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화는 린치처럼 어렵지 않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역사>(2005) DVD 코멘터리에서 이례적으로 데이비드 린치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데이비드 린치가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얻은 무한대의 자유, 그러니까 <인랜드 엠파이어>(2007)로 나아가기 전 <로스트 하이웨이>(1997)와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의 '몽환적 린치 월드'를 거치며 '디지털적' 방법론을 모색하다가 결국 디지털 이미지에 안착한 그의 현재에 대한 얘기였다. <로스트 하이웨이>는 <블루 벨벳>(1986)과 <트윈 픽스>(1992)의 공간에서 여전한 악몽의 미로를 펼쳐놓지만 보다 더 내밀한 심연으로, 그리고 크로넨버그가 언급한 현재의 린치와 가장 가깝게 다가 선 첫 번째 작품이다.


명성과 부를 누리고 사는 색소폰 연주자 프레드(빌 풀먼)는 의처증에 시달리다가 아내 살해혐의로 체포된다. 그리고 자동차 정비공 피트(발타자 게티)는 폭력배 보스의 정부로부터 유혹을 받아 살인을 저지른다. 패트리샤 아퀘트가 그 두 여자를 함께 연기하며 전반부의 후반부의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된다. 프레드와 피트 역시 장면을 뛰어넘어 역할을 바꿔 혼란을 가중시킨다. <사이트 앤 사운드>의 킴 뉴먼이 말한 것처럼 시놉시스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그는 “영화는 내러티브의 논리를 매 순간 파괴하면서 상호 모순적이고 불가해한 사건들을 즐기고 있다”고도 덧붙인다. <블루 벨벳>(1986)과 <트윈 픽스>(1992)처럼 필름 누아르 플롯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로스트 하이웨이>에서는 의도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플롯에 매혹된다.

말하자면 <로스트 하이웨이>는 과거의 린치와 현재의 린치를 잇는 가교다. 어둠의 힘 앞에서 무기력한 빌 풀먼은 <블루 벨벳>의 카일 맥라클란의 또 다른 버전이며, 패트리샤 아퀘트는 앞서 역시 <블루 벨벳>이나 <트윈 픽스>에서 목격했던 학대받고 살해당하는 여성 캐릭터의 변주다. 하지만 <로스트 하이웨이>는 기존의 린치 월드로부터 히치콕의 <현기증>(1958)과 큐브릭의 <샤이닝>(1980)을 지나 또 다른 악몽의 세계, 더욱 끝없이 부유하는 이미지들과 만나 새로운 지도를 그린다. 미로처럼 복잡하고 조금씩 어긋나는 시간, 그리고 과감한 생략과 비약 속에서 혼란은 가중되지만 그 이미지와 사운드의 놀라운 향연은 ‘영화’ 그 자체의 경계와 대면하게 만든다. <포지티프>의 미셸 앙리는 <로스트 하이웨이>를 두고 “영화가 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 경계가 되는 그 어떤 것에 접근한다는 매우 강한 느낌을 준다”고 썼다.


데이비드 린치가 <로스트 하이웨이>에 대해 가장 최근에 한 얘기는 그가 쓴 에세이집 <데이비드 린치의 빨간방>에 아래와 같이 실려 있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O.J.심슨 재판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영화는 그 사건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돼 있을 것이다. 심슨을 보고 놀란 점은, 그가 미소도 짓고 때론 웃음을 터트리기도 한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그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태연히 골프를 치기도 했다. 나는 한 인간이 정말 살인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삶을 이어갈지 궁금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공포를 회피하려고 마음이 스스로 기만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인 ‘심인성 기억상실’이라는 말을 접하게 됐다. <로스트 하이웨이>는 그런 심리현상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주성철 씨네21 취재팀장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종종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되곤 한다. 꿈을 꾸는 듯 진행되는 이 영화의 구조를 생각하면 참으로 적절한 비유 같다. 그런데, 만약 뫼비우스의 띠를 가위로 자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신비로웠던 미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선분으로 바뀌어버리고 말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본 러닝타임은 147분이지만, 국내에서는 어떤 이유에선지 한 씬이 통째로 잘려나가 136분 버전으로 개봉하였다. 물론 삭제된 장면이 있다 할지라도,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성취해 낸 경이로움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처를 봉합할 수는 있어도 가위질로 인한 흉터는 남는다. 시작과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에 남은 작은 흔적. 그렇다면 이 흔적을 역으로 이용, 출발점으로 삼아서 뫼비우스의 띠를 천천히 짚어나가도 되지 않을까?



