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 <부드러운 살결> 상영 후 유운성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의 강연이 이어졌다. 유운성 프로그래머는 트뤼포의 초기작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며, 비록 개봉 당시엔 냉대를 받았지만, 이후에 재평가 받으며 트뤼포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라는 이야기로 운을 떼었다. 트뤼포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예외적으로 보이는 작품이기도 한 <부드러운 살결>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트뤼포 영화 세계 전반의 특징적인 면들을 짚어나간 이 날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유운성(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 작년 미국의 필름포럼에서 <부드러운 살결>이 상영되었을 때, 짐 호버만은 이 영화를 두고 재평가되어야 할 영화라고 쓰면서, ‘가정domestic 서스펜스 영화’라고 표현한다. 개인적으로는 ‘친밀함intimacy의 서스펜스’라고 부르고 싶다. intimacy는 친밀함의 의미도 있지만 성적 의미도 갖고 있다. 이 ‘친밀함intimacy'를 가지고 트뤼포의 영화 세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다.

 

친밀함의 서스펜스

‘친밀함’이라는 말을 정의한다면, 오직 둘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관계라고 말하고 싶다. 둘 이외의 다른 어떤 관계가 끼어들거나, 보아서도 안 되고, 시각적으로든 언어적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둘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노출되어서도, 알려져서도 안 되는 관계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두 가지 충동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내부적으로는 이 관계를 감춤과 동시에 알리고 싶어 하는 충동이 있고, 외부적으로는 그런 관계의 낌새가 있을 때 바깥의 사람들이 그 관계를 알고 싶어 하는 충동이 있다. 친밀함의 관계가 성립이 될 때, 그것은 굉장히 흥미진진한 영화적 소재가 되는데, 문제는 영화는 이 친밀함’ 담아내기에 굉장히 불편한 매체라는 점이다. 관계 외부의 듣는 사람, 듣는 기계 같은 것을 일체 허용하지 않아야하는데, 이미 카메라가 관계를 포착하는 순간 친밀함은 파괴된다. 영화는 친밀함에 굉장한 호기심을 갖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다루기 불편한 매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친밀함의 관계를 맺고 있는 당사자들이 이걸 파괴하는 가장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은 자신들의 성적인 관계를 직접 카메라로 담아내는 셀프포르노 형식이 될 것이다.

영화는 바라보는 것, 응시 없이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영화가 아무리 친밀함의 공간에 호기심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영화적으로 하면, 결국은 관음증적인 형식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트뤼포가 가장 좋아하는 히치콕 영화 중 하나인 <이창>의 두드러진 테마이기도 하다. 트뤼포는 영화가 친밀함의 공간에 다가가려고 하면 관음증적인 것이 되거나 그 관계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굉장히 잘 알았던 감독이었다. <이창>같은 영화는 이런 공간에 다가가면서 사실은 그것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의식, 죄책감이 있기 때문에 영화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변명이 필요해진다. 가령 <이창>의 제프리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있다는 설정은, 실체적 결함 자체가 그런 죄책감을 시각화한 것으로 보인다. 결말부에 가서 주인공이 나머지 다리까지 깁스를 한 것은 죄책감을 갖고 기어이 모험을 한 것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트뤼포는 이런 식의 역설적인 구조를 꽤나 두려워했던 감독처럼 보인다. 트뤼포는 영화에서 베드씬 찍는 것을 꺼려했던 감독이었다. 친밀한 관계에 대해 호기심은 있는데, 패러독스도, 죄책감도 싫어했던 점들이 트뤼포 영화의 모순적인 태도들과 다양한 면모들을 만들어낸다. 트뤼포는 동료 누벨바그 감독들 중 어떤 이보다도 친밀함이라는 관계, 그 관계가 이뤄지고 있는 영화적 공간에 대해 깊이 관심 갖고 있던 감독이었다. 트뤼포의 연애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친밀함의 공간에 다가가면서 그것의 직접적인 재현을 피하려는 일련의 시도들로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장르로 가거나 영화 스타일 자체를 전시하는 식으로 눈가림을 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뭔가 보고 싶고, 관찰하고 싶은 건 있는데, 여기에 결부되는 죄책감은 피하고 싶다는 데에 트뤼포 특유의 유아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관음증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고 어떻게 친밀함의 공간으로 다가갈 것인가.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죄책감만이라도 피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나오는 트뤼포의 세 가지 해결책이 있다.

