상과는 상관없이 명문대에 들어가 성공에 이르길 강요받고, 여자는 자신의 처녀성을 지켜내지 못하면 창녀로 전락하고 마는 선택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비난 받지 않고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남자답게, 여자답게 살아가려면 이를 지켜야만 한다. 영화는 두 사람 주변 도처에 존재하는 사회적 억압을 드러내며, 두 사람이 감정이 우선되는 사랑조차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경제적인 문제와도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사회에 의해 억압된 열정은 강렬한 색채와 사운드와 몸짓의 형태로 폭발하듯 표현된다. 가령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힐난을 받은 디니가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워즈워드의 시를 낭독하다 말고 교실을 뛰쳐나가는 장면이나 새해 기념 파티에서 버드가 술에 취한 그의 누나 지니(바바라 로든)를 찾다 동네 사내들에게 농락당한 지니를 위해 싸우고 울부짖는 장면, 혹은 디니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스스로 자르거나, 물에 몸을 던지며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특히 첫 장면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폭포는 이러한 인물들이 처한 곤경과 그들의 열정을 한층 극화시키는 장소로 기능한다. 내러티브는 식상하리만치 전통적인 서사형식을 따르고 있는 반면, 인물들의 개성어린 연기와 그들의 몸짓은 생생한 박진감을 가지고 있다. 엘리아 카잔은 탄탄하게 구축된 내러티브 속 인물의 상호 반작용을 통해 성적 억압을 비롯한 계층과 재산, 가족과 학교, 산업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사회적 모순을 집중적이고 명료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 속에서 인물들은 때론 비뚤어지고 왜곡된 모습을 보인다. 이혼녀라는 상흔을 안고 모든 이에게 무시당하지만 시종일관 비전통적이고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지니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카잔은 그러한 왜곡된 인간상은 이미 결정되어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더 이상 살아 갈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지니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을 보면, 사회란 필연적으로 그러한 모순을 담보하고 있고 완벽한 자유를 원한다면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단연 라스트 씬이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디니가 버드를 찾아가 그의 아내와 그를 닮은 아이를 만나고,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라는 한 마디로 어색한 짧은 재회와 작별을 고하는 그 장면. 버드를 만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직도 버드를 사랑하냐”고 묻는 친구에게 디니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워즈워드의 시를 읊조린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 말아라. 그 속에 간직된 오묘한 힘을 찾을지어다.” 이 장면을 반추해서 생각해보면, 영화 <초원의 빛>은 여주인공 디니의 자기 형성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의 변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랑의 시련을 겪는 여주인공이 어떻게 상처 입고, 견뎌내고, 치유했는지를 그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이는 지금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 우리네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느 사회, 어느 가정에서 누구나 한번쯤 겪는 고민이며 현실 그 자체다. 현실을 벗어나지, 떠나지 못할 거라면 살면서 입은 상흔은 성숙한 인생 태도로 받아들이고, 길을 계속 가야만 한다. 아름다운 기억, 추억이란 이름으로 저 편에 묻어둔 채. 마지막 장면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며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는 연유는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신선자)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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