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1989년 3월 존 사베츠에 관한 특집기사를 다룬 적이 있었다. 그의 사망을 기린 추모 특집판이다. 가장 흥미로운 글은 카사베츠를 자신의 진정한 스승으로 여긴 마틴 스콜세지의 간결한 에세이였다. 그는 카사베츠의 영화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던 시절에 나는 처음 <시민 케인>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식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내가 겪은 두 번째 충격은 존 카사베츠의 영화 <그림자들>이었다. 이어 나는 트뤼포, 고다르, 샤브롤, 안토니오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최고의 감독은 카사베츠였다. 그의 작품은 어떻게 에너지와 감정이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모든 물질적 어려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나는 오슨 웰즈의 모든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스무 번 정도를 보아야만 했었다. 하지만 카사베츠의 영화는 단지 한 번만 봤을 뿐이다. 내가 그 영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정감이 있고, 심리적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내게 있어 카사베츠의 영화는 다양성과 현존, 삶 그 자체의 본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내가 영화에서 삶을 포착하기를 바랐던 그러한 것이었다”.

 

 

레이 카니와 나눈 인터뷰를 읽어보면 존 카사베츠는 그의 영화경력 초기부터 인물의 마스크를 벗기고 배우의 연극적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일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삶에서 가장 큰 실험이 드라마틱한 퍼포먼스만큼이나 무대화되고 인공적인 것이라 여겼다. 생생한 경험은 드라마틱한 경험만큼이나 관습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누군가를 연기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스크를 벗으면서 마치 다큐멘터리적인 정밀함으로 얼굴을 노출시킨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그림자들>과 <얼굴들>에서 그는 마스크와 얼굴들을 드러내는데, 표면적으로는 즉흥적인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즉흥적인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 즉흥성은 인물들의 제멋대로의 연기를 카메라에 담아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그림자들>의 즉흥성은 대략 18시간의 촬영으로 얻어낸 즉흥성이었다. <얼굴들>의 경우는 150시간의 테이크가 필요했다. 많은 횟수의 촬영이 그가 ‘완벽성’을 기하려 시도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카사베츠는 반대로 ‘불완전성’을 추구한 작가였다.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완성’이란 표현은 내러티브의 완결성, 이야기를 매듭짓는 것, 각본의 이야기를 얼마나 충실하게 영화로 구현해내는가에 달려있다. 이야기의 완성은 일종의 제도화 과정이다. 이야기가 그린 현실을 영화의 기법으로 얼마나 완성도 있게 구현하는가가 관건이다. 카사베츠는 다른 경로를 추구했다. 그는 작품의 완성에서 실패할 권리를 획득하려는 작가이다.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존 카사베츠를 ‘오슨 웰즈 이래 가장 눈부신 미국의 이단적인 영화감독’이라 불렀던 것처럼 카사베츠의 영화는 워낙 독특해 무시당했고, 종종 어설프고 조잡한 영화로 비판 받기도 했다. 그의 영화에서 이미지의 연결은 대단히 불합리하고, 줄거리와 플롯은 느슨하고 인과관계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카사베츠의 영화에 담긴 즉흥성과 서투름은 삶의 은밀한 비밀에 근접하기에 어울린다.

 

 

1958년 존 카사베츠는 그의 첫 작품 <그림자들>을 시나리오나 콘티 없이 즉흥적으로 완성했다. 그 순간에 고다르를 위시한 유럽의 작가들, 일본의 오시마 나기사가 이와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카사베츠는 과정과 생성의 작가다. 그의 영화의 마지막이 시작만큼이나 늘 열려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영화를 끝낼 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랑의 행로>에서 '사랑은 흐름이예요’라 말하는 것처럼 흐름의 가능성을 화면에 기입하기 위함이다. <그림자들>에서 카사베츠의 카메라는 티에리 주스의 표현처럼 마치 폭풍 안을 포착하는 것처럼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프리재즈처럼 즉흥적으로 감정과 리듬을 담아낸다. 살아있는 시간의 기입, 여기 그리고 지금을 보여주는 영화적 쇼트들, 불가능한 예측의 사건들,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대사의 즉흥성. 카사베츠의 영화에는 이러한 사건들로 가득하다. <영향아래의 여자>에서 주인공 지나 롤랜즈는 남편 피터 포크를 기다리다 알코올에 취해 감정의 흐름에 따라 다른 남자를 따라간다. 이 모든 과정은 그녀의 신체의 추락에 관한 퍼포먼스들처럼 보인다. 꽤나 길게 진행되는 스파게티 식사 장면들. 혹은, <사랑의 행로>에서 지나 롤랜즈가 동물들을 데리고 오빠의 집을 방문하는 순간. 공항에서 지나 롤랜즈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가방들을 들고 안내원에게 어설픈 불어로 심경을 털어놓는 순간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신체가 벌이는 퍼포먼스들로 카사베츠 영화에서 플롯을 넘어선 진정한 사건들이다.

