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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03 [특별강좌] 안톤 체호프와 문학 ❶
  2. 2011.07.29 ‘문제의 올바른 제기’로서의 문학

단편소설의 거장 안톤 체호프

지난 7월 30일 오후 안톤 체호프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베짱이> 상영 후 ‘2011 시네바캉스 서울’의 첫 번째 부대행사로 '안톤 체호프와 문학'이란 제하의 특별강좌가 열렸다. 강사로는 체호프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오원교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가 나서 ‘단편소설의 거장 안톤 체호프’란 주제로 체호프 문학의 특징에 대해 열띤 강연을 펼쳤다.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전한다.


오원교(모스크바 국립대학 박사,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 이번 ‘시네바캉스 서울”에는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다섯 편의 영화가 소개된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영화에 대한 분석보다는 체호프와 그의 문학, 특히 소설을 중심으로 이야기 나누려 한다. 톨스토이가 한 말이 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체호프를 좋아하고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누구나 체호프를 읽으면 자기 나름의 체호프를 가지게 된다. 문학작품을 가지고 영화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감독은 원전에 대해 자기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읽어내게 된다. 체호프는 총 900여 편의 작품을 썼는데, 그 중에 62편이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많은 경우는 소비에트 시대에 국가적인 정책으로 국영영화사인 모스필름에서 만들어졌고, 그에 따라 원작에 대한 해석에서 알게 모르게 시대적인 맥락이나 분위기가 반영 된다. 오늘 보신 <베짱이>의 주인공 드이모프는 또 다른 체호프로 표현되었다. 이 영화는 삼소노프라는 감독의 데뷔작인데, 영화에 체호프의 문학관이나 인생관을 아주 잘 버무려 놓은 것 같다. 체호프가 가졌던 삶의 자세 같은 것들이 영화에서 표현된 주인공과 많이 닮아있다. 체호프와 관련된 기념비나 박물관에 가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말이 그 자신이 쓴 “공공의 선에 복무하려는 바람은 언제나 영혼의 요구여야하고 개인적 행복의 조건이어야 한다”이다. 드이모프의 삶과 올가의 삶을 비교해보면 그들의 행복의 조건이 어디를 향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체호프는 1860년에 작은 항구도시에서 태어났다. 19세기는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다. 푸쉬킨부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거장들이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짜르체제에서 글을 썼다는 건데, 그건 유한계층만 가능했다. 체호프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작가들은 귀족출신이라는 얘기다. 체호프는 할아버지가 농노출신으로, 천한 출신의 최초의 작가이다. 할아버지가 돈을 모아서 농노해방이 되기 전에 일종의 노비문서를 사서 태우고, 아버지 대부터 자유인이 되었다. 상인이었던 체호프의 아버지는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기도 했는데, 가족성가대를 조직해서 체호프의 형제들을 교회에 세워 노래를 하게 했다고 한다. 체호프에게는 그런 경험들이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의 작품에는 단 한 번도 순수한 의미에서 교회나 종교가 나오지 않는다. 그가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종교를 갖지는 않았다.

