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헤매던 소년, 소녀가 존 레논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 다비드 트루에바의 <눈을 감으면 삶은 더 편하지>

 




영어 교사 안토니오는 비틀즈 아니, 그보다 존 레논의 열렬한 팬이다. 그는 비틀즈의 노래 가사로 영어를 가르친다. 어느날 그는 교실 창문 너머로 한 학생이 교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교장 신부에게 손찌검을 당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렇듯 <눈을 감으면 삶은 더 편하지>에 등장하는 소년, 소녀들은 어른들이 가하는 물리적 폭력에 노출돼있다. 폭력의 주체가 되는 어른은 교사, 수녀원 원장, 경찰인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소년, 소녀의 사적 영역에 개입하며 훈육의 이름 아래 폭력을 당연시한다. 극 중 안토니오는 이 영화에서 위와 같은 어른들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어른이다. 그는 아이들과 마주칠 때마다 결코 무심하게 지나치지 않는다. 벨렌과 후안호 역시 그의 관심으로 인해 존 레논을 만나러 간다는 무모한 여정에 동참한다. 수녀원과 가족을 떠난 벨렌과 후안호는 알메리아까지 동행하며 안토니오를 지켜보는 시간을 갖는다. 존 레논을 향한 안토니오의 집념을 의아해하던 두 소년, 소녀가 그를 응원하기까지 안토니오의 도전은 두 인물의 시선 속에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배우 활동에 도전한 존 레논이 <나는 어떻게 전쟁에서 이겼는가>(리처드 레스터, 1967)를 촬영하는 동안 만든 노래 스트로베리 필즈는 영원하리의 가사에서 차용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존 레논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안토니오의 열정이 기입된 존 레논의 흔적이다. 무작정 촬영장 근방으로 찾아간 안토니오는 경비와 제작진으로부터 출입을 제지당하고 동행한 벨렌은 그가 비웃음을 사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와 후안호는 극장에 숨어들어 기어이 제작진에게 쪽지를 전달하는 안토니오를 또한 보게 된다. 벨렌과 후안호의 시점에서 안토니오는 유머와 지혜를 갖춘 어른으로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사려 깊은 교사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하지만 존 레논을 쫓는 과정에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드러내고 넘치는 열정이 비웃음을 사기도 하며, 후안호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농부에게 뺨을 맞기도 한다. 심지어 존 레논을 만나 벅차오르는 기쁨 때문인지, 마리화나의 영향 때문인지 낮은 절벽에서 떨어져 실성한 사람처럼 감격에 겨워 웃기도 한다. 영화는 간절한 목표에 다가가는 그의 숨김없는 얼굴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좌절과 감격을 오가는 안토니오의 도전에 벨렌과 후안호의 반응과 동시에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두 사람의 재능이다. 면허가 없지만 벨렌은 안토니오 못지않게 운전을 할 줄 알며, 준수한 미용 기술을 갖고 있다. 후안호 역시 낙서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뛰어난 그림 실력을 지녔다. 초반부에서 물질적으로 안토니오의 영향에 의존했던 두 소년, 소녀는 점차 그들이 지닌 가능성을 드러낸다. 안토니오는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위축된 벨렌과 아버지에 대한 분노에 차있던 후안호가 반응하도록 이끈다. 다만 이는 안토니오가 의도를 갖고 유도한 것이 아닌, 단지 그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두 사람은 그에게, 또는 서로에게 반응한다. 술에 취한 안토니오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넌지시 벨렌에게 청혼하자 그 뒤에 후안호를 찾아가는 벨렌의 행동 역시 안토니오가 촉발한 반응에 해당한다. 영화의 전개가 안토니오의 선택과 동선에 집중된 것처럼 보이지만 존 레논에 촉발된 안토니오의 적극적인 행동처럼 안토니오를 바라보는 벨렌과 후안호의 반응도 간과할 수 없다. 안토니오의 여정에 막 합류할 무렵까지만 해도 그들에게 존 레논은 막연한 유명 인사에 불과했지만 안토니오가 선물한 존 레논의 육성 녹음을 후안호가 재생하는 순간, 알메리아에서의 경험이 집약된 것 같은 라이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유발한다.




