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민규동 감독이 추천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지난 30일 저녁,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상영 후 이 영화를 추천한 민규동 감독과 함께한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필름이 변색되었다는 공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극장을 찾아주었다. 다양한 측면에서 함의를 품고 있는 논쟁적인 영화였던 만큼 짧은 시간에도 깊이 있는 대화와 질문이 오고간 자리였다. 이 지면을 통해 그 일부를 옮겨본다.


민규동(영화감독):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친구들에게 줄거리를 설명하기는 힘들었는데 촬영과 색감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필름 상태 때문에 세피아, 혹은 흑백처럼 보였지만, 사실 촬영감독을 전시회에 데려가서 처음에 나오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보여주며 저 그림의 색감을 구현하고 싶다고 얘기했었다고 한다. 프랑스는 겨울에 해가 빨리 저물어서 낮에도 등을 켜두는데 이런 1월의 파리, 해질녘의 빛깔 같은 걸 활용해서 굉장히 아름다운 영화를 찍은 것 같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처음 이 영화가 개봉 됐던 때에는 굉장히 정치적으로 해석되기도 했었는데 감독님은 어떻게 보셨는지?
민규동: 베르톨루치는 우리에게, 특히 내게 <마지막 황제>로 처음 접해진 감독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상을 9개 받았었는데 중국의 역사를 외국인의 시각으로 다루는 게 독특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그를 다시 만난 셈이다. 젊은 시절 8,90년대에 거쳤던 혁명에 대한 낭만적 기대가 있었는데, 베르톨루치도 마찬가지로 사회적이고 진보적인 것들, 역사변혁에 관한 것들을 젊은 시절에 몸으로 체감한 사람이어서 남다른 느낌이 있었다. 이와 별개로 이 영화를 선택한건 에로티시즘의 파격적인 지점을 선보였기 때문이었다. 같이 본 친구가 ‘이렇게 야한 영화도 처음이고 이렇게 지루한 영화도 처음이다’라고 했던 감상이 아직도 기억난다. 처음에 봤을 때 왜 이게 그렇게 파격적이며 물의를 일으켜야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갖고 있었다. 처음엔 이 영화가 하려던 얘기가 뭔지 이해를 잘 못했던 것 같다. 근데 30대에 파리에서 다시 보니까 영화의 줄거리와 사랑 방식이 조금 이해가 갔었다. 40대가 되어서 봤을 때는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고 너무 절박하게 공감이 됐다. 여러 가지 함의가 있는 영화이고 72년작인 만큼 68혁명에 대한 후일담으로써의 정치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보편적인 감정에 대한 이야기로써 큰 위로가 된다.


김성욱: 이 영화에는 이방인적인 느낌이 많다. 주인공도 파리의 아메리카인이면서 또 많은 외국을 거쳐서 온 이국적 인물이기도하고 감독도 파리에서 외국인으로서 영화를 찍었다. 그러다보니 공간이 유독 인상적이다. 아무래도 주된 공간은 아파트다. 정해진 한 공간에서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헤어진다는 설정이 관객에게 납득이 힘들 수 있는데, 이 영화는 잘 맞아떨어지고 또 그 공간 안에서 시간이 파괴되는 느낌도 든다. 베르톨루치가 “이전까지는 과거시점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이 영화에서부터 현재 진행으로 지속되는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던 말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공간이 특별히 더 중요하게 작용한 것 같다.
민규동: 베르톨루치가 처음 이야기를 구상한 계기는 밀폐된 공간에서 이름 모를 여자와 알 수 없는 미래를 즐기며 사랑하고 싶다는 성적 환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따라서 처음에는 아주 주관적이고 사적인 남녀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맥락에서 파리와 아파트라는 공간이 적절했던 것 같다. 왜 프랑스를 배경으로 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상적인 욕망이 펼쳐지지 않는 공간을 선정한 것 같고, 영화 속에 드러나다시피 교회, 법, 가정 같은 주류 질서에 대한 저항의 욕구가 컸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공간을 찾다 보니 오래 된 큰 아파트가 정해진 것 같다. 그 안에서는 어떤 질서도 존재 않는 원초적인 공간으로 역행하고자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무엇도 나를 억압할 수 없는 공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느낌으로 해석하도록 공간을 배치한 듯했다.

