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만날 수 없었던 우리시대 수작들을 한 자리에!

- 서울아트시네마, 3 5일부터 24일까지 3주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동시대 영화 특별전개최

- 주목할만한 동시대 영화 15편 상영, 영화의 맛을 더하는 비평가들의 특별강연 마련



뛰어난 완성도와 작품성으로 지금 우리 시대가 주목해야 하는 영화지만 대중적 관심을 받지 못한 최근 나온 국내 기개봉작과 미개봉작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대표 최정운) 3 5일부터 약 20일간 종로구 낙원동 낙원상가 4층에 위치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동시대 영화 특별전’이라는 기획전을 개최한다.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언제나 우리를 설레게 하는 세계 각국 거장들의 작품에서부터 정식 개봉을 앞두고 특별 상영을 갖는 레오 까락스의 13년만의 신작 <홀리 모터스>까지 새로운 영화적 활력을 느낄 수 있는 다채로운 영화 15편이 상영된다.

상영작에는 70, 80세를 훌쩍 넘긴 노장이면서도 끊임없이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J 에드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트윅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탈리아의 거장 마르코 벨로키오의 <내 어머니의 미소>를 비롯해 지난해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혔으나 이 작품을 끝으로 영화 작업을 중단한 헝가리의 거장 벨라 타르의 은퇴작 <토리노의 말>과 그의 또 다른 걸작 <런던에서 온 사나이>, 그리고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아벨 페라라의 <4:44 지구 최후의 날> 등 각 나라를 대표하는 신구 시네아스트들의 수작들이 선보인다.

이번 특별전을 기획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는 이번 상영작들은 국내에서 정식으로 개봉하지 못했거나 개봉하더라도 대중적인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동시대의 영화들임에도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들 가운데 여전히 보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는 작품들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이번 상영작들은 우리가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들이기도 하다이 다채로운 영화들을 함께 보면서 영화에서 보이는 것, 또는 보았다고 믿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해보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 기간 중에는 영화에 대한 해설은 물론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네토크가 준비되어 있다. 3 9() 저녁 7 <트윅스트> 상영 후와 3 16() 저녁 7 <홀리 모터스> 상영 전에는 영화평론가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의 강연이 마련되어 있고, 3 17() 오후 3 10 <라폴로니드 : 관용의 집> 상영 후에는 김성욱 디렉터를 비롯해 유운성, 이용철 평론가와 함께하는 비평가 좌담이 이뤄질 예정이다. 동시대 영화들을 함께 보고 이야기하는 이 특별한 행사는 동시대 영화의 현주소와 함께 영화 매체의 본질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는 귀한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쉽게 만날 수 없는 동시대 수작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이번 특별전은 오는 3 5()부터 24()까지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되며((매주 월요일 정기 휴관), 관람료는 일반 7,000, 청소년 6,000, 관객회원, 장애인 및 노인은 5,000원이다. 현장 예매는 3 517시부터 이뤄지며, 맥스무비, 티켓링크, 예스24 등 지정 예매처에서 인터넷 예매도 가능하다. 자세한 작품정보와 상영시간표는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www.cinematheque.seoul.kr) 참조. (문의 02.741.9782)

 

★ 특별 행사

1) 시네토크

일시: 39() 19<트윅스트> 상영 후

강사: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2) 상영 전 소개

일시: 316() 19<홀리 모터스> 상영 전

강사: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3) 비평가 좌담

일시: 3 17() 15 10 <라폴로니드 : 관용의 집> 상영 후

• 진행: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 게스트: 유운성(영화평론가), 이용철(영화평론가)

 

■ 상영작 목록 (15)

내 어머니의 미소 My Mother's Smile (마르코 벨로키오, 2002)

런던에서 온 사나이 The Man from London (벨라 타르, 2007)

도주왕 The King of Escape (알랭 기로디, 2009)

온 투어 On Tour (마티유 아말릭, 2010)

트윅스트 Twixt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2011)

4:44 지구 최후의 날 4:44 Last Day on Earth (아벨 페라라, 2011)

헤이와이어 Haywire (스티븐 소더버그, 2011)

라폴로니드:관용의 집 House of Tolerance (베르트랑 보넬로, 2011)

토리노의 말 The Turin Horse (벨라 타르, 2011)

아버지를 위한 노래 This Must Be the Place (파올로 소렌티노, 2011)

심플 라이프 Simple Life (허안화, 2011)

