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8일, 프랑수아 트뤼포의 <사랑의 도피> 상영 후 “앙투안 드와넬의 모험”이란 주제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번 시네토크는 <400번의 구타>로 시작해 <사랑의 도피>로 마무리되는 ‘앙투안 드와넬 시리즈’의 전반적인 이야기와 트뤼포의 영화세계에 대한 것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함께 보며 진행됐다. 여기에 그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이 영화는 앙투안 드와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부부의 거처>로 트뤼포는 드와넬 시리즈를 마감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동료 감독 한 명이 코펜하겐의 한 극장에서 2시에 <400번의 구타>로 시작해 8시에 <부부의 거처>로 끝나는 '드와넬 시리즈'를 연속 상영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트뤼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시리즈를 한 편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 편 더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부부의 거처>의 말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고, 그래서 작정하고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 행복하게 결말을 맺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거의 10분 이상 과거 드와넬 시리즈의 영화 클립을 사용했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400번의 구타>로 시작한 트뤼포의 영화적 특징이 가장 많이 녹아들어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트뤼포의 영화를 드와넬 시리즈를 이야기하려 한다.

 

이 영화의 시작은 아침을 맞은 두 연인의 아침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트뤼포 영화가 그러하듯 성애의 장면은 없다. 사소한 순간이지만 처음의 장면을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두 연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중간에 에펠 탑이 보인다는 것이다. <400번의 구타>의 첫 시작이 에펠 탑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왜 에펠탑인가? 트뤼포는 유년기에 거리를 방황하고 돌아다닐 때 에펠 탑을 중심 기점에 두고 길을 찾았다고 한다. 트뤼포의 영화 대부분에는 그런 기억 때문인지 언제나 에펠 탑이 나온다. 이 영화는 외부 풍경으로 에펠 탑이 보이지 않고, 내부의 공간에 자리잡혀 있다. 굳이 말하자면 <400번의 구타>가 바깥으로 떠도는 영화라면, 이 영화는 안으로 들어오는 영화, 내향적인 영화, 내부로 향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완결편이기에 영화 곳곳에 과거의 장면을 활용하고 있다. 몇 가지 플래시백이 교묘하게 사용되고 있다. 첫 번째 플래시백은 앙투완과 부인이 이혼을 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를 줌인하면서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드와넬 시리즈는 드와넬이 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영화에 오면 드와넬 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플래시백이 사용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앙투안 드와넬의 삶을 복수적인 시점으로 보고 있는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두 주인공이 닮았다. 베르트랑은 돈 주앙 같은 인물이지만 여자를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사랑한 남자로, 두 사람의 캐릭터가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대신 차이는 있다. 베르트랑이 외향적이라면 앙투안은 트뤼포와 비슷하게 내향적인 인물이다.
 
플래시백이 활용되는 것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플래시백은 기차에서 벌어지는 장면이다. 기차의 움직임과 더불어 과거로의 시간이 흘러간다. 기계의 운동은 앞으로 향하고 그 가운데 앉혀진 사람들은 과거의 시간을 상기한다. 운동과 시간이 결합되어 있다. 운동성은 기제들, 즉 기차나 자동차가 있고 필름의 움직임이 과거의 시간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과거의 플래시백을 실제로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이 과거에 출연했던 영화의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사실은 기록된 과거를 다시 되돌아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영화에서 플래시백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생각 안에서 있었던 어떤 심상이 펼쳐져 나가는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과거에 촬영된 필름의 릴이 다시 펼쳐져 나가는 플래시백이다. 절차적으로는 같지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질료가 트뤼포가 이미 십여년 전에 촬영한 필름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라는 시간이 철저하게 물질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물질적인 사물, 필름, 사진 같은 것들을 통해서 과거라는 시간이 환기되어 간다.