김성욱:
영화 촬영 당시 검열문제나 분위기상으로 봤을 때 이 정도의 포르노그래픽한 영화를 찍을 여건이 프랑스 정도나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질문 하나가, 마지막에 말론 브란도가 씹던 껌을 뱉어 붙이는 장면에서 '그 껌을 왜 붙였고 언제부터 씹었는지' 이다. (좌중 웃음) 오늘 유심히 보니 아파트를 뛰어올라간 다음부터 씹고 있더라. 즉흥적인 면도 있는 것 같고, 어쨌든 이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의 연기는 굉장히 특별하다. 그가 연기한 폴이란 인물은 어떻게 봤는가?
민규동: 예전엔 몰랐는데 다시 보니까 많이 섹시한 인물이다. 고독이나 참회 같은 인물의 고행을 누가 이만큼 소화할 수 있었을까 잘 상상이 안 된다. 감독이 밝혔듯이 이 영화는 사실 탄탄한 시나리오를 구축해서 대사를 외우게 하며 찍은 게 아니라, 무척 거칠고 즉흥적으로 많은 걸 열어놓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메소드 연기법을 체계적으로 교육받고, 연기의 기교와 깊이를 알며 독특한 기벽이 있었던 이 훌륭한 배우가 적합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는 모든 이야기와 이미지를 뚫고 자연스레 인물을 만들어낸 것 같다. 후에 브란도가 이 영화를 찍는 동안 자기 삶을 강탈당하는 느낌에 너무 고통스러웠고 다시는 이런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말했을 만큼, 자신의 실제 삶을 쏟아 부으며 이 인물을 힘겹게 통과한 것 같다. 촬영하며 살이 10키로나 빠졌다고 들었다. 특히 주목하고 싶은 건 아버지가 술꾼이고 어머니가 알몸으로 감옥에 갇혔던 경험 등이 실제 그의 삶에서 나왔단 점이다. 상대 여배우에게만 질문 대사가 주어졌고 브란도의 독백은 정해진 대사 없이 그가 자기 경험을 말했다고 한다.

김성욱: 이 영화를 볼 때면 늘 대가가 보여주는 카메라 움직임에 감탄하게 된다. 이를 테면 중간에 장모와 폴의 대화 장면에서 카메라가 슬쩍 들어가서 벽을 보여주다가 장모가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든지, 중간 중간 사람들을 세워놓고 카메라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장면도 많고, 마지막에 테라스에서 뒤로 빠지는 장면도 굉장히 좋았다. 전작인 <순응자>에서는 카메라가 발레처럼 움직이는데, 이 영화에서는 인물들을 놓고, 공허감을 주는 그 틈들을 잘 찍어냈다. 영화에서 촬영과 전체적인 장면 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봤는가?
민규동: 처음엔 촬영이 전혀 안 보였는데 세 번째 보니 보이더라. 굉장히 유려하며 현장에 가기 전에는 계획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감독 스스로도 <파리의 아메리카인> 같다는 말을 했을 만큼 음악적이며 뮤지컬 영화적인 성향이 있다. 베르톨루치는 카메라가 가만히 있는 걸 견딜 수 없어서 항상 움직이게 된다고 하더라. 그는 자신의 영화 <루나>의 '어머니를 향해 다가가는 아이' 씬을 이야기 하면서, 가까이 다가가는 카메라는 그 대상을 욕망하는 자신의 시선이고 다시 멀어질 때는 그 금기된 욕망에 대한 주저함이라고 했다. 카메라가 크레인 업하는 것은 발기, 성적 욕망의 이미지라고 하더라. 사위와 장모간의 장면들에서는 묘한 성적 관계를 암시하려는 규칙 속에 움직이는 것 같았다.

관객1:
저널들에서 이 영화를 성정치학과 관련지으며 훌륭한 영화라고 치켜세우기에 호기심에 비디오로 빌려봤었다. 영화를 보면 가정을 부정하는 폴과 가정을 이루려는 톰이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데, 이 영화에 표현된 가정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민규동: 폴이 외롭다고 생각하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부인이 죽었는데 이유를 알 수 없고 남겨진 것은 그녀의 정부였던 마르셀 뿐이다. 결국 지난 5년간의 결혼 생활, 가정과 사랑에 대해 짙은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낯선 여자와 폭력적인 정사를 가진 것 아닐까. 이 증명도 부질없다고 느낀 순간 아내에게 가서 참회하고, 결국 가족과 관계, 사랑이 유의미한 것이었다 말해달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쟌느가 다시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나. 쟌느와 폴의 관계는 일종의 자해였다고 본다. 이를 통해 과거를 잊으려했고 결국엔 쟌느와의 새로운 관계를 원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시도는 성공한 셈이다. 반대로 쟌느는 폴의 대척점에서 평범한 가정과 사랑을 원하는 보통여자로 존재한다. 따라서 둘의 관계는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감독은 결국 '가정을 이루려는 쟌느와 톰에게도 희망이나 출구는 없지 않는가' 라고 묻고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2: 부인의 시신 앞에서 우는 장면에서 장례를 치르지 않고 계속 집에 두는 건지 아니면 과거 현재가 뒤섞이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붙여놨던 껌을 다시 씹는 경우가 있는데 껌을 붙이는 장면에서는 폴의 삶에의 의지가 드러난 게 아닐까? (좌중 웃음)
민규동: 사실 이 영화는 한 3일정도 밖에 안 되는 시간을 다루고 있다. 감독이 시적으로 시간을 다루다보니 물리적 시간과는 다른 느낌을 주어서 그런 것 같고, 한편으론 영화 속 두 남녀가 나누는 관계가 너무 깊어서 3일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듯하다. 이 점은 우리와 다른 유럽인들의 사랑 방식 땜에 생긴 시차가 아닐까. 껌에 대해서는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만큼 의도적인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감독도 그 아버지도 시인이었던 만큼 어떤 시적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붙을 듯 말 듯 붙지 않는 두 남녀의 깨진 세계를 봉합하기를 원하는 건 아닐까. 근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해석도 보지 못했다. 베르톨루치는 늘 불가해한 어떤 부분을 열어 놓는 게 영화의 예술적 경지라고 말한다.

