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8일, 프랑수아 트뤼포의 <사랑의 도피> 상영 후 “앙투안 드와넬의 모험”이란 주제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번 시네토크는 <400번의 구타>로 시작해 <사랑의 도피>로 마무리되는 ‘앙투안 드와넬 시리즈’의 전반적인 이야기와 트뤼포의 영화세계에 대한 것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함께 보며 진행됐다. 여기에 그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이 영화는 앙투안 드와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부부의 거처>로 트뤼포는 드와넬 시리즈를 마감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동료 감독 한 명이 코펜하겐의 한 극장에서 2시에 <400번의 구타>로 시작해 8시에 <부부의 거처>로 끝나는 '드와넬 시리즈'를 연속 상영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트뤼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시리즈를 한 편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 편 더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부부의 거처>의 말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고, 그래서 작정하고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 행복하게 결말을 맺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거의 10분 이상 과거 드와넬 시리즈의 영화 클립을 사용했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400번의 구타>로 시작한 트뤼포의 영화적 특징이 가장 많이 녹아들어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트뤼포의 영화를 드와넬 시리즈를 이야기하려 한다.

 

이 영화의 시작은 아침을 맞은 두 연인의 아침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트뤼포 영화가 그러하듯 성애의 장면은 없다. 사소한 순간이지만 처음의 장면을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두 연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중간에 에펠 탑이 보인다는 것이다. <400번의 구타>의 첫 시작이 에펠 탑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왜 에펠탑인가? 트뤼포는 유년기에 거리를 방황하고 돌아다닐 때 에펠 탑을 중심 기점에 두고 길을 찾았다고 한다. 트뤼포의 영화 대부분에는 그런 기억 때문인지 언제나 에펠 탑이 나온다. 이 영화는 외부 풍경으로 에펠 탑이 보이지 않고, 내부의 공간에 자리잡혀 있다. 굳이 말하자면 <400번의 구타>가 바깥으로 떠도는 영화라면, 이 영화는 안으로 들어오는 영화, 내향적인 영화, 내부로 향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완결편이기에 영화 곳곳에 과거의 장면을 활용하고 있다. 몇 가지 플래시백이 교묘하게 사용되고 있다. 첫 번째 플래시백은 앙투완과 부인이 이혼을 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를 줌인하면서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드와넬 시리즈는 드와넬이 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영화에 오면 드와넬 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플래시백이 사용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앙투안 드와넬의 삶을 복수적인 시점으로 보고 있는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두 주인공이 닮았다. 베르트랑은 돈 주앙 같은 인물이지만 여자를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사랑한 남자로, 두 사람의 캐릭터가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대신 차이는 있다. 베르트랑이 외향적이라면 앙투안은 트뤼포와 비슷하게 내향적인 인물이다.
 
플래시백이 활용되는 것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플래시백은 기차에서 벌어지는 장면이다. 기차의 움직임과 더불어 과거로의 시간이 흘러간다. 기계의 운동은 앞으로 향하고 그 가운데 앉혀진 사람들은 과거의 시간을 상기한다. 운동과 시간이 결합되어 있다. 운동성은 기제들, 즉 기차나 자동차가 있고 필름의 움직임이 과거의 시간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과거의 플래시백을 실제로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이 과거에 출연했던 영화의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사실은 기록된 과거를 다시 되돌아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영화에서 플래시백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생각 안에서 있었던 어떤 심상이 펼쳐져 나가는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과거에 촬영된 필름의 릴이 다시 펼쳐져 나가는 플래시백이다. 절차적으로는 같지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질료가 트뤼포가 이미 십여년 전에 촬영한 필름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라는 시간이 철저하게 물질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물질적인 사물, 필름, 사진 같은 것들을 통해서 과거라는 시간이 환기되어 간다.

