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보라>의 이강현 감독

최근 한국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소재의 무거움에 함몰되지 않고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형식의 실험과 사례의 활용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에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9월 1일부터 8일까지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이란 제하로 최근 한국 다큐멘터리의 주목할 만한 8편의 작품을 모은 특별전을 열고 있다. 이 중 지난 9월 3일 오후에 현장보건관리에 대한 기록물 <보라>가 상영되었고, 상영 후 이 영화를 연출한 이강현 감독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 현장을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작품을 만들 때 처음 떠올린 것은 어떤 것이었나?
이강현(영화감독): 처음에는 산업의학전문의들의 기록일지를 보고 이것들을 기록해보면 그 과정에서 어떤 견해나 느낌들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질병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삶에서 희노애락의 정점에 있는 부분이고 삶의 불가항력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다루고 싶었다.

김성욱: 질병과 증후에 대한 느낌이 있다. 그 질병과 증후가 모두 기계와 연동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산재에 있어서의 기계의 작업이 있고, 카메라도 일종의 기계라고 할 수 있고, 컴퓨터 하드디스크라든가 하는 모든 부분들이 공통적으로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부분인데 여기에 인간이 연동되어 있으면서 발생하는 질병과 증후에 관한 동일성이 존재한다.
이강현: 처음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질병을 얻는 과정이 자본주의적인 노동과정에서 얻게 되는 기본적인 불가항력이라는 점이었다. 삶에는 그런 불가항력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내 삶이 마음대로 안 풀리는 문제,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는데 잘 안 되는 것들, 몸이 쇠해지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노동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상황과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편집하는 과정에서 빠지긴 했지만 사무직이나 소위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 관한 부분들도 꽤 있었다.

김성욱: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과정에서 의사들이 질문을 던지고 사람들의 상태를 듣는 작업을 반복해서 보다보니,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감독과 인물들의 관계가 이와 굉장히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강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의사들의 위치가 나의 위치와 비슷하게 느껴지거나, 투사되었던 부분들이 있다. 의사들의 진료행위가 굉장히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현실에서 무력한 것이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없으면 안 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김성욱: 전체적으로 편집을 하고 연결을 만들어갈 때의 원칙은 어떤 것이었나?
이강현: 촬영을 할 때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지만 편집을 할 때는 직감적으로 진행을 했었다. 그 과정이 쉽진 않았는데, 촬영분을 오랫동안 보면서 느낌이 오는 것들을 골라내거나 가장 못 견디겠는 부분들을 버렸다. 극적인 것이 벌어지는 것보다는 뒤에 있는 것이 보인다든지, 사건이 벌어지지 않지만 뭔가 느낌을 주는 시공간들이 중요했다. 못 견디는 부분은 스스로 자괴감이 들고 참을 수 없는 부분들이다. 이를테면 요즘에는 제조업의 경우는 어떤 사업장이든지 이주노동자들이 있는데,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촬영분들은 모두 빠졌다. 그런 부분을 다룬다는 것이 소수자들을 다룬 것 같지만, 사실은 재식민화하는 느낌도 좀 있다. 그런 부분들은 의도적으로 배재했다.

김성욱: 촬영할 때의 원칙은 어떤 것이었나?
이강현: 오디오 운영이 중요했다. 영화에서 비디오와 오디오가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싱크가 정확히 맞물려있다. 다만 여러 대의 마이크를 두어서 똑같은 시공간이지만 그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판단했다. 그리고 인물의 이야기하는 것을 쫓아가지 않는다는 것, 시공간을 축약하거나 상황을 요약하는 인서트를 찍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김성욱: 보통의 다큐멘터리에는 어떤 상황들이 있고 그에 따라서 특정한 인물을 따라감으로써 자연스럽게 어떤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는데 <보라>에는 그런 부분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도리어 공간에 대한 느낌이 훨씬 더 강한 것 같다. 촬영할 때도 인물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카메라를 위치시키는 지점을 중요하게 다루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부분들을 포착하는 것 같다.
이강현: 구체적인 인물들을 선호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개별성들을 다루는 것이 견디기 힘든 점이 있다. 그래서 나의 욕망은 개별성들을 지워버리고 롤러로 민 것처럼 평평한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욕망이기도 하다. 개별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두 가지는 부딪힐 수밖에 없고, 모순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모순들을 지나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성욱:
후반부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사람들의 에피소드와 산재라는 부분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다.
이강현: 후반부는 처음부터 사진과 관련된 걸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지금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단면중의 하나라고 생각이 되었다. 자기의 삶에서 노동해서 먹고사는 것 이외의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 자기 삶을 어떻게 좀 더 의미 있고 즐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그것이 공교롭게도 ‘사진찍기’였던 것뿐이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사진찍기’라고 했을 때에는 그것이 주는 다른 느낌이 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이미지를 취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영화를 만드는 행위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중간에 서버실을 지키는 청년의 관련된 부분은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시켜주는 브릿지같은 역할이었던 것 같다. 서버라는 덩어리는 사진을 비롯해서, 사람들이 꿈꾸고 욕망하는 것들이 담기는 구체적인 쇳덩어리이고, 그것을 지키면서 밤샘노동을 하는 그 공간은 노동으로 몸이 쇠해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전반부에 해당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김성욱: 하드디스크를 복원하는 공간에 대한 부분도 특이했다.
이강현: 처음에 하드디스크 관련한 것을 찍기로 하고 그 다음 필요한 것은 그럼 하드디스크를 수리하거나 복원하는 공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런 공간은 다양하게 있다. 사진이나 음악, 사람들의 대화, 혹은 누군가의 일기처럼, 지금의 사람들의 정신영역 또는 정신영역 이상의 대부분이 담겨 있는 곳이 하드디스크다. 그것이 고장이 나서 수리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전반부의 몸과도 연결된다. 그런데 우연히 찾아간 그 곳의 분위기가 말씀하신 것처럼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영화적으로 차용될 때는 우리의 욕망과 것들이 고장이 나서 다뤄지고 있는 공간의 풍경이라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조금은 스산하기도 하는.