신사적이면서도 불쑥 드러나는 아이 같은 천진함, 열광의 대상을 향한 고도의 집중, 빈곤과 질병을 겪는 아이들을 대하는 사려 깊은 배려 속에서 고개를 드는 쓸쓸한 모습 등, 안토니오는 그를 연기하는 배우 하비에르 카마라가 과거에 분했던 또 다른 캐릭터를 상기시킨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2003)에서 식물인간이 된 발레리나를 돌보는 간호사 베니뇨 역시 그와 비슷한 입장의 여행 작가에게 본보기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시행착오를 이겨내고 평정을 찾은 이상적인 사례가 아닌, 집착에 가까운 열정으로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 슬퍼한 여행 작가처럼 베니뇨, 아니 배우 하비에르 카마라의 사려 깊고도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인물을 재현하는 능력은 안토니오를 기억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영어 교사 Juan Carrón Gañàn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눈을 감으면 삶은 더 편하지>는 프랑코 정권의 잔재 아래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찰나의 일탈이자 유예 기간을 조명한다. 이 기간이 안토니오에겐 그의 우상을 대면하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벨렌과 후안호에겐 안토니오와 함께 보낸 시간이었다. 안토니오는 두 소년, 소녀의 입장을 판단하거나 훈계하기보다 자신의 열정, 목표, 근성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벨렌과 후안호는 농부에게 모욕을 당하고 돌아오는 안토니오를 완력에서 져버린 약자로 여기는 것이 아닌, 후안호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과정에서 동원한 폭력이 잘못된 것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첫 어른으로 본다. 길을 잃은 두 소년, 소녀는 알메리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존 레논에게 미친 듯이 열광하는 괴짜 영어 교사의 천진한 열정과 단호한 태도의 경험이 존 레논의 육성에 스며들어 짧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언제고 상기할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든다.


 

권세미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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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시간

-욘 가라뇨와 호세 마리 고에나가의 <플라워>

 




욘 가라뇨와 호세 마리 고에나가의 <플라워>(2015)의 초반부는 아네를 위한 꽃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아직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의사에게서 폐경 진단을 받은 아네에게 어느 날부터 꽃배달이 온다. 남편이 보냈을 거라 생각했던 꽃은 익명의 누군가에게서 온 것이었고, 아네는 매주 같은 시간 도착하는 정체모를 꽃다발에 내심 즐거워한다. 영화는 꽃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지 않은 채 잠시 다른 부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아네와 같은 직장에 다니던 베나트와 그의 아내 로우르데스의 이야기다. 로우르데스는 베나트의 어머니와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러던 중 베나트가 교통사고로 죽어버리고 만다. 로우르데스는 시어머니와 연락을 끊고 다른 남자와 살기 시작한다. 베나트가 죽은 후 또 한 가지의 변화가 생기는데, 더 이상 아네에게 꽃배달이 오지 않는다.


이후의 시간동안 영화는 베나트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준다. 죽음은 아주 짧은 순간 벌어지고, 영화는 죽은 후에 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죽은 자를 완벽하게 떠나보내는 여정으로 보여준다. 자신에게 꽃을 보낸 사람이 베나트였을 거라고 추측하게 된 아네는 매주 그가 죽은 장소에 꽃을 가져다 놓고, 누군가 매주 꽃다발을 가져다 놓는단 사실을 알게 된 로우르데스는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을 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새 남편의 불만스러운 말에 로우르데스는 약간 격앙된 톤으로 난 이걸 끝내야해라고 얘기한다. 영화의 중후 반부를 끌고 가는 핵심적인 대사라고 생각한다. 죽음 후에도 끝내야 할 것이 남아있는 것이다. 로우르데스가 완결지어야 하는 것은 베나트를 상실한 슬픔도 아니고, 시어머니와의 풀지 못한 관계도 아닌 것 같다. 익명의 누군가가 전해주는 꽃다발의 정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베나트의 한 부분이다.




실제로 베나트가 아네에게 꽃을 보냈는지가 영화에서 명시되진 않는다. 몇 가지 단서로 추론만 가능할 뿐이며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에 따져 물을 수도 없다. 아네와 시어머니는 점점 친밀해져 베나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죽은 이를 슬퍼하는 자리에 로우르데스는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러나 이는 몇 년 후 역전된다. 베나트의 어머니는 치매로 아들을 기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고, 아네는 역시 회의감에 빠져 더 이상 꽃을 가져다 놓지 않는다. 베나트의 죽음 후 그에게 집착했던 두 사람은 고작 몇 년 사이에 이미 돌아섰다. 로우르데스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보며 우는 모습은 영화에서 가장 마음 아픈 장면이다. 그렇게 집착했던 것조차 기억해낼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린 모습. 동시에 그렇다면 과연 로우르데스는 베나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플라워>는 서서히 잊혀져가는 시간에 대해 차분한 톤으로 이야기한다.




<플라워>는 남은 이들의 겪는 혼란의 시간과 죽은 자의 육체가 완전히 소멸되는 과정을 평행하게 진행시킨다. 베나트는 그가 생전에 바랐던 대로 죽은 몸을 의과대학에 기증하고, 시신이 방부 처리되어 의과 생들의 실습용으로 쓰이게 되면서 그의 (신체의) 죽음은 유예된다. 몇 년 후 마침내 시신의 사용가치가 모두 끝났을 때 그는 화장되어 로우르데스에게 다시 돌아오고, 그때서야 로우르데스는 언뜻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영화가 끝난다. 죽음이라는 시간을 유예시키는 것은 이 영화에서 중요하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플라워역시 유사하게 기능한다. 영화는 꽃다발을 만드느라 꺾여버린 꽃들만을 보여준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엔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 꽃들이다. 베나트는 아네와에게 꽃다발을 좀 더 살려둘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모습은 일견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곧 사라질 이의 바람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황선경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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