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俠少女 張徹映畫 愛情告白

부끄럽지만 고백합니다. 누군가 취미를 물어보면 “영화 보는 거 좋아해요”라고 답했던 나, 중학교 때 무협드라마에 심취하고는 한국 드라마와 가요에 관심을 잃었다고 말하던 나, 장철 감독님을 이제야 영접하고는 첫눈에 반했습니다. 뒤늦게 시름시름 장철 앓이를 하며 이번 특별전에서 꼭 전작을 보리라 다짐했지요. 극장에서 웃옷을 벗어재낀 건강한 남성들을 보며 허허 웃고 있는 젊은 여자가 있다면 아마 저일 겁니다. 덕분에 일상생활에서도 내내 조금 흥분상태입니다. 100편이 넘는 그의 영화들 중에서 고작 7편밖에 보지 않은 장철 입문자일 뿐이지만 이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어 설익은 애정고백을 해볼까 합니다.



사실 잔인한 걸 싫어합니다. 특히 전쟁 영화에서 툭하면 나오는 대규모 전투 장면은 싫어하는 클리셰 중 하나이지요. 의미 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단역들이 불쌍해서 중요한 장면에 집중이 안 되더군요. 그것은 단지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과시적인 액션에 그치고 맙니다. 그런데 ‘피바람이 부는’ 장철 영화를 볼 때엔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져라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차이가 뭘까, 저기엔 다른 뭔가가 있다. 이 생각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는 급이 다른 무술 때문이기도 합니다. 커다란 스크린으로 봐야만 진가를 알 수 있는 수려한 액션 씬! 각자의 위치에서 합을 맞추는 수십 명의 정확한 호흡! 일 대 다 액션 씬 중에서는 가히 최고라 할 만하니, 당연히 신세계를 발견한 기분에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요. 그러나 ‘다른 뭔가’는 아마도 무술 혹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장철 영화에서의 무술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인 것입니다.


또 강호라는 곳이 기본적으로 그러하지만, 장철의 세계에는 차원이 다른 비장함이 있습니다. 누구나 정의의 편에 선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한 후 영웅으로 추대 받는 모습을 기대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주인공일수록 가차 없습니다. 물론 주인공은 적들을 모두 쓰러트리지만 자신 역시 못지않게 비참히 죽어버립니다. 목적을 위해서 기꺼이 받아들인 죽음임과 동시에 승리했으나 승리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인 죽음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거의 죽음에 이른 상태에서 한번 씨익 웃고는 “난 여전히 천하제일의 검객이다”라고 말하는 <심야의 결투>의 은붕(왕우).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적을 마주하고 “모든 사람이 죽지요” 라며 동료를 보내는 <쌍협>의 소비(강대위). 이번 특별전에서는 상영하지 않지만 <복수>의 관소루(강대위) 역시 형을 죽인 사람들에게 모두 복수한 후, 애인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음을 맞습니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시체는 너무나 처참하고 쓸쓸하여 장렬함이 감돌고, 그들의 신념에선 숭고함까지 느껴지곤 합니다.