 

 

 

 

카사베츠가 영화에서 시도한 것은 눈앞에서 생생하게 일어나는(그리고 쉽게 사라지는) 언어가 미치지 않는 사건들을 담아내는 것이다. 이는 언어나 개념의 매개로는 표현되기 힘들거나 숨겨지는 진실들이다. 너무 흔해서 거의 지나쳐 버리기 쉬운 일들, 몸짓들, 습관들이다. 식사를 하거나 술주정을 부리거나 애정을 구걸하거나 하는 진부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이다. 그의 영화에서 캐릭터는 시나리오에서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화된 효과로서 구축된다. 배우들의 몸은 그러므로 이중성 안에 놓여진다. 그들은 먼저 픽션의 기능 안에 놓여 있다. 다른 한편 배우들의 몸은 정의하기 어렵고 간파하기 힘든 감정의 과정들을 보여준다. 티에르 주스의 표현을 빌자면 이런 카사베츠의 목표는 흐름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많은 모습들을 취한다. 언어의 흐름들, 목소리들의 흐름들, 사랑의 흐름들, 그리고 알코올의 흐름들.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언제나 이러한 흐름들을 통해 감정의 순간들과 통찰의 섬광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카사베츠의 시학은 이렇듯 불규칙해 보이면서도 견고한 형식을 고안하는 것에 있다.

 

 

2002년 12월, 서울독립영화제의 일환으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존 카사베츠의 영화 5편을 상영했었다. 그러니까 이번 '존 카사베츠 회고전'은 시네마테크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존 카사베츠의 영화가 서울에서 처음 필름으로 공개된 10년만의 일이기도 하다. 그 이후 간헐적으로 존 카사베츠의 영화를 몇 차례 상영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11편의 전작을 상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카사베츠가 세상을 떠난 몇년 후, 프랑스의 배우 제라르 드 파르디유는 카사베츠의 영화 5편의 판권을 구매해 프랑스에 개봉시킨 적이 있다. 그는 카사베츠의 열렬한 팬이었다. 제라르 드 파르디유 덕분에 카사베츠의 영화가 프랑스에서 재개봉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또 많은 젊은 영화인들에게 카사베츠가 선망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살아생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영광이었다. 이제 우리가 그의 영향력을 충분히 느낄 시간이다.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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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삶을 긍정하는 에너지
- 존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의 여자>

 

 

 


<영향 아래의 여자 A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는 존 카사베츠의 일곱 번째 장편영화로, 평생의 지지자이자 페르소나였던 지나 로랜스가 주연을 맡았다. 인물의 불안한 내면심리를 ‘얼굴’을 통해서 가시적으로 표현한 그녀는 이 영화로 골든 글러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 영화에는 로랜스 뿐만이 아니라 카사베츠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 대거 출연한다. 평소에 돈독한 우정을 나눴던 피터 포크가 메이블의 남편 역할인 닉을 연기했고, 그의 어머니와 장모 역은 실제 카사베츠의 가족인 캐서린 카사베츠와 레이디 로랜스가, 세 명의 자녀 역할에는 카사베츠의 아이들이 직접 연기를 선보였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카사베츠 자신의 가족영화로서 그에게 가장 친밀한 작업이자, 그가 평생 흥미를 가졌던 미국 가족의 이야기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는 사랑이 붕괴하는 순간을 그린 연인의 영화이기도 하다.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닉과 메이블은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사랑을 확인할 기회를 빈번히 놓친다. 수도공사 직원인 닉은 매일 밤낮 도시 곳곳의 수도건설로 바쁜 시간을 보내느라 아내 메이블과의 약속을 매번 어기고 만다. 예민한 성격의 메이블은 닉의 사랑을 갈망하지만 계속되는 사랑의 좌절로 점차 신경증 증세가 악화되어 간다. 결국 메이블은 닉과 단둘이 보내기로 한 저녁약속이 깨지자 미쳐버린다. 영화는 사랑이 완전히 깨졌다고 메이블 스스로가 확인하는 좌절의 순간에서부터 시작된다.  