삭제된 장면은 베티(나오미 왓츠)가 오디션을 보는 장면이다. 이보다 앞서 베티가 리타(로라 해링)와 함께 연기 연습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베티의 연기는 오디션에서의 그것과 대사만 똑같을 뿐 완전히 다르다. 베티는 리타와의 연습에서 복수심에 들끓는 여인을 연기하지만, 오디션에서는 아버지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한다. 오디션에서 보여준 연기가 진짜라면, 리타와의 연습은 무엇이었을까? 필요하지 않은 연기를 연습한 까닭은 무엇일까?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이런 질문은 확실히 어리석은 것이다. 사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감히 추측하건데, 이 영화를 수입, 배급한 회사가 이 장면을 삭제하고 심의에 넣은 것도 아마 ‘설명이 되지 않으므로 쓸데없는 장면’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놓고 생각하면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의 ‘클럽 실렌시오(Silencio)’가 떠오른다. “밴드는 없다”고 외치는 사회자,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이)는 여가수, 그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베티와 리타. 거짓으로 위장한 쇼는 베티의 거짓 연기 혹은 거짓 연습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중요한 질문, 즉 영화 이미지의 증명 가능성에 대한 의심과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베티의 두 가지 연기 모두 결코 빼놓고 지나갈 수 없는 장면인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제작되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었다. 처음엔 ABC TV 미니 시리즈로 기획되었지만, 제작 도중 프로젝트가 백지화되자 프랑스 영화제작사의 도움을 받아 영화로 재구성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극장에서 개봉시에 볼 수 있는 것은 창작자의 의도가 훼손된 <멀홀랜드 드라이브>이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영화가 중요한 장면이 삭제된 채로 개봉되었다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한 씬을 뭉텅 들어낸 국내 배급사의 결정은,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송은경 | 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유토피아를 향한 첫번째 여행


왜 영화의 정전(canon)이 필요한가? 왜 최고의 영화들을 시네마테크는 선정하는가? 왜 걸작선의 분류가 필요하고, 작품들을 상영하려 하는가? 시네마테크의 취향을 보여주려 함은 아니다. 영화의 과장된 지식과 정보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함도 물론 아니다. 평론가인 조나단 로젠봄이 ‘영화 정전의 필요성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했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가 영화의 정전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는다면 대학의 칠판이나 학생들이 읽는 영화 교과서, 혹은 케이블 채널의 프로그램에 기재된 목록들로, 혹은 박스오피스 성적의 결과로 영화들이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네마테크가 정전의 목록을 만드는 것은 앤드루 새리스가 1960년대에 영화의 판테온을 세우려 했던 것과는 다른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영화의 위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영화의 정전이란 높은 가치를 지닌 예술 작품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작품이 정전에 포함될 것인가는 논쟁적이다. 선정자들의 영화에 대한 판단과 취향, 선별의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제임스 아제, 마니 파베르, 앙드레 바쟁, 폴린 카엘, 피터 보그다노비치, 앤드루 새리스, 로저 에버트, 조나단 로젠봄, 하스미 시게이코 등이 선정한 다양한 목록들이 있다. 이미 폴 슈레이더는 영화 정전을 위한 흥미로운 7가지 표준을 제시한 바 있다. 아름다움, 기묘함, 형식과 주제의 단일성, 전통, 반복 가능성, 관객들의 참여, 모럴리티 등이 어떤 작품이 정전인가를 결정하는 표준들이다. 평론가인 애드리안 마틴 또한 세 가지 정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첫째, 스타워즈 정전. 대중적이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들의 목록이다. 둘째, 시민 케인 정전. 1950년대와 60년대의 아트하우스와 누벨바그 시절에 비평가들이 구축한 오래된 정전이다. 셋째, 키아로스타미 정전.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정전에서 결핍되고 누락된 영화들을 보완한 새로운 정전을 말한다.

살아남은 영화들은 오직 그 작품에 속하는 이중적인 시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르게 된다. 이중적인 시간이란 곧 작가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을 의미한다. 영화의 정전을 만드는 것은 그런 시간들에 간섭해서 과거의 작품에 현재의 생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개관 10주년을 맞아 시네마테크가 선보이는 ‘100편의 시네마 오디세이’도 그런 이유 때문에 시작되었다. 이 목록들이 그럼에도 결핍과 불완전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하고 싶다.