 

 

 

 

영화의 기본적인 이야기는 소설로서 자신의 인생을 꾸려나가려고 했던 드와넬의 이야기다. 과거에 영화로 봤던 그의 이야기가 이번에는 픽션(소설)이라는 것을 사용해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일과 소설에는 차이가 있다. 이 영화의 맥락 안에서만 보자면, 앙투안 드와넬에게 있어 소설은 자신의 삶과 인생을 회고하는 것이자 동시에 자신의 삶을 소설이라는 것을 통해서 변경해가는 것이다. 자기 인생을 근거로 해서 작품을 만들어나가기에 자기의 삶을 조금 윤색하거나 각색해나가는 것이 가진 창작성의 문제도 담겨져 있다. 동시에 그것은 드와넬 시리즈라는 것 자체가 트뤼포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자전적 성격의 한계성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어떻게 삶과 영화를 결합하는가의 문제, 이것은 트뤼포를 위시한 누벨바그 감독들의 공통된 질문이었다. 고다르와 트퓌로를 비교하자면, 고다르가 삶과 영화를 원 플러스 원처럼 플러스 결합했다면, 트뤼포는 마이너스로 했던 것 같다. 즉, 삶에서 빠진 부분을 영화로 메꾸려 했던 것 같다. 삶에서의 부족분을 삶에서 회복시킬 수 없었기에 영화라는 것으로 대치시켰다고 볼 수 있다. 고다르에게 삶과 영화가 대등했다면, 트뤼포는 영화가 삶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 영화에서 앙트완이 소설을 쓰는 창작 행위의 동기가 트뤼포의 그것처럼 삶의 부족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드와넬이 어째서 소설가가 됐는가, 혹은 <여자를 사랑한 남자>에서 베르트랑이 왜 소설가가 됐는가를 생각한다면 이런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법정에서 재판관인 여자를 쳐다보는 장면의 플래시백이 있다. 여자의 안경을 쳐다보는 순간, 클로즈업이 되면서 <부부의 거처>에서 크리스틴의 모습을 회상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의 플래시백은 회상이라는 것을 특정한 사물, 사진, 필름 등을 경유해서 진행되는, 회상의 물리성이라는 프로세스를 거친다는 공통점이 있다. <400번의 구타> 이후의 드와넬 시리즈 전체를 봤을 때, 드와넬의 직업이 어떤 변천을 거쳤는지를 유심히 보면 드와넬이란 인물과 직업이라는 게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드와넬이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그러면서 소설가가 된다. 예술적인 표현들과 표현의 매질, 즉 물질적인 질료성의 프로세스들을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트뤼포가 매진하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콜레트가 기차 안에서 소설을 읽어나갈 때 책과 과거의 회상 장면이 오버랩되어 보이는데, 이 영화에서 충. 과거에 필름으로 찍혀진 것, 즉 이미지와 활자화된 문자와의 충돌이 있다. 자전적이 소설과 자기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과, 그것이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이다. 이 둘이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장면화되어 있다. 트뤼포의 영화에서는 오버랩, 디졸브, 아이리스 등의 장면들이 많다.

 

