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중계] 김성욱 프로그래머 '마스무라 야스조의 미학' 강연

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이 한창인 21일 오후 <아내는 고백한다> 상영 후,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특별강연이 있었다. <아내는 고백한다>를 중심으로 마스무라 야스조가 일본영화사에서 갖는 의미와 그의 영화세계의 전반적인 미학에 대해 이야기한 자리였던 그 시간을 일부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전반적인 마스무라 야스조의 이야기와 방금 보신 영화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드리겠다. 오시마 나기사는 마스무라의 영화가 나왔을 때, “이것은 돌파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지금 시점에서 마스무라의 영화를 보는 것은 전혀 몰랐던 작가와 배우를 만난다는 의미와 함께, 이것이 일본영화사에서 어떤 돌파구로 작용했으며 현 시점에도 돌파구로 작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내포한다.

 

일본영화계의 하나의 전통은 욕망의 표출을 억제했던 경향이다. 마스무라는 이와 같은 상황

에서 개인을 그려내면서 일본 누벨바그에 직접적 영향을 줬다. 이때의 개인이란,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온 한 개체가 아니라, 조직과 집단과 사회와 구조와 틀, 어떤 관계 안에 있는 개인이었다. <아내는 고백한다>에서도 이는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가령 로프와 매달린 사람의 수직적 구조가 그것이다. 중간에 매달린 여자를 중심으로, 위에는 기어 올라가서 만나야 할 젊은 남자가 있고, 아래는 남편이 있는 수직적인 선이 되는 로프는 동시에 여자에게는 하나의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로프에 매달린 것은 생명과 연관됨과 동시에 자신을 옭죄는 올가미인 셈이다. 마스무라가 주목한 것은 그 수직의 안에서 무언가를 끊어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마스무라는 인간의 외면적인 것, 신체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가령 이 영화의 비에 젖은 머리, 조금 까매진 양말, 진흙을 밟고 걸어온 듯한 여주인공의 모습, 손끝 연기나 얼굴 표정, “내 몸이 얼마나 야위었느냐”라고 말할 때의 반지와 시계의 헐거움. 그런 점에서 <눈먼 짐승>이란 작품은 마스무라의 세계를 응축해서 보여주는 영화라 하겠다. 촉각적이고 표피적인 것에 몰두하는 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예술가의 눈은 멀게 되고, 이는 맹목적인 여성의 형상과 닮아있다. 눈 멈과 맹목성. 표피적이고 표면적이고 촉각적임, 그것과 눈이 멈의 상태. 눈이 먼 상태에 빠진 인물들의 사랑에의 맹목성. 이런 것들은 단순히 이야기의 구조 내에서 형성되는 것만이 아니라 보다 물리적이고 촉각적으로 진행된다.

 

마스무라의 영화는 심플한 점이 매력적이다. 가령 <아내는 고백한다>에서는 “사랑 한다면 죽일 수도 있다. 죽일 수 없다면, 죽을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단순한 테마가 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이율배반적인 것인가?” 이 테마 하나에 몰두해 영화 전체가 흘러가는 구조다. 핵심이 무언인지 정확하게 느낄 수가 있고, 이 하나를 맹렬한 속도로 파고 들어간다.

 

사랑과 죽음이 분리 불가능한 상태가 펼쳐진다. 이는 일종의 질문인데, 이 질문이 제기되는 지점이 어디인가에 그 중요성이 있다. 이 영화에서 자일을 끊게 되는 지점에서 이 여자가 느낀 것은 진정으로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죽이는 것과 사랑을 깨닫는 것이 같은 순간에 벌어진다. 뭉개지고 절단 난 남편의 시체를 바라보는 것. 그것과 함께 삶과 생으로 충만한 젊은 남자에의 열망이 대조된다. 시체, 죽음과 마주한 이후에 남아있는 여자의 삶에의 데카당스적 열망. 이는 전후의 영화라는 환경에서, 시체들과 마주한 인간의 에너지에 대한 탐구이다. 그 에너지는 곧 사랑, 욕망과 열망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가장 에로틱한 것이다. 에로틱한 것은 작은 죽음이다. 일종의 오르가즘. 작은 죽음의 경험을 얻는 것은 영화를 볼 때의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하다. 영화와 에로티시즘은 떼어낼 수 없다. 그것을 영화적 형식과 본성과 연결시켜나가는 마스무라 영화의 매혹성이 있다. 즉 단순한 센세이션을 넘어선 영화의 본질을 담아내는 것이다.

