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들> 상영 후 황덕호 재즈평론가 시네토크 현장 스케치 

 

지난 5월 15일, 존 카사베츠의 데뷔작인 <그림자들> 상영에 이어 “재즈와 영화: 존 카사베츠와 찰스 밍거스”라는 제목으로 재즈 평론가 황덕호씨와 함께 하는 시네토크가 진행되었다. 이 날 시네토크 시간에는 제목처럼, 찰스 밍거스의 음악적 태도나 작업 방식, 카사베츠 영화와의 유사한 지점들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며, 특별히 찰스 밍거스의 음악을 함께 듣는 시간도 마련되었다. 재즈와 영화 이야기가 함께 했던 이날의 이야기를 일부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존 카사베츠는 데뷔작 <그림자들>을 만들면서, 그 무렵인 50년대 후반에 프리 재즈에 깊은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동시대적으로 그런 음악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거의 첫 번째 감독으로 이야기된다. 프랑스의 비평가 티에리 주스가 카사베츠의 영화와 재즈와의 연관성에 대해 얘기한 부분이 있다. “카사베츠의 <그림자들>은 오넷 콜맨의 프리 재즈를 최초로 경험한 동시대의 영화였다. 단지 찰스 밍거스가 영화 음악에 참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카사베츠와 재즈 사이에는 많은 유사성이 있다. 살아있는 시간을 기입하고, 쇼트의 중심에서 여기와 지금을 보여주고 있고, 굴절에 대한 불가능한 예측이 있다.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대사에 스윙이 있고,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소리의 우연성과 독특성에 대한 우월성이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악보의 우월성에 순종하는 데에 대한 거부가 있다.” 50년대 후반의 프리 재즈, 특히 찰스 밍거스나 오넷 콜맨이 카사베츠와 관련해서 많이 언급된다. 프리 재즈란 어떤 것이었고, 두 음악인이 당시 어떤 영향성을 갖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황덕호(재즈 평론가): 프리 재즈에 국한해서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찰스 밍거스 음악의 특징을 놓고서 카사베츠 영화와의 공통점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오늘 보신 <그림자들>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겠지만 영화의 주인공들이 혼혈 부모 밑에서 태어난 세 남매인데 밍거스 역시도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다. 밍거스의 아버지는 흑인 하사관이었고, 밍거스를 낳기 전에 백인여성과 결혼해 두 딸을 낳았다. 그 중 한 명은 완전히 엄마를 닮아서 백인처럼 보이고, 다른 한 명은 아버지를 닮아 완전히 흑인처럼 보인다. 밍거스의 아버지는 이후 밍거스 어머니와 재혼했는데, 그녀는 중국인이었고, 밍거스를 낳고 곧 죽게 된다. 밍거스가 어린 시절에 집 안 거실에는 이상하게 백인 엄마의 사진만 걸어놨었다고 한다. 그래서 밍거스는 그녀가 자기 엄마라고 생각하고 자랐었고, 큰 누나와 함께 둘째 누나의 피부가 검다고 놀렸다고도 한다. 영화에서의 벤과 비슷했던 셈이다. 벤 역시 혼혈인데, 그가 늘 같이 돌아다니는 친구들은 백인친구들이다.

밍거스는 고등학생에 되어서야 흑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피부가 검은 색인데도 자기가 흑인이라는 생각을 별로 갖지 못했던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까 자기 근처에 다 흑인친구들만 모이는 것을 보고 비로소 내가 흑인이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 이미 많은 시간이 걸렸고, 어린 시절에 자신의 미적 체험이나 취향이 결정되는 과정 속에서 백인문화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밍거스는 처음에는 첼로를 연주하다가 콘트라베이스로 악기를 바꿨는데, 열심히 첼로를 해서 교향악단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자, ‘미안하지만 흑인을 뽑는 교향악단은 없다. 콘트라베이스로 바꿔서 재즈를 해보라’ 는 권유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후에 재즈 뮤지션이 됐지만 클래식 작곡 기법으로 일일이 악보에 모든 음들을 써서 하는 작품들을 50년대 초반까지도 쓰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일정정도 반성을 하게 된다. 아무리 자신이 재즈 작품이라고 썼지만 막상 연주자의 연주를 들어보면 뭔가 어색하고, 이 음악도 저 음악도 아닌 스타일로 들린다는 느낌을 받고 나서 그 해답을 듀크 엘링턴에게서 찾게 된다. 일단은 음악을 듣고서 좀 더 이야기를 할까한다. <그림자들>이 나왔을 무렵인 1959년에 발표된 곡이다. “수요일 밤의 기도회”이다. 수요일이 되면 흑인들이 모여서 신도들이 열띤 예배를 보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선곡한 음악이 있으니 함께 들어보고 얘기를 계속 나누면 좋겠다.   