소설 그 자체와 나중에 소설을 읽으면서 이 여자가 떠올렸던 자신의 과거의 기억이 충돌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필름으로 찍힌 것과 회상, 이미지라는 것과 활자화된 문자가 같이 충돌되는 것이다. 여기서 소설은 자전적인 소설을 쓴 것인데 자기의 이야기라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인 이미지로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장면화된다. 트뤼포 영화를 보면 디졸브, 오버랩, 아이리스 같은 방식의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표현적 방식 안에서 영화적 디졸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나간다. 이런 특징들은 누벨바그 작가군 중에서도 트뤼포가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런 방식을 자주 사용했던 이유는 장 콕도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기차의 플래시백 장면에 이어 앙투안이 자신이 신작소설의 구상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특별하다. 그 전까지 소설은 자신이 겪어왔던 것에 근거해서 구성한 픽션이라면, 여기서의 신작은 자기가 떠올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나중에 보면 자기가 경험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자신이 경험한 것이냐 아니냐라는 (진위성) 문제보다는, 이 장면에 등장하는 사진이 꽤나 흥미롭다. 한 남자가 사진을 찢어버려서 찢어진 사진을 앙트완이 줍게 되고, 조각난 것을 붙여서 그가 여자를 찾아다닌다는 설정인데, 이것이 영화에서 크게 작동한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에서 얼굴은 모른 채 단지 다리만 보고 빠져서 그 여자를 쫒아 다니게 되는,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베르트랑의 추적의 삶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찢어진 사진을 포토몽타주 하듯이 붙여서 완성된 형태로 사진 속 여자를 찾는 행위의 여정이 영화의 마지막에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트뤼포 영화에서 사진은 적극적으로 활용된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자를 사랑한 남자>에서 베르트랑은 사진을 보면서 자기가 만났던 모든 여자들과 그 여자들이 보낸 편지를 보면서 그것을 근거로 소설을 쓰게 된다. 과거의 기억을 사진에 의지해 떠올리면서 추억을 완성해나가는 행위로 소설을 쓴다. 말하자면 사진이라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흔적이고, 무언가를 창조해나갈 수 있는 물리적인 근거점이 된다. 다른 한편, 사진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지되어 있다. 그것을 일종의 포즈이다. 그래서 달리 말하자면 트뤼포의 영화가 (영화라는) 운동성과 (사진이라는) 정지성, 이 둘 사이를 오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충돌은 앙투안의 연애적 삶에도 관통한다. (사진으로 표현된) 정지성이라는 것이 영원하고 불변적인 사랑을 말한다면, 움직이는 (영화의) 끊임없이 가변적인 연애가 있다. 끊임없이 여자를 바꿔가는 앙트완의 연애는 굉장히 부지런해야 하는 삶이고, 앙투안은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내내 열심히 뛰어다닌다.

 

 

 

 