마스무라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 안에서 충돌되는 힘의 역학관계를 대중영화가 갖고 있는 이항대립의 요소로서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충돌의 에너지는 유동적인 면이 있다. 원래 설정된 캐릭터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캐릭터들이 변이되는 모습에서 발생하는 충돌이기 때문이다. 인물의 변이라고 하는 것. 어떤 지점에서 만들어지고, 변이를 만드는 추동력이 무엇인가? 인물이 하나의 개인으로서 등장하게 되는 지점까지 영화가 끌고 가, 어느 순간 내부의 에너지가 분출되어 나갈 때, 개인성이 탄생한다. 그러한 변이 지점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섹스 체크>이다. 힘과 에너지를 갖게 되는 몸, 성차의 문제, 그 변이의 과정들이 하나의 주제나 테마, 혹은 소재처럼 작동하는 영화이다. 마스무라는 그것을 가정 내의 공간까지 끌어온다는 점에서 선구적이다. 이런 에너지, 힘들의 격돌을 무엇보다도 영화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것이 마스무라의 역량이다.

 

마스무라의 영화가 현재 어떤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마스무라의 영화가 갖고 있는 현대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회성을 잃어가는 영화들, 어떤 관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터무니없는 개인을 다루는 영화들과는 달리, 마스무라의 영화는 사회적 밧줄에 얽혀 있는 자에게서 개인성이 출현하는 지점, 사랑의 탄생이자 열망의 탄생, 그것이 죽음과 쇠락을 경유하는 것을 보여준다. (정리: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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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섹스 체크>

 

방탕하게 살아가던 왕년의 천재 육상선수가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반항적이며 재능 있는 한 여공을 스프린터로 키워내 올림픽에 출전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가 올림픽에 출전하는 데는 한 가지 장애물이 있다.

 

이 짤막한 시놉시스만 보면 짐작하기가 쉽지 않지만 <섹스 체크>는 정말 괴악한 영화다. 이 영화의 뼈대는 스포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인데 숨은 재능을 가진 소녀가 세상으로부터 배척받는 명 코치를 만나고 정상에 서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인데, 영화 중반에 스포츠 영화의 틀을 깨는 양성인간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며, 양성인간의 성별을 바꾸기 위한 섹스 행각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괴이한 소재와 전개는 영화의 주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섹스 체크>는 스포츠물이라는 장르 안에 있되 그 어떤 스포츠물과 다르다. 특히 엽색 행각을 일삼는 최악의 인간 말종 미야지 코치의 존재는 영화에서 그 무엇보다 눈에 띤다.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영화 가운데 몇몇 작품들, 특히 <세이사쿠의 아내>, <아내는 고백한다> 등은 상투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과 사회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어떤 특별한 욕망을 가진 개인이 있고 사회는 그 욕망을 용납하지 않기에 필연적이고도 격렬한 대립이 발생한다. 그런데 영화 <섹스 체크>는 마스무라의 그런 자장 안에 있는 듯하지만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미야지 코치라는 인물을 통해 변주해서 보여준다.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겠다는 미야지의 꿈이 좌절된 것은 중일 전쟁에 병사로서 참전하느라 올림픽에 출전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그는 전쟁을 혐오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메달을 획득하고 일장기를 올린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사회적인 가치와 대립되지 않는다. 미야지는 친구의 아내를 강간하는 반사회적인 인물이지만 또한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가치, 즉 사회적 가치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사회적 가치란 이 영화에서는 국가주의적 가치와 동일한 것이다. <섹스 체크>는 그렇게 국가가 개인의 신체를 어떻게 사유화, 도구화하는지 보여준다. 가령 영화에서 미야지가 자신의 친구 미네, 그리고 미네의 부인과 함께 부르는 올림픽 노래의 가사에는 “너의 팔과 너의 다리는 자랑스러운 일본의 팔과 다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즉 개인의 팔과 다리는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미야지 역시 자신이 조련하는 히로코의 신체를 철저히 미야지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킨다. 미야지가 미네 앞에서 히로코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주무르며 육상 선수로서 타고난 신체라고 싱글벙글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 장면은 미야지 자신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일장기를 휘날려야 한다는 국가적 소명을 실현하는 자이며 히로코의 신체와 인격은 그 소명 앞에 종속된 것에 불과하다는 미야지의 내면적 가치이다. 이 장면에서 미야지는 마치 기수가 훌륭한 경주마를 보듯 히로코를 본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욕망은 미야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기록 갱신이라든지)과 혼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영화의 현실성을 잘 살려주고 있다.