‘유토피아로의 여행’이라는 부제가 딸린 첫 번째 여행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은 20세기 초두에서 21세기의 시작에 나온 8편의 영화들이다. 유토피아는 단지 알려진 공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간 바깥에 존재하는 곳이다. 유토피아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만족스럽지 못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끈다. 영화는 그런 점에서 비록 공포와 비극을 수반할지언정 언제나 유토피아로의 여행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에이젠슈테인과 동시대의 작가이지만 세계 영화사의 정전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보리스 바르넷의 아름다운 작품 <저 푸른 바다로>(1933)가 보여주는 세계가 그러하다. 세계영화사의 정전에 주로 몽타주 학파들의 감독들이 기재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자면 보리스 바르넷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이다. 두 선원과 해변의 여인의 사랑의 트라이앵글을 그린 <저 푸른 바다로>는 유토피아적인 세계로의 여행을 다룬 내용만큼이나 토키의 여명에 새로운 미학적 여정을 시도한 작품이다. 동시대 장 비고의 <라탈랑트>(1934), 루이스 부뉴엘, 살바도르 달리의 <황금시대>(1930)와 견주어 볼 만한하다. 무성영화 시대의 도상을 유지하면서 순수하고 단순한 사랑과 발견의 이야기가 감미롭다.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작가들, 르네 클레르, 자크 타티, 장 르누아르, 혹은 오타르 이오셀리아니의 세계를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지도가 유토피아라는 땅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지도를 들여다 볼 가치란 전혀 없다’고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지난 세기는 한 때 유토피아의 꿈을 간직했지만 실패로 끝난 역사이기도 했다. 찰리 채플린은 언제나 침대 머리맡에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두었다고 한다. 이 단순한 습관은 채플린이 빈곤과 궁핍 속에서 자라난 자신의 유복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환경을 평생 잊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황금사냥에 나선 사람들의 정신 이상적 행동을 코미디로 극화한 <황금광 시대>(1925)에서 폭소를 유발하는 것이 그런 배고픔이다.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비극이 도리어 웃음의 정신을 자극해 준다. 생각건대 웃음이란 곧 반항의 태도인 까닭이다. 우리들은 자연의 위력이라는 것 앞에 서서 자신의 무력함을 웃을 수밖에 없다. 웃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채플린은 통렬한 비극의 기록에서 희극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찰리는 낡아빠진 헌 구두 한 짝으로 저녁 식사를 때운다. 그는 정성들여 요리한 구두를 식탁에 내놓고는 맛스런 스파게티라도 먹는 듯 구두끈을 음미하고 고급 생선 요리처럼 구두 밑창을 접시에 올려놓고 생선 가시를 발라가듯 천연덕스럽게 못을 먹어치운다. 터무니없는 상상 불가능한 연출이지만 이보다 더 강렬하게 빈곤을 표현한 장면을 찾기 힘들 정도로 지극히 사실적인 장면이다. 롤랑 바르트의 지적대로 그는 ‘허기의 작가’로 언제나 배고픔을 과장되게 표현했다. 그는 배고픔과 허기를 영화에 담아낸 거의 유일한 예술가였다.


감동적일수록 더 웃겨야만 한다. 채플린의 이러한 원칙이 후기의 걸작 <독재자>(1940)에서도 활용된다. 작은 유태인 이발사 찰리가 자신과 닮은 독재자 힝켈(히틀러를 희화한 인물이다)을 대신한다는 간단한 이야기로 나치의 살인광증을 조롱하는 코미디다. 채플린이 1인 2역을 소화한 ‘찰리-힝켈’은 실제로 작은 차이를 지닌 인물로 사람들에게 오인된다. 채플린과 독재자 히틀러, 둘은 콧수염만큼이나 서로 닮았지만 그로부터 엄청난 거리를 지닌 다른 상황, 즉 웃음과 공포가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채플린은 독재자를 조롱의 대상이나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막스 피카르트가 ‘우리 안의 히틀러’라 말했던 것처럼 채플린은 사회와 시대, 심지어 평범한 사람들 안에 독재자와 살인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그가 영화로 탈구축을 시도하려 했던 것인 그러한 ‘우리 안의 히틀러’이다. 7시간 반에 달하는 대작 <히틀러>(1977)에서 지버베르그는 히틀러의 성공이 대중의 시대, 민주주의의 시대에 호소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는 히틀러가 독일 대중의 비합리성에 철저하게 호소했기에 히틀러를 이해하고, ‘우리 안의 히틀러’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비판의 도구가 아니라 그들의 언어를 빌려오는 것이 필요하며, 적들의 도구로 공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화와 비합리성의 권능을 환기시키는 것으로만 히틀러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다. 아우슈비츠의 통계학, 나치 경제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으로는 히틀러와 싸울 수 없다. 차라리 리하르트 바그너와 모차르트를 끌어들여 싸워야만 한다. 지버베르그가 상정한 것은 그래서 채플린과 마찬가지로 개인으로서의 히틀러는 아니었다. 그가 고민한 ‘우리 안의 히틀러’는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단지 히틀러가 우리를 만들었듯 우리가 히틀러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우리 모두 또한 잠재적인 파시스트적 요소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히틀러는 우리 자신 안에 그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정보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그런 의미이다.