 

 

 

 

영화의 기본적인 이야기는 소설로서 자신의 인생을 꾸려나가려고 했던 드와넬의 이야기다. 과거에 영화로 봤던 그의 이야기가 이번에는 픽션(소설)이라는 것을 사용해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일과 소설에는 차이가 있다. 이 영화의 맥락 안에서만 보자면, 앙투안 드와넬에게 있어 소설은 자신의 삶과 인생을 회고하는 것이자 동시에 자신의 삶을 소설이라는 것을 통해서 변경해가는 것이다. 자기 인생을 근거로 해서 작품을 만들어나가기에 자기의 삶을 조금 윤색하거나 각색해나가는 것이 가진 창작성의 문제도 담겨져 있다. 동시에 그것은 드와넬 시리즈라는 것 자체가 트뤼포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자전적 성격의 한계성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어떻게 삶과 영화를 결합하는가의 문제, 이것은 트뤼포를 위시한 누벨바그 감독들의 공통된 질문이었다. 고다르와 트퓌로를 비교하자면, 고다르가 삶과 영화를 원 플러스 원처럼 플러스 결합했다면, 트뤼포는 마이너스로 했던 것 같다. 즉, 삶에서 빠진 부분을 영화로 메꾸려 했던 것 같다. 삶에서의 부족분을 삶에서 회복시킬 수 없었기에 영화라는 것으로 대치시켰다고 볼 수 있다. 고다르에게 삶과 영화가 대등했다면, 트뤼포는 영화가 삶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 영화에서 앙트완이 소설을 쓰는 창작 행위의 동기가 트뤼포의 그것처럼 삶의 부족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드와넬이 어째서 소설가가 됐는가, 혹은 <여자를 사랑한 남자>에서 베르트랑이 왜 소설가가 됐는가를 생각한다면 이런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법정에서 재판관인 여자를 쳐다보는 장면의 플래시백이 있다. 여자의 안경을 쳐다보는 순간, 클로즈업이 되면서 <부부의 거처>에서 크리스틴의 모습을 회상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의 플래시백은 회상이라는 것을 특정한 사물, 사진, 필름 등을 경유해서 진행되는, 회상의 물리성이라는 프로세스를 거친다는 공통점이 있다. <400번의 구타> 이후의 드와넬 시리즈 전체를 봤을 때, 드와넬의 직업이 어떤 변천을 거쳤는지를 유심히 보면 드와넬이란 인물과 직업이라는 게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드와넬이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그러면서 소설가가 된다. 예술적인 표현들과 표현의 매질, 즉 물질적인 질료성의 프로세스들을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트뤼포가 매진하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콜레트가 기차 안에서 소설을 읽어나갈 때 책과 과거의 회상 장면이 오버랩되어 보이는데, 이 영화에서 충. 과거에 필름으로 찍혀진 것, 즉 이미지와 활자화된 문자와의 충돌이 있다. 자전적이 소설과 자기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과, 그것이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이다. 이 둘이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장면화되어 있다. 트뤼포의 영화에서는 오버랩, 디졸브, 아이리스 등의 장면들이 많다.

 