관객1: 영화의 초반부는 숨을 쉬기조차 어려운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느낌보다는 왜 이런 장면들이 등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특히 아이들이 야구하는 모습에서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빈 운동장을 오랫동안 보여주는 장면에서 이전까지와 달리 음악이 흐른다. 그 장면에서 전반부에서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갇혀 있는 듯한 노동자들의 마음이 왠지 모르게 느껴졌다. 그 공간을 비춰주신 의미가 무엇인지?
이강현: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위기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혹시 후반부가 전반부에서 나오는 열악한 노동환경들을 모르거나 혹은 무시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판하고자하는 것이냐고 묻는 분들도 간혹 있었다. 그런 의도는 전혀 아니었다. 전반부와 후반부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실 같은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떤 일이던지 간에 벗어나기 힘들 것 같은 느낌, 굴레를 벗어나 다른 인생을 꿈꾸기 힘들 것 같은 느낌이 굉장히 중요했다. 어떻게 보면 후반부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 보고자하는 사람들의 분투 같은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분투라는 것은 무망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무망한 느낌의 감정이 말씀하신 장면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그 때의 음악은 외화면에서 들어온 소리들이지만 배경음악과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그 부분에서만큼은 음악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타깝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감정적으로 확 가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음악이 안정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툭 끊기게 되고 바로 다음에 서버실을 지키는 청년이 잠에 깨서 세수를 하고 나오는 장면이 이어진다. 꿈결 같은 느낌이기도 했던 것 같다.

관객2: 전반부는 관찰자적인 입장이고 감독님이 크게 개입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의 관찰자적인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입장을 따라갔다면 후반부에는 관찰보다는 감독님의 주관성, 자의식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굳이 다큐멘터리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이강현: 전반이 관찰자적인 느낌이 들었다면 넓은 화면이라든지 뒤에서 바라보는 것 때문이었을 것 같은데, 사실 어느 한 장면 아주 강하게 개입하지 않은 장면은 없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거기에는 배재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오히려 뒤로 빠졌을 때 생기는 공간의 느낌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배재되는 것들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 배재되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고, 그것은 아주 깊은 개입이었다고 생각된다. 전반부의 관찰자적인 듯한 느낌과 후반부에서 개별성에 주목하는 것 같은 부분들 사이에서 부딪히고 모순되는 것들을 통과하는 것이 이 영화의 중심적인 결이라고 사후적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자의식은 없다. 이 영화도 논픽션이라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라고 했을 때 그에 전제되는 것들, 믿음들이 있는데, 그것을 전적으로 공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 같다.


김성욱:
<보라>를 보면서 내가 잘 못 봐왔던 어떤 것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모든 장면들, 모든 말들이 흥미로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떤 결론을 냈다기보다 시도를 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다큐멘터리를 칭하는 여러 명칭들 중에 에세이필름이라는 것이 있는데 ‘에세이’라는 것이 시도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으로 또 어떤 시도나 결과물을 생각하고 계신지도 궁금하다.
이강현: 다음 작업은 배우가 나오는 작업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 얘기를 꺼내다가 만 것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될 것 같다. 사람들이 ‘시도’라고 할 만한 것은 없을 것 같다. 보다 더 기본에 충실한 것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정리: 장지혜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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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소재의 무거움에 함몰되지 않고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형식의 실험과 사례의 활용으로 각광받고 있다. 9월 1일부터 8일까지 열리는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 전은 언급한 특징을 보여주는 최근 한국 다큐멘터리의 주목할 만한 8편의 작품을 모은 특별전이다. 상영되는 8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 다큐멘터리의 최근 경향이라 할 만한 움직임을 추적해본다.