J. 에드가 J. Edgar (클린트 이스트우드, 2011)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You Ain't Seen Nothin' Yet (알랭 레네, 2012)

문라이즈 킹덤 Moonrise Kingdom (웨스 앤더슨,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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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내 사랑>은 누벨바그의 진정한 출발을 알리는 선구적인 작품이자 감독 알랭 레네와 누보로망 작가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만남으로 유명하다. 관습적이고 선형적인 이야기에만 매달려온 기존의 영화 작업에 의문을 제기했던 레네는 새로운 형식과 기교를 구사하는 누보로망 작가인 뒤라스에게 직접 시나리오를 부탁했다. 뒤라스는 상식적인 전개 방식 대신 그녀의 소설에서나 접했을 법한 다양한 실험 구조를 영화에 적용시킨다. 뒤라스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을 전하며 이후 시나리오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를 주문받지 않았다면, 나는 히로시마에 대한 글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을 때, 나는 히로시마의 엄청난 사망자 수를 보고 내가 만들어 낸 유일한 연인의 죽음의 스토리를 쓰게 되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밀착된 피부의 움직임에서 시작한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형상을 띠는 분진들이 시대를 덮는 상흔처럼 남녀의 살갗에 뿌려진다. 곧이어 히로시마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나누는 프랑스 여자와 일본인 남자의 관계가 드러나고, 단순한 우연을 가장하던 이들의 만남은 히로시마라는 공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뒤라스는 “지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가능한 한 최대한 서로 동떨어진 두 인물에게 히로시마는 에로티시즘과 사랑, 불행의 보편적인 여건들이 강렬하게 조명될 수 있는 공통된 장소”라며, 히로시마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곳이라 말했다.


여자는 히로시마에서 모든 걸 다 보았으며 항상 히로시마의 운명에 대해 슬퍼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영화 촬영을 위해 히로시마를 처음 방문했다. 하지만 히로시마는 이미 그녀의 의식에 깊이 각인된 공간으로 자리한다. 스무 살도 채 되기 전 느베르에서 적군 병사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삭발당한 채 지하실에 감금됐던 그녀에게는 몰래 파리로 떠나올 때 들었던 종전 소식이 아물지 않았던 아픔으로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에서 기인한 히로시마와 그녀의 운명이 조응하면서 히로시마는 여자가 머물고 있는 현재의 공간이자 느베르에서 겪은 아픔에 어떤 보편성을 확인시켜주는 환상의 공간이 된다. 점차 여자는 기억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를 무차별하게 넘나들며 시간이나 합리성의 경계를 망각한다. 이와 같은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바로 레네와 뒤라스가 주목했던 화법이다.

여자는 느베르에서 겪은 시간을 통해 ‘그럼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엄숙한 진리를 알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여인들이 기형아를 낳거나 남자가 불임이 된다고 해도 그 역시 계속되는 삶이다. 그런 점에서 <히로시마 내 사랑>은 개별적인 모든 것이 보편적이던 시대의 상흔을 공간으로 은유하는 영화이자, 한 시대에 편입되어 기꺼이 살아가며 각자가 감당하고 있는 삶의 규모에 집중하는 영화다. 뒤라스는 당시 히로시마 원폭에 대한 엄격한 취재로 주목받았던 존 허시의 현지 보고 기사의 원문을 일부 이용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대본을 썼다. “보름째 되는 날 히로시마는 다시 꽃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수레국화와 글라디올러스, 그리고 둥근잎 나팔꽃과 수선화들이. 그때까지 꽃들의 세계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어떤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잿더미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장미경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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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저녁,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상영 후 이 영화를 추천한 김종관 감독과의 시네토크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종관 감독은 일본 여행을 하는 동안 다시 봤는데 개인적인 위로를 많이 받았다며 추천의 말을 전했다. 공간과 인물의 내밀한 관계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을 해 온 김종관 감독과 함께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 반가운 우연처럼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무거운 듯 가벼운 듯 다양한 맥락으로 이어지던 관객과의 대화 속에서 <히로시마 내 사랑>은 일상의 진동을 안고 사는 우리들에게도 작은 위로를 건네는 듯 보였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방금 상영한 <히로시마 내 사랑>은 김종관 감독이 선택한 작품이다.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특별한데 그 경위에 대한 소개를 부탁 드린다.