이때 비장함, 장렬함 이면에 있는 허무함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막연하게 떠오른 느낌이지만, 이 정서야 말로 장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적어도 영화에서는)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철 세계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커다란 악과 싸웠습니다. 악의 수장은 강호에서 명성을 얻은 실력자이지만 진정한 무림 고수는 아닙니다. 무술을 ‘목적이 아닌 도구로 다루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들은 더 큰 명성을 욕심내며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 사익을 위해 수련하고, 다른 사람을 꺾기 위한 초식을 연마 하는 데에 주력합니다. 이때 장철을 대변하는 주인공이 나타나 무술의 뜻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악의 무리를 모두 처단합니다. 설사 먼저 쓰러질지라도, 오승욱 감독이 언급했듯 죽었음에도 원념 때문에 다시 살아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산 자, 즉 무술의 경지에 이른 자는 망설임 없이 강호를 떠나버립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그들에게 있어, 속세의 사사로운 모든 것들은 이내 져버릴 한 때의 꽃과 다를 바 없는 셈입니다. 한편, <복수>의 관소루는 복수는 했지만, 애인에겐 가지 못하고 끝내 원념을 남긴 채 죽어야만 합니다. 앞서 쓴 것처럼 승리했지만 승리했다고도 볼 수 없을 죽음에 이른 것이지요. 그렇다면 관소루가 목숨과 바꾼 장엄한 접전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장철의 세계에서는 어떤 승리든 장렬하면 할수록 그 못지않은 허무함이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함, 장렬함, 숭고함 속에 뒤섞인, 어쩌면 철학처럼 느껴지는 허무함이야말로 여타 무협영화와의 차별점이겠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검은 옷을 입은 주인공이 죽는 경우는 없더라는 겁니다.(몇 편 안 봐서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흰 옷을 입고 전투로 향하는 주인공에게는 죽음을 불사한 결연함이 묻어납니다. 주인공은 항상 피바다의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흰 옷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하얀 옷에 붉은 피가 튀었을 때, 이는 주인공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신호입니다. 그때부터 영화는 진짜로 시작합니다. 그동안 마지막 결투를 위해 쌓아온 것처럼 주인공도, 영화도 모든 것을 다 쏟아냅니다. 마지막 10여 분을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지막 전투는 장철 영화의 진수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 황폐한 전장의 위로 떠오르는 마지막, ‘劇終’. 아. 정말 그 순간 고독의 무게란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장철의 영화는 동성애 코드로 읽힐 정도의 남자들 간의 깊은 교감으로도 유명합니다. 오히려 여자가 등장할 때 남자들이 불행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잔인한 장면과 약한 내러티브로 인해 남자들의 영화라는 편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자를 위한 특별전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남자들만 나오며, 탄탄한 몸을 드러내고, 남성미가 한껏 폭발하는, 게다가 내용 힘들게 따라갈 필요 없이, 마치 춤을 추듯 아름다운 무술 장면을 감상하면 되는 영화를 마다할 수가 있을까요. 게다가 왠지 사연 있어 보였던 배우들의 눈빛이 아른거려 집에 돌아가서도 마음을 진정시키기 힘들었습니다. 어두운 이면을 안고 있기에 매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스타를 사랑하기 때문에 영화를 사랑한다면 그건 아직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부정하고 싶습니다. <심야의 결투>에서 차가운 눈빛을 한 왕우(은붕 역)에 매료 되서 한 편 더 보러 왔다고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정말이지 그에게 무릎 꿇고 구애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심야의 결투>의 은붕은 금연자밖에 사랑하지 않으니 포기해야겠네요. 또 격렬한 싸움 후에 머리를 쓰윽 넘기는 여유를 보여주는 강대위느님은 어떻습니까. 특히 강대위는 <복수>에서 다른 배우들과 달리 연인과의 애정 씬을 몇 번이나 소화해내며 여심을 설레게 했지요. 운동으로 단련된 몸을 감추지 않고 옷을 걸핏하면 벗어던지는 남자들도 물론 좋습니다!(하지만 사실 적룡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유독 옷 한번 벗지 않고, 싸우기 직전까지 흰 옷으로 멋을 잊지 않는, 양조위와 유희열 그 중간쯤의 강대위에게 솔직히 전 반했습니다. 이번 주는 본격적으로 ‘강대위-적룡’ 콤비가 출연한 작품들을 공략해볼까 합니다. 앞에선 진지하게 장철 영화의 장렬함, 허무함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멋진 배우들을 보며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이지요. 정말이지, 특별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휴리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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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세미 2012.04.14 05: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사랑스러운 글이예요^^


<심야의 결투>에서 관객들의 눈을 휘어잡는 것은 은붕(왕우)의 현란한 칼부림이다. 그는 항상 혈혈단신으로 떼 지어 있는 악당 무리들과 맞선다. 다른 장철의 영화들이 그렇듯 피바다가 내내 흐르지만 은붕의 흰 옷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는다. 은붕이 카메라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면서 악당들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오솔길 장면에서는 그 무용 같은 액션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진 핸드헬드의 사용은 긴박감을 만들어 관객을 쥐락펴락 한다. 이는 물론 요즈음의 액션 영화만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컬트의 반열에 오른 홍콩판 B영화를 보는 감흥에 빠지기에는 충분하다.

은붕은 압도적인 무공을 앞세워 무표정한 얼굴로 살육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 속에는 금연자(정패패)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꿈틀거리고 있다. 산에서 요양을 취하고 있는 금연자를 속세로 불러내기 위해 그는 시신들 옆에 금연자의 비녀를 꽂고 떠난다. 금연자가 이 모든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다. 이런 행위는 모두 금연자를 만나기 위한 은붕의 애절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철의 폭력 묘사는 이 같은 로맨스를 일종의 맥거핀처럼 보이게 만든다. <심야의 결투>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은붕과 금연자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난 뒤, 은붕이 죽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10여 분이 더 남아 있다. 이미 피가 흐르고 내장이 쏟아지는 상태에서 은붕은 몸을 일으켜서 남은 적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심야의 결투>의 세계는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흘려버리는 냉혹한 세계다. 기운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끝내 에너지를 전부 소모해버리는 은붕은 마치 처음부터 그 싸움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피와 함께 비장미가 넘쳐흐른다.

이러한 폭력 묘사는 선과 악이라는 가치가 상실된 상태에서 나온다. 은붕의 살육은 부모를 죽인 악당들에 대한 복수와 금연자를 만나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복수를 끝내고 금연자와 마주한 이후로도 살육을 멈추지 않는다. 비록 은붕이 악인만을 골라 죽인다고 하지만, 그러한 가치판단에 따라 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인이라는 핑계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선악의 지배적인 가치가 실종된 상태에서의 폭력은 일견 허무해 보인다. 비장한 결투가 끝나고 나면, 승리했다고 웃을 수도 없고, 졌다고 울 수도 없다. 은붕의 잔혹한 폭력의 이면에는 허무가 깔려 있다. <심야의 결투> 마지막 장면에서의 계곡은 그렇게 쓸쓸해 보인다.

by 송은경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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