보시는 것처럼 콜레트와 관련한 장면에서 두 가지 종류의 사진이 있다. 하나는 증거사진이 되는 범인의 프로필 사진이다. 이것은 <400번의 구타>에서의 앙투안이 타자기를 훔쳐서 도주하다가 경찰서에서 수감되면서 사진을 찍을 때와 유사한 종류의 사진이다. 넓게 이야기하자면, 트뤼포의 영화 그리고 드와넬 시리즈 영화에서 사진은 체포, 구금, 포획, 정지와 연결된다. 정지라는 것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라면, 이는 트뤼포의 삶에서 구속과 관련되는데 이는 감옥이나 군대, 학교와도 같은 공간과 연결된다. 트뤼포의 삶 자체가 구속과 탈주를 계속 반복해왔다. 사실 20대까지 트뤼포의 삶이라는 것은 구속된 상태에서 탈주의 욕망을 끊임없이 반복해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누벨바그의 시절을 거치면서 구속에서의 탈주 욕망이 한편으로는 내부화되는 운동으로의 변화가 있다. 즉, 가정을 꾸리는 것, 트뤼포에게는 두 번째 가정을 꾸리는 것, 아이를 만드는 것, 혹은 앙투안에게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 이런 삶이 반복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부로 움직이는 운동으로, 바깥으로 나가려는 운동과 충돌한다. 콜레트가 사건 파일을 뒤적거리다 발견하는 두 종류의 사진, 즉 살인 사건의 사진과 드와넬이 흘린 여자의 사진은 모두 사진의 본성, 즉 무언가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진은 구속과 체포, 탈주를 반복한 트뤼포를 구제한 앙드레 바쟁의 영화적 이미지의 존재론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이라는 글에서 바쟁은 무언가의 흔적, 성화성과도 같은 이미지를 강조한다. 이 영화에서 포토몽타주와도 같은 여인의 사진은 그런 트뤼포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모든 작가들은 영화적 역량을 무엇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그 세계가 달라진다. 즉, 영화적 파워의 본성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트뤼포에게 영화의 강력한 힘이란 구속과 탈주를 반복한 그가 영화관에서 경험한 것으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던 아이가 영화관의 어둠에서 무언가를 지켜봄으로 해서 자기를 투사할 수 있었고, 그 영화관의 낯선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의 응시, 바라보는 사람들과의 낯선 사람들과의 감정적 연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두번째 측면이 트뤼포의 영화를 대중적인 영화로 만들어갔다. 트뤼포의 영화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고려한 영화다. 그는 두 종류의 감독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다 해도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다면 다른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전제해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트뤼포는 후자의 감독이 되려 했다. 동시에 트뤼포의 인정욕구가 있다. 이는 영화의 투사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 자신을 인정해가는 것, 자신을 이해해나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트뤼포의 영화는 그래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영화에 기입된다. 내가 영화를 본다는 조건이 영화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실현한 사람은 히치콕이었다. 특히 <이창>에서 그러하다. 트뤼포가 히치콕을 끌어오는 것은 그가 히치콕의 형식을 빌어온 것도 있지만 트뤼포 자신의 영화적 경험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트퓌로의 영화에서는 그래서 본다는 것과 관련한 문제, 특히 시점의 문제가 언제나 특이하게 작동한다. 그리고 시점의 문제가 운동성을 갖게 되면 추적이 된다. 그것이 연애 영화에서는 한 남자가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이다. 이런 형식이 만개된 작품이 <도둑맞은 키스>나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라고 볼 수 있다. 영화 관람의 경험이 영화 안에 녹아들어갔을 때 표현되는 두 번째 방식은 그의 영화 안에 언제나 그림자적인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메인 캐릭터를 닮은 분신적 존재가 영화 안에 이중으로 등장한다. 그 존재들은 언제나 익명적이거나 대단히 낯선 사람들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언제나 앙투안과 짝패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도둑맞은 키스>에서 크리스틴을 쫓아다니는 이상한 남자가 있다. 그런 인물들과 앙트완이 공유하는 감정이 있다. 