김종관(영화감독): 제가 만든 영화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절한 영화가 아닐 수 있다. 보통 추천 영화라 하면 좋아하는 영화, 지배적인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주는 인상이 강했던 것 같다. 저한테 어떤 지점에서 가장 강렬하고 필요하게 느껴졌던 영화라, 전반적인 것에 대해 말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지난 늦가을에 3주 정도 혼자 일본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처럼 개인적인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뭔가 마음의 광기가 있는 상태에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때 탔던 기차의 속도감이 느려서 굉장히 긴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거기서 책 한 권을 읽고 영화 한 편을 봤는데 둘 다 이상한 우연처럼 그 여행에 대한 제 감상과 비슷한 느낌을 줬다. 공교롭게도 기차가 고장이 나서 후쿠시마에서 잠깐 정차했는데 그때 인상도 재미있었다. 밤에 여행을 하다 보니 로맨스 있는 낭만을 기대하기도 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많이 타질 않더라. (웃음) 어쨌든 그 공간을 보는 것 자체가 묘했다. 분명히 그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느낌과 어울려서 이 영화가 개인적으로 의미 있게 다가온 것 같다.

김성욱: 일본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24시간의 정사>이다. 히로시마라는 제목이 뭇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가 그랬는지 개봉판 제목이 달랐는데, 이 제목에서는 영화가 그리는 시간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영화는 낯선 도시에서 낯선 사람과 24시간 동안 연애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가능한 연애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김종관 감독도 낯선 도시인 일본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갖게 된 느낌이 있었을 것 같다.

김종관: 이러한 한시적인 로맨스가 기존에 장르적으로 존재하고 매력 있기는 하지만, 다년간의 여행을 해 본 결과 그런 로맨스가 잘 일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웃음)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공간과 공간의 만남이지 않나. 어떤 공간과 만났을 때 겪게 되는 감정의 지점들과 이 영화가 주는 것들이 맞닿아있는 것 같다. 어떤 곳을 여행하는 것은 낯선 공간을 보는 것인데 혼자 여행을 할 때는 기억, 특히 유년에 대한 어떤 기억들을 건드린다. 이 영화가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정치적이고 그 시대의 상황들을 반영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읽으면 좀 통속적인 부분이 있다.


김성욱: 여주인공인 에마뉘엘 리바가 했던 대사 중 “이 도시가 나의 몸에 딱 어울린다”는 표현이 있다. 이처럼 영화의 첫 시작은 몸과 몸이 만나는 것이지 않나. 몸과 몸이 만나는 것과 느베르라는 도시와 히로시마라는 도시가 만나는 것이 교묘하게 영화에 섞여 있고, 경계지대가  무화되면서 혼합되는 느낌이 있다. <히로시마 내 사랑> 역시 출발점부터 2차적인 사랑, 즉 다시 사랑하게 되는 유부남과 유부녀의 이야기고 그런 관점에서 성인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는 사랑에 들떠있거나 그러려고 하는 열병에 사로잡혀 있거나 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영화를 어떻게 느꼈는지도 궁금하다.

김종관: 기본적으로 치정극이나 불륜극을 좋아한다. 트뤼포의 <이웃집 여자>(1981) 같은 파괴적인 영화를 좋아한다. 무엇보다 각본을 뒤라스가 썼기 때문에 공간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을 잘 접합시키지 않았나 싶다. 시나리오에서는 전체적으로 여자가 더 강하게 느끼는 관능이나 성적인 욕망이 있는데, 아마 뒤라스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경험들에서 기인한 것 같다. 추억 속 공간은 이질적이고 그 안에 있는 본인은 외롭지만 바깥 대상들은 공포스럽고 하는 것들이 성적인 자극이나 욕망과 절묘하게 맞아 들어가는 부분이 있다. 그런 면에서 뒤라스가 공간과 관능에 대한 것을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김성욱: 이 영화에 대해 뒤라스는한 여인이 죽은 자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라고 말했었다. 여자가 일본인 남자를 만날 때 여전히 아직 죽지 않았던 독일인 남자를 떠올리게 되면서 죽음과 삶이 혼동되어 있는 상태가 히로시마라는 공간 안에서 사랑 이야기로 진행이 되고 있다. 이런 것은 연애 이야기에서도 반복되는 틀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김종관: 사회적인 상황이 있으니까 과거에 집착하고 못 벗어나는 부분이 격의 있어 보이는데 통속적인 연애담에서는 그런 모습들이 추하고 일그러지게 표현되기도 한다. 당시 만들어진 영화들 중에 <남과 여> 같은 작품도 과거에 대한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비슷한 설정이 많은 것 같다.


