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의를 지키는데 이유가 어딨어

- 존 스터지스의 <황야의 7인>

지난해 <황야의 7인>이 톰 크루즈 주연으로 다시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존 스터지스 감독이 만든 <황야의 7인>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무엇보다 율 브리너,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찰스 브론슨 등의 개성적인 배우들이 출연해 인기를 끌었다. 작품의 성공으로 이후 속편이 세편이나 만들어지기도 했다. 때마침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 분노의 추격자>가 개봉하는 즈음에 과거의 서부극과 새롭게 만날 좋은 기회다.

 

 

서부극에서 총싸움은 장르의 약속이다. 서부극의 주인공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총을 빼들고 상대와 싸워야 한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보안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가장을 잃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인디언들의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서, 잃어버린 조카를 찾기 위해서 등등. 이들은 결국 싸워야만 하고, 이때 중요한 것은 싸움의 이유다. 제대로 된 싸움의 이유만이 이들의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존 포드의 <역마차>의 키드(존 웨인)는 처음에 등장할 때만 해도 위험한 무법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디언들과 싸우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총을 빼들 때 정의의 편에 설 수 있었다. 즉 왜 싸우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존 스터지스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를 리메이크해 만든  <황야의 7>은 흥미로운 영화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세 번의 총격전에서 눈여겨 볼 것은 첫 번째와 마지막 싸움인데 여기서 주인공들은 굳이 싸울 필요가 없는데도 싸운다. 이를테면 마을 사람 모두가 죽은 사람의 장례를 거부하고 있을 때 크리스(율 브리너)는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관이 실린 마차에 용감히 올라탄다. 그리고는 생명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싸움을 한바탕 벌인 뒤 결국 죽은 자를 땅에 묻어준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거기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옳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등장하는 이 거침없는 행동이 관객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준다.

 

마지막 싸움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악당은 의외로 이해심이 넓은 편이라서 힘들게 붙잡은 크리스 일행을 말까지 태워서 마을을 떠나게 해준다. 그러니 주인공들이 이대로 마을을 떠났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예전처럼 악당에게 세금을 바치며 살았을 테고, 주인공들은 다시 자유로운 총잡이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말머리를 돌린다.