이 부분이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관객의 행위 자체를 영화 안에 기입시켜 버리는 트뤼포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트뤼포 영화는 물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라는 것은 기계적인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필름이 돌아간다, 프로젝션에 의해 스크린에 이미지가 투영된다는 식의 기계적 매커니즘과 기계적 매커니즘의 작동, 프로세스에 따라서 감정이라는 것들이 전개되어 간다. 트뤼포는 이런 전제를 망각하지 않고 언제나 감정의 전달보다 중요하게 보고, 기계적 프로세스와 감정의 프로세스가 언밸런스하게 되는 것이 이들의 낭만적 연애를 어렵게 만들어가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에서의 피아노 건반의 기계적 움직임과 연주자의 감정의 언밸런스가 있다. <도둑맞은 키스>에서의 파리의 속달체계에 의해 편지가 전달되는 것과 낭만적인 편지도 그러하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앙트완이 무언으로 편지를 직접 전하는 것은 감정의 표현과 감정을 담는 표현의 매체가 같은 속도로 진행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도 마지막에 그런 순간이 도래하게 된다.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샤를르 드네는 한 여자에서 다른 여자로 매번 갈아타는 남자의 실제 이유가 너무 근접해지는 것에의 두려움, 상처받는 것에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트뤼포의 친밀함의 다른 측면이다. 즉, 트뤼포적인 인물들은 상황을 (연애적 사건을) 컨트롤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친밀함에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400번의 구타>에서 극장의 사진을 훔쳐갔던 앙트완은 드와넬 시리즈의 마지막인 <사랑의 도피>에서는 남이 버린 사진을 붙여서 그 사진의 여자를 찾아가 사랑을 완성한다. <사랑의 도피>의 마지막은 <400번의 구타>의 놀이공원에서의 장면과 앙트완이 현재의 여자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병치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트뤼포의 열망을 볼 수 있다. 앙트완은 놀이 기계의 움직임의 가속화로 벽면에 정지된 것처럼 붙어버린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회전차의 구조는 영화의 전사인 조에트로프zoetrope와 대단히 비슷하다. 정지된 사진, 움직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구조, 이러한 (영화적)기제를 동원해서 삶을 반추해가는 것이 드와넬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정리: 김고운(관객에디터) | 사진: 김아라(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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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도피>는 <400번의 구타>를 시작으로 <앙투안과 콜레트>, <도둑 맞은 키스>, <부부의 거처>를 지나 근 20년 동안 그려낸 앙트완 드와넬의 마지막 기록이다. 이 연작에는 한 남자의 반생이 담겨 있다. 극 중 인물이 성장하는 배우인 장 피에르 레오 역시 나이를 먹었다. 앙트완 드와넬의 긴 여정을 갈무리하는 영화답게 <사랑의 도피>에는 전작의 요소가 골고루 등장한다. 지나온 삶에 대한 회상인 것이다. 전작을 보지 않았더라도 크게 불편함은 없으나 가능하면 보는 것이 좋다. 앙투안을 앙투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의 성장을 같이 지켜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도피>의 앙투안만 본다면 그는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인 철없는 남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과거를 따라가다 보면 왜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400번의 구타>에서 어린 앙투안은 엄마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마음에 영영 채워지지 않을 공허가 생겨버렸다. 모성애의 결핍을 느끼는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그래서 탈이지만) 소중한 것을 지킬 줄 몰라 스스로를 망가뜨린 다음, 이내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의 서투른 소통방식은 <부부의 거처>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내이고 싶었다던 크리스틴에게 ‘넌 나의 누이이자, 딸이자, 엄마’라고 말했던 앙투안. 그런 그에게 우연히 만난 새아버지가 “엄마는 너를 사랑했었다”고 말하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앙투안이 붙들고 있던 과거를 하나씩 놓아주는 과정을 보여준다. 새로운 삶에 한 발 내딛기 위한 도움닫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해야만 한다. 그래서 위태로운 사빈과의 관계는 고질적인 그의 한계를 넘기 위한 숙제인 셈이다.