서울아트시네마의 9월 프로그램 중 하나로 ‘다큐멘터리 진실의 정치학’을 마련한 건 극영화 일색의 극장가에 그 비중과 비율을 높여가고 있을 만큼 한국 다큐멘터리가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만 하더라도 <쿠바의 연인> <오월愛> <종로의 기적> 같은 작품이 예술영화전용관에서 높은 좌석점유율을 기록했고 <트루맛쇼>의 경우, 관객의 입소문을 타고 멀티플렉스로 상영관을 늘려가며 1만 명을 훌쩍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언급한 작품의 선전에 힘입은 걸까. 이후 개봉 대기 중인 한국 다큐멘터리는 <꿈의 공장> <용산> <청계천 메들리> <하얀 정글> 등 10여 편에 달한다.

‘재미’를 사수하라
최근 들어 두드러지고 있는 한국 다큐멘터리의 부상은 관객의 인식 변화에 기댄 바가 크다. 일례로,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2009)가 유례없는 300만 관객을 동원하고 <아마존의 눈물>과 같은 TV프로그램이 기대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다큐멘터리는 지루하고 계몽적이라는 저간의 편견을 불식시키고 볼만하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실제로 올해 화제를 모았던 다큐멘터리를 보면 진실추구라는 다큐멘터리의 본령 외에 ‘재미’를 동일선상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 작품들이 눈에 띈다. 정호현 감독의 <쿠바의 연인>은 쿠바 남자와 한국 여자의 사랑 속에서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양국 간의 문화적 차이를 발랄하게 풀어냈고 이혁상 감독의 <종로의 기적>은 기성세대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동성애자들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밝게 생활하는 모습을 강조했으며 <트루맛쇼>는 TV맛집 프로그램의 조작 실태를 몰래카메라라는 코믹한 형태로 구성해 고발의 경직성을 완충했다.
이들 작품이 흥행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쿠바의 연인>, <종로의 기적> 5천 명, <트루맛쇼> 1만 2천 명의 관객동원) 다큐멘터리를 낯설어 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극장의 문턱을 낮춘 것은 사실이다. 시대가 예전 같지 않아서 창작자의 진정성에 기대 호소하는 방식만을 가지고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시위도 놀이로써 소화하는 세대가 등장했고 아무리 선의를 가진 목적의 행위라도 감성을 건드리지 않으면 지지를 얻기 힘든 시대가 도래했다. 유행에 민감한 메이저 극영화의 경우, 시대의 감성에 발맞춘 결과물로 발 빠르게 관객과 호흡했지만 다큐멘터리는 장시간의 제작 기간을 필요로 하고 (예컨대, 김동원 감독의 <송환>의 경우, 12년의 제작 기간, 500개의 촬영 테이프, 800시간의 촬영 분량이 소요됐다!) 소재와 주제의 성격이 직선적인 탓에 매니악한 작품으로 분류되어 다수의 관객과 만나기에는 애초에 한계가 존재했다.
<워낭소리>가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은 흥행성적을 떠나 다큐멘터리로는 드물게 시대의 감성을 단적으로 드러낸 텍스트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산골 노인부부와 함께 사는 늙은 소의 이야기를 다룬 <워낭소리>는 자연과 멀어진 도시인들에게 하나의 스펙터클로 작용하며 예상 밖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빌딩숲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워낭소리>의 자연은 평상시 보기 힘든 볼거리였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초월한 할아버지와 소의 우정은 경쟁과 약육강식의 사회생활 속에서 잊힌 가치를 떠올리게 하는 감정의 도르래였다. 그런 관점에서 <쿠바의 연인>이나 <종로의 기적>, <트루맛쇼>는 모두 어떤 시대적 감성을 자극하는데 탁월한 연출을 보여준다. <쿠바의 연인>은 한국의 익숙한 풍경으로 자리 잡은 국제커플 중 한 쌍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되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차이를 좁혀가는 에피소드가 공감대를 형성했다. <종로의 기적>은 게이커뮤니티가 활발한 종로를 상징적인 배경으로 삼지만 특정 공간에 몰아넣지 않고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게이들을 통해 (여전히 편견이 존재하지만) 좀 더 다변화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트루맛쇼>는 맛에 대한 관심이 과열되고 있는 이때 TV맛집 프로그램의 허구를 전시하며 천박한 우리네 맛의 감식안을 폭로했다.