 

트뤼포의 세 가지 도피법

첫 번째는 죄책감을 덜 가지는 상태에서 다가가기이다. 이 방식은 친밀함의 공간에 개입하거나 들어가려는 사람을 어린이와 어른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부의 침실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아이처럼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트뤼포는 자신의 남자주인공을 그런 식으로 가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인물이 어쨌든 영화에서는 성인으로 나타나니까 사회적으로는 무능하고, 성인의 특성 가운데 일부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은, 다리에 깁스를 한 주인공이라는 히치콕의 물리적인 처리방식이 심리적이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처리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이런 점에서 트뤼포의 ‘앙트완 드와넬 연작’의 장 피에르 레오가 굉장히 트뤼포적인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해결책은 친밀함이 두 사람 사이에서 성리보디는 것이라는 전제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이다. 친밀함과 유사한 감정으로 유지되는 삼각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쥴 앤 짐>같은 영화의 토대를 이루는 구조로,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같은 영화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시도가 그렇다는 것이지 성공하진 못한다. 결국은 두 명의 시선으로 지탱되는 친밀함의 공간과 그걸 바라보는 카메라에 대한 메타포로 삼각관계가 등장하는데, 친밀함의 원래의 전제를 억지로 감추려고 하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에서 결국은 친밀함의 공간은 사실 두 사람의 것임이 확인되고 밝혀진다. <쥴 앤 짐>은 계속해서 쥴과 카트린, 짐과 카트린으로 오가고 결국 마지막엔 동반자살이라는 아주 가혹한 방식으로 친밀함이란 둘 사이에서밖에 성립될 수 없다는 전제를 확증하고 끝난다.

세 번째 방식은 친밀함의 순간이나 관계들을 장르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영화 장르라는 것은 카메라가 바라보는 기계장치라는 불편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이런저런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죽음을 기록한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고, 때로는 외설스러운 일일수도 있는데, 이런 죽음이 장르, 이를테면 범죄영화나 전쟁영화, 액션영화에서는 죄책감 없이 카메라가 죽음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애의 과정을 바라본다는 것은 굉장히 민망한 일이지만, 이런 민망함을 덜어줄 수 있는 장르가 스크루볼 코미디나 뮤지컬이 될 수 있다. 멜로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섹스와 그것의 실패를 낭만화하는 작업이다. 트뤼포가 어떤 식으로든 차용하고 있는 이 장르들은 친밀함의 공간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뤼포는 친밀함의 공간의 구조를 누구보다도 호기심을 갖고서, 죄책감을 덜고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던 탓에 말씀드린 이 세 가지 도피법을 오가며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트뤼포의 필모그래피를 얼핏 보면 다른 누벨바그 동료들과 비교했을 때, 예술적인 연속성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비평가 시절에 이른바 작가정책의 주창자였던 트뤼포는, 자신이 감독이 되자 작가정책의 구원비평의 수혜를 가장 필요로 하는 감독이 되었다. 그 결과 샤브롤과 함께 가장 누벨바그적인 작가가 되었다. 고다르와 리베트는 아주 명료하게 극단적인 아방가르드 실험으로 갔고, 이른 태도는 사실 5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 시절에 내세웠던 ‘작가’라기 보다는 ‘예술가’의 형상이었다.