체호프는 1879년에 모스크바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1980년대부터 필명으로 유머 잡지들에 콩트 등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해진 원고료에 따라 정해진 행에 맞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요구하는 것에 맞게, 짧고 간략하게 글을 써야했는데, 이는 단편작가로서 체호프를 체호프답게 만드는 일종의 수련기간이였다. 체호프는 스스로 ‘간결함은 재능의 누이이다’라는 말할 정도로 간결함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와 더불어 작가의 절제성은 체호프의 중요한 특징이다. 하지만 체호프는 애초에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의학을 대단히 중요한 학문으로 여겼고 더군다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실증주의 과학에 모든 인류가 진보의 희망을 걸었던 시기였기에 의학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과학이 최고의 학문이었다. 체호프는 ‘의학은 나의 아내이고, 문학은 나의 연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의학과 문학이 체호프에게서는 왜 하나인지가 중요하다. <베짱이>에는 드이모프가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어. 의사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치료해야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은 세상의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으로 치밀하게 결합되어 있고 총체적으로 연관되어있으며 사람의 운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체호프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1886년에 안톤 체호프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작품을 내고부터, 그는 문학계와 연극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880년대라는 시기는 러시아문학사에서는 퇴락의 시기였다. 투르게네프나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거장들이 죽고, 톨스토이는 당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같은 자신의 명작들을 두고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던 시기였다. 문학의 공백상태였던 시기에 체호프라는 뛰어난 작가가 나타난 셈이다. 첫 번째 단편집이 푸쉬킨 상을 받는 등 비평계의 관심을 받게 되면서 작품에 대한 비판들도 존재했다. 작품에 이념이나 사상, 예술적 구성이 없으며, 그저 일상의 연대기를 그릴 뿐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체호프 이전의 작가들은 성인에 가까운 사상가들이었고, 그들은 러시아 인민들에게 그들이 나아갈 바를 전지적으로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체호프는 그것이 과연 러시아가 나아갈 길을 제대로 밝혀주는가라는 반성에서부터 시작했다. 체호프는 오히려 그를 비판을 하는 평자들이 기대하는 톨스토이주의나 대지주의는 교조이고 독단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해방운동, 변혁운동이 높아지던 시기였고, 인민주의 운동, 맑스주의와 같은 것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데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가 모든 이들의 관심사였다. 체호프도 바로 그런 시대적 과제에 대면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890년, 서른이 되던 해에 느닷없이 사할린 여행을 떠난다. 사할린은 시베리아와 함께 강제노역과 유형의 땅이었는데, 그래서 실제로는 여행이라기보다 순례에 가까운 체험이었다. 그는 사할린과 관련된 엄청난 분량의 자료들, 다른 이들의 글들을 꼼꼼히 분석한 뒤 사할린으로 떠났다. 이 여행은 체호프의 인생에서 일대 전환점이 된다. 모두에게 사할린은 외면하고 싶은 곳이었는데, 체호프는 도대체 사할린은 어떤 곳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체호프와 동시대의 작가이자,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 『6호실』을 쓴 레스코프는 ‘도처에 6호실이 있다. 6호실이 바로 러시아다’라고 말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사할린이 바로 러시아였던 것이다. 강제와 억압, 탄압, 비인간이 존재하는 곳. 체호프는 직접 그곳의 실상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즉, 러시아인 중 누구도 이 사할린적인 상황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그는 사할린에 관한 다른 글들과 자신의 경험을 비교하게 되면서 결국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이는 체호프 문학의 요체라고 생각된다. 사할린을 다녀와서부터 체호프의 사회인식은 상당히 깊어졌고, 의료교육이나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보통 체호프는 사회적인 부분과는 거리가 먼 작가로 얘기되곤 하는데,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체호프 문학에 대해서 ‘온 세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글쓰기다’라고 했다. 체호프 문학의 방법 내지는 예술성을 평가한 말인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톨스토이가 했던 이 말이 어떤 의미일까에 매달리고 있다. 체호프 문학의 요체는 ‘문제의 올바른 제기’라고 할 수 있다. 체호프는 작가는 심판관이 아니기 때문에, 인물을 만들어내지만 그 인물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진 않는다고 말했다. 오늘 <베짱이>를 보신 분들이 탄식도 하고 많은 반응들을 보였는데, 체호프의 작품을 읽어보면 그러한 탄식은 행간에도 없다. 체호프는 작품 속에서 올가 이바노브나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드이모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체호프의 모든 작품이 그렇다. 그런 면에서 톨스토이와는 반대다. 톨스토이는 너무나 독백적이고 독단적이다. 그의 작품은 글 안의 전지적인 작가의 말만 읽으면 앞으로 주인공이 어떻게 될지 뻔하다. 체호프는 작가는 ‘불편부당한 목격자’이어야 하고 심판관은 독자여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문학에서 최초로 독자의 역할에 대해서 공동의 창작자라고 생각했던 작가가 체호프이다. 따라서 작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올바른 제기’라는 것이다. 체호프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에서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독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독자들이 답을 하는 것이다. 체호프는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체호프는 스스로 자신이 휴머니스트이며, ‘나의 믿음은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 주원탁(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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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의 문학 세계