영화에 등장하는 어떤 액션 장면보다 이 결심의 순간이 가장 큰 짜릿함을 준다. 꼭 싸워야 할 이유도 없고(배신은 마을 사람들이 먼저 했다) 수적으로도 불리하지만(“자네들 정말 미쳤군!”), 결국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 그 이유는 마을 사람들을 향한 측은지심이었을 수도 있고 자신의 총을 함부로 다룬 악당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다. 또는 마을에 숨겨 놓았다고 믿는 보물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관객의 짐작일 뿐이며 우리는 7인의 총잡이들의 속마음을 끝내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 조차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눈빛과 단호한 몸짓은 결국 관객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설득시키고야 만다. 이보다 명쾌하고 매력적으로 싸움의 이유를 납득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글_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말 위의 두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본 비평가 크리스 후지와라의 존 포드 강연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대미는 미국의 비평가인 크리스 후지와라가 장식했다. 지난 26일에 이어 27일 저녁에는 그의 두 번째 선택 작인 존 포드의 <말 위의 두 사람> 상영 후 후지와라와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포드의 작품 중 가장 기이하다는 평가를 받은 <말 위의 두 사람>을 좋아한다는 크리스 후지와라의 강연은 <말 위의 두 사람> 팬들에게는 영화만큼 흥미로운 자리였으며, 존 포드 영화로는 이상하다고 여긴 관객들에게는 다시 한 번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말 위의 두 사람>이 갖고 있는 매력과 존 포드란 인물에 대해 꼼꼼하게 짚어준 크리스 후지와라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존 포드의 <말 위의 두 사람>을 이번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에서 평론가 크리스 후지와라 씨께서 선택해주셨다. 이 영화는 몇 분의 열렬한 지지층이 있는 반면 존 포드 영화중에서 가장 심심한 영화 또는 <수색자>라는 뛰어난 영화를 만든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이상한 컬트영화에 속한다. 포드 영화 같지 않다는 평도 들은 바 있고 작품에 대한 애호가 유독 나뉘는 작품이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가 흥미로운 자리가 될 것 같다. 이 영화를 선택하신 크리스 후지와라 씨를 모시고 존 포드와 <말 위의 두 사람>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크리스 후지와라(美 영화평론가): 이 영화는 좀 특이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포드 영화로는 마이너 영화로 간주되었고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의 내용을 가지고 비슷하게 반복한 영화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영화라고도 하였고, 상반되는 요소들이 많은 영화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포드는 이 영화를 통해서 이전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영화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하면서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포드는 이 영화를 통해서 미국과 개척사회, 백인들의 사회, 코만치 인디언들의 사회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포드가 만든 이상적인 서부영화에서 등장하는 군대도 등장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들의 많은 요소들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거기에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61년에 만들어졌는데 1956년에 만든 <수색자>와 굉장히 비슷하다. 두 영화 다 코만치 인디언들에 의해 잡혀간 백인 여성 또는 소녀들을 다시 찾아오려는 노력에 관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굉장히 다르다. <수색자>의 경우는 나탈리 우드가 열연했던 데비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 굉장히 감동적으로 환영을 받게 돼서 나중에 적응을 하고 사회에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에 이 영화에서 엘레나는 거부당한다. 엘레나라는 캐릭터가 코만치와의 육체적인 관계에 의해 정의 내려졌고 변절된 사람 더 이상 순결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수색자>에서 존 웨인의 캐릭터는 인종차별주의자로 인디언을 증오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끝에서는 그마저도 ‘데비를 죽이지 않겠다’라며 인종차별주의자적인 생각을 초월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방금 본 영화에서 러닝울프라는 10대 소년은 사형을 당하는데, 이것이 마치 심판과 변호인이 있었다는 정의로운 재판의 결과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백인들 깊은 내면에 있는 폭력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백인들의 타고난 폭력성이 발산된 장면에서 마치 공포 영화 같은 분위기가 된다. <수색자> 물론 무서운 영화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수색자>의 경우 최소한 같이 화합해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반면에, 이 영화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일부 비평가들의 말처럼 포드의 이전 영화와 다른 더 어두워진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서 인종들이 화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포드 영화에서 완전히 새로운 요소는 아니다. 거스리 맥케이브 역을 한 제임스 스튜어트와 엘레나가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끝 장면은 1939년에 만들어진 <역마차>와 비슷하다. <역마차>는 이전에 매춘을 했다는 이유로 사회가 버린 여자와 무법자 존 웨인이 마을을 떠나서 서부로 가는 모습이 나온다. 굉장히 유명해진 마지막 대사가 있는데 ‘그래도 최소한 이 사람들은 문명의 축복으로부터 구제를 받은 것이다’라는 말이다. 1939년에 만들어진 <역마차>에서조차도 백인들이 서부에 와서 보여준 사회의 모습이 이미 부패된 사회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위선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또 반복되는 요소가 있는데, 초반에 보면 제임스 스튜어트가 다리를 난간에 올려서 꼬고 앉아 있는 거다. 이것은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로 나왔던 헨리 폰다의 모습과 비슷하다. 여기서 왜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64년에 만든 <샤이안>에서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황야의 결투>에서 헨리 폰다가 했던 와이어트 어프 역을 맡은 바 있는데, 폰다와 굉장히 다른 것이, 폰다가 맡았던 와이어트 어프는 OK목장에 가서 적을 상대하고 서부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영웅이 되는 반면에, <샤이안>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맡은 와이어트 어프는 행동을 거부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냥 카드만 치고, 위기의 순간에는 떠나버려서 개입을 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이상 예전에 알려졌던 영웅이 아니고 이제는 안티-히어로 역할인 셈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는 결과다. 