 

♬ Charles Mingus - Wednesday Night Prayer Meeting ♬

 

 

보통 재즈에서 16마디나 12마디의 테마를 연주한 뒤, 솔로 연주자들이 차례로 연주하고, 다시 다 같이 테마를 연주하는 것이 기본적인 포맷이었다. 찰스 밍거스는 이러한 방식이 불만이었다. 대신 그는 더 많은 음악적인 내용들을 작곡을 해서 만들어내려고 했는데, 그가 작곡한 내용을 일일이 악보에 써서 연주자들은 그 악보를 보고 연주하다보니 재즈 특유의 즉흥성이나 에너지가 표현이 안됐던 것이다. 그런 면을 가지고 많은 시행착오를 하다가, 듀크 엘링턴의 방식에서 해답을 얻게 된다. 작곡자는 기본적인 작품의 테마를 가지고 리허설을 하면서, 멤버들에게 떠오르는 멜로디를 묻고, 그렇게 다른 연주자들과 연주를 해가면서 곡을 완성해 간다. 사실 재즈에서의 작곡이라는 것은 집단적인 창작이다. 그래야 보다 풍부한 것을 담아낼 수 있고 연주자들의 즉흥성과 자발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카사베츠가 영화를 찍는 방식도 그런 면에서 일치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카사베츠은 1957년 4만불의 저예산으로 <그림자들>을 찍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소규모 자본을 가지고 스스로 모든 결정하며 창작한다는 데에서 밍거스도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밍거스 역시도 카사베츠 만큼이나 메이저 음반사와 많은 갈등이 있었고, 그래서 결국 자기 음반사를 직접 차리기도 했는데, 그런 면에서 카사베츠와 밍거스의 태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57년에 <그림자들>의 촬영을 마치고, 58년에 음악 제작에 들어갔는데, 찰스 밍거스가 쓴 작품이 영화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베이스나 드럼 솔로를 한 정도만 들어가있다. 크레딧에도 색소폰 솔로에 샤피아 하디, 그 외에 추가적인 음악에 찰스 밍거스 이렇게만 나온다. 찰스 밍거스가 실제로 이 영화를 쓴 작품들은 거의 반영이 안돼서 굉장히 화가 났었다고도 한다.

찰스 밍거스 같은 뛰어난 거물이 어떻게 이런 독립영화의 음악을 맡게 되었을까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신화적 존재였던 찰리 파커나, 미국무부 지원 아래 해외 투워를 했었던 디지 길레스피, 콜럼비아사와 계약했던 마일즈 데이비스 정도를 제외하고는, 사실 대부분의 재즈 뮤지션의 사회경제적 입지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몇몇 메이저 음반사가 아니라면 음반을 제작해도 사실 배포망이 거의 없기 때문에 판매가 어려웠던 것이다. 자신이 직접 음반사를 만들기도 했던 찰스 밍거스는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자, 50년대 초에는 전업 뮤지션의 길을 벗어나서 우편배달부가 되기도 했다.