모스필름 특별전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러시아의 최대 제작사 모스필름의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다. 이번에는 특별히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작가 겸 소설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다섯 편 <결혼> <베짱이> <철 지난 꽃> <갈매기> <6호실>을 소개한다. 이에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의 오원교 HK연구교수가 안톤 체호프의 문학세계에 대한 소개 글을 보내왔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단편 소설가이자 새로운 드라마 형식을 창조한 극작가이다. 체호프는 1960년 1월 17일, 러시아 남부 아조프 해의 작은 항구도시 타간로그에서 파벨 예고로비치(Павел Егорович)와 예브게니야 야코블레브나(Евгения Яковлевна) 사이의 5남 1녀 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규모 잡화상을 운영했던 아버지는 예술과 사회활동에 관심이 많은 개성이 강하고 다소 전제적이고 보수적인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충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현모양처였다. 체호프는 후에 “재능은 아버지로부터, 정신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라고 술회하였다. 1876년 아버지의 경제적 파산으로 가족이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 체호프는 고향에 혼자 남아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고학으로 중학교를 마쳤다. 어린 시절 타간로그에서 다양한 경험과 기억들은 작가의 세계관과 자연관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체호프 문학이 자라나는 자양분이 되었다. 1879년 작가는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의 입학을 계기로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지만, 궁핍한 가정 형편 때문에 고단한 대학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체호프는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순수한 예술적 동기라기보다는 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였다. 1880년 3월 잡지 <잠자리>에 실린 첫 작품을 시작으로 ‘안토샤 체혼테’, ‘환자 없는 의사’, ‘쓸게 빠진 인간’ 등의 필명으로 다양한 신문과 잡지에 수많은 단편소설, 콩트, 단막극, 만평을 썼다. 이 시기에는 출판사의 요구로 대부분 짤막한 작품들을 썼는데, 이러한 극도의 간결성에 대한 추구 — “간결함은 재능의 누이이다” —는 장차 단편작가 체호프의 고유한 시학적 원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1884년에 의학 수업을 마친 체호프는 이후 수년간 간헐적으로 의술 활동에 종사하면서 작품 활동을 병행해 나갔다. 의학을 비롯한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서 강하게 지속되었으며, 특히 의학 수업과 의술 경험은 그의 작품들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의술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세밀하고 직접적인 관찰을 가능하게 했다. 체호프는 그의 작품들 속에서 삶의 중대한 고비에 선 인간의 깊은 심리를 파고들면서 공감을 표하되 감상에 젖지 않고 냉혹하리만큼 명징한 객관성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훌륭한 의사와도 같은 작가의 냉철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술가로서의 체호프는 과학자로서의 신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작가는 화학자와도 같이 객관적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1885년 원로 작가 그리고로비치(Д.В. Григорович)의 충고와 격려, 당대의 유력 신문 <신시대>의 발행인 수보린(А.С. Суворин)과의 만남을 계기로 작가로서의 사명감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체호프는 점차 초기의 희극적이고 풍자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보다 진지한 문학성을 지향하게 된다. 1886년 단편 <추도식>에서 처음으로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체호프는 <우수>, <아뉴따>, <반까>, <자고 싶어> 등에서 일상의 외적 희극성을 넘어 존재의 복잡한 심연으로 천착해 들어가 당대 러시아인들의 삶의 본질적 측면들을 예리하게 반추한다. 그는 자신의 인물들을 결코 치장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짓누르는 온갖 삶의 고뇌와 인간적 실상을 들추어냈다.