그래서 난간에 다리를 올리고 뒤로 기대고 있는 이미지가 반복되는 것을 과연 우리가 어떻게 받아드려야 되느냐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맥케이브를 <황야의 결투>에 나온 와이어트 어프와 비교해서 그보다 못한 사람으로 봐야 되는지, 포드가 자신을 비판하고 있는지라는 의문이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이미지가 영화 끝에 다시 나오는데 이번에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아니라 좀 더 어리고 우스꽝스러운 엉뚱하고 코믹한 캐릭터로 나온 워드다. 워드가 이제 보안관이 된 상황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는데, 워드가 이 자세를 취한 것은 포드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사람들에게 던진 대답이라 볼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이 포드가 자기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고 하는데, 포드는 이미지 그 자체로는 순수함이나 가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단지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언제든 차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보고 마음에 들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애착이 가는 캐릭터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그래서 행복하거나 만족한 상황에 머물길 원하는데, 포드는 이것을 거부하고 이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며 그런 것에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한다. 이런 이미지들이 꼭 필요한 이유는 다른 단계, 차원의 진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손짓이나 몸짓, 행동, 언어, 언어의 실패 또는 문제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 보면 내러티브 측면에서 몸짓이나 손짓, 행동 또는 언어에 있어서의 자유가 나타난다. 포드는 이전부터 추구하던 것들로 그의 초기 무성영화들에서도 특정 제스처가 나오는데 이 제스처들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 반복 되서 나타난다. 마치 의식과도 같아 보인다. 갈수록 그의 영화에서 이런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 <말 위에 두 사람>에서는 마치 그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과 캐릭터들을 보는 관점이 굉장히 포드답고 순수한 영화라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리처드 위드마크와 제임스 스튜어트가 타사코사 마을을 떠나기 전 강가에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3분정도 컷 없이 진행되는 장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이 장면을 거론한다. 여기서 두 사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지만 중요한 것은 위드마크가 스튜어트에게 결국은 왜 가기로 결정하기로 했냐는 질문이다. 스튜어트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긴 하지만 그 장면 길이의 3분이 거의 다 지나서야 대답을 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간접적인 접근 방식이 굉장히 포드다운 방식이다. 직설적으로 문제를 다루지 않고 오랜 시간을 걸쳐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끊기고 끊기면서 대화가 진행된다. 결국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중간에 끊기게 하는 것들에 집중을 하게 만든다. 시가를 피운다든가 벨이 다리에 차고 다니는 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든가 등 손짓, 몸동작, 겉으로 보기에는 즉흥적인 행동에 의해 계속 대화는 끊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결국은 대화 내용의 앞에 나서게 되면서, 스튜어트의 대답은 뒤로 밀려 끝에 나오게 된다. 이 장면이 대단한 것이 두 배우간의 리듬감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훌륭한 재즈 대가들이 같이 연주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즈 뮤지션들처럼 각자의 스타일로 연주를 하면서도 화합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위드마크의 경우 굉장히 단절되어 짧게 말을 하고 스튜어트는 광범위하게 편하게 얘기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느낌을 주는데 그 둘의 앙상블이 돋보인다. 이 장면은 제목과 관련된 것도 표현해 주고 있다. 위드마크의 ‘왜 가기로 했냐’는 질문을 바꿔서 얘기하자면 ‘왜 우리 두 사람이 타고 가야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 보면 말을 타고 어디로 간다는 것보다 둘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여정이 중심이 되는 내러티브를 가진 서부영화들, 특히 포드가 만든 영화들은 풍경의 아름다움이 중요시되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상징이 기본적으로 들어있다. 그러나 <말 위의 두 사람>에서 여정은 굉장히 단순하고 풍경에 대한 강조도 없으면 오히려 영화 안에서 여정은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아까 말한 것처럼 여기서는 말을 타고 어디 간다는 것보다는 둘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리차드 위드마크를 커플로 봤을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왜 둘이 친구인가’라는 점이다. 영화 초반을 보면 서로 이미 알고 있던 사이고 어느 정도 서로 애착도 있는 사이로 나타나지만 둘에 과거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그리고 영화 후반에 가서는 굉장히 적대적으로 변해서 우정이 계속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편에서 스튜어트가 겉치레식으로 경례를 하니까 위드마크가 그만하라고 하면서 우린 너무 오랫동안 친구였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스튜어트는 아니 도대체 우리가 친구라는 생각을 했냐고 반박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구나, 원래는 친구였지만 일어난 일 때문에 관계가 틀어졌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 후반부 무도회 장면에서는 적대적인 둘이 다시 친구가 되는데, 전에 싸웠던 것을 대화로 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시 친구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다시 친구가 되는 것이 포드다운 방식이다. 문제가 있었을 때 얘기하거나 해결하지는 않지만 이 두 사람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같기 때문에 다시 합칠 수밖에 없다. 둘의 우정은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전에 강가에서 둘이 대화하는 모습에서 강은 둘의 우정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포드가 갖고 있는 우정의 개념은 하워드 혹스와 비교하자면 굉장히 다르다. 혹스 같은 경우는 두 남자 사이의 우정에 관해서 직설적인 발언을 꼭 하게 된다. 그런 발언이 없을 경우에는 <스카페이스>처럼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죽이는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게 된다. 반면에 포드는 우정이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둘이 스크린에 모습이 나타나는 것만으로 우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어떤 대화나 의식이 전혀 없다. 그의 후기작인 <독수리의 날개>에서 존 웨인과 댄 데일리의 모습을 보면 진정한 우정 관계라고 볼 수 있지만, 둘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나 친밀감은 직설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둘이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만 묘사된다.