김성욱: 영화 자체가 파편적인 느낌이고 영화적인 설정으로 보더라도 각각의 장면들이 분리되는 특징이 있는데, 사실은 전체가 서로 연결될 수 없는 것들이 연결되어 있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종의 몽타주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런 파격성이 느베르나 히로시마를 연결 짓는 가장 영화적인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가능함이 이 영화의 기본적인 설정이 아닌가 한다.

김종관: 그렇다. 거창하거나 사소하게 풀어도 불가능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멜로 영화에서 중년의 사랑을 푸는 원칙 같다. 뒤라스가 쓴 시나리오는 거의 소설 같은데, 영상으로 구성하는 것 자체가 소설이 번역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러면서 구조적으로 열려 있는 부분들도 있다.

김성욱: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는 어떤 장면들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나.

김종관: 처음에 다큐멘터리 장면도 기억이 난다. 그 소스를 기준으로 거의 내레이션과 같은 대화를 썼는데, 영화에 나왔던 그 공간의 이미지들은 제가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히로시마는 불이 꺼지지 않아서 좋다는 밤거리에 대한 대사도 기억이 난다. 이 여자의 심리 상태에서 보면 어둠을 무서워할 것 같은데, 히로시마라는 도시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도 불을 끄지 않는 어떤 심리가 히로시마가 가진 그런 상처와 닮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관객1: 유명한 영화라 굉장히 기대를 많이 했는데 중간중간에 심심하기도 하고 어려웠던 것 같다. 우선 영화를 보면서 음악이 좀 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전반적으로 영화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다. 또 이 영화가 원폭 투하 이후 14년이 지난 다음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영화인데 남자 주인공이라든지 일본 사회에 대한 묘사 같은 것들이 모호한 느낌이 많았다. 제작자나 뒤라스가 일본, 혹은 히로시마라는 공간 자체에 갖고 있던 생각이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 같은데 단지 개인적인 감성만 표출된 영화인지,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김종관: 일단 음악은 당시 영화에서 음악을 쓰는 스타일이 있고 관객들이 그 스타일이나 관습을 이해하는 것이 지금과는 다를 것 같다. 옛날 영화를 보면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들이 다르긴 한데, 그 시대를 완전히 배제하고 음악을 아주 독특하게 쓴다고는 볼 수 없다. 그리고 남자에겐 초월적인 연인간의 무드가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큐처럼 쓰이지 않나. 어쨌든 히로시마라는 공간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여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자의 시선으로 이곳을 본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그 시선을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김성욱 일본은 전범국가이면서 나치스 독일에 공조한 나라이기 때문에 파괴를 했던 나라가 동시에 파괴를 당했다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히로시마라는 장소는 여자에게는 여행을 떠나온 공간이면서 여자가 느끼는 정념과 상태 안에서의 도시이기 때문에 설정 상 현실적인 문제들이 빠진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또 하나는 이 영화를 보는 프랑스 내부의 정치사회적인 관점들인데, 이 영화가 제작되던 58, 59년에는 독일 점령 당시 프랑스에 대한 언급이 금지되었던 시기였다. 프랑스 입장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 히로시마 얘기를 하면서 독일 점령 당시 느베르에서 여자가 겪은 불편한 일들을 언급하는 지점들이 있었던 거다. 마찬가지로 알랭 레네의 전작 <밤과 안개> 역시 수용소에 대해 말하지만 당시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자행하고 있는 폭력적인 사태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프랑스 사회의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다뤘다는 입장도 있다. 전쟁이 끝난 이후 독일 병사를 처참하게 죽여버리는 것과 동시에 여주인공이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으로 형상화된 것처럼, 어떤 균형이 맞춰져 있다.


관객2: 통속적인 연애담이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독일 병사를 잊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데 자꾸 그렇게 안 되는 것을 망각에 대한 죄책감으로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김종관: 영화의 스토리 라인에 정치적인 상황을 대어 보면 일치되는 않는 부분들이 있고 또 통속적인 연애담으로 보면 연결이 되는 부분이 있고 그렇다. 정리가 안 되는 정서들이 혼재되어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런 것들에 대해 스토리 라인을 쫓아서 보려고 하면 힘들지 않을까 한다.