찰스 밍거스는 흑인으로서의 아이덴테티를 늦게 가지면서, 흑인성에 대한 굉장히 강렬한 태도를 갖게 되고, 정치적으로도 확고한 표현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Fables of Faubus>은 남부의 포버스라는 인종주의적인 주지사를 비꼰 음악이다. 당시에 포버스는 흑인과 백인의 학교를 통합해 운영하라는 법령을 지키지 않고, 주의 독립된 군대를 가지고 정부군과 대치하기도 했었다. 원곡에는 가사가 있는데, 콜럼비아사가 이를 못 싣게 해서 보컬 부분이 빠지게 된다. 나중에 밍거스가 독립 음반사를 차린 뒤 보컬을 입혀서 포버스를 조롱하는 가사를 그대로 실어 다시 발표하기도 했다.

 

김성욱: 정확하게 프리 재즈 스타일이라는 게 어떤 것인가?

황덕호: 프리 재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이전의, 찰리 파커로 대변되는 비밥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프리 재즈는 비밥의 조성적 특징, 리듬과 같은 규칙들을 다 벗어던지는, 그래서 보다 자유로운 재즈를 추구한다는 의미였고, 59년도 무렵에 오넷 콜맨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선언처럼 등장했다. 사실 밍거스는 프리재즈와 태도가 상당히 가까우면서도, 자기 음악을 프리 재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특히 밍거스는 작곡이라는 측면에 굉장히 많은 열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 재즈와 거리를 뒀었다. 그렇지만 비밥을 넘어셔려는 태도에 있어서 프리 재즈와 상당히 가까웠다. 불협화음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조성에서 탈피하고,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스윙감에서 벗어나서 리듬에서도 파격성을 주는 점들이 프리 재즈와 가까웠기 때문에 프리 재즈로 오인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밍거스는 오넷 콜맨의 음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밍거스는 무조건 조성을 버리는 것이 과연 음악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했다.

 

관객1: 들려주신 음악의 느낌도 그랬고, 영화에서는 인종적인 문제가 나오지만, 결국엔 벤이라는 캐릭터가 그냥 잊어버리자는 느낌으로 끝나는데...

황덕호: 비트 세대라는 말이 영화에도 등장하는데, 사실 케루악이나 버로우즈, 긴스버그 같은 비트 세대의 작품들에 대해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비트 세대의 작품들을 대부분의 작가들이 백인이어서 그런지 동시대를 살면서도 의아할 정도로 인종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고민이 없다. 그런데 카사베츠의 <그림자들>을 보면서, 카사베츠가 흑인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인종문제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예리하게 파헤쳤을까 싶어서 깜짝 놀랐다. 마지막에 벤이 인종문제를 잊는다기보다는 뮤지션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인종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재즈도 범위가 넓기 때문에 단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뮤지션에 따라서도 달랐던 것 같다. 하지만 흑인 뮤지션들이 인종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봤던 부분은, 사실 일반 대중들이 혹은 백인 재즈 평론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예를 들어, 아트 블레이키의 <Freedom Rider>라는 음반이 있다. 당시에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서 미국의 남부를 순회하고 다녔던, 우리로 치자면 희망버스 같은 운동이 있었는데, 바로 그 운동을 위해서 쓴 작품이었다.

 

관객2: 영화 마지막에 이 영화는 즉흥적으로 촬영된 것이라는 자막이 뜨는데, 어디까지가 즉흥적인 것인가.

김성욱: 즉흥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부분들이기 때문에 사실 굉장히 계획된 연기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배우들은 카사베츠가 운영하던 일종의 액터즈 스튜디오의 수강생들이었다. 매일 연기수업을 진행하다가, 조금 더 실제적인 방식으로 해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연기를 무대가 아닌 실제 현실에서 진행해보자는 의도였기 때문에 이 것을 영화로 만들어서, 개봉하거나 배급하려는 계획은 애초에 없었다고 한다. 로메르의 영화도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를 개입시킨다고는 하지만, 100퍼센트 완성된 대사에 따라서 끊임없이 액팅들을 해나가는 과정 안에서 굉장한 자연스러움에 도달하면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한 번에 해서 생기는 그런 방식의 즉흥성은 아니다.