 

불편함의 정면 응시

<부드러운 살결> 같은 영화는 트뤼포 영화 경력에서 불편함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아주 드물고 희귀한 시도로 보인다. 불편함이라고 하는 것이 이 작품에 서스펜스를 낳는다. 이 영화 이전에 트뤼포가 만든 세 편의 영화 <400번의 구타>, <피아니스트를 쏴라>, <쥴 앤 짐>은 앞서 말씀드린 트뤼포의 세 가지 해결책을 차례로 제시한 영화들이었다. <부드러운 살결>은 세 가지 시도를 다 거친 다음 그것을 파기하고, 친밀함의 공간에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방식을 취한다. 트뤼포는 이 영화에서 시도했던 것과 같은 불편함을 감당하기에는 여린 구석이 있었던 감독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 이후에 적어도 관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일한 <부부의 거처>를 찍는데, 설령 부부관계와 연애관계에서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부드러운 살결>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부드러운 살결>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털어내면서, 불륜 혹은 간통이 유머와 코미디를 통해 죄책감을 경감시키는 아주 잘 알려진 트뤼포의 방식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부부의 거처>는 황당한 조합을 띈다. 르누아르의 <랑주씨의 범죄>에서의 공간의 구조 안에서 자크 따띠의 영화를 연상케한다. <부드러운 살결>에서와 같은 트뤼포의 모험 또는 시도는 불행히도 한 번에 그쳤고, 프랑스 영화 안에서 이런 식의 대담한 방식으로 극도의 친밀함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계승이 되었다면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가 아닐까 싶다.

<부드러운 살결>은 친밀함의 관계, 특히 불륜을 소재로 삼아서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데 따르는 서스펜스를 담아내는 데 최선을 다한다. 영화에서 두 연인들이 친밀함의 공간을 성립시킬 수 있는 공간들을 찾아 헤매는데, 적어도 이 영화에선 결국은 호텔방이거나 둘의 일체의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낯선 시골의 모텔 정도 밖에 없다. 트뤼포는 만들면서도 이 영화가 히치콕적인 서스펜스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트뤼포가 왜 히치콕이라는 감독을 그렇게 좋아했을까를 생각해보면, 히치콕의 영화가 궁극적으로는 섹스로 향하는 연애의 도정을 서스펜스 모험의 형식으로 가장 탁월하게 담아내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히치콕의 영화는 모험의 과정은 보여주지만 항상 성관계 직전에 끝나버린다. <부드러운 살결>의 초반에 리스본 호텔의 엘리베이터 장면을 보면, 굉장히 히치콕적인 방식으로 찍혀졌다. 주인공 라쉬네와 스튜어디스인 니콜, 니콜이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장면에서 긴장감을 포착해내는데, 서스펜스를 담아내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올라갈 때의 시간을 실제의 시간보다 훨씬 길게 잡는다. 히치콕적인 서스펜스에서의 시간의 왜곡을 잘 활용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리스본 호텔의 엘리베이터에서 과거의 연인이었던 두 남녀의 공간에 침입해서 관찰을 했더 라쉬네는 영화가 진행되면 자신과 니콜과의 친밀함을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애쓰게 있다. 이 영화는 <신나는 일요일>처럼 노골적인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히치콕의 <이창>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라쉬네에게는 <이창>의 제프리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깁스가 스토리와 스타일상 무려 두 개가 있다. 트뤼포가 이런 식의 직접적인 방식으로 친밀함 공간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죄책감을 경감시키기 위한 , 혹은 죄책감을 안고 이 영화를 찍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메타포적인 깁스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깁스는 주인공 라쉬네가 갖고 있는 작가로서의 명성이 있다. 명성이라는 것은 <이창>의 깁스보다 훨씬 더 고약해서 자꾸만 타인의 시선을 끌어들여 친밀함을 방해한다. 두 번재 깁스는 스타일상의 선택으로 보이는데, 라쉬네 역할의 배우 장 드사이의 연기에서 표현적인 요소를 거의 박탈해버린다. 트뤼포 영화 중에서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의 주인공과 더불어 유독 가장 매력 없는 남자주인공이다. 이처럼 무색무취하고 매력 없는 인물이 있었나 싶다. 스타일상의 면에 있어서 이 인물에게 깁스를 해버리는 방식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마 이 인물을 연기한 배우가 역할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고 실제로 트뤼포도 이 배우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 영화를 좀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은 라쉬네라는 인물이 굉장히 친밀한 관계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를 바라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 점은 이 영화가 뒤틀리는 계기가 된다. 오늘날로 보면 라쉬네라는 인물은 셀프 카메라 형식으로 자신들의 연애를 간직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라면 트뤼포 감독 자신의 꽤 정확한 반영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 라쉬네가 우연히 불륜의 관계에 빠져들었다기보다, 사실은 극단적으로 서스펜스를 유발할 수 있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관찰하기 위해 여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야외에서 카메라로 여자의 모습을 열정적으로 기록하다가 자동으로 놓고 자신도 함께 사진을 찍는다. 스스로 아내와의 불화를 만들어낼 증거를 기록하는 셈이다. 사실 이처럼 사진이라고 하는 것, 혹은 사진을 수집한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트뤼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트뤼포 영화 안에서 그것은 꽤 중요한 계기가 될 때가 있다. 한편으로는 사진을 찍는 행위 그 자체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이창>의 주인공과 연결된다.