관객3: 이 영화에서 실제로 중요한 것은 여자와 히로시마와의 관계라고 본다. 여자가 독일인 병사를 사랑해서 겪게 되는 고통과 히로시마라는 도시와 그 안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동일시됐다고 생각한다.

김성욱: 말씀하신 것처럼 동일시라고 하는 게 이 영화의 큰 핵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에 의해 이 여자도 상처를 입었지만 원폭으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은 지리적, 상황적으로 달라서 국가에 의해 일으켜진 보편적인 상처로 연계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일본인 남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김종관: 영화에서는 여자가 화자고 그녀의 개인적인 심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과감하게 얘기하자면 말씀하셨던 대로 이 영화를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상징적으로 놓아버리면 재미없어지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 부분들을 남녀간의 일상적인 플롯으로 보완을 하면서 더 모호해지고 재미있어지는 부분들이 있다. 통속 연애극으로서의 기능들도 그대로 보면 더 중의적이고 영화적으로 재미있어질 것 같다.

관객4: 마지막에 서로를 히로시마와 느베르라고 불렀던 대사가 생각이 나는데, 근사하고 결함이 없는 주인공 남자의 모습을 통해서도 히로시마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상처를 잘 치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김종관: 이 영화가 낙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열린 결말에 따른 부분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 낙관이라기보단 위로를 느꼈던 것 같다. 여자에게도 위로의 지점들은 있지 않았을까 한다.

관객5: 감독님의 <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서도 여자가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안 담길 것 같고,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여자 주인공의 기억에 대한 모호한 장면은 다른 감독이 찍고 있는 그 영화에도 담기지 않을 것 같은 개인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연결점에 대해 여쭤보고 싶다.

김종관: 이렇게 레네 영화와 제 영화가 연결점이 있는 게 너무 좋다. (웃음) 그것을 또 연결 지어 얘기하려니 쑥스러운데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찍었을 때 애초에 개인적인 얘기들을 해보고 싶었다. 사진도 그렇고, 영화라는 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순간을 담을 수 있는 거지 않나. 영화가 다루는 첫사랑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감정의 한 부분이고, 그런 것들을 영화라는 장치로 담아볼 수 있다는 게 저한테는 가장 큰 의미인 것 같다. 소중한 공간들과 감정들, 그 시기들, 젊음들 같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면 기억하기 싫은 부분들까지 떠올려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선 일정 부분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김성욱: <히로시마 내 사랑>은 현대 영화 안에서 감정과 의식의 상태로 영화를 일관되게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김종관 감독의 작품에서도 감정의 상태나 분위기, 인물의 느낌들이 많이 느껴지는데, 그런 영화들을 만들 때의 팁 같은 게 있나.

김종관: 저는 아주 작은 작업들을 많이 했고 대부분 두 사람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다. 그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가 여행도 좋아하고 공간에 대한 의미들이 크게 갖고 있어서 그런 공간에 대해 관찰을 하고 인물 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는 편이다.

김성욱: 올해는 굉장히 에로틱한 영화를 한 편 만들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영화를 계획하고 있나.

김종관: 시나리오를 하나 써서 준비하고 있다. 서스펜스 애로물인데, 한시적인 시간 안에 서로의 성적인 욕망을 들여다보는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정리│장미경 관객 에디터 사진│최용혁 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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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레네의 영화를 진정한 현대영화의 출발점이라 말하면서 종종 간과하는 것 중의 하나는 그가 프랑스 역사의 어두운 지대를 통과하며 세계 기억(홀로코스트, 히로시마, 알제리 전쟁)의 문제를 다뤘다는 점이다. 레네에게 중요했던 것은 기억의 지리정치학이다. 그는 전후 20년의 침울한 시기동안 프랑스인들이 기억상실증에 빠졌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기억의 계속적인 변경이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레네적 인물들의 무기력은 그들이 과거의 기억과 망각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예외적인 인물들, 즉 수용소의 시간에서 되돌아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망각만이 아니라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와 관련한 거짓 기억들과의 다툼에서도 발생한다. <히로시마 내 사랑>(1959)에서 레네는 글로벌한 기억과 개인적 기억의 충돌을 그렸다. 글로벌한 공포의 기억은 히로시마라는 장소에 구현되어 있고, 개인적인 기억은 느베르에서 프랑스 여인이 겪은 외상에 있다.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기억 저편에는 기억상실과 망각을 강요한 억압된 기억이 또한 있다. <지난해 마리앵바드>(1961)에서 기억은 미로와도 같은 거울들에 왜상을 만든다. 남자는 여인에게 둘이 지난해에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눴고 그녀가 정한 약속을 위해 지금 왔으며 이제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말하지만, 여인은 남자의 주장을 부인한다. 둘은 기억을 공유하지만 한 명이 확언할 때 다른 이는 부인한다. <뮤리엘>(1963)에 이르면 두 개의 글로벌한 기억(2차 대전의 폭격과 알제리 전쟁)이 개인적인 사랑의 기억과 연결된다. 불론느에서 중고가구점을 운영하는 엘렌은 알제리에서 돌아온 옛 애인 알퐁스와 재회하면서 기억의 혼란에 빠진다. 한편 알제리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엘렌의 아들 베르나르는 고문으로 사망한 알제리 소녀 뮤리엘에 대한 기억 때문에 강박증에 시달린다. 레네는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의 재건축 과정과 전쟁의 기억을 병치시키면서 조심스럽게 알제리 전쟁이 초래한 정치적인 문제를 끄집어낸다.