<사랑의 도피>는 많은 것을 충실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서로를 오랜 시간 지켜본 후에야 나올 수 있는 함축적인 표현이 이 영화의 힘이다. 대신 여러 사건들이 층층이 쌓인 후, 시간이 흘렀을 때 어떤 미래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우연들이 만들어낸 운명에 관한 영화이다. 흔들리는 앙투안의 삶에 안정이 찾아왔을지 알 수는 없다. 설령 그렇지 않는다 해도 앙투안이 얄미운 구석은 있지만 싫어할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는 예술가의 모습의 그의 매력이었으니까. 트뤼포 역시 앙투안처럼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끝내 친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으며, 여성편력으로도 유명했다. 과거는 트뤼포에게 평생에 사라지지 않은 멍울이었다. 그럼에도 <사랑의 도피>는 표면적으로나마 그의 유년시절을 정리하고 떠나보내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한 편의 송가이다.(김휴리: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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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사랑이야

 

* 프랑수아 트뤼포가 1971년에 남긴 앙투안 드와넬 연작에 관한 노트 <앙투안 드와넬은 누구인가?>를 바탕으로 쓴 글임을 밝힌다.

 

‘앙투안 드와넬 연작’은 애초에 한 편으로 예정되었으나 우연한 기회에 20년의 세월에 걸쳐 진행된 다섯 편의 영화 - <400번의 구타>, <앙투안과 콜레트>, <도둑맞은 키스>, <부부의 거처>, <사랑의 도피> - 를 말한다. ‘앙투안 드와넬 연작’은 낭만적이면서 고전적인 남자의 이야기다(트뤼포는 앙투안이 19세기 식의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앙투안은 소년 시절에 이미 발자크를 비롯한 고전문학에 매혹되었고 삶의 매순간마다 일기와 편지를 쓴다. 그가 장차 쓰게 되는 소설은 일기와 편지의 확장에 다름 아니다. 인터넷과 핸드폰의 시대라면 앙투안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앙투안 드와넬 연작’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성장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앙투안은 어른과 사회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기에 계속 공간을 이동하고 직업을 바꿀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인간관계와 사랑에 있어 도무지 성장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그것은 프랑수아 트뤼포가 이 시리즈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했다). 앙투안은 천성적인 현실도피주의자다. ‘앙투안 드와넬 연작’은 감독과 배우와 인물이 함께 엮어나간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다. 오디션에서 뽑힌 장 피에르 레오는 물론, 콜레트, 크리스틴, 사빈느 역할의 세 여배우 - 마리 프랑스 피지에, 클로드 자드, 도로시가 들락거리면서 다섯 편이자 결국에는 한 편인 영화를 완성했다. 배우들의 얼굴에는 세월의 자취가 남아 있으나, 그들은 배우가 아니라 실제로 그 인물인 양 자연스럽게 역할에 스며들었다.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1959)의 첫 촬영을 1958년 11월 10일에 시작했다. 그날 앙드레 바쟁이 40세로 생을 마감한다. 아버지로 여긴 바쟁의 죽음을 애도했던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를 그에게 바친다. <400번의 구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 앙투안은 슬프고 고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물에 변화를 가져온 건 장 피에르 레오라는 어린 배우였다. 오디션 당시 엄청난 열정으로 임해 트뤼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소년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트뤼포는 레오 덕에 각본보다 영화가 더 좋게 나왔다고 밝힌 바 있다. 트뤼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은, 레오가 첫 시사에서 보여준 반응에서 알 수 있다. 촬영 내내 밝은 모습으로 행동했던 레오는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속에 트뤼포의 어린 시절과 그의 현재가 함께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단편으로 기획됐던 영화가 장편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가 소년기의 아픈 경험들을 담기를 원했다. 십대에 이미 경찰서를 들락거린 트뤼포처럼, 13살 소년 앙투안은 가족과 학교가 공히 포기한 말썽꾸러기다. 거짓말과 가출과 도둑질로 인해 소년은 철창에 갇히고 감화원으로 보내진다. 앙투안은 말한다. “지겨워, 내 인생을 살고 싶어, 바다를 보고 싶어”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장면은 그 바람에 대한 대답이다. 해변으로 달려간 소년은 세상으로 향하는 모험의 문턱에 선다. 트뤼포는, 자신이 태어난 이듬해에 장 비고가 내놓은 <품행 제로>에 견줄 만한 작품을 만들었다.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의 속편에 대해 가끔 생각하면서도 속편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 두려워했다. 그의 두려움은 옴니버스 영화 <스무 살의 사랑> 중 프랑스 편을 의뢰받는 순간 사라진다. 그는 앙투안이란 인물을 다시 한 번 등장시키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자신의 과거를 살짝 변주하기로 한다. 영화에 미친 트뤼포는 음악에 빠진 앙투안으로 변했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릴리안 리트뱅을 만났던 기억을 음악회에서 앙투안과 콜레트가 눈길을 주고받는 것으로 바꾸었다. 17살 소년 앙투안은 레코드 회사에서 일하면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한다. 콜레트는 소년의 일상에 변화를 부른다. 소년은 소녀의 집 맞은편으로 숙소를 옮기고, 소녀의 가족과도 친해진다. 그러나 콜레트는 앙투안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그랬다. 아름다운 소녀 리트뱅을 놓고 경쟁했던 장 뤽 고다르와 트뤼포는 둘 다 쓴맛을 보고, 사랑의 실패는 자살 소동과 군 입대로 이어졌던 것이다(그러므로 다음 작품 <도둑맞은 키스>는 군인인 앙투안의 모습으로 발을 뗀다). 현실적인 소녀와 낭만적인 소년이 만났을 때 이미 예견된 첫사랑의 고통을 <앙투안과 콜레트>(1962)는 시리면서도 유머러스한 표정으로 전한다.

 

연작의 세 번째 작품 <도둑맞은 키스>(1968)는 앙투안의 새로운 사랑이 그렇듯 덜컹거리는 작품이다. 촬영에 들어가고 며칠 뒤, 그 유명한 ‘앙리 랑글루아 사건’이 벌어진 탓이다. 당연히 랑글루아를 옹호했던 트뤼포는 일련의 사태들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인과 투사라는 두 가지 생활을 병행했던 트뤼포는 촬영장에 매번 늦게 도착했고 심지어 참석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각본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겪어야만 했으며, 배우들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대사를 만들어 내어 연기했다. 그런 까닭에 영화에 참여했던 스텝들은 <도둑맞은 키스>를 ‘작은 기적’이라 부른다. 연작 중 첫 컬러 영화인 <도둑맞은 키스>에서 앙투안은 여자 친구 크리스틴과 여신처럼 아름다운 부인 파비앙 사이에서 뒤뚱거린다. 그의 뒤뚱거림은 극중 그의 직업이 군인, 야간경비원, 사설탐정, 신발가게 점원, TV 수리공 등으로 바뀌는 것과 대응한다. 청년이 되어서도 앙투안은 모든 것에 서툴다. 그래서 그는 사랑스럽다.