관객3: 처음에 나오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많은걸 설명하는 것 같다.
민규동: 베르톨루치가 그 그림을 브란도에게 보여주며 이런 고독을 표현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표정에서 배우가 이를 의식한 게 느껴지는 듯하다. 또 영화에서 익명성이 무척 중요한데,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뭉개진 초상화, 익명의 얼굴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이 얼굴들은 히스테리에 대한 은유이기도하다. 즉, 욕망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부정적 상태가 드러난 이 그림이 인물들의 핵심적인 이미지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리 : 백희원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리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베르톨루치의 영화 가운데서도 가장 감각적인 영화인 동시에, 말론 브랜도라는 불세출의 배우가 가장 자유롭게 자신의 내면을 표출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거미의 계략>(1970)에서부터 베르톨루치와 함께 작업해온 촬영 감독 비토리오 스토라로의 거의 회화에 가까운 실험적인 화면이 돋보인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말론 브랜도의 즉흥 연기와 스토라로가 그야말로 카메라로 그림을 그리듯 창조해낸 무드로 가득한 파리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경험을 가져다주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또한 태어나자마자 온갖 수난을 감수해야 했다. 이탈리아에서 외설죄로 감독과 제작자, 배우들이 법정에 섰을 뿐만 아니라 본국에서 약 15년 동안 상영 금지를 당했으며,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변태적인 포르노 영화라는 악평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외설 시비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당시 베르톨루치 영화 중 최고의 수익을 올렸으며, 제작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와 주인공 말론 브랜도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다. 브랜도는 실제로 이 영화에서 대부분의 대사를 완전히 뜯어고쳐 즉흥적으로 만들면서 알코올 중독인 부모로 인해 괴로워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반페미니즘 논쟁과 외설 시비에 시달렸던 이 영화는 그러나 저명한 영화평론가 폴린 카엘로부터 말론 브랜도의 천재성을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보여준 영화라는 찬사를 받았다.

아내의 자살로 인해 비탄에 젖은 중년 남자 폴은 우연히 한 임대아파트에서 젊은 아가씨 잔느를 만나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잔느는 영화감독인 약혼자 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폴과의 관계에 깊이 빠져든다. 두 사람은 때때로 임대 아파트에서 만나 바깥세상을 잊고 둘 만의 세계에 몰입한다. 그러나 여관을 경영했던 아내가 한 집에 정부를 두고 있었으며, 그녀의 자살의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폴의 상처는 여간해서 치유되지 않는다. 잔느는 서로에 대해 이름조차도 알지 못하게 하는 폴의 태도에서 심한 소외감을 느끼고 충동적인 관계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지만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성정치학에 몰두했던 베르톨루치의 고민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영화인 동시에, 한때 절친한 친구였던 장 뤽 고다르를 비롯한 누벨바그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주인공 잔느의 약혼자이자 영화감독 톰 역을 맡은 장 피에르 레오는 트뤼포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극 중 역할이 영화감독이라는 점에서 누벨바그 감독들의 이미지를 쉽게 겹쳐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서로 다르지만 베르톨루치는 잔느와 폴의 관계를 종종 잔느와 톰과의 관계와 대비시킨다. 잔느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으려는 톰은 잔느에게 과거에 대한 사실적인 고백을 강요하며, 잔느의 현재 상태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재구성하려 한다. 반면 폴은 잔느에게 어떤 얘기도 듣고 싶어 하지 않으며, 조작하기 쉬운 현실 대신 완전한 판타지를 택한다. 낯선 남녀의 만남과 도피, 그리고 비극적 결말이라는 점에서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1965)의 구조와 유사한 면을 보이는 이 영화는, 그러나 말론 브랜도가 보여주는 지극히 감성적인 연기와 영화의 전반을 감싸는 풍부하고 멜랑콜리한 영화음악으로 인해 전혀 다른 감정적 울림을 준다. (최은영_영화평론가)