<뮤리엘>의 첫 장면은 유례없는 몽타주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층위에서 보자면 엘렌이 자신의 중고가구점에 온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단순한 장면이다. 하지만, 마치 깨어진 유리조각들처럼 엘렌과 여인, 가구들, 그리고 누군가 커피 잔을 매만지는 손의 파편적인 쇼트들이 불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가 세계와 맺는 관계의 방식이 이러하다. 전쟁의 파괴에서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세계에 거주하는 이들이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기억에 의해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레네의 몽타주는 이런 파괴된 세계, 뿔뿔이 흩어진 세계, 중심을 잃어버린 세계의 감각을 파편적인 몽타주로 구축한다. 기억과 의식 그 자체가 무질서를 조건으로 하기에 불연속적 쇼트가 구축한 세계 또한 무질서가 허용된다. 시간의 혼동, 공간의 혼동 속에 속박되어 있는 인물들, 그들의 정신적 상태는 사고와 언어의 위기뿐만 아니라 표상의 절대 위기를 반영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뒤라스의 문학에 대해 지적하면서 ‘극악무도하고 고통스런 그런 광경들이 (결국) 해를 입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각장치와 표상장치다’라고 말했던 것이 이와 같다.

글/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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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정성일의 선택,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시네토크

2월 11일 특별섹션으로 마련된 카르트 블랑슈: 시네필의 선택작으로 정성일 평론가가 추천한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상영 후 정성일 평론가와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가 상영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시네마테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김성욱 프로그래머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자’는 말을 건네며,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와 시네필의 강령을 전달했다. 그는 시네마테크의 관객들이 극장을 지키기 위해 행동해야만 할 것이라며 행동이 결여된 채 극장에 앉아있다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말했다. 약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강연은, 시네마테크가 처한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자는 ‘선배 시네필’의 지혜와도 같은 것이었다.

정성일(영화평론가):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는 영화사적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찾는다면 호의적인 비평보다 비판적인 글들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비판들은 대부분 이 영화가 연극적인 것이라는 부분을 지적한다. 여기서 질문. 영화가 연극을, 영화가 회화를, 혹은 영화가 문학과 음악을 끌어안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하는 문제. 나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보는 즉시 매혹되었다. 굉장한 걸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트리의 영화 13편 정도를 보았는데 당시 영화를 함께 보았던 친구들은 아무도 나의 기트리에 대한 방어를 동조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내 세대에서 누구와도 기트리에 관한 사랑을 함께 나누지 못한 것이다. 그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나눌 친구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내 방식으로 글을 읽고 영화들을 찾았다. 여전히 기트리에 대한 책들은 한글은 물론이고 영어연구서적도 찾을 수 없다. 프랑스에서조차 그에 대한 연구서적 2권과 자서전 1권, 연대기 1권 정도가 전부다. 이번 친구들 영화제의 목록을 정하면서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어쩌면 이번 영화제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을 때, 다른 영화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만큼은 꼭 상영했으면 좋겠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유는 세대를 건너뛰어 나의 친구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8년 동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사샤 기트리의 영화가 단 한 편도 상영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다가 김성욱 프로그래머에게 올해 사샤 기트리의 상영계획이 잡혔다는 말을 들었다. 이기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걸 보기 위해서라도 서울아트시네마는 계속되어야한다. (웃음)