 

 

카사베츠의 많은 영화가 그러하듯이 <영향 아래의 여자> 역시 정해진 내러티브에 따라 흘러가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다르게, 사랑의 좌절을 경험한 여성의 심리상태를 중점으로 진행된다.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던 닉과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못한 순간 메이블의 심리는 격동적이고 에너제틱하게 변화한다. 메이블은 저녁약속이 파기된 이후부터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데 이로 인한 착란증세나 알코올 중독의 상태는 단순히 술을 마시고 있는 시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영화 대부분에서 보이는 그녀의 불안정한 심리상태 전반을 대변한다. 사랑의 마지막 순간을 감지한 여성의 불안한 심리는 기쁨, 불안, 희망, 절망, 분노 등의 걷잡을 수 없는 감정 사이를 오간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감정의 상태, 이로 인해 계속해서 이동하는 듯한 운동성은 인물의 심리인 동시에 영화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된다.

 

 

메이블을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계속되는 사랑의 좌절이다. 이 영화에서 부부의 사랑을 좌절하게 하는 것은 주로 외적인 요인에 있다. 우선 노동자 계급의 가정이라는 설정이 그들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닉은 정해진 시간에 근무하는 화이트컬러 계급의 시민이 아니다. 그는 근무시간 이외에도 여러 가지 돌발상황에 이용되는 수도공이며, 본인의 의도에 따라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여기에 미국 노동자 계급이 공유하는 문화도 부부의 걸림돌이 된다. 예를 들어 메이블과의 약속을 어긴 닉은 다음날 아침 10여명이 넘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함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한다. 표면상으로 공동체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노동자계급의 집단문화는 사실상 부부의 시간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스파게티 식사가 진행되는 장면의 인물배치는 이것을 확인해준다. 여기에서 닉과 메이블은 식탁 양끝으로 멀리 떨어져 앉고 두 사람 사이의 빈 공간에는 동료들이 배치된다. 스파게티 접시와 빵 바구니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건네지고, 카메라는 이 접시들의 움직임을 따라 좌우로 이동하다가 메이블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동료의 시선에서 멈춘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샷에서 메이블은 건너편의 닉에게 어떤 사인(sign)을 보내고 있지만, 그는 그 신호를 감지하지 못한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메이블은 의도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시선으로 닉의 동료들에게 이름을 묻기 시작한다. 극도로 부산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이 시퀀스에서 메이블은 자신의 사랑이 전달돼야 할 대상을 잃고 헤매게 되는 것이다.

 

 

식사가 끝난 후에 이어지는 가족들의 방해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시어머니의 전화와 아이들의 귀가는 두 사람의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 메이블이 오랜 시간동안 개인적인 시간에 침해받아왔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가족이 주거하는 공간은 2층으로 된 가정주택이다. 하지만 이 주택에는 메이블의 개인적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부는 간이침대를 이용하면서 식사시간에는 식당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다용도 방에서 생활한다. 그렇기 때문에 'PRIVATE'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적힌 문이 눈에 띈다. 사실 이것은 침실에서 욕실로 통하는 문이지만 실재로 이곳은 메이블이 가진 최후의 도피처이다. 그러나 이 공간도 메이블만의 사적인 공간이 될 수는 없는데, 이 문은 호출을 당하면 즉각 응답을 해야 하고 언제라도 개방해야만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메이블과 저녁을 같이 보낸 남자의 행동과 닉의 동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전날 밤 함께 술을 마신 남자는 그녀가 보이지 않자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면서 그녀를 불러낸다. 동료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닉의 행동 역시 동일하게 작용한다. 이 장면에서 닉은 동료들을 현관에서 기다리게 한 다음, 자신은 문을 통해 침실에 진입한다. 그러고 나서 메이블과의 대화를 나눈 후 그는 동료들에게 침실과 현관을 잇는 문을 개방함으로써 부부침실을 공적인 장소로 탈바꿈 시킨다. 이 영화에서 메이블에게 주어진 '개인적인 공간'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계속해서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노출해야 한다는 사실과 남편의 무관심은 메이블을 절망하게 만들고, 이렇게 축적된 불만들은 그녀가 커다란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데 동력이 된다.