 

이제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많고 사랑받는 배우였다. 그렇지만 포드처럼 그의 연기를 지휘한 감독은 없었다. 그가 평상시에 말을 더듬고 주저하는 것처럼 반복하는 것을 극에 달하게 해서 일종의 비주얼 패턴처럼 보이도록 한다. 포드는 그의 말에서 보이는 언어의 매너리즘 조차도 제스처로 보이게 한다. 언어도 제스처처럼 개인적인 언어를 이용해서 말이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서부영화하면 떠오르는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에서 탈피한 듯 보인다. 그리고 일부 비평가들이 냉소적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일 텐데 오히려 저는 심오한 사실주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포드가 이전의 것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세계의 발달 과정에서 당연한 결과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 영화가 실제 만들어진 60년대 초, 그 때 당시 미국의 역사와 인종문제, 그리고 사람들 간의 분단을 다루고 있다. 또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사실주의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두 사람이 마을로 돌아온 다음에 존 맥킨타이어가 분한 프레이저가 말하기를 ‘내가 가르쳐주지 못한 것을 자네가 가르쳐주기를 바랐다’라고 했다. 이 말은 ‘신만이 신의 역할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이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대사를 듣고 떠오른 것이 <아파치 요새>에서 헨리 폰다가 말하길 ‘군대를 지휘하려면 제대로 지휘를 해라’라는 말인데, 말하자면 ‘신이 되려면, 신이 되어라’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할리우드라는 영화의 중심에서 가장 존경받는 감독인 존 포드가 신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존 포드인 나도 신의 역할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거와 같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영화 초반 맥케이브가 의자에 앉아있는 장면에서 맥케이브를 포드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포드는 30년 대부터 시력이 굉장히 나빴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60년대 가서는 거의 장님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점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자기가 못 봤다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봤다고 얘기해서 사람들이 무서워하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장님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봤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다면 저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것을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게 했다. 초반부 장면에 마을을 차지하러 온 두 도박사는 맥케이브를 무시하면서 ‘눈이 있지 않냐’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자면 ‘장님이냐 이 병신아’라는 심한 말을 하는거다. 맥케이브는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다 알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맥케이브가 하는 행동은 마치 감독이 하는 행동과 비슷하다. 맥케이브도 감독처럼 미션을 가지고 떠나는데 이것은 위험도가 높고 성공할 가능성이 낮으며,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예측불허의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만드는 것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을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서 관객에게 제시하듯이 이 영화 속에서 맥케이브는 두 명의 포로를 데리고 온다. 영화 속의 맥켄들러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자신이 부인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거짓말을 통한 위안이라고.” 부인에게 주는 것이 영화가 주는 거짓말과 같다. 특히 서부영화에서는. 그래서 관객이 받는 것 또한 거짓말 속의 위안이다. 현실감각이 뛰어난 포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대중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거짓으로 재현한 것으로 위안을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존 포드는 말하자면 의식의 대가이다. 왜냐하면 엔터테인먼트 역시 또한 의식이어서다. 이 의식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영화에서 재현되어서 잊을 수 있게끔 해주는 거다.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들 때 포드는 사람들이 과거의 일을 잘 잊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말 위의 두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본 존 포드 강연을 들어줘서 감사하다. (정리: 신윤하)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선택,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시네토크

이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추천한 작품은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로 지난 17일 이 영화에 대해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영진 평론가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 한껏 젖어있는 관객들을 보며 ‘나도 여러분이 보시는 그대로만 존 포드를 알고 있다’는 말을 건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화에 대한 개괄적 설명과 함께 평소 쉽게 접할 수 없는 존 포드 감독에 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풀어 주었던 시간이었다. 재치와 유머가 한껏 묻어났던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시네토크 현장을 이곳에 옮긴다.