트뤼포는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왜 이런 식의 영화 찍기로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을까. 영화적 친밀함이라는 것이 항상 외설적인 것의 경계에 있는데 그 것이 경계에 머물기 위해선 친밀함 자체를 시각화하지 않는 한에서만 외설의 바깥에 머물 수 있다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그런 친밀함을 담아내야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다가가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그건 영화 자체의 딜레마이기도 하면서 트뤼포의 다양한 연애영화들을 생성하게 만든 동기가 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부드러운 살결>은 트뤼포 이후의 다양한 도피의 방식들로 다시 가기 전에 있었던 좀 특이한 사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트뤼포가 연애, 영화, 관계에 대해서 접근하는 모든 강박관념, 불안, 죄책감, 서스펜스와 같은 것이 모두 담겨져 있는 영화로 보인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 김아라(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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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미 가득한 영화 속의 영화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말할 때면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작품이 바로 <아메리카의 밤>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저자 아네트 인스도프에 따르면 트뤼포는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히치콕과의 대화>에서 얻었다고 전한다. 히치콕이 ‘촬영장의 현실과 영화 속 현실을 중첩하면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두고 트뤼포가 <아메리카의 밤>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아메리카의 밤>은 니스의 라 빅토린느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영화 촬영 현장의 안팎을 다룬다. 극 중 영화는 아들과 며느리, 시아버지의 삼각관계를 소재로 한 '파멜라를 찾아서'인데 그렇다고 <아메리카의 밤>이 메이킹 다큐멘터리라는 뜻은 아니다. 몇몇 실제 인물이 등장하지만 트뤼포가 직접 극 중 감독 페랑을 연기하는 등, '파멜라를 찾아서'는 영화 속 촬영 현장에서 만들어지는 허구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신 트뤼포는 자신이 그간 영화 현장에서 경험했던 일화들을 극 중에 녹여내며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처럼 <아메리카의 밤>을 구성한다. 예컨대 고양이의 비협조적인(?) 연기로 우유 먹는 장면의 촬영이 지연되는 설정은 <부드러운 살결>(1964)을 연상시키고, 미국 자본과 영국 배우, 프랑스 스태프라는 다국적 현장의 혼란스러움은 트뤼포의 유일한 스튜디오 시스템 영화 <화씨 451>(1966) 당시의 반영인 듯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촬영현장에서 골칫거리로 전락한 극 중 배우 알퐁스(장 피에르 레오)의 존재는 '앙투안 드와넬'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현장은 어느 곳이든 전쟁터를 방불케 해서 극 중 페랑 감독은 “영화 만들기란 마차를 타고 서부를 여행하는 것과 같아서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지 걱정스럽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실제로 <아메리카의 밤>이 보여주는 '파멜라를 찾아서'의 촬영장은 대사를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노(老)배우의 잦은 NG, 정신병 전력을 갖고 있는 여배우의 돌출행동, 갑작스러운 배우의 죽음, 제작자의 잦은 간섭 등 예상치 못한 사건과 사고의 연속으로 어수선하다.