더글라스 서크는 전쟁의 비극에서 가장 멜로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1958)는 미국영화로서는 드물게 패전국인 독일의 입장에서 전쟁의 비참을 그린 작품이다. 1944년 이른 봄의 러시아 전선. 독일군 병사 에른스트는 삼주의 휴가를 얻어 2년 만에 고향 베를린에 돌아온다. 그러나 도시는 이미 폐허가 되어버렸고 부모님의 행방도 묘연해 망연자실한다. 가까스로 어린 시절의 여자 친구 엘리자베스와 재회하고, 이내 서로 마음이 끌린 둘은 결혼을 올리고 자그마한 행복에 잠긴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곧 전선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러시아 전선으로 보내진 에른스트는 전장으로 떠나기 전 아름다운 여인과 잠깐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죽음과 사랑의 끔찍한 부조화가 여기에 있다. 서크는 이 영화에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풍경과 두 연인에 주목한다. 기이한 사랑이 그렇게 시작한다. 전쟁의 와중에 연인들에게는 사랑이 허용되지 않는다. 에른스트와 엘리자베스가 레스토랑에서 잠깐의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그들의 유예된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비행기의 공습이다. 그들에게는 사랑을 나눌 장소가 허용되어 있지 않다.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린 두 연인은 공습을 받은 폐허에 절반은 화상을 입고, 남은 가지에 꽃을 피우고 있는 나무의 이미지와 닮았다. 폭격의 열이 이른 봄에 주위를 따듯하게 해서 꽃이 빨리 피었던 것이다.

또 다른 연애의 지도. 왕가위의 <아비정전>(1990)은 <열혈남아>(1987)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이자 <화양연화>(2000), <2046>(2004)로 이어지는 ‘1960년대 홍콩 삼부작’의 첫 번째 여행을 다룬 영화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라는 장국영의 대사는 이 영화의 시간성을 환기시키는데, 그렇다고 1960년대라는 시대의 고유명이 사실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왕가위는 전체적인 스타일과 분위기로 시대를 담아낸다. 당시의 체육관 매표소, 작은 매점, 오래된 코카콜라, 담배, 야간 순회의 경관의 출근부, 구식의 전화박스, 여기에 옛 음악과 댄스가 시대의 분위기를 더한다. ‘아비’라는 말 자체가 시대의 상징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전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의 사회적 문제, 청소년의 교육 문제가 당시에 주목받게 되면서 ‘아비’라는 말은 젊은이에 대한 회의적, 경멸적 표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는 또한 니콜라스 레이의 <이유 없는 반항>(1955)의 홍콩 공개시의 제목이기도 했다. 1966년의 문화대혁명, 1967년의 홍콩의 대규모 폭동 등으로 홍콩의 1960년대는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였다.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연애 감정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인물들의 모습에는 그런 시대의 애매한 분위기가 담겨 있다. 시간의 어긋남, 과거에의 후회, 연애의 파탄과 반복이라는 왕가위적 연애가 그렇게 작동한다.


여행은 그렇게 지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영토로의 일탈을 내포한다. 소요하기, 경로를 벗어난 항해, 방랑하기, 배회하기, 그리고 심지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영화-여행의 본질이다. 짐 자무쉬의 <데드맨>(1996)은 서부극의 스타일을 빌려 생과 죽음의 의미를 묻는 내면세계로의 여정을 다룬 영화다. 자무쉬의 표현을 빌자면, 이 영화의 테마는 ‘인생은 마지막이 없는 사이클’이라는 것. 전작들에서 도시의 다양한 표정을 그려왔던 자무쉬는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신비적인 대자연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데드맨>의 여행이란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역사적, 문화적 여정과는 거리가 있다. 공간을 통과하는 여정은 횡단하는 대지의 리듬에 따라 영화가 전개되고 지리적 공간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시간이 형성되는 독특한 영화 형식을 창조한다. 영화의 모두에 인용되는 ‘사망자와는 여행하지 않는 편이 좋다’라는 앙리 미쇼의 시는 이러한 여정의 독특성을 예고한다.