1888년 체호프는 러시아 남부 돈 강지역의 여행에 기초해서 자신의 서정적 산문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인 중편소설 <초원>을 집필하면서 확연히 문학적 전환을 이뤄냈고, 마침내 단편집 <황혼녘에>로 러시아 학술원에서 푸슈낀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서 문단의 기대와 주목을 본격적으로 받게 된다. 이시기에 체호프는 산문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극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바노프>, <숲의 정령> 등의 작품은 절제된 체호프적 드라마 기법에 완전히 이르지는 못했지만, 주위의 일면적 이해와 부당한 평가와는 별도로 극작가로서의 면모를 이미 적지 않게 드러내었다. 하지만 문학적 성공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체호프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심각한 고뇌에 빠지고 근본적인 자기 성찰에 몰입하게 된다. 1880년대 말은 체호프에게 문학 세계의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긴장어린 정신적, 예술적 추구의 시기였다. 그는 이제 인간의 불행, 행복, 사랑 등의 보편적 문제를 넘어 당대 러시아 지성인들의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었던 구체적이고 예민한 사회적 물음들, 특히 이른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시대적 과제에 다가서게 되는데, 톨스토이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그 대표적 예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와중에 그는 1890년 4월 강제노역과 유형의 땅, 사할린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길에서 체호프는 <시베리아에서>를 집필하였고, 유형지의 실태를 직접 체험하고 그 해 12월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 <사할린 섬>, <구세프>, <아낙네들>, <유형지에서> 등의 작품을 통해 커다란 문학적,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참을 수 없는 고행의 땅이자 악마의 섬’에 대한 자발적 순례였던 사할린 섬 여행은 체호프의 삶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라는 현실에 대한 인간적 각성과 참회뿐만 아니라, 이제 “문제는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이다”라는 문학에 관한 획기적 인식을 낳는다.

체호프는 이듬해 수보린과 함께 유럽을 여행한 후, 1892년 모스크바 남쪽의 멜리호보 마을에 작은 영지를 구입하여 가족과 함께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체호프는 창작 활동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등의 사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체호프는 레비탄((И.И. Левитан)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가, 학자, 미술가, 음악가 등과의 활발한 교류를 지속하였는데, 1895년에는 야스나야 폴랴나를 방문하여 처음으로 톨스토이(Л.Н. Толстой)와 조우했다. 멜리호보에서 작가 체호프는 문학의 절정기를 맞게 되는 데, 1892~1898년 사이에 <결투>, <6호실>, <신학생>, <3년>, <농부들>, <나의 삶>, <상자 속의 인간>, <나무딸기>, <사랑에 대하여>, <이오니치> 등과 같은 주옥같은 단편들을 집필하였다. 이 작품들은 러시아의 삶의 다양한 영역에 대한 예술적 탐색의 심연과 작가의 인본주의적 신념의 강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1890년대 체호프의 작품들에서는 개인적, 사회적 삶의 차원에서 진리, 미(美),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는데, 인간의 사회적-역사적 임무 혹은 사명이라는 문제가 가장 결정적인 의의를 지니게 되고, 이는 인간적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종래의 이해에 대한 본질적 재고로 나아간다. 예컨대, 체호프는 인간의 행복 추구를 본성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권리로 간주하면서도 인간 존재의 고귀한 목적에 상응하는 행복만을 옹호하였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아르쉰의 땅이나 저택이 아니라 광활함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모든 본성과 특성을 펼칠 수 있는 지구 전체, 자연 전부이다.” 또한 1890년대 말 체호프는 다시 희곡으로 관심을 돌렸는데, 1896년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초연에 실패하여 작가에게 충격을 주었던 <갈매기>는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МХАТ)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뒤이어 <바냐 아저씨>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97년에 체호프는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해야 했으며, 의사의 권유로 1898년 흑해 연안의 휴양도시 얄타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요양을 하면서 체호프는 ‘하얀 별장’을 짓고, 육체적 쇠약에도 불구하고 문학 창작과 지인들과의 만남을 활발하게 펼쳤다. 1900년 체호프는 희곡, <세 자매>를 탈고하고, 이 작품으로 1902년 그리보예도프 상을 수상하였으며, 1898년에 처음 만났던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Ольга Книппер)와 1901년 5월 25일 결혼하였다. 한편 1900년 초 러시아 학술원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던 체호프는 고리키(М. Горький)의 제명에 항의하여 회원 자격을 스스로 반납하기도 하였다. 1903년에는 마지막 단편 <약혼녀>와 희곡 <벚꽃 동산>을 탈고하였다. 말년에 체호프의 문학에서는 인간 내면에 대한 면밀한 숙고와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더욱 깊어지는 가운데 만연한 상투성과 산문성에 대한 예리한 질타와 지양의 모색이 두드러진다. 1904년 6월 체호프는 아내, 올가 크니페르와 함께 독일 남부의 유명한 요양지인 바덴바일러로 갔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1904년 7월 2일 새벽 3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청했던 마지막 샴페인 한 잔을 다 비우지 못한 채, “나는 죽는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다.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로 운구 되어 수많은 군중이 애도하는 가운데 7월 9일 노보제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일찍이 톨스토이가 ‘새로운, 온 세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글쓰기’라고 일갈한 체호프 문학의 요체는 다름 아닌 ‘문제의 올바른 제기’이라는 독특한 ‘객관성의 시학’이다. 체호프에 따르면 예술가(작가)는 재판관이 아니라 ‘불편부당한 목격자’이고, 따라서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그것의 ‘올바른 제기’이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레르몬토프(М. Лермонтов)적 전통의 혁신으로 읽혀지고 체호프 문학의 새로움과 고유성을 가장 본질적으로 표현해주는 시학적 원리인 ‘문제의 올바른 제기’는 고리키의 진단처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드높은 사고에 기초한다. 체호프의 객관성의 시학은 무엇보다도 현실의 절대적 총체성 앞에서 인간적 인식의 상대성이라는 예술-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문제의 올바른 제기는 당대 비평가들의 힐난과는 달리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불가지론적 허무주의나 상대주의의 표출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을 독단적이거나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행동하면서 문제 해결을 시도했던 19세기와 당대의 러시아 문학의 지배적 조류에 맞서는 작가의 반성적 인식의 표출이자, 대상에 대한 대화적 관계를 견지하며 양심적 진리를 끝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예술가 정신의 표현이다. 체호프 문학에서 문제 제기의 올바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서 문제 자체의 합리성과 함께 서사 대상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서사 주체, 즉 작가 자신과의 관계에서 작가적 입장을 원칙적으로 규정한다. 체호프에 따르면 문학가는 화학자처럼 객관적이어야 하며, 일상의 주관성으로부터 절연됨으로써 일체의 강요, 허위 그리고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요컨대 문제 제기의 올바름은 ‘불편부당성’, ‘합리성’, ‘객관성’, ‘냉정함’, ‘냉담함’ 그리고 ‘정의’의 총체이며, 이것은 체호프에게서 양심적 진리를 사명으로 하는 문학의 예술성을 재는 척도이자 강한 인상의 기초이다. ‘산문 속의 푸슈킨’이라고 일컬어진 체호프 문학을 관통하고 있는 이른바 간결성과 절제성은 바로 이러한 시학적 원리의 구현이다.

