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만나다

"우리가 난잡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난잡하다"

- <솔루션>, <코메디: 다 웃자고 하는 얘기>의 김곡, 김선 감독

 

곡사가 작년에 발표한 두 개의 단편 <솔루션> <코메디: 다 웃자고 하는 얘기>는 그렇게 보기 편한 영화는 아니다. 어린아이는 문자 그대로 똥을 밥처럼 먹으며 해맑은 웃음을 짓고, 인기 없는 개그맨은 죽은 아내의 시체 옆에서 강박적인 개그를 시도한다. 곡사는 왜 이런 난감한 전략을 택한 것일까. 지난 2 23일에 진행했던 관객과의 대화 내용을 여기에 옮기니 그 답을 찾아보자.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곡사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 중에 가장 웃긴 영화이지만 동시에 무섭기도 하고 비극적인 면도 있다. 일단 두 편의 영화가 모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고 <솔루션>의 유령과 <코메디>의 시체처럼 두 편 모두 죽음이 등장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김선(영화감독): 나이가 들어서 가족 이야기에 관심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영화를 준비할 때의 상황부터 설명을 드리자면, 상업영화를 한 다음에 이제 정말 우리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모든 작업이란 게 그때까지 축적해 온 내면의 경험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쓴 것이 <코메디>였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 그리고 여러 가족들이 모여서 구성한 사회에 만연한 유령들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었다. 그건 정말 죽은 사람의 혼일 수도 있고,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압박감일 수도 있다. 사회적인 억압이나 압력들, 그런 유령들과 싸워나가는 이야기를 가족에서부터 시작해볼까 했다. 그리고 그런 어두운 존재인 유령들과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보니 코미디언이 생각났다. 어두운 존재들을 잊게 만들고, 동시에 환기시키는 사람들인 것 같다. 진짜 웃긴 사람들은 슬픔도 같이 전달하지 않나. 그들이 무대에서는 유령들과 잘 싸우는 것 같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 유령들한테 완전히 지배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패배를 인정하는 비참한 삶을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솔루션> 역시 같은 시기에 쓰였으니 비슷한 맥락의 시나리오다. 공교롭게도 <코메디>를 찍다가 전주국제영화제의 맹수진 프로그래머에게 <!!!> 프로젝트로 <솔루션>을 제안받은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서 가족과 유령이 등장하는 비슷한 느낌의 시나리오가 나온 것 같다. 그런데 <솔루션>은 좀 더 적은 예산으로 찍어야 했기 때문에 페이크 다큐 포맷을 차용했다. 그리고 이제껏 영화를 찍으며 연구 끝에 도달한 이미지들 - 무당, 유령, 박정희, , 항문 같은 것들이 총 집약된 영화였다.


김성욱: 두 작품 모두 구순기와 항문기를 다루고 있다. <코메디>에서도 계속 담배를 입에 물고 있지 않나,

김곡, 김선: 녹색, 그린(좌중 폭소).주를 마시고 뭔가를 먹는 행위도 반복되고. 담배에 불이 잘 안 붙다가 마지막에만 확 켜지는 설정 같은 것들이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솔루션>의 변 색깔은 무슨 색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푸른색이랄까(웃음).

김곡(영화감독): 굉장한 논쟁에 휩싸였던 부분이다. 보도자료에는 두세 시간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2, 3일을 싸웠다. 스탭들 역시 김곡파와 김선파로 나뉘어서 ‘리얼리즘’으로 가야할지 편하게 웃게 해야할지 나뉘었다. 김곡파는 갈색 계열만 아니면 된다는 쪽이었고, 김선은 원칙주의자였다.


김성욱: “사람 음식을 달라!”는 변짱이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강조된 대사는 아니지만 묘하게 와 닿더라.

김곡: 식변증도 사실 식인습성의 일종일 수도 있지 않나. 신체나 다름없는 거니까. 그리고 만들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다시 관객 입장에서 보니 옛날에 만들어지고 역사 속에 버려두었던 쓰레기들, 그 똥들을 우리가 먹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싸는 것의 순환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거꾸로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똥까지는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먹는 행위를 다루었는지 자문하게 되더라. 먹는다는 건 정치에서 굉장히 본질적인 행위인 것 같다. 권력이라는 건 누군가를 먹는 것이고, 많이 먹을수록 센 거 아니겠나. 오늘 보니 이런 원형적인 상징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김선: 어떻게 보면 다이어트처럼 안 먹는 게 권력이 되기도 하지만 먹는 것이 권력의 원형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먹는 것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역전되고 모순된 상태를 표상하고 싶었다. 설정이 괴팍한 만큼 형식도 재미있게 가보자는 생각으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나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프로그램들을 희화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코메디>에서는 그런 역전된 소화 상태를 극으로 풀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일상적으로 보이는 삶의 기저에 어두운 유령들이 깔려 있다는 것. 죽은 아내의 유령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웃겨야 하고, 이 세상을 웃겨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마누라까지 웃겨야 한다는 플롯을 떠올려보았다.


