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사람의 기억은 머리에 남을까,

마음에 남을까?!”

- 배우 배수빈이 말하는 미셀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2013년 여덟 번 째 친구들 영화제가 한창인 지난 24일,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상영 후 배우 배수빈과 함께 한 시네토크 자리가 마련되었다. 배수빈은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함께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인사를 전하며, 삶과 영화에 대한 진심어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배수빈(배우): <이터널 선샤인>을 네다섯 번 정도 봤는데, 볼 때마다 가슴에 와 닿는 장면이나 대사가 달랐다. 볼 때마다 그 느낌이 달라서 신기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인 후 다시 본다면 또 어떤 장면과 대사가 나에게 영감을 줄까하는 기대감에 이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자주 보게 됐던 건 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뭔가 잊고 싶은 게 있었던 건가?

배수빈: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운명인 것 같다. 나와 너무 달라서 혹은 나와 너무 비슷해서, 자기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끌림들 때문에 상대를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무언가를 경험하게 되지 않나. 잘 끝났건, 잘 끝나지 못했건 그 기억들은 소중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 기억들로 인해 우리는 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연애를 할 수 있고,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됐다. 딱히 나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게 아니라. 나는 좋은 기억이든 안 좋은 기억이든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고 하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김성욱: 영화 속 조엘(짐 캐리)이라는 인물은 과거의 상처 때문에 기억을 지웠다. 상대역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도 그렇다. 짐 캐리는 이런 캐릭터를 많이 맡아왔다. 나에게는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의 캐릭터로서 조엘이라는 인물이 특별하게 와 닿는다. 배우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이는가?

배수빈: <이터널 선샤인> 속의 짐 캐리를 보면 당시에 어떤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것 같은 모습이다. 얼굴에서 그런 분위기가 나지 않나. 나도 연기를 하면서 상처를 갖고 있고, 결핍을 가진 인물들에게 끌리곤 했다. 작년에 작업한 <26년>이라는 작품 같은 경우, 혼자만의 트라우마가 아닌 전 국가적인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다. 나는 트라우마가 너무 크다면 살아가는 힘마저도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들이 올 수도 있겠지만 긍정적으로 이겨내다 보면 또 다른 삶이 펼쳐지지 않을까. 영화 속에서는 트라우마에 빠져버린다 해도 최소한 삶에서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성욱: <이터널 선샤인>과 함께 추천했던 작품은 <태양은 가득히>였다. 이 작품은 어떤 점에서 끌렸나?

배수빈: 그 영화 역시 알랭 들롱의 부와 명예에 대한 결핍 때문이었던 것 같다. 거짓말에 거짓말이 더해지고. 자신이 따라가고 있는 욕망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내가 배우로서 추구해 나가야하는 방향성 같은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였다.

 

김성욱: 이 영화를 보며 짐 캐리라는 배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초기작 <마스크>나 <케이블 가이>를 보면 몸으로 CG를 구현하는 듯한 배우였는데(웃음), 2000년대 초반에는 진지한 역할을 자주 맡았다. <트루먼 쇼>도 그렇지 않나. 오늘 영화에서 인상 깊은 탁자 장면을 보면, 한편으론 진지하면서도 한편으론 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위트 있는 캐릭터를 잘 소화해낸다. 배우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배수빈: 굉장히 특별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나도 배역을 맡다보면 한 쪽으로 치우쳐진 경우가 많다. 짐 캐리 같은 캐릭터 소화가 가능한 것은 여유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초반에는 나이도 어리고 경험치도 없는 배우가 본인의 개성으로 이슈화되어 나오다가, 시간이 흘러 여유가 생기면 그 개성이 페이소스 있게 풀어지는 게 아닐까. 나도 세월의 무게가 더해지면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성욱: 이 영화에서 어떤 장면을 특히 좋아하나? 내 경우에는 탁자 장면이 인상 깊다. 재미있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다.

배수빈: 짐 캐리가 어린 시절 자위행위 하던 기억으로 돌아간 장면. 중고등학생때 누구나 경험해봄직한 장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성욱: 다 경험하지는 않는다. (웃음)

배수빈: 미셸 공드리의 편집도 좋다. 그러니까 중간 중간 갑자기 인물이 사라지고 거꾸로 진행되고, 신기할 정도로 편집을 잘 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천재 감독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기억을 없애는 방법이 머릿속의 점들을 지우는 것이란 아이디어 자체도 신기했다. 사람의 기억은 머리에 남아있나, 마음에 남아있나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김성욱: 이 영화를 촬영했을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면, 짐캐리가 몇몇 장면들에서 편집에 의존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 어떤 장면은 카메라 뒤로 돌았다가 본인이 직접 다시 카메라 앞으로 나타나고. 두 명이 나오는 장면도 각기 찍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인터뷰에서 미셸 공드리는 이런 방식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 때 한 대답이 “해보지도 않고 가능하냐고 묻느냐”는 것이었다. 배우로서 감독과의 그런 경험이나 일화가 있는지.

배수빈: 유지태 감독의 장편 데뷔작 <마이 라띠마>에서 함께 촬영을 했는데, 매 장면마다 2테이크 씩 간 것 같다. 한 장면 장면을 위해 합심해서 노력 했다. 감독의 의지가 이렇다고 해서 이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그렇지 않나. 함께 합의를 한다면 몇 테이크인들 촬영 못하고, 거꾸로 찍는 것인들 못하겠나. 배우는 자신의 역할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보면 사족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라는 매체는 내가 느끼는 것보다 관객들이 느끼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김성욱: 그런 식의 경험이 있있던 장면이 있나? <26년> 같은 작품에서는 많았을 것 같다.

