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5일, 우리에게 미지의 감독으로 남아 있는 자크 로지에의 두 번째 장편 <오루에 쪽으로>(1973)가 상영되었다. <오루에 쪽으로>는 바다에서 펼쳐지는 세 여자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카메라에 담아낸 영화로, 마치 극장 안에서 바캉스를 다녀온 것 같은 생생함과 휴가가 끝난 후의 쓸쓸함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영화 상영 후에는 자크 로지에의 초기 단편들과 함께 그의 영화 세계에 대해 상세히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강연이 열렸다. 그 현장을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아직은 미지의 작가인 자크 로지에의 영화를 처음 소개하는 사람이 저라는 것이 꽤나 즐거운 일이다. 오늘 자크 로지에라는 작가의 기이한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로지에가 만든 단편들의 일부를 보겠다. 로지에가 50년대에 만든 단편 영화를 보면 놀라운 느낌을 받게 된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자크 로지에의 단편 영화를 보고 질투심 같은 걸 느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로지에의 <신학기(Rentrée des classes)>(1956)는 트뤼포의 <개구쟁이들>(1957)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나는 로지에의 단편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어떤 학생이 신학기에 학교에 가다 친구의 꼬임에 빠져 냇가에 가방을 던진 후 가방을 찾아서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두 번째로 보여드릴 영화는 <블루진(Blue Jeans)>(1958)이라는 영화인데, 칸에서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두 청년이 여자를 꾀려고 하는 내용이다. 이 두 편의 단편을 보게 되면 자크 로지에가 자연, 바다, 해변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작가라는 걸 알 수 있다.

 

로지에의 첫 장편 데뷔작은 <아듀 필리핀>(1962)이라는 영화다. 1959년에 고다르가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들고 나서 제작자가 고다르에게 동료 감독 중에서 괜찮은 감독을 뽑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고다르가 추천한 감독이 자크 드미, 아녜스 바르다, 자크 로지에였다. 그 덕분에 제작자가 자크 로지에의 데뷔작을 만들었다고 한다. 제작자는 비용이 덜 들도록 촬영을 짧게 끝내기를 원했지만 자크 로지에는 빨리 찍는 작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로지에는 장편을 총 4편 만들었는데, 근 10년에 한 편 꼴이다. 빅토르 에리세와 더불어 과작의 작가라 불릴 만하다. 그런데 이런 작업방식이 로지에의 대중적 지명도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됐다. <아듀 필리핀> 개봉 당시 극장 관람객은 5천 2백 명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고다르 영화의 제작자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들을 미국에 배급했는데, 미국의 수입자는 로지에의 영화를 전혀 수입할 생각을 안 했다고 한다. <아듀 필리핀>이 미국에 처음 소개되기까지 10년이 걸렸고, 오늘 보신 <오루에 쪽으로> 역시 프랑스 개봉 후로부터 20년이 지나서였다. 16mm로 촬영된 영상을 35mm로 블로우 업 할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한다. 고다르는 로지에를 빨리 찍는 작가라고 소개를 했지만, 사실 로지에는 촬영을 느리게 진행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두 대의 카메라를 이용해서 작업했고, <아듀 필리핀>에는 4만 미터의 필름을 썼다고 한다. 당시 감독들마다 사용했던 필름의 양을 따지면 샤브롤이 1만 7천 미터, 고다르가 1만 미터 정도였다. 촬영을 굉장히 길게, 많이 한 것이다. <아듀 필리핀>은 현장 녹음이 잘 들리지 않아서 더빙 작업에만 5개월이 더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쓰고 작업한 것이 아니라서 동시녹음이 좋지 않아 후시로 배우의 입술 움직임을 해독하며 녹음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로지에는 그렇게 효율적인 작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돈이 많이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제작자 입장에서 보면 효율성은 많이 떨어지는 셈이다.