이런 혼란한 상황은 결국 영화 만들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 <아메리카의 밤>인 이유인데, 원제인 ‘Day for Night’는 낮에 밤 장면을 촬영하는 영화 기법을 말한다. 작품의 완성을 위해 다양한 책략을 활용한다는 영화의 주제가 제목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다(‘사랑의 묵시록’이라는 국내 제목은 <아메리카의 밤>을 완전히 오독하고 있다). 그래서 트뤼포는 감독인 페랑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지만 그가 어떤 인물인지 묘사하기보다 돌발 변수의 현장을 어떻게 교통정리 하는지 기능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때 페랑 감독(이자 현실의 트뤼포 감독)이 보여주는 자세는 배우와 스태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다. 그는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내는 법이 없다. 이들과 함께 영화를 완성하겠다는, 그리고 기어코 완성해내는 감독의 책임감이 영화에 대한 애정과 동료들에 대한 신뢰로 전면에 나서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영화학자 토드 매카시는 “현장에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트뤼포의 성격처럼 이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관계에는 인간미가 가득하다”고 극찬했다. 제목의 좋은 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메리카의 밤>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고 그 여세를 몰아 미국 흥행에도 성공했다.

 

(허남웅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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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홍성남 영화평론가와 들려주는 트뤼포의 세계

매혹의 아프로디테란 부제로 열리는 ‘2010 시네바캉스 서울’ 상영작 중에는 특별히 여인을 사랑한 감독 프랑수와 트뤼포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나오는 작품이 3편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지난 8월 3일은 이 세 작품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이름하여 트뤼포데이 였다. 마지막 상영작인 <부드러운 살결> 상영 후에는 홍성남 영화평론가가 트뤼포의 영화세계, 그 중에서도 트뤼포와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재밌는 시네토크를 펼쳤다. 그 일부를 이곳에 옮겨본다.


홍성남(영화평론가): 이번 영화제에 상영하는 영화들 중에서 트뤼포 영화가 세편이 포함되어 있는데, 트뤼포가 좋아했었던 혹은 트뤼포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매혹되었던 여배우들에 주목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트뤼포의 영화세계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 트뤼포와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릴 수는 없겠지만, 트뤼포의 개인적 이야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측면에서 그의 전반적인 영화세계와 관련시켜 이야기하고자 한다. 트뤼포의 영화는 ‘대체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라고 질문해 볼 수 있다. 좀 더 간단하게 질문을 바꿔본다면 ‘과연 그의 영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범주로 나눠지는가’이다. 트뤼포는 언제가 감독의 첫 작품에는 감독의 영화세계의 모든 것이 담겨있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작품들은 그보다 더 나을 수도, 못할 수도 있지만 모두 첫 작품의 변주라고도 말했다. 모든 감독들에게 이 말이 적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떻게 보면 트뤼포의 전반적인 영화세계는 그 자신의 말을 확인시켜주는 과정이지 않나 싶다. 데뷔작인 단편 <개구쟁이들>(1957) 뿐 아니라 그 이후 장편 세 작품인 <400번의 구타>, <피아니스트를 쏴라>, <쥴 앤 짐>은 이후 트뤼포가 만들 영화들의 범주를 미리 알려주는 영화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400번의 구타>에서 처음 등장한 앙트완 드와넬의 성장과 사랑, 삶의 이야기는 이후의 영화들에서도 이어지면서 트뤼포 영화에 있어 하나의 범주를 이루게 된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와 같은 장르 영화도 있다. 이 작품은 그 안에 미묘하게 여러 장르들이 섞여있지만 특히 필름 느와르 또는 범죄 영화의 영향을 볼 수 있다. 트뤼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감독으로는 히치콕과 장 르느와르를 들 수 있는데, 트뤼포는 범죄드라마를 장 르느와르 식으로, 애정관계의 이야기를 히치콕 같은 방식으로 만들고 싶다며, 그것이 자신의 영화적 이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 번째 작품은 <쥴 앤 짐>인데, 과거를 배경으로 하면서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닌 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들의 범주에 속한다. 물론 이러한 범주들은 편의를 위한 구분으로, 트뤼포의 전체 필모그래피에서 보면 그 구분이 모호하거나 다층적이다.