 

 

메이블의 히스테릭한 상태는 그녀의 심리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에너지는 카메라 무브먼트에 또한 동력이 된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한 곳에 머무는 일은 극히 드물다. 카메라는 기복이 심한 메이블의 심리처럼 끊임없이 이동하며 관객의 시선까지 이동하게 만든다. 그리고 인물들의 동선은 항상 카메라를 앞질러 이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들은 정해진 프레임을 벗어나게 되고 영화의 활력 넘치는 에너지를 생산해낸다. 메이블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퀀스만 놓고 보더라도 그녀는 정원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아이들에게 고함을 친다. 카메라는 재빠르게 메이블을 포착하려 애쓰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프레임 오른쪽으로 빠져나간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인물들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욕망이 외적인 제약을 넘어, 카메라의 프레임을 넘어 벗어나는 것을 표현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전반부(메이블이 제프 박사를 만나 정신병원으로 이송되기 전)까지는 프레임을 벗어나는 인물이 메이블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반부로 넘어가는 기점부터는 가족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 영화에는 크게 두 번의 다툼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메이블이 정신병원에 이송되기 직전에 닉, 시어머니, 정신과 의사 제프와 함께 벌이는 소동이다. 이 장면에서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흥분된 상태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앞다퉈 고함을 친다. 시어머니는 메이블의 남자관계와 관련된 악담을 쏟아내고, 닉은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겠어”라는 절망적인 말을 남긴다. 흥분한 인물들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생각들을 대사를 통해 발언함으로써 추상적이었던 것들을 표면적인 것들로 변화시킨다. 다른 하나는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메이블이 가족들과의 식사를 망친 다음에 닉과 아이들이 함께 벌이는 소동이다. 흥분한 메이블은 자해를 가하고 놀란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엄마에게 매달린다. 상황을 통제하려는 닉은 엄마와 아이들을 격리시키려 하지만 마음만큼 쉽사리 되지 않자 메이블의 뺨을 후려친다. 이 장면에서는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심리적인 에너지가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 두 번의 소동에서 공통된 것은 인물들의 심리가 어떤 방식을 통해서든 외적인 것으로 발산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물들 모두는 결국 영화 내내 메이블이 보여줬던 것과 같은 상태에 놓였다는 것을 뜻하며, 그들이 지금까지 가장 진솔한 감정을 표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친 일상생활과 희미해져가는 희망은 그들이 솔직한 감정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절망적인 시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분노에 찬 에너지를 소진한 이후의 사람들은 다시금 삶을 살아가고 희망을 되찾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한바탕 소동을 벌였던 가족은 이내 평온을 되찾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보살핌 아래서 행복한 잠에 빠지고, 닉과 메이블은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집안 정리를 한다. 더 이상 그들의 얼굴에서는 불안감을 찾을 수 없고, 오히려 평온하고 행복한 느낌을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는 일상의 붕괴와 사랑의 좌절이 도래한 순간에 다시금 삶을 긍정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이처럼 카사베츠 영화의 힘은 일상을 스크린에 옮겨놓았다는 데에 있다. 그의 영화는 드라마틱한 순간보다 인간들의 삶과 일상 그리고 사랑을 표현한다. 그래서 카사베츠의 영화는 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스크린을 통해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삶에 좌절하고 사랑에 상처받는 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한 <영향 아래의 여자>는 카사베츠 영화의 정점에 놓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고운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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