 

 

방금 보신 단편 중 첫 번째 단편에서 자크 로지에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로지에의 기본적인 특징은 탈선이라 할 수 있다. 정상적 궤도에서 자꾸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영화사에서 보면 <익사에서 건져낸 부뒤씨> 같은 장 르누아르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로지에는 르누아르의 조감독을 하기도 했다. 정상적 궤도에서 빠져나가는 상황으로, 등교길에서 갑자기 책가방을 물에 던지면서 꼬마는 자연적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 어린아이의 모험은 우연히 던져진 가방에서 시작해, 그 가방을 따라가며 진행된다. 그런 점에서 르누아르적인 탈선이 있다. 로지에는 르누아르의 계승자이자, 로지에 이후의 작가로 보면 키아로스타미, 이오셀리아니의 선구자격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자연의 시냇물의 아름다움은 그 물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장애물과 만나며 굴절되는 데 있다. 직선의 움직임도 가능하지만 그건 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라고 말했다. 지그재그 3부작 같은 영화가 <신학기>와 비슷하다. 이런 영화들이 강력하게 환기시키는 것은 삶의 영역에서 우회로를 해 나가는 것이다. 이들 영화는 지그재그로 진행되는 사건을 그리는데, 그때 삶의 근원적 진실에 훨씬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렇게 정상적 궤도에서 탈선해가는 경향이 로지에에게 시대와의 불화성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싶다. 즉 상업적 효율성에서 보면 영화를 찍기 전에 시나리오를 정하고 거기에 맞춰 작품을 만들어 나가고 사전적 준비에 따라 진행되어야 하는데, 로지에는 늘 탈선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경향이 대부분 휴가나 바캉스 영화라는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휴가의 감독, 그리고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화 제작에서도 너무 오래 휴가를 떠난 것이다(웃음). 바캉스의 감독이라는 점에서 자크 로지에는 에릭 로메르와 비슷하지만, 로메르는 굉장히 효율적으로 1년에 한두 편씩 영화를 만들었다. 프랑스 평론가 장 두셰에 의하면, 자크 로지에는 상업적 규칙을 지키지 않았고, 그 어떤 규칙도 지키지 않으려 했던 작가로 표현되고 있다. 자유로움을 좋아했다는 점이 그의 영화를 돋보이게 만들지만 제작의 어려움도 낳은 것이다.

 

 

로지에의 두 단편과 <오루에 쪽으로>를 보면 그런 점이 느껴진다. 아이가 물뱀을 쫓아가는 장면처럼 정상적 궤도에서 일탈해 나간다는 건 바깥 저편으로 나가는 것이자, 거기서 낯선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일반적인 영화가 갖고 있는 규칙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이야기적이라기보다 몸짓, 말투, 웃음소리들, 이상한 제스처들, 다양한 소리들로 가득 차있는 영화에 가깝다. 그래서 동시대적으로 보면 존 카사베츠 영화와 비슷하다. <오루에 쪽으로>는 카사베츠의 <남편들>(1970)의 여성적 버전 같다. 야생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연관성을 찾아보면, 로메르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1987)의 첫번째 에피소드와도 비슷하다. 로메르도 이런 영화를 찍을 생각을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상적 궤도에서 많이 탈피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레네트>는 예외적으로 많이 이탈해있는 영화다. 로메르의 바캉스 영화나 자크 로지에의 바캉스 영화는 그런 식으로 노출된, 무의식적인 야생성(savage)과 만나는 것이 특징이다. <오루에 쪽으로>에서 굉장히 길게 나오는 보트 타는 장면은 그런 느낌을 준다. 요즘으로 보면 거의 3D 체험이 가능할 정도다. 그렇게 자연과의 만남이라는 사건들이 있다. 그런데 카메라가 자연과 만난다는 것, 바캉스를 영화로 찍는다는 것 외에도, 그런 야생성을 영화의 내부로 비집게 들어오게 하면서 영화를 내부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로지에의 또 다른 특징이다. <오루에 쪽으로>를 보면 인물들이 자연적 세계로 나가는 것도 있지만, 바깥의 자연이 내부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침입이 있다. 가령 집 안에 물고기, 장어가 돌아다니고, 그 때문에 내부의 소동이 벌어진다. 또 다른 한편으로 영화적 사건으로 보자면, 그것은 카메라가 찍는 자연적 대상으로 배경을 찍어 나갈 때 영화가 갖는 근본적인 변화의 과정들을 겪는다는 것이다. 자연적 세계, 굉장히 낯선 세계는 완벽히 컨트롤 불가능하고 여기에 영화가 들어가게 되면서 영화의 진행 경로가 자연스럽게 여러 우회들을 거쳐나가게 된다. 트뤼포는 <아듀 필리핀>이나 <오루에 쪽으로> 같은 영화가 누벨바그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오루에 쪽으로>는 말 그대로 파도wave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10여 분 간 요트의 장면은 누벨바그란 게 뭔지 그대로 보여준다. 자크 로지에는 어떤 면에서 순항의 작가라고도 할 수 있다. 자연적 세계와의 만남이라는 것은 세계의 풍부함을 카메라에 담아내기 위한 것이고, 카메라 앞에 오는 삶의 역동성을 직접적으로 영화가 담아내는 계기를 이루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 소수의 스태프들과 함께하는 동시녹음, 올 로케이션 현장 안에서 영화의 규칙성을 탈피해 나가는 과정들을 느낄 수 있다.