일단 이렇게 세 개의 범주로 나눠진 것이 트뤼포의 영화 세계라고 가정한다면, 그 다음엔 그것들을 관통하는 전체적인 주제나 요소 혹은 모티브에 대해 질문해 볼 수 있다.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에서 장 피에르 레오는 극 중 반복해서 ‘과연 여자는 마술적인 존재인가’ 라고 묻는데, 어떻게 보면 그 질문이야말로 트뤼포의 전체 영화세계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트뤼포는 기본적으로 <여자를 사랑한 남자>라는 자신의 영화제목처럼 여성을 사랑하고 여성을 탐구하고자 했던 감독이기도 하다. 트뤼포의 영화를 보면 여성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답을 내놓기보다는 질문을 위한 탐색을 위해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행위하고 사고하는 것이 트뤼포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것 같다. 트뤼포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런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영화와 맞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치이론이나 사회이론에 더 맞는 사람들일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예술을 배반하는 사람들일 거라 말했다. 트뤼포는 정치적인 연설이 이뤄지는 광장이나 사무실 혹은 공장, 회의장에서 이루어지는 일보다, 침대에서 이뤄지는 일이야말로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러한 것들이야말로 영화가 담아야 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언젠가 데이비드 린의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콰이강의 다리>의 시나리오를 열 명의 감독들에게 보낸다면 모두 똑같은 영화가 나올 테지만, 반면에 <밀회>의 시나리오를 열 명의 감독들에게 보낸다면 열 편 모두 다 다른 영화가 나올 것이라고도 했다. 그만큼 남녀의 문제란 사람들에게 있어 각각의 관점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트뤼포의 영화들 속에서 절대적인 것과 잠정적인 것 사이의 구분과 대립이라는 문제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절대적인 것 혹은 절대적인 것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서 고정되고 영원하고 명확하다고 여긴다. 그에 비해 모든 것들은 가치가 되었던 범주 개념이 되었든 고정되고 영원한 것은 없다고 여기는 것은 잠정적인 것 혹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과 관계된다. 잠정적인 것은 사랑의 감정과 관계라고 하는 것이 변화하는 것이며,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과 묶일 수 있다. 트뤼포는 자신의 영화에 나온 많은 배우들과 관계를 맺곤 했다. 그는 자신의 영화 제목처럼 여자를 사랑한 남자였고 그의 영화적 분신인 앙트완 드와넬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도덕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런 관계에 대해 책임감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트뤼포의 영화에는 절대적으로 혐오하거나 미워할 만한 인물이 없다. 트뤼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한 장 르느와르는 모든 인간은 각자의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소중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트뤼포다. 트뤼포는 잠정적인 인물들에 대해 나쁘게 그리지도 않지만 언제나 선하게 그리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충분히 동정하고 공감을 살 수 있는 인물로 그리면서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약점을 잘 그려내기도 한다.