김영진(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영화 잘 보셨는지 궁금하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어렸을 때보면서 막 울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대책 없이 센치한 영화 같다. (웃음) 감독 존 포드에 대해서 우리는 늘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우리가 대체 그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감독이라고 하지만 명쾌하게 왜 위대한지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어렵다. 존 포드는 무성영화부터 시작했던 감독이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 다져진 감독이기 때문에 우리가 도저히 당도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감독이었다. 주로 그는 ‘촬영은 사람들의 눈을 찍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의 영화를 보면 이 말이 정말 공감된다. 존 포드 영화현장의 전설 중 하나가 우연찮게 굉장한 장면을 건진다는 것에 있다. 이를테면 진주만 습격 때 존 포드가 현장에 있었는데 그는 그걸 카메라에 담았다. 또한 <황색 리본을 한 여자>에서 기병대가 말을 타고 갈 때 내려치는 천둥번개를 그대로 화면에 담았다고 한다. 일부는 철저하게 기획된 것들도 많았겠지만 이 같은 에피소드들은 정말 기막힌 우연과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존 포드는 전성기가 굉장히 길었고 외형상으로 거의 모든 작품을 통해 확고한 커리어를 쌓았던 감독이나 그럼에도 불가하고 그의 최고 정점을 꼽자면 1939년 후 <역마차>와 <젊은 날의 링컨>, 그리고 <모호크족의 북소리> 등을 연달아 발표할 때다. 흔히 존 포드의 영화는 패밀리 전통에 대해서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미화를 하고 있다고 읽혀지는데 사실 그것 이상으로 패밀리 공동체가 부서지는 걸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는 게 훨씬 흥미롭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처음 봤을 때 아버지의 죽음을 보여주는 방식이 엄청나게 충격적이었다. 아버지가 죽을 때 아들의 대사 한 마디 없이 바로 점프해서 어머니로 넘어가는데 어머니가 ‘영광을 봤다’라고 하잖나. 그런 ‘디그니티’, 가족이 ‘디그니티’를 지키며 어떻게 죽음과 대면하는가를 절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장 이상적인 부분이다.

존 포드 영화에서 말하기 힘든 부분들 중 하나는 영화에 나타나는 텐션을 어떻게 발견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논구를 많이 했지만 존 포드의 살아생전 인터뷰에서는 그럴듯한 대답이 없었다. 존 포드는 1950년대 이후에 비평적 명성이 높아지며 유럽에서 엄청난 열풍이 불었던 감독이다. 인터뷰는 거의 코미디였다. (웃음)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인터뷰가 있는데 것도 재밌지만 서면으로 볼 수 있는 평론가들 인터뷰는 더 희극적이다. 존 포드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흔히 존 포드가 굉장히 권위적이었다는 말을 하곤 한다. 존 포드를 회고하며 그의 스태프들은 존 포드를 ‘고집불통 노인네’라고 말하지만 돌아보면 그와 일한 것은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존 포드는 인터뷰를 통해 ‘나에게 영화는 직업이고 내 인생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는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를 좋아했고 그것을 즐겼을 뿐이지 자신이 한 번도 위대하다거나 하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들이 존 포드 영화 복합성의 깊이를 설명해주는 한 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존 포드는 할리우드 인더스트리 내에 있었고 단 한 번도 스스로 각본을 쓰지 않았다. 당시 영화사의 사장들은 소위 ‘영화 밥 먹고 자란 사람들’이라 나름대로 영화의 도사였다고 한다. 그날 찍은 분량을 보고 맘에 들지 않으면 재촬영하고 편집기사 불러서 편집하고 했던 시스템이 있어서, 감독은 실제로 공장의 현장책임자정도에 불과했었다. 이로 인해 존 포드도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존 포드는 왜 ‘존 포드’일까. 그는 미국의 역사에 대해 굉장한 탐구를 했던 감독이다. 책도 많이 읽고 영화들을 보면 독립전쟁부터 서부시대는 물론이고 2차 세계대전까지 역사적 시기의 영화들을 많이 다루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는 현재나 미래가 늘 과거로부터 시작한다. <황야의 결투>에서도 그렇고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도 주인공의 회상부터 시작하지 않나. 과거를 회상하며 미래를 다짐할 때 전통은 굉장히 강력한 흡입력을 보여준다. 놀라운 건 존 포드가 그려낸 현재와 미래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낙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나중에 이르러서 신화 자체도 스스로 해체하고 파괴하는 정도까지 발전한다. 이게 바로 존 포드 영화의 특이점이다. 많은 할리우드감독들은 존 포드만큼 미국을 사랑했고 미국적 가치를 주장했지만 그만큼 미국의 역사 이면의 양극성을 복합적으로 드러낸 감독은 없었다. 근데 이게 드라이하지 않고 센치하며 유머러스하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나. 존 포드 영화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잔치장면이다. 그는 이걸 거의 의식적으로 보여준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도 밥 먹은 것을 마치 의식 치루는 것처럼 아기자기하게 보여준다. 일상에서 흥분되는 하모니의 순간들을 잡아내는 거다. 이 장면들은 언제나 순간적이다. 향연이 짧게 끝나고 그다음은 대체로 가족의 해체라든가 노동착취, 초기 자본주의의 극악함이 극에 달할 때의 상황이 전개된다. 로빈우드는 포드적 히어로는 결말에 늘 혼자 남는다는 말을 했다. 기이한 패러독스다. <분노의 포도>에서도 마지막에 어머니를 떠나는 헨리 폰다가 전혀 낙관적이지가 않게 보인다. 전통의 가치는 신화화된 시선에 뿌리를 두고 현재와 미래를 그려내지만 항상 현실의 복합적 조직들이 인물들이나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하지만 끝까지 ‘디그니티’를 잃지 않는다는 것, 그게 감동을 준다.