 

 

로지에의 두 번째 단편 <블루진>은 자크 로지에의 인물들의 출발점 같기도 하다. 로지에의 인물들은 고독하고 위약한 인물들이다. 똑같은 바캉스의 인물을 그려도 로메르의 사람들은 자기 논리에 빠져있고 자기변명, 자기합리화가 분명하다. 그들은 결코 자기 태도를 바꾸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이상한 궤변을 부린다. 그런데 로지에의 인물들은 멜랑콜리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이들은 종종 집단으로 구성된다. <블루진>에서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하고 <아듀 필리핀>에는 셋, <오루에 쪽으로>는 여자 셋 남자 둘이 나온다. 그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함께 노니는 것이다. 현대적인, 도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반대로 규칙적 세계에서 일탈해나가는 상황에서는 이오셀리아니의 영화가 그렇듯이 같이 노래 부르고 와인 마시고 떠돌아다니는 등 의 집단성이 발휘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오루에 쪽으로>도 그렇고, 자크 로지에 영화에서는 연인보단 동성 친구끼리 나오는 경우가 많다. 도시적 세계에서 빠져나와 자연적 세계에서 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흥취를 영화가 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흐름과 하모니가 있다. 그런데 <오루에 쪽으로>의 결말이 굉장히 쓸쓸해 보이는 건, 그 하모니가 깨지는 과정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에 관객들은 세 여자의 각각의 리듬을 잘 모른다. 그러다 카메라가 각각의 인물을 따로따로 보여주는 방식에서 조금씩 그들은 개별화가 된다. 대표적인 장면은 모두 모여 음식을 먹던 중 조엘이 꺄린과 패트릭이 이야기하는 걸 지켜보는 부분이다. 그것도 모르고 질베르는 계속 엉뚱한 얘기를 하고, 조엘은 꺄린이 패트릭과 내일 배를 타러 간다는 사실에 좀 짜증이 나 있는 상태다. 그때부터 영화에서 균열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고, 일탈적인 것의 집단성이 무너져가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것이 이 영화를 좀 쓸쓸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오루에 쪽으로>는 시대성을 떠올리게 하는 면모가 있다. 즉 우리는 세 여자가 갖고 있던 집단성이 점차 괴멸되어가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 영화가 직접적으로 지칭하고 있진 않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67~68년의 젊은이들의 집단적 열기가 완전히 빠진 이후에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기운의 쇠락이 보이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자크 로지에는 68혁명의 젊은 기운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히피 유토피아의 쓸쓸함을 그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이후에 나올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물론 이 작품이 시대적 감각들을 정치적이나 사회적 주제 안에서 드러낸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형식과 젊음에 대한 태도는 동시대적인 쓸쓸함에 대한 느낌이 있다. 영화에는 저항적인 음악을 만들었던 공(GONG)이라는 락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밴드의 사이키델릭한 음악이 영화의 서두와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런 점에서 젊음의 소멸성과 그에 대한 쓸쓸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가 사라지는 시간을 담아냄으로써 그 시간들을 보존하는 기능도 하기 때문에, 쓸쓸한 지난여름의 기억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럼으로써 보존되어 있는,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의 보존 같은 것도 있다.