 

정리: 장지혜(관객 에디터) | 사진: 주원탁(자원 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인물에 대한 넘치는 애정

 

두 번의 스튜디오 작업은 존 카사베츠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했다. 그는 할리우드 시스템 아래에서 영화를 찍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스튜디오와 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절대로 상업영화를 찍지 않기로 결심했다(물론 그 결심도 어쩔 수 없이 바뀌지만). 카사베츠는 할리우드의 역겨움을 <얼굴들>의 도입부에서 드러낸다. 시사실에 모여 앉은 영화 관계자 중 한 명이 “이번엔 뭘 팔 거야?”라고 묻자 상대편 인물이 “돈이죠”라고 대답한다. 이어 옆 인물이 “사실, 이건 아주 좋은 영화예요”라고 말하면 다시 다른 인물이 “상업영화 영역의 <달콤한 인생>이라고나 할까요”라며 너스레를 떤다. 돈의 원칙으로 운영되는 할리우드와 더 넓게는 돈으로 지배되는 미국사회에 대한 비판은 카사베츠 영화에 심심치 않게 나오는 풍경이다.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에서 한 갱스터는 마르크스를 인용해 “돈은 대중의 아편이야”라고 말한다. <얼굴들>에서 회사원들이 창녀 위에 군림하고 협박하기 위한 카드로 들이미는 건 여지없이 돈이다. 1965년, 카사베츠는 만 달러를 가지고 <얼굴들>의 촬영을 시작했고, 삼 년 동안 다섯 편의 영화에 출연해 번 이십만 달러를 들여 작품을 완성했다. 그와 장모의 집이 영화의 주요 로케이션이었으며, 그의 집 차고가 영화의 편집실이었다.

 

카사베츠가 ‘<얼굴들>에 대한 소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 연극무대용이던 <얼굴들>의 초고를 쓸 당시 카사베츠는 자기 삶에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렇게 나온 시나리오가 미국 중산층과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과 공포로 물든 건 당연한 일이다. 주인공인 포스터 부부와 그 외의 인물들은 교외에 살며 편협한 생각을 품은 중산층의 전형으로 제시된다. 서로 진실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지내던 그들은 어느 날 술에 취해 가면 아래 얼굴을 하나씩 드러낸다. 누군가는 거침없이 행동하고, 누군가는 야만적으로 변하고, 누군가는 본모습을 들킨 것에 놀라고, 누군가는 짧은 자유를 만끽하려 애쓴다. 밤은 끝나지 않을 듯이 길게 이어지며, 몸에 맞지 않는 낯선 악몽에서 깨어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얼굴들>은 배우와 카메라가 연주하는 재즈에 다름 아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배우들은 감정의 출렁임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성난 말처럼 널뛰는 카메라는 배우의 얼굴과 신체의 조각 위를 더듬는다. 그러므로 얌전히 앉아 인물과 이야기를 분석할 생각은 떨쳐버려야 한다. 영화와 함께 달리기가 우선 급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추해빠진 중년 부부는 각각 젊은 창녀와 제비족과 밤을 보낸 뒤 자신과 상대방의 벌거벗은 얼굴과 마주한다. 마침내 마리아가 남편 리처드에게 “내 삶이 싫어. 그냥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순간, 카사베츠는 이제 당신의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극은 없다. 악몽에서 깨어났으니 현실을 살 일만 남았다. 카사베츠는 현대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인물에 대한 애정을 거둔 적이 없다. 카사베츠는 아무리 나쁜 인물도 미워할 수 없게 그린다. 그는 삶에 있어 ‘애정’만큼 소중한 게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이용철 /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상처를 숨기고 웃음으로 무장한

어른들의 비구조화적 세계

- 존 카사베츠의 <얼굴들>

 

 

 

 

 고다르는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닌 반영된 현실이라는 말은 한 적이 있었다. 정석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영화 속의 현실은 언제나 잘 구조화 되어있다. 그러나 반대로 존 카사베츠는 현실의 반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인물들 간 반응은 갑작스럽게 발생하며 짜여있지 않고 예측 불허하다. 어른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나타낸 이 작품은 인간들과의 관계와 그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들의 태도를 끈질기게 바라본다.