시네토크
1월 30일 오후 3시30분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 민규동 (영화감독)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는 그 명성과 제목, 널리 알려진 주제곡 선율로 제법 낭만적인 사랑영화로 오해 받을 만하다. 배우들의 면면과 비토리오 스트라로의 콘트라스트 짙은 유려한 화면도 이에 한 몫 한다. 그러나 이 근사한 외피 속에 펼쳐지는 관계들은 조금도 낭만적이지 않다. 인물들은 거의 결핍에 의해서 움직이며 번지수를 잘못 찾아 자꾸 엇갈린다. 개봉당시 외설 논란을 일으키며 유명해진 정사장면들은 둘의 결합이라기보다 충돌에 가깝다. 카메라는 멀리서 이를 차갑게 바라보거나, 고통의 표정에 다가갈 뿐이다. 사랑의 밀어 대신 욕설과 사회시스템을 부정하는 말들이 튀어나온다. 제일 다정한 언어는 그르렁대는 동물소리. 이 영화에서 가장 낭만적이라 할 만한 것은 사랑은 커녕 차라리 죽음과 고독일 것이다.



영화는 중년 남자 폴(말론 브란도)이 내뱉는 절규 내지는 고함으로 시작한다. 이 때 모자에 꽃을 단 어린 여자, 잔느(마리아 슈나이더)가 발랄한 걸음으로 힐끗, 그를 스친다. 잠시 후 두 남녀는 세 놓인 빈 아파트에서 만나 충동적인 섹스를 나눈다. 그 후 폴은 아내의 자살 현장으로, 잔느는 약혼자 톰(장 피에르 레오)이 도착하는 기차역으로 제 갈 길을 간다. 이후 폴과 잔느 각자의 삶이 교대로 진행되는 사이사이 두 남녀는 환하고 살풍경한 아파트에서의 정사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여기서 두 삶, 두 관계는 불협화음의 돌림노래를 맞춘다. 이를테면 영화감독인 톰이 잔느를 영화주인공으로 삼고 그녀의 역사를 원할 때, 막상 그녀가 가장 내밀한 기억을 털어놓는 대상은 폴이다. 그러나 폴은 이를 거부한다. 그가 바라는 관계는 지금, 여기 뿐. 어떤 무게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잔느와의 가학적인 섹스를 통해 아내의 자살과 외도라는 현실로부터 도피한다. 그런 폴에게 현실의 사랑을 원하고 거부당하는 잔느가 "내 영혼을 강간당하는데 지쳤어"라 외치며 상처를 드러내는 대상은 또 톰이다. 폴은 잔느에게 던졌던 모욕의 말들을 아내의 시신 앞에 돌아와 다시 뱉어내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엇갈리는 감정들은 결국 폴과 잔느의 관계를 파국으로 이끈다. 영화 중반, 그의 신분을 밝히려는 잔느에게 폴은 ‘그걸 알게 되면 곧 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의 끝은 바로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에 어긋난다. 잔느가 폴의 부재를 비로소 받아들이자, 마침내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인 폴이 잔느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과 상황을 밝히기 시작한다. 끝이다. 폴은 새로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익명에서 벗어나 현실의 실체로써 이름과 무게를 갖는 순간, 둘 사이의 가학적인 관계는 그 무게만큼 잔느를 억압하게 되며, 고로 더 이상 사랑 아닌 폭력이 된다. 이는 끝내 잔느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몬다.



본래 베르톨루치가 염두에 두었던 남녀 주인공은 전작 <순응자>(1970)의 장 루이 트랭티냥과 도미니크 산다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말론 브란도의 연기를 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가장 깊이 남는 것은 브란도의 그늘 짙은 얼굴이 풍기는 고독의 인상이다. 하지만 촬영 후 그가 영화에서 모욕감을 느꼈다며 “두 번 다시 이런 영화는 찍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유명하다. 슈나이더 역시 훗날 “브란도와 베르톨루치에게 강간당하는 느낌이었다”며 출연에 대한 후회를 토로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배우들이 실제 몸소 겪어낸 고통은 완벽한 음악과 촬영으로 경이적으로 근사하게 스크린에 펼쳐진다. 미처 여기선 다루지 못한 정치적 함의까지 띤 채, 그렇게 외설은 예술이 되고, 고통은 고전이 됐다.(백희원: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