모든 영화가 시대와의 접점 없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지만 진실 추구와 고발, 폭로와 같은 정보제공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다큐멘터리에게 있어 동시대성은 가장 중요한 영화적 좌표다. 이에 더해 무거울 수밖에 없는 메시지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한 화법의 선택, 즉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용한 방법으로써의 재미 추구는 또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는 <볼링 포 컬럼바인>(2002) <화씨 9/11>(2004) 등을 연출한 마이클 무어가 선구자라 할만하다) 다만 이는 최근 한국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여러 경향 중 하나로 생각해야지 모든 작품에 적용되는 연출은 아니다. 한국사회에 갈수록 만연한 불순(?)세력의 정보 차단 현상과 맞물리면서 한국 다큐멘터리는 다종한 소재와 다기한 형식으로 진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추구하라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진실과 고발이라는 다큐멘터리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한편으로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감행하는 작품이 집중되고 있다. 이런 경향의 기저에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특수성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비리에 대한 감시 역할을 수행하던 TV시사고발 프로그램의 기능이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구멍 뚫린 국민의 알권리의 일부분을 다큐멘터리가 메우고 있는 것. 개봉을 앞둔 김성균 감독의 <꿈의 공장>과 송윤희 감독의 <하얀 정글>은 물론이고, 여러 경로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고 있는,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에서 주요하게 소개되는 태준식 감독의 <당신과 나의 전쟁>, 이강현 감독의 <보라>, 문정현 감독의 <용산> 모두 우리의 생존권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문제들을 정면에서 응시한다.
<꿈의 공장>은 세계적인 브랜드로 떠오른 국내 최대 기타회사 콜트/콜텍의 횡포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을, <하얀 정글>은 타인의 생명을 다루는 고귀한 의료 행위가 장삿속으로 변질된 한국 의료계의 검은 실상을, <당신과 나의 전쟁>은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무관심 속에 그들만의 투쟁으로 전락한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을, 1년 동안 촬영한 기록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보라>는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상시고용 50인 이상 300인 이하 사업장의 근로자는 해당 사업장의 보건 관리 업무를 맡은 보건관리대행기관의 산업의학전문의에게 3개월에 한 번씩 보건관리를 현장에서 받는다)에 근거하여 이뤄지는 현장 보건 관리의 실체를, <용산>은 2009년 1월 거리로 내몰린 용산 철거민을 비롯해 6월 항쟁의 이한열 열사, 광주민주항쟁의 시민까지, 죽음으로 내몰리는 약한 자의 현실을 다룬다.


특히 이들 작품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주류 언론의 은폐 속에 무관심으로 내몰리는 이슈를 향한 진실의 정치학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종류의 다큐멘터리는 작품의 유효성이 극장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극장 밖의 현실로 연장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이를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바꾼다'는 의미로 비장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적인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둘 때 비로소 관객의 접근이 용이해진다. 사실 다큐멘터리의 본질은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던 현상에 카메라를 밀착함으로써 우리의 본모습을 폭로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더 정확히는 겉으로 드러난 사회적 현상의 이면을 들추는 이들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를 작동하는 시스템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앞서 언급한 다큐멘터리들이 현재는 미지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만큼 관객의 호응도를 미리 재단할 수 없지만 다루는 소재는 우리 사회에서 첨예한 이슈거리인 까닭에 익숙하게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잠시 언급을 보류했지만 박경근 감독의 <청계천 메들리>는 좀 다른 경우에 해당한다. 해당 소재가 내포한 사회적 파급 효과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영화들에서 더 나아가 형식적인 실험에 더욱 힘을 기울인다. <청계천 메들리>는 서울 청계천에서 쇠를 다루는 영세한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단순한 현실의 기록을 넘어 이들의 작업을 중심으로 기록화면과 멀티이미지의 향연 속에 한국과 일본, 근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쇠의 사회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진화하고 분화되는 한국 다큐멘터리의 영토 확장 배경에는 저 너머의 진실을 찾겠다는 창작자의 용기 있는 태도가 짙게 배어있다. 이 용기의 정체는 진실 탐구에 따르는 위험과 인내심의 감수와 더불어 이를 최대한 정확하게 알리겠다는 창작자의 사명감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다만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구국의 결단에 방점을 찍기보다 작품의 미학성도 놓치지 않겠다는 창작자의 정체성 또한 확연히 드러난다. 진실과 재미의 순간을 목도하라, 이것이 한국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미학의 현주소다.

글/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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