배수빈: <마이 라띠마>를 찍을 때 스테디캠으로 1분 이상 지속되는 장면이 있었다. 출연 인원만 30-40명이 얽혀서 나오는 건데, 그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 8시간 정도를 투자한 것 같다. 딱 한 테이크를 위해서. 거기에는 주연, 조연 배우도 있겠지만 보조출연 하시는 분들도 있고 스탭분들도 있다. 정말 작은 역할부터 스탭들까지 전부.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 다 함께 힘을 기울였던 장면이 생각난다.

 

김성욱: 짐 캐리는 <이터널 선샤인> 시나리오를 받고 로또에 당첨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배우로서 활동하면 여러 종류의 시나리오를 받을 텐데, 어떤 식으로 판단을 하나?

배수빈: 반반이다. 정말 잘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시나리오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 <광해>의 연극을 준비하고 있다. <광해>의 영화 시나리오를 봤는데 이 영화는 될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실했다. 시나리오가 주는 묵직함이 있었다. 배우들은 내 생각에 감인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잘 넘어가느냐, 읽는 중간에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잘 넘어가느냐, 시나리오를 다 읽고 딱 덮었을 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었던 작품들은 거의 그런 식이었다.

 

김성욱: 첫 영화, 첫 작품을 한지 거의 10년 가까이 된 것으로 안다. 어떤 계기로 배우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배수빈: 사실 처음에는 배우가 될 생각이 없었다. 원래 나는 사진을 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엔 사진, 음악 이런 것들이 너무 좋았다. 우연찮게 배우라는 직업을 갖게 된 거다. 배우로 지내다보니 결국 과연 무엇 때문에 내가 창작 활동을 좋아했을까 궁금해졌다. 결국 그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회 현상들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연기를 하면 캐릭터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캐릭터들이 갖고 있는 상처들을 감싸 안으면서 따뜻한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앞으로도 휴머니티가 살아있는 작품들을 위주로 선택하고자 한다.

 

관객: 지금까지 TV나 영화에서 진지하고 의미 있는 캐릭터 위주로 선택했던 것 같다. 사극도 그렇고. 생각하고 있는 롤모델 배우나 감독이 있나? <26년>, <마이 라띠마>, <무서운 이야기> 등 영화 선택이 대중적이지 않을 것 같다.

배수빈: 마음이 가면 그냥 한다. 그게 정답인 거 같다. 어디에 구애 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연기만 할 뿐이다. 실험적인 작품에 가능한 한 많이 출연하고 싶다. 본받고 싶은 배우라고 하면, 상(像)이 없는 배우가 되고 싶다. 고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싶지 않다. 상을 부수상이 없는 배우. 고정적으로 저런 느낌이야, 이런 상을 갖는 게 싫다. 상을 부수는 작업을 해나갈 생각이다.

 

정리: 김경민(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박지연(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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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망각의 새로운 가능성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어느 날 아침 한 남자가 출근 대신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난다. 기차를 타고 바다를 찾은 그는 그곳에서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남자는 지나치게 수줍어하고, 여자는 어딘가 들떠 있다. 그리고 그날 밤 얼어붙은 강 위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바라본다. 관객은 영화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 두 사람이 과거에 이미 헤어졌던 연인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서로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자신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조우한 것이다. 다시금 사랑의 출발에 선 그 순간에 기억과 상처는 불쑥 되돌아오고, 인물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변덕스러운 감정은 언제든 그들을 다시 고통 속에 몰아넣겠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이 우연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렇게 사랑은 다시 시작된다.

 

 

<이터널 선샤인>은 무엇보다 찰리 카우프만과 미셸 공드리의 공동 작업으로 관심을 모았고, 그 결과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두 사람의 공통된 관심사(기억, 꿈, 불안, 무의식)가 바탕이 되었고, 카우프만 특유의 섬세한 플롯 구성은 공드리의 시각적 아이디어와 만나 시너지 효과를 냈다. 특히 기억을 삭제 당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억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애잔함과 함께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한편 겹겹의 플래시백으로 들쭉날쭉하고 복잡한 구성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변화된 상황을 예시한다. 상황과 공간들을 연결하는 방식에서의 촉각성은 기억을 시각적 재생이 아닌 접촉과 전이의 과정으로 옮겨놓는다. 이때 ‘기억’을 ‘영화’로 바꿔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공간화된 기억, 인물 내부와 외부를 동분서주하는 과정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에 다름 아니며, 체화된 감각에 대한 강조는 특수효과 대신하는 특유의 ‘로우테크’로 이어진다.

 

이러한 감각들은 영화 안에서 기억의 파괴에 대응하는 것이며, 동시에 미셸 공드리가 보여주는 노스탤지어와 환상이 갖는 힘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서 기억/망각, 현실/꿈, 실제/재연의 이분법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더 이상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영화에 개입하기에 이른다. 영화가 반복해서 얘기하는 니체의 경구는 망각에 보내는 찬사이다. 이때의 망각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기억은 망각의 극복이 아니라 망각이라는 구성적 작업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터널 선샤인>의 기억 상실은 <비카인드 리와인드>에서 비디오 대여점의 죄다 지워진 영화 테잎들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 망각과 지워짐의 과정은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유희의 공간을 열어둔다. 그곳에서 공드리는 지극히 사적인 기억과 환상에 의지해 소진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는 과거의 잠재력을 다시 불러들인다. <비카인드 리와인드>에서의 유토피아적인 거리 공동체나 <이터널 선샤인>에서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그 순간처럼 말이다.

 

장지혜 /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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