말하자면 체호프 문학에서 문제 제기의 올바름 내지 객관성은 결코 삶에 대한 자신의 기존 지식의 주장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고 타자의 지식, 견해, 진리에 대한 가치평가, 상이한 진리들의 대조, 진리들의 자질과 조건들에 대한 탐구를 전제한다. 또한 진정한 진리의 끝없는 추구 과정에서 어떠한 대답도 유일한 것으로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제기된 물음에 대한 가능한 답의 추구 노력 속에서 표현된다. 이처럼 문제의 올바른 제기라는 체호프의 문학 창작의 원리는 현실에 대한 불편부당한 인식에 근거해서 그것을 고유의 복합성과 충만함 속에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서, 섣불리 문제의 해결만을 추구하는 주관성의 시학에 맞서는 객관성의 시학의 본체인 것이다. 한마디로 체호프의 객관성의 시학은 해체와 회색빛 좌절, 산문적인 질서가 지배하는 파편화된 당대 현실에 대한 체호프의 작가적 대응이며, 구원의 가능성이 모호하고, 거대 서사의 황금시대가 종말을 고하며, 부정과 모색이라는 문학의 툰드라 시대에 맞선 작가의 진실하고 냉정한 문학적 형식이다. 바로 이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모든 본성이 만개하고 인간 속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되는 드넓은 세상에 대한 체호프의 인본주의적 갈구가 샘솟는다.

글/ 오원교(모스크바 국립대학 박사,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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