그리하여, 뇌와 정신의 여정이 있다. 아이덴티티, 기억, 트라우마, 혼란스런 시각으로 구성된 가장 현대적인 경향의 영화들이 그것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는 그런 점에서 진정으로 21세기의 새로운 영화다. 마치 뫼비우스 띠처럼 뒤얽힌 이 영화는 고전 영화의 선형적 논리에 의문을 가한다. 깨어나지 않는 악몽과도 같은 종결 없는 순환이 작동하고, 관객으로서 우리는 플레이, 리플레이 되는 게임에 참여하듯 영화를 보게 된다. 여기에 질문이 있다. 영화는 우리의 정신 바깥에서 발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보는 이 이미지들은 순수이 시각적인 것인가, 아니면 몸과 의식을 필요로 하는 육화된 것인가?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영화를 정신적 여정으로 이해하게 한다. 영상의 움직임이 인간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모방해 만들어졌기에 영화는 인간의 정신에 호소할 수 있다. 심리적으로 말하자면, 영화는 필름이나 화면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그 사실성을 부여하는 관객의 정신 속에 존재할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움직임의 재생산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부터 감정과 허구의 가장 정교한 단계에 이르는 정신의 기능을 재현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그런 영화의 주관적 이미지를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진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것은 일종의 마인드 게임이다. 유령적인 캐릭터들, 혹은 이미 죽었거나 거의 죽음 상태의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영화는 우리들에게 무의식을 포함한 밤의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이제 마지막 여행이 남았다. 오디세이의 귀착지에는 존 카사베츠의 <사랑의 행로>(1984)가 있다.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오손 웰즈 이래 가장 눈부신 미국의 이단적인 영화감독’이라 불렀던 카사베츠의 영화는 생전에 너무 독특해서 무시당했고, 종종 어설프고 조잡한 영화로 비판 받았다. 이미지의 연결은 불합리하고, 줄거리와 플롯은 느슨하고 인과관계는 불명확하며 인물들의 연기는 어색하고 과장스럽다. 하지만 카사베츠의 영화에 담긴 즉흥성과 서투름은 존재의 공복에 시달리며 강렬한 삶을 욕망하는 인간의 내밀한 삶의 비밀에 접근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미완성의 예술이다. 그는 완성의 작가가 아니라 ‘과정’, 혹은 ‘됨 becoming’의 작가이다. 그의 카메라는 마치 폭풍 속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프리재즈처럼 즉흥적으로 인물을 담아낸다. 그렇다고 영화 속 사건들이 실제로 즉흥적인 것은 아니다. 카사베츠는 ‘생생한 경험은 드라마틱한 경험만큼이나 관습의 산물일 수 있다’고 여겼다. 가령, 그의 영화에서 즉흥적인 것은 대사가 아니라 무대화된 연출이다. 그는 대사를 배우에게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그 역할이 무엇인지는 결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배우들의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그것을 담는 카메라가 뒤따른다. 마치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가 실제 발생하는 사건을 포착하는 것처럼 배우들의 퍼포먼스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다. <사랑의 행로>의 한 장면에서 지나 롤랜즈는 택시 운전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발 참을성을 갖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해요. 왜냐하면 내가 정확하게 지금 어디로 갈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카사베츠는 방향 잃은 사람들의 여정을 흐름으로 포착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사랑의 흐름이다. 사랑은 존재의 모든 부분을 생기 넘치게 해주는 강렬한 에너지이다. 카사베츠는 자신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자기만의 철학을 갖길 원했고, 그 철학이란 어떻게 사랑할지를 아는 것이고, 어디에서 사랑을 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분노와 적대감, 그리고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꼭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그의 영화에서 흐릿한 빛과 어둠, 화면을 파괴하는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들은 에너지와도 같은 사랑의 흔적이자 자취다. 그는 공간을 점유하는 대상과 인물보다는 그들을 감싸는 힘과 흐름, 그것의 분위기, 존재의 내적 움직임, 순간의 열정을 포착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인물들은 알코올로, 광기로, 사랑의 실패로 쓰러진다. 그들은 모두 영향력 아래에 있다. 카사베츠는 해체의 순간을 추적한다. 그는 몸을 붕괴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체는 회복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들뢰즈가 지적하듯이 앙토냉 아르토가 “나는 삶을 잃고, 모든 수단을 통해 나의 자리를 되찾으려 하는 사람”이라 말했던 것을 카사베츠에게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다. 붕괴의 지점에서 존재가 갱신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지나 롤랜즈가 놀라운 방식으로 연기하는 인물들의 상황이다. 카사베츠의 독창성은 불안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내적 여정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영화화했다는 점에 있다.

글|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