존 포드의 스타일은 수식이 없다. 그는 얼터너티브한 숏을 절대 쓰지 않는다. 그렇게 카메라에 담겨진 장면들은 편집실에서 그냥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거다. 물론 이것도 존 포드의 전설 중 하나다. 그는 두 번 찍으면 불 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히치콕은 치밀한 콘티를 짰지만 존 포드는 그냥 굵게 제작하는 스타일이었다. 요즘엔 왜 다들 이렇게 찍지 못할까 의문이 든다. 현존하는 존 포드 스타일의 유일한 감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생각이 든다. 이스트우드는 여전히 호소력이 있지 않나. 결국 영화는 다 인품 그대로 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존 포드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존 포드는 정말 철두철미한 감독이다. 무성영화 시절부터 영화를 찍어왔고 엄청난 커리어가 붙었기 때문에 그는 전설의 거장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관객1: 클린트 이스트우드 말씀을 하실 때 공감을 했다. 감독 가치관의 옳고 그름이 영화에 투영되고 또 그것이 영화의 가치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김영진: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치는 불필요한 것 같다. 이면을 같이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겉으로만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많잖나. 훌륭한 예술가는 그 레벨이 아닌 것 같다. 복합성을 응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분노의 포도>같은 경우도 보수적인 사람이 만든 영환데 요즘 이야기 같지 않나, 용산 이야기 같고 어쩜 이렇게 현재와 똑같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분노의 포도>가 존 스타인벡의 사회리얼리즘을 감상적으로 변형시켰다는 글을 보았는데 나는 이것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영화를 보면 가족이 트럭을 타고 난민촌으로 가는데 놀라운 숏이 나온다. 모든 난민들의 얼굴에 초점이 맞아있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굉장한 리얼리스트의 태도다. 물론 정서적으로 영화에서 찡한 것 도 있었다. 극 중 아들이 엄마와 춤을 추는데 엄마는 아들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들은 엄마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로 융합되어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그 장면이 너무 감동적이다. 보수적인 엄마와 운동권 아들이 잔치에서 춤을 추는 것을 묘사하는 것 같지 않나. 이것에 흐르는 인간애라는 건 진짜 성숙한 무언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관객2: 영화 속에서 가족만이 유일하게 주인공들의 불명예를 안아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가족들은 현실 때문에 죽거나 떠난다. 양면성과 복합성을 드러내는데 이런 영화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가르쳐달라.
김영진: 본인이 말씀하셔놓고(웃음),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된다. 이 영화도 충분히 산만하게 찍을 수 있는 영화인데 산만하지 않다. 비교적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편인데 이런 구조에서 양가성을 나타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가 머리면 어머니는 가슴이라는 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버지가 ‘머리’라지만 아들들이 노조를 결성할 때는 갑자기 감동적으로 나오지않나. 이런 인물들의 세세한 지점을 보는 것이 정말 재밌다.


관객3: 영화에서 특이하게 노래가 많이 나오는데 어떤 부분은 뮤지컬이라 생각될 정도다. 노래의 영향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주신다면.
김영진: 나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가 존 포드 개인의 자전적 느낌이 수용되었다 생각한다. 존 포드는 아일랜드계였고 미국에서 태어낫는데 11명의 형제들 중 막내였다. 그의 11명의 형제들 중 6명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때문에 휴에 대한 애착이 어느 정도 짙게 담겨있지 않나. 사실 존 포드의 댄스파티만 나오면 나는 이성을 잃는다. (웃음) 정말 따듯한 순간 아닌가.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니 나도 존 포드를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감독의 산맥을 넘어본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거다. 여러분들과 나, 우리 모두 존 포드를 너무 익숙하게 보지 말고 제한적 영역을 뚫었던 위대한 감독이라는데 동의해야한다. 아직도 나는 존 포드를 탐구 중이다. (정리: 강민영)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