 

기트리는 매우 긴 시간 동안 작업을 했었고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감독이지만 프랑스바깥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연극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영화를 연출했지만 동시에 연극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던 감독이다. 연극은 프랑스영화사에서 매우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연극배우들 대부분이 영화로 흘러들어왔으며 기트리도 그런 맥락에 놓여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기트리는 장 르느와르의 위대함에 비견할만한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며 그는 마르셀 까르네나 쥘리앵 뒤비비에가 아니었다. 나는 기트리가 까르네나 뒤비비에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기트리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비평가들의 관심 밖에 놓였다. 기트리를 비평의 범주에 놓이게 한 것은 1950년대 까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이들이었다. 특히 세 사람이 기트리를 옹호했다. 한 사람은 고다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알렝 레네, 또 하나는 크리스 마르케였다. <사기꾼의 이야기>의 첫 장면, 제작과 음악감독 등을 소개하는 장면은 고다르의 <경멸>의 첫 장면과 동일하다. <경멸>은 프리츠 랑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트리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다.

 

“기트리의 영화가 발견된 건 시네마테크의 공로다”

 

기트리는 1895년 2월 21일에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뱀파이어> 상영 때 말씀드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트리는 태어나서 영화의 탄생을 본 셈이다. 그리고 그가 러시아 페테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는 뜻은 맑스주의의 보급이 진행된 시기를 말하며 볼세비키들의 활동이 조직화로 이어지는 초입의 시대였다. 그는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 온 후 1차,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색출, 나치 승복 등 격정의 시기 속에 힘겹게 러시아인으로서의 생을 보냈다. 기트리는 연극에 매우 재능이 있던 사람이었다. 스무 살에 직접 쓴 희곡을 무대에 올리고 연출을 했다. 기트리는 연극에서 즉흥연기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느슨하게 구성된 연기의 가능성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기트리가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15년, 그는 연극을 했던 사람답지 않게 <우리 집의 그들>이라는 다큐멘터리로 데뷔했다.

20세기 초 드가나 로댕, 마네와 같은 예술가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지만 곧 영화에 관심을 잃고 연극에 전념했다. 그는 토키영화(유성영화)의 시작과 함께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다. 1957년까지 기트리는 3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이것은 미완성된 영화들 포함한 것이다). 영화계로 복귀한 기트리에 대해 비평가들은 대부분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지나치게 연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필름 다르(예술영화를 낮춰 부르는)’라는 치욕을 받았다. 하지만 알랭 레네는 가장 강력하게 기트리의 영화를 지지했다. 레네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자기 생애의 베스트 중 하나로 뽑았고, <히로시마 내 사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기트리의 아이디어를 훔쳐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두 작품 사이의 친척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것은 결국 시네마테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기트리의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버림받았기 때문에 상업극장에서는 볼 방법이 없었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시네마테크의 도움 때문이었고 랑글루아의 프로그래밍 덕분이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랑글루아에게는 원칙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네마테크의 프로그램을 감독, 배우, 장르 중심으로 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네마테크는 학교가 아니고 박물관이 아니며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영화들을 섞어서 상영하며 관객들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사를 만들고 연관성을 찾아내고 영화들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충격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의였다. 랑글루아는 졸작을 함께 상영할 때에 진정한 시네마테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레네는 기트리의 영화를 지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순수영화와 싸워라.’ 시네필이나 비평가들 혹은 감독들 중에서 영화만으로 순수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레네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진정한 영화는 순수한 영화 밖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고 믿었다. 영화 이전에 존재했던 긴 예술의 행적을 부정할 수는 없는 거다. 기트리는 기꺼이 그 순수의 논리에 반하여 연극과 우정을 나눴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영화를 보시면 즉각적으로 발견하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보이스내레이션. 토키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과거로만 넘어가면 모든 장면들이 단 한 번의 대사도 없이 보이스오버내레이션으로 찍혀진다. 틀림없이 브레송은 이걸 보았을 것이다(맹세코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시골사제의 일기>를 찍으며 사샤 기트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히로시마 내 사랑>의 내레이션도 역시 기트리의 연장선인 것이다. 이 영화가 또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흔히 말하는 ‘크레타인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거짓말의 부분과 전체집합, 발화와 언술의 전체와 부분집합의 논제가 이뤄지는 거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궁극적으로 모우리가 보았던 모든 말들이 사기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민한 분들이라면 이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문득 ‘이 모든 것이 사기라면 이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이것은 즉각적으로 관객을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들이다.