 

 

 영화의 서사는 칼로 자른 듯 깔끔하게 나뉘어져 있지 않다. 외려 관객들에게 찢어진 조각보들을 하나하나 던지고 관객들로 하여금 바느질로 잇게끔 한다. 표면적으로 편안해보이기만 했던 부부의 관계는 집을 떠나겠다는 남편의 고백으로 깨져버린다. 남편은 남편대로 친구와 젊은 매춘부를 만나 그녀의 집에서 이미 놀아났고, 아내는 남편이 집을 나간 후 클럽에서 어린 남자를 만나 그와 하룻밤 만에 사랑에 빠진다.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그들은 친구들을 만나고 이성과 달콤한 사랑을 나누려고 시도한다.

 

 

 집에서의 파티 장면에서는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상황들로 가득하다. 셋 이상의 사람들이 존재할 때 그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진심을 담은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잠잠해지고, 다시 누군가의 한 마디에 모두 연습했던 것처럼 웃음을 터트린다. 성인이라면 누구든지 의례적인 술자리에서 느꼈을 법한 공기가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좋은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그들만의 암묵적인 규칙은 웃음과 가벼운 농담이다. 혹은 그들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각자가 위치했던 지위와 체면을 잊어버린 채 유아적인 방식으로 춤을 추거나 상대방의 이름을 가사에 넣어 노래를 부르며 논다. 이 때 즐겁게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남녀를 뒤로 하고 소외된 이의 얼굴에는 또 혼자 남겨졌다는 상처가 남는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지 않고 상처받은 사람은 과장된 언행을 하거나 정해진 규칙을 깨고 돈으로 여자를 산거나 마찬가지라는 감춰졌던 진실을 폭로한다. 카사베츠는 이런 어른들 사이의 감정이 감춰지고 드러내는 갑작스러운 순간들을 숨김없이 발견하고 관객에게 드러낸다.

 

 

 그렇게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를 받아 떠나고 남녀 단 둘이 남았을 때, 그들은 조금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낯선 이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숨기려고 했던 자신의 외로움이나 약한 모습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며 위로받고 싶어 한다. 영화 속에서 등장한 '사랑은 항상 사람을 정복하게 만들 거야.'라는 재즈의 가사처럼 단 둘이 남겨진 그들은 세상에는 사랑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 관계도 돈으로 사거나 하룻밤의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것뿐이다. 주인공 해리와 매춘부나 다를 것 없는 젊은 여자는 해리가 찾아온 밤부터 아침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여자는 해리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요리를 치우며, 해리가 볼 수 없는 부엌에서 여전히 즐거운 듯 노래를 부른다. 결코 해리가 원하는 여자가 될 수도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실을 깨달은 채, 눈물을 애써 닦으면서 말이다. 이처럼 행동과 반대되는 인물들의 심리 상태는 관객들의 숨마저도 순간 먹먹하게 만든다. 해리의 아내인 마릴라와 젊은 남자 채트와의 관계도 그러하다. 젊은 남자 채트는 눈물과 기침으로 얼룩져 콜록대는 마릴라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언제까지고 함께 있을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남편의 등장에 바로 줄행랑을 친다. 어른들에게는 사랑이 최상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뼈아픈 사실도, 역시 감독은 날카롭게 파고들어 관객을 찌른다. 이런 장면들과 서사를 통해 그는 어른들의 진실하지 못한 모습의 현실을 포착한다.

 

 

 그런 성인들의 아슬아슬한 행동들을 영화는 매우 자유로운 방식으로 포착하고 있다. 대조가 강한 흑백의 16mm는 빠르게 변화하는 인물들의 얼굴들에 주목한다.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혼자 남겨진 순간, 화면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꽉 채운 그들의 눈과 코, 입은 매우 과장되어 아름답기보단 괴기스럽게 느껴진다. 신경질적이면서도 고독한 그들의 내면을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관객은 그들이 겪는 일상 속에서의 고통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시종일관 인물들의 표정에 집착했던 영화는 마지막에야 비로소 그들이 떠나고 남은 공간만 지그시 비추는데, 그 순간 이 영화가 가지는 진실을 폭로하는 힘을 관객들은 느낄 수 있을 거다. (윤서연 :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