 

<도둑맞은 키스>의 속편 격인 네 번째 작품 <부부의 거처>(1970)는 부부가 된 앙투안과 크리스틴의 이야기다(두 사람이 결혼한 걸 보고 싶다고 랑글루아가 트뤼포에게 말했다 한다). 도입부에 흘러나오는 현대음악의 불안한 향기는 부부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한다. 크리스틴은 집에서 음악 레슨을 하고, 꽃 가게에서 일하던 앙투안은 사무 착오로 미국계 회사에서 일할 기회를 잡는다. 드와넬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나는 한편, 앙투안이 회사에 손님으로 온 일본 여자와 외도를 하면서 부부생활은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트뤼포가 <부부의 거처>에서 원했던 것은, 레오 맥커리, 조지 큐커, 에른스트 루비치가 연출한 미국식 코미디의 분위기였다. 실제로 영화는 일상의 웃음으로 넘친다. 부부가 사는 아파트의 주변인물도 그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에필로그에서 재결합한 앙투안 부부는 사이가 나빠 보이는 이웃 부부가 예전에 했던 것처럼 행동한다. 그때, 이웃 부인은 “두 사람은 이제 진짜로 사랑하게 됐어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부부의 거처>는 흐뭇한 미소로 마감된다.

 

 

연작이 이어지고 성공을 거두면서 드와넬이라는 인물과, 실재하는 두 사람 장 피에르 레오와 프랑수아 트뤼포 사이에서 웃기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트뤼포와 레오를 혼동한 카페 주인은 트뤼포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영화가 옛날에 만들어졌나 봐요. 그 때는 많이 젊어 보이더군요”라고 말했다. 신문 가판대의 남자는 먼저 왔다간 레오를 트뤼포의 아들로 착각하기도 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레오와 트뤼포가 앙투안이라는 가상의 인물로 융합되었음을 알려주는 예들이다. 트뤼포는 드와넬이 만화 캐릭터처럼 고정된 인물로 변하는 게 싫었던 것 같다. 게다가 <부부의 거처>를 마쳤을 무렵에 이미 트뤼포는, 레오라는 배우가 하나의 인물에 고착될까봐 걱정했다. 트뤼포는 <사랑의 도피> (1979)를 끝으로 앙투안이라는 캐릭터를 더 이상 영화에 끌어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사랑의 도피>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보다 이전 네 편 영화를 요약하고 총정리하는 쪽을 택했다. 전작에서 뽑아낸 장면(과 새로 찍은 몇 가지 장면)으로 플래시백을 완성하고, 등장했던 인물들의 관계를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그래서일까, 연작을 마무리한 뒤 트뤼포는 <사랑의 도피>가 진짜 영화처럼 보이지 않아서 불편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앙투안 드와넬 연작’이 어쩌면 실패한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앙투안 드와넬 연작’이 흥미롭고 재미있는 영화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사랑의 도피>에서 앙투안은 편지를 쓰다 엄마가 가르쳐 준 단 한 가지 진실을 떠올린다. ‘중요한 건 사랑이다’ 앙투안이 그토록 현실 안팎을 서성인 것도 다 ‘사랑’ 때문일까. 그는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으나, 그 시간의 자리엔 사랑이 남았다. <사랑의 도피>는 레코드점에서 키스하는 두 커플과 어린 앙투안의 모습을 교차하며 끝난다. 놀이기구를 타다 어지러워하던 소년은 삶과 사랑을 경험하며 더욱 심한 어지러움을 겪는다. 그 어지러움 속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면 그건 사랑 덕분이다. 20년의 기록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다.

 

(이용철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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