소설 그 자체와 나중에 소설을 읽으면서 이 여자가 떠올렸던 자신의 과거의 기억이 충돌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필름으로 찍힌 것과 회상, 이미지라는 것과 활자화된 문자가 같이 충돌되는 것이다. 여기서 소설은 자전적인 소설을 쓴 것인데 자기의 이야기라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인 이미지로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장면화된다. 트뤼포 영화를 보면 디졸브, 오버랩, 아이리스 같은 방식의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표현적 방식 안에서 영화적 디졸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나간다. 이런 특징들은 누벨바그 작가군 중에서도 트뤼포가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런 방식을 자주 사용했던 이유는 장 콕도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기차의 플래시백 장면에 이어 앙투안이 자신이 신작소설의 구상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특별하다. 그 전까지 소설은 자신이 겪어왔던 것에 근거해서 구성한 픽션이라면, 여기서의 신작은 자기가 떠올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나중에 보면 자기가 경험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자신이 경험한 것이냐 아니냐라는 (진위성) 문제보다는, 이 장면에 등장하는 사진이 꽤나 흥미롭다. 한 남자가 사진을 찢어버려서 찢어진 사진을 앙트완이 줍게 되고, 조각난 것을 붙여서 그가 여자를 찾아다닌다는 설정인데, 이것이 영화에서 크게 작동한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에서 얼굴은 모른 채 단지 다리만 보고 빠져서 그 여자를 쫒아 다니게 되는,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베르트랑의 추적의 삶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찢어진 사진을 포토몽타주 하듯이 붙여서 완성된 형태로 사진 속 여자를 찾는 행위의 여정이 영화의 마지막에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트뤼포 영화에서 사진은 적극적으로 활용된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자를 사랑한 남자>에서 베르트랑은 사진을 보면서 자기가 만났던 모든 여자들과 그 여자들이 보낸 편지를 보면서 그것을 근거로 소설을 쓰게 된다. 과거의 기억을 사진에 의지해 떠올리면서 추억을 완성해나가는 행위로 소설을 쓴다. 말하자면 사진이라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흔적이고, 무언가를 창조해나갈 수 있는 물리적인 근거점이 된다. 다른 한편, 사진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지되어 있다. 그것을 일종의 포즈이다. 그래서 달리 말하자면 트뤼포의 영화가 (영화라는) 운동성과 (사진이라는) 정지성, 이 둘 사이를 오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충돌은 앙투안의 연애적 삶에도 관통한다. (사진으로 표현된) 정지성이라는 것이 영원하고 불변적인 사랑을 말한다면, 움직이는 (영화의) 끊임없이 가변적인 연애가 있다. 끊임없이 여자를 바꿔가는 앙트완의 연애는 굉장히 부지런해야 하는 삶이고, 앙투안은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내내 열심히 뛰어다닌다.

 

 

 

 