 

기트리의 영화 중 내가 특별하게 사랑하는 영화는 그의 필모 중 마지막 세 편의 것이다. 물론 기트리의 영화들 중에 여러분을 질겁하게 할 만한 위인전 시리즈가 있다. (웃음)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선입관을 주고 싶지 않으니, 그때까지 시네마테크가 버텨준다면 기트리의 회고전을 보며 다시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기트리를 방어한 레네의 이야기를 더 붙이면, 레네의 열렬한 팬들이라면 레네의 영화가 1970년대 중반이후 갑자기 전환점을 맞은 것처럼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레네는 그때부터 연극처럼 영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레네의 영화들을 보면 아주 명백하게 이 영화들은 기트리가 만들었던 연극과 영화 사이의 우정관계에서 시네마틱한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보며 가장 감동받았던 건 사기를 치는 장면들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 영화를 보며 깨달은 사실, 영화 속의 사기행각은 단 하나도 흉내를 낼 수 없다는 것. 모두 영화적인 방법으로만 성립되는 사기라는 것이다. 카메라, 편집, 보이스오버내레이션 등이 있을 때 만 성립되는 사기, 기트리는 메소드 속에서 사기의 메소드가 어떻게 시네마를 성립하는 것인가. 순간 모든 것이 부서져버린 거다. 영화는 무엇보다 ‘시네마’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어떻게 견디는 것인지를 생각해야한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견디어진 영화들이 두 번 보고 DVD를 구입해서보고 그것이 세계 명작인양 소유하고 하는 유혹을 건네주는 것이다.


 

관객1: 영화의 연극적인 부분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 부탁드린다. 그리고 어제 <뱀파이어>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스턴트들이 굉장히 과감하게 짜여진 것 같았다. 무성영화의 공통적인 특징인가.

정성일: 연극적인 부분에 대한 것은 세트 디자인과 클로즈업 씬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단 세트라는 공간이 정해지면 그 공간을 스테이지화하는 것이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특징이다. 이 영화에는 클로즈업이 없는데 당대 비평가들은 이런 영화 속 동선이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무성영화에서 가장 중요한건 스펙타클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관객들을 매혹시킬만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무성영화에서 가장 발전하지 못한 것이 멜로드라마다. 당시에는 카메라와 인물사이의 거리를 관습적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액션들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팡토마>를 보시게 된다면 재밌는 부분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이다.

관객2: 시네마테크를 얼마 다니지 않았는데 영화를 어떻게 봐야하나 고민해야 할 때가 많다. 항상 그냥 영화를 보러 오곤 하는데 어떤 마음가짐이나 태도나 접근방식을 가지고 오면 좋을지에 대한 조언과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필요성에 대해 말해달라.

정성일: 아무 생각 없이 이곳에 오는 게 맞다. 이곳은 다른 곳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네마테크는 게토가 되는 것이다. 행여 이곳에 온다고 해서 선민의식을 갖고 내 안목은 훌륭하다 생각하는 건 참 웃기다. 상영하는 영화가 좋고 프로그램이 좋아서 여기에 오는 것 뿐이다. 시네마테크 전용관도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사실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가에 더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장소의 목표는 영화 상영에 있어야 하고, 지금의 이 좌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영화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 공간을 확보하려 노력하는 거잖나.

관객3: 정성일 평론가가 관객들과 스크린 사이에서 말을 할 때 나에게는 그게 하나의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시네필의 형님으로서 한 마디 한다면.

정성일: 마음 같아서는 시네필 소림사를 하고 싶다. (웃음) 하지만 지켜지지 못한 것이 많다. 일례로 키노는 100호를 만들지 못하고 끝났는데 중요한 교훈을 줬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들도 많았으나 ‘있을 때 잘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시네마테크가 있을 때 잘하셔야한다는 것이다. 그때 시네마테크가 있었어, 이건 다 헛소리다. 잘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답을 가지고 행동을 하면 된다. 그 답을 가지고 있어야 시네필이다. 답을 가지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사실 그 분이 시네필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답을 갖고 행동하는 것 두 가지가 지금의 시네필 강령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월이 좋아 태평성대 보내며 영화를 보던 시절은 끝났다.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만일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그에게 ‘영화는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정리: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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