반면 그러한 잠정적 인물에 반해 절대적인 것 혹은 그러한 가치에 속할 수 있는 인물은 어떤 사람들일까? 사랑의 가치를 영원한 것으로 믿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부드러운 살결>의 프랑카 같은 인물이다. 그러한 인물들은 대체로 영화 안에서 적대 혹은 심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트뤼포의 <상복을 입은 여인>이란 영화에서 잔 모로는 결혼을 앞두고 남자의 죽음을 맞게 되자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한 사람씩 살해하는 여성을 연기한다. 혹은 <아델 H의 이야기>의 이자벨 아자니는 결국 스스로 광기에 빠질 정도로 한 남자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러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절대적인 가치 혹은 사랑에 빠져 있으며 결국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인물을 그릴 때조차도 트뤼포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인물에 대해서 적의나 혐오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공감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동정심을 가지고 묘사한다.

이러한 문제는 트뤼포의 전반적인 영화세계와 연관 지었을 때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 지하철>은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한 극단의 이야기다. 이 영화에 대해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라는 역사적 배경을 통해 중요한 역사적·정치적 문제를 질문하지 않을까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 영화에 대해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홀로코스트의 문제나 반유대주의 문제를 소소한 가정 비극과 같은 것으로 떨어뜨렸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도덕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단순한 것이 아니냐하는 것이었다. 선과 악의 축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명확하게 그려져 있다는 거다. 그러나 그 영화는 절대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대립이 중요한 모티브인 영화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악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치 협력자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맹신이 전체주의와 연결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선이라고 할 수 있는 극단 사람들이 있다. 연기를 한다는 것은 정체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역할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이므로 이들은 잠정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극단의 배우이기 때문에 역할을 맡을 때와 실생활에서의 정체성이 다르기도 하지만, 나치 정권 하이기 때문에 실생활에서도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연기를 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유동성이라는 이 영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시간이 흐른 후 두 남녀 주인공은 재회하게 되는데 연극 속의 장면이 연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픽션과 리얼리티 사이의 유동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아메리카의 밤>에서도 트뤼포가 보여주는 것은 영화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사이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거다. 절대적인 것은 그 어떤 영화의 주어진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는데, 시나리오를 가지고 곧이곧대로 영화로 만든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트뤼포가 추구했던 영화 만들기는 그와는 달랐다. 물론 기본적으로 시나리오가 주어지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 계속해서 적응하면서 변화해간다는 것이다. 물론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는 더 이상은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 논리로 생각하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이 영화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완성된 한 편의 영화 안에서도 절대적인 것과 잠정적인 것이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뤼포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태어난 사람이란 것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에게 있어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했다. 그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결국 생겨나는데 그가 바로 앙드레 바쟁이었다. 또한 트뤼포는 장 피에로 레오와도 일종의 부자관계 형성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 찾기와 아버지 되기였는데, 단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버지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화 안에서도 아버지가 없다는 것, 아버지가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은 굉장히 중요하다. 트뤼포에게 어울리는 명칭은 혁명가보다는 개혁가가 아닐까 싶다. 편의상 구분을 해보자면, 트뤼포와 자주 비교되곤 하는 고다르가 ‘혁명가’라면, 트뤼포는 오히려 시스템 안에서 더 나은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개혁가’라고 할 수 있다. 라울 쿠타르는 ‘나는 필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시네마를 만드는 사람이다’라고 했던 고다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보자면 트뤼포는 분명 필름을 만든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 편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 갔던 사람이 트뤼포라고 한다면, 영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영화란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 사람이 고다르였다는 의미인 듯하다.

트뤼포는 대중적이며 장르적인 영화를 만들면서도 작가적 시각과 예술영화의 품격, 프랑스적인 멜랑콜리가 같이 한 데 섞인 영화를 만들었다. 제임스 모나코는, 트뤼포라는 사람은 사람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일까에 대해서 가장 내밀하면서도 보편적인 논리를 갖고 경박하지 않은 유머와 관능성과 영화적 재미를 함께 갖춘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트뤼포가 영화역사상 가장 뛰어난 감독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가장 많은 애정을 받고 있는 감독이지 않을까 싶다. (정리: 장지혜)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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