보시는 것처럼 콜레트와 관련한 장면에서 두 가지 종류의 사진이 있다. 하나는 증거사진이 되는 범인의 프로필 사진이다. 이것은 <400번의 구타>에서의 앙투안이 타자기를 훔쳐서 도주하다가 경찰서에서 수감되면서 사진을 찍을 때와 유사한 종류의 사진이다. 넓게 이야기하자면, 트뤼포의 영화 그리고 드와넬 시리즈 영화에서 사진은 체포, 구금, 포획, 정지와 연결된다. 정지라는 것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라면, 이는 트뤼포의 삶에서 구속과 관련되는데 이는 감옥이나 군대, 학교와도 같은 공간과 연결된다. 트뤼포의 삶 자체가 구속과 탈주를 계속 반복해왔다. 사실 20대까지 트뤼포의 삶이라는 것은 구속된 상태에서 탈주의 욕망을 끊임없이 반복해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누벨바그의 시절을 거치면서 구속에서의 탈주 욕망이 한편으로는 내부화되는 운동으로의 변화가 있다. 즉, 가정을 꾸리는 것, 트뤼포에게는 두 번째 가정을 꾸리는 것, 아이를 만드는 것, 혹은 앙투안에게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 이런 삶이 반복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부로 움직이는 운동으로, 바깥으로 나가려는 운동과 충돌한다. 콜레트가 사건 파일을 뒤적거리다 발견하는 두 종류의 사진, 즉 살인 사건의 사진과 드와넬이 흘린 여자의 사진은 모두 사진의 본성, 즉 무언가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진은 구속과 체포, 탈주를 반복한 트뤼포를 구제한 앙드레 바쟁의 영화적 이미지의 존재론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이라는 글에서 바쟁은 무언가의 흔적, 성화성과도 같은 이미지를 강조한다. 이 영화에서 포토몽타주와도 같은 여인의 사진은 그런 트뤼포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모든 작가들은 영화적 역량을 무엇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그 세계가 달라진다. 즉, 영화적 파워의 본성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트뤼포에게 영화의 강력한 힘이란 구속과 탈주를 반복한 그가 영화관에서 경험한 것으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던 아이가 영화관의 어둠에서 무언가를 지켜봄으로 해서 자기를 투사할 수 있었고, 그 영화관의 낯선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의 응시, 바라보는 사람들과의 낯선 사람들과의 감정적 연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두번째 측면이 트뤼포의 영화를 대중적인 영화로 만들어갔다. 트뤼포의 영화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고려한 영화다. 그는 두 종류의 감독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다 해도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다면 다른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전제해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트뤼포는 후자의 감독이 되려 했다. 동시에 트뤼포의 인정욕구가 있다. 이는 영화의 투사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 자신을 인정해가는 것, 자신을 이해해나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트뤼포의 영화는 그래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영화에 기입된다. 내가 영화를 본다는 조건이 영화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실현한 사람은 히치콕이었다. 특히 <이창>에서 그러하다. 트뤼포가 히치콕을 끌어오는 것은 그가 히치콕의 형식을 빌어온 것도 있지만 트뤼포 자신의 영화적 경험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트퓌로의 영화에서는 그래서 본다는 것과 관련한 문제, 특히 시점의 문제가 언제나 특이하게 작동한다. 그리고 시점의 문제가 운동성을 갖게 되면 추적이 된다. 그것이 연애 영화에서는 한 남자가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이다. 이런 형식이 만개된 작품이 <도둑맞은 키스>나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라고 볼 수 있다. 영화 관람의 경험이 영화 안에 녹아들어갔을 때 표현되는 두 번째 방식은 그의 영화 안에 언제나 그림자적인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메인 캐릭터를 닮은 분신적 존재가 영화 안에 이중으로 등장한다. 그 존재들은 언제나 익명적이거나 대단히 낯선 사람들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언제나 앙투안과 짝패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도둑맞은 키스>에서 크리스틴을 쫓아다니는 이상한 남자가 있다. 그런 인물들과 앙트완이 공유하는 감정이 있다. 이 부분이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관객의 행위 자체를 영화 안에 기입시켜 버리는 트뤼포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트뤼포 영화는 물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라는 것은 기계적인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필름이 돌아간다, 프로젝션에 의해 스크린에 이미지가 투영된다는 식의 기계적 매커니즘과 기계적 매커니즘의 작동, 프로세스에 따라서 감정이라는 것들이 전개되어 간다. 트뤼포는 이런 전제를 망각하지 않고 언제나 감정의 전달보다 중요하게 보고, 기계적 프로세스와 감정의 프로세스가 언밸런스하게 되는 것이 이들의 낭만적 연애를 어렵게 만들어가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에서의 피아노 건반의 기계적 움직임과 연주자의 감정의 언밸런스가 있다. <도둑맞은 키스>에서의 파리의 속달체계에 의해 편지가 전달되는 것과 낭만적인 편지도 그러하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앙트완이 무언으로 편지를 직접 전하는 것은 감정의 표현과 감정을 담는 표현의 매체가 같은 속도로 진행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도 마지막에 그런 순간이 도래하게 된다.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샤를르 드네는 한 여자에서 다른 여자로 매번 갈아타는 남자의 실제 이유가 너무 근접해지는 것에의 두려움, 상처받는 것에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트뤼포의 친밀함의 다른 측면이다. 즉, 트뤼포적인 인물들은 상황을 (연애적 사건을) 컨트롤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친밀함에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400번의 구타>에서 극장의 사진을 훔쳐갔던 앙트완은 드와넬 시리즈의 마지막인 <사랑의 도피>에서는 남이 버린 사진을 붙여서 그 사진의 여자를 찾아가 사랑을 완성한다. <사랑의 도피>의 마지막은 <400번의 구타>의 놀이공원에서의 장면과 앙트완이 현재의 여자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병치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트뤼포의 열망을 볼 수 있다. 앙트완은 놀이 기계의 움직임의 가속화로 벽면에 정지된 것처럼 붙어버린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회전차의 구조는 영화의 전사인 조에트로프zoetrope와 대단히 비슷하다. 정지된 사진, 움직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구조, 이러한 (영화적)기제를 동원해서 삶을 반추해가는 것이 드와넬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정리: 김고운(관객에디터) | 사진: 김아라(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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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장례식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자전적 소설인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의 저자이자 유체역학 연구 기술자인 베르트랑 모랑(샤를 드네)이다. 모란의 장례식에는 그의 저작에 걸맞게 여자들의 행렬이 꼬리를 문다. 어떻게 보면 해괴하기까지 한 이 촌극의 본질은 그러나 모랑이라는 한 남자의 순수함 자체다. 모랑의 인생은 죽기 전부터 죽은 순간 그리고 죽음 이후의 순간까지 매순간 진지하고 철저하게 여자를 향한다.