 

 

로지에는 “나는 뤼미에르처럼 영화를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자연적 상태를 기록하는 상태로서의 영화를 선호했다. <오루에 쪽으로>를 보면 그런 미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바캉스 영화인데, 바캉스라는 건 자연적 세계 안에서 사람들을 노출시키고 직접적이고 투명한 것들을 드러낸다. 여름의 바캉스에서 공간, 상황들의 투명함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투명하게 드러내게 되는 과정들이 보인다. 직접성이나 투명성이란 말은 어떤 해석의 골조나 설명들로 연결되지 않고 관객이 직접 이미지와 접촉시켜 나가는 가능성을 가진 작품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잃어버린 경험의 회복으로도 볼 수 있다. 다른 매개들을 거쳐 해석하거나 이야기를 이해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현실과 접촉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는 파졸리니의 영화를 두고 베르톨루치가 했던 말, 즉 영화가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과정들을 묵격하는 것 같은 기쁨을 느끼게 만든다. 영화를 발견하는 것 같은 기쁨, 사람 혹은 사물과 접촉하는 원초적인 상태의 경험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정리: 송은경(관객 에디터) 사진: 황초희(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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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고다르는 우리가 총체적 권력을 지니고 있는 온갖 형태의 수사학의 시기, 언어적 테러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다르는 자신이 영화의 평범한 고용인으로서 말과 이름이 지배하기 이전의 사물에 대해 말하고 싶고, 아빠와 엄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전의 아이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는 아직 이름을 갖기 전의 바다, 파도, 자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전(以前)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기원으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구스타브 쿠르베의 논란적인 그림이 상기시키듯이 기원으로의 회귀는 세계의 기원, 미스터리의 기원, 불명료함과 순수한 나체의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고다르는 <영화사>의 2A에서 사티아지트 레이의 <아푸의 세계>(1959)와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의 이미지를 혼합하고 여기에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영상과 흑백의 포르노그래피 영상을 연결하는 과감한 몽타주를 선보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영화예술의 아름다움의 가능성, 혹은 그것의 유년성이 철저하게 유린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세계의 몰락 이전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 이후, 체르노빌 이후, CNN의 공습이후, 9.11테러 이후에 잃어버린 세계와 시간을 되찾으려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아니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것입니다. 이후의 시간에서 이전의 가능성을 되찾는 것. 그래서 과거는 죽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다르에게 만약 영화가 현재의 예술이라면 그것은 과거의 현재(기억), 현재의 현재(직관), 미래의 현재(기대)라는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인데, 이는 일종의 데자뷰의 시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매 시대는 다음에 이어질 시대를 꿈꾼다고 말했던 이는 벤야민 입니다. 그는 새 것에서 자극받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판타지가 사실은 근원적 과거와 이어져있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사물이 존재하는데 왜 그것을 조작하려 하느냐’라는 로셀리니의 유명한 말은 이미지가 항상 거기에 존재하고 있기에, 그 이전에 있었기에 이후에 도래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는 세계로 우리를 내던지는 행위이다. 영화적 체험이란 결국 데자뷰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혹은, 시네마테크에서 고전영화를 보는 것이 이미 데자뷰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관객에게는 ‘어디서 본 것만 같은’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는 우리들 서로가 이미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사람들이라는 기묘한 체험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2011년 시네바캉스 서울’에서 그런 데자뷰의 신비한 체험을 함께 했으면 합니다.

글/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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