 

그러나 미야지는 그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히로코를 여자로 대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끝내 무너지는 순간, 그리고 나중에 미쳐버린 미네의 부인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되는 장면에서 직관적으로 찾아온다. <섹스 체크>는 국가주의적 가치에 순응하는 개인의 좌절을 통해 국가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영화다. 이는 당시 일본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는데, 특히 미야지가 중일 전쟁에 참전해서 민간인 여성을 강간하고 포로를 살해하는 장면은 현재 일본에서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이만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제작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게 만들 정도로 사실적이고 냉정하다. (홍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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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모더니스트라 불리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세계는 일본영화사에서 어떤 분기점을 이룬다.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가 일본적인 정신성을 대표하는 예의바름, 절제의 미덕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슬픔을 우아하게 표상했다면, 마스무라 야스조는 생동하는 삶의 원초적인 충동과 욕망을 파격적으로 표출, 또 다른 일본성을 드러낸다. 이는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등 일본 뉴웨이브 계열의 감독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마스무라가 바라본 60년대의 일본은 치유될 길이 없을 정도로 병든 사회였고, 그의 영화에는 그러한 비관적 세계관이 담겨있다. 사회가 병들었고, 사람들의 감정이 병들었으며, 욕망은 뒤틀려있다. 그의 영화에서 전쟁과 관련된 시기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욕망은 다른 욕망이나 공동체에 의해 억압되는데, 그 공동체란 집안, 마을, 혹은 국가이다. 군국주의 사회 속의 ‘전체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희생됐던 개인의 삶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눌린 욕망들이 있고, 그 억압된 욕망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상을 뚫고 강렬히 분출된다. 또한 전후의 초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끝없는 성공을 꿈꾸며, 성적 욕망을 자유로이 표출한다. 이에 대한 과대망상적인 집착은 쉽사리 광기로 전이되고 그들 욕망의 충돌은 일종의 게임처럼 펼쳐진다.

이처럼 마스무라는 인간의 마성을 극단적으로 탐구한다. 특히 마스무라의 페르소나 와카오 아야코를 통해 자유롭게 표출된 여성의 욕망은 그 자체로 급진적이다. 아울러 사랑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정신적 뒤틀림과 신체에 대한 페티시즘적 욕구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병든 에로스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에로스는 결국 타나토스, 즉 죽음으로 이끌린다. 가령 <만지>의 부부는 “사랑만이 전부야.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라며, 정말로 죽음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간다. 마치 죽음만이 삶을 증명할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마스무라가 일본 영화계에서 이뤄낸 전복적 성취는 격정적 감정의 표출이 엄격하게 형식화된 미장센과 몽타주 스타일 속에서 정동의 변증법을 구축해낸다는 점에 있다. 오즈와 마찬가지로 그의 카메라는 고정되어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카메라 셋업으로 하나의 숏만을 찍고, 계속 셋업을 바꿔가며 360도 공간을 전면적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오즈와 달리 마스무라가 만들어내는 숏들의 프레이밍은 매우 탈중심적(파스칼 보니체가 말한 데카드라주 décadrage)이다. 

그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의 빈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하여 파편화되고 잘려진 느낌을 갖게 되는 숏들의 몽타주로 구축되는 영화적 공간은 시각적이라기보다는 촉각적인 접속에 의해 구성되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엄격한 형식적 스타일 안에 놓인 인물들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를 뚫고 나갈 것 같은 감정적 격동을 만들어내고, 그 감정들을 파편화해 다시 이어붙이는 몽타주가 강렬한 정동을 이룬다.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마침내 카메라가 움직이는 순간, 그 감흥의 강렬함은 말할 것도 없다.

가령 <아내는 고백한다>의 마지막 순간 비틀비틀 파멸을 향해 걸어가는 여자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트래블링 숏이 그러하다. 또한 <만지>의 최종적 순간에 세 명의 인물이 기도를 하고 수면제를 먹고 나란히 누워 죽음을 기다릴 때, 불교의 여보살화를 따라 수직으로 이동하는 카메라의 상승과 하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와 그 이행을 보여준다.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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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유일의 민간 비영리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3월 9일부터 24일까지 시대를 앞서간 모더니스트라 불리는 일본의 위대한 영화감독 마스무라 야스조(1924~1986)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회고전을 개최한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영화계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으며, 일본 뉴웨이브의 전조로 평가받는 인물로, 인간의 마성을 극한까지 탐구한 위대한 시네아스트다. 그는 1959년 <입맞춤>으로 데뷔한 후 1982년까지 모두 57편의 작품을 남겼고, 전통적인 일본이 아닌 내면에 감춰진 일본성을 감각적이고 독특한 스타일로 표현하고 사회 비판적린 내용의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그의 예술성은 오랜 세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1990년대 말 비로소 발견되어 재평가되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여성의 욕망을 충격적인 내용과 형식으로 표현해낸 <아내는 고백한다>(1961)에서부터 완벽한 예술에 대한 열망과 성적 욕구를 밀도 있게 보여주는 <눈먼 짐승>(1969), 여성의 동성애를 감독 특유의 독특한 시선으로 보여준 대표작 <만지>(1964), 그리고 <훔친 욕정>(1962), <문신>(1966), <세이사쿠의 아내>(1965) 등 60년대에 만든 대표작 10편이 상영된다.

한편 이번 회고전에서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와 미학’에 관한 두 차례의 강연도 마련되어 있다. 자세한 상영 및 강연일정은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www.cinematheque.seoul.kr)를 참고하면 된다. (신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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