세탁소에서 오로지 다리만 보고 반해버린 여자를 쫓으면서 모란의 여정은 시작된다. 그러나 영화의 서사는 무척 단조로운데 여자를 너무 좋아하던 남자가 많은 여자들을 만나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새로운 여자에게 한눈을 팔다가 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눈을 뜨자마자 본 간호사에게 다가가려다 침대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 전부다. 여자를 바라보고 여자에게 접근하고 여자를 취하고 다시 새로운 여자를 찾는 과정이 끝까지 반복된다. 세탁소의 미지의 여성, 백화점에서 본 베이비시터, 렌터카 여직원, 끝까지 목소리만 등장하는 모닝콜 회사의 여직원, 웨이트리스, 영화관의 농아 안내원, 부티크의 중년여성, 유부녀에 자신의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의 여성편집자까지 마치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처럼 그는 쉼 없이 여자를 관찰하고 만나고 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랑의 모습은 오히려 전형적인 호색한의 모습에서 비껴나 있는데, 아마도 그의 모습이 시종 열정적이면서도 진지하고 불안하기까지 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랑은 여자를 탐할 때 나름의 엄격한 규율이 있다. 백인백색이겠지만 특정한 순간 특정한 공간에서 자신의 주의를 끌어야함이 첫째다. 물론 모랑에게 특히 거부할 수 없게 다가오는 일종의 페티시는 나풀거리는 치마와 하이 힐 그리고 스타킹으로 휘감긴 여성의 발목 라인이다. 둘째는 동침 이후의 만남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지속하지 않는 것인데, 이는 계속 새로운 여자를 찾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유가 된다.

 

모랑은 왜 이렇게 지속적으로 끌리는 여자를 찾고 버리고 찾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할까. 잘 알려진 트뤼포의 모성애에 대한 결핍은 극중 모랑이 자신의 어머니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집에서는 상반신을 드러내고 다녔으며 거리에서 마주쳐도 모르는 척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트뤼포 그리고 모랑의 채울 수 없는 갈증의 근원이 된다. 즉 모랑은 성숙한 남자로서 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직 미성숙한 아들로서 모성의 흔적을 쫓는 것이다. 결국 그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대상을 쫓을 운명을 지녔고 그의 사명은 죽을 때까지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된다.

 

우리와 모랑은 다른 부류인가? 트뤼포의 대답은 단연 ‘아니다’이다. 안정되고 화목한 가정은 모든 결핍과 욕망을 아름답게 덮어주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타협의 산물이다. 우리는 대부분 적당한 타협을 반복하며 평생을 보낸다. 적당한 선에서의 연애, 결혼 등등. 그러나 누구나 진정으로 바라는 이성에 대한 욕망이 있었고 그 대상은 자주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모랑처럼 행동으로 옮길 만큼 절박하지 못했을 뿐이다.(김준완|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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