관객1: 페이크 다큐라는 형식이나 풍자가 담긴 영화들이 노리는 감정이 경쾌하고 통쾌한 것이라면 개인적으로 이 영화들은 난잡하게 느껴졌다. 공허하고 구차한 느낌이었다.

김곡: 일부러 난잡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숨기지도 않는다. 만약 난잡하게 보였다면 우리가 난잡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묘사하는 대상이 난잡해서 그런 것이다. 일단 세상이 똥밭이다.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난잡해진다. 굉장히 기예가 좋은 시나리오 작가나 연출이 와도 난잡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리고 리얼리티 쇼라는 형식 자체가 난잡하다. 리얼리티 쇼에서는 하나의 디테일들에 사람들이 열광한다. 무대 안과 밖이 난잡하게 섞이기도 하고, 그들의 연기 안에서 공적인 지위와 사적인 욕망이 난잡하게 섞이기도 한다. 어떻게 말하면 난잡성에 열광하는 시대라는 거다. 오히려 이 영화가 욕을 먹어야 한다면 왜 리얼하지 않느냐, 가 아니라 왜 그대로 베꼈냐는 비난을 들어야 할 것이다.


관객2: <솔루션>의 솔루션은 결국 항문으로 음식물을 흡입해서 입으로 내뱉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왜, 어떻게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김선: 우리도 고민을 많이 했던 부분이다. 똥이 밥이 되고 밥이 똥이 되는 자기모순을 묘사하는 난잡한 영화가 될 텐데, 제목이 ‘솔루션’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곡사가 말하는 솔루션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분명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솔루션 없이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코메디>의 경우에는 그곳을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인 존재에게 담배 한 대 정도가 솔루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담배가 나의 생명을 줄일지언정 지금의 안도감으로 이 비극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솔루션이 아닐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었다. <솔루션>의 경우에서는 똥인지 된장인지를 아는 게 먼저라는 느낌을 주려고 했다. 비록 주지는 못했지만 노력은 했다(웃음). 사회자까지 똥을 뒤집어쓰는 것, 누가 나쁜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는 느낌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변명처럼 애니메이션을 덧붙였는데 결과적으로 더 난잡해졌다.

김곡: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지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정치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솔루션>은 타이틀만 ‘솔루션’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선 : 처음에는 그럴듯한 저서를 남기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다면, 영화를 찍으면 찍을수록 책을 쓰는 게 아니고 춤을 추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솔루션>은 막춤, <코메디>는 살풀이 같은 것이다. 영화의 커트나 호흡감 같은 것들이 신체와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감독 일을 해가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시나리오를 쓰거나 어떤 이야기를 떠올릴 때 춤을 생각하는 버릇까지 생겼다. 감독은 글쟁이가 아니라 모션을 하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김성욱: 어쨌든 두 분이 만든 영화들 중 가장 즐거웠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 봐서 더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새로운 5년’이 시작되는데 어떻게 계속 비타협적으로 영화를 만들어갈 예정인가.

김선: 최근 많은 연락을 받았다. 지금 제한상영가를 받아서 행정소송 중인 <자가당착>이라는 영화 때문이다. 별 거 아니고 포돌이가 나와서 쥐 잡는 내용인데 두 번이나 제한상영가를 받았다. 앞으로의 5년 동안 곡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일단 제한상영가 투쟁이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는 독립영화/상업영화의 구분 없이 막 찍으려고 하는 편이다. 찍고 싶은 것을 무조건 찍어야 성미가 풀리는 사람들이라 찍고 싶은 대로 찍을 것이다. 그리고 요전에도 찍으려다가 엎어진 영화가 있는데, 그중에는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영화도 있었다. 눈치 보지 않고 찍고 싶으면 찍겠다.

김성욱: <솔루션>의 일본 제목은 <역분사가족>이라고 해도 되겠다(좌중 폭소). 오늘은 곡사의 영화를 보고 내일은 <칠레전투>를 상영하고, 모레는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다. 특정한 시대와 관계를 가진 영화들을 연달아봐서 더 의미가 깊었던 것 같다.

 

정리: 박예하(관객에디터) | 사진: 김윤슬(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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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리뷰

.......가이 매딘, 자궁의 빙하기

가이 매딘의 '겁쟁이는 무릎을 꿇는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영화감독들 뿐만 아니라 영화팬들을 몇 십 년째 사로잡고 있는 현대의 저주가 있다. 그것은, 영화 문법의 개발은 멈춰 버렸고, 더 이상 형식과 스타일의 새로움은 없으며, 모든 새로움은 이제 내러티브의 몫이 되어버렸다는 자포자기다. 누구 말대로, 더 이상 영화는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을 취하는 것이라는 저주. 가이 매딘은 이 공공연한 저주를 깜박 잊었던 작가 중에 한 명이다.

매딘은 무의식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를 통해 비춰보는 인간의 무의식이 아니라, 반대로 그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비춰보는 영화의 무의식이다. 매딘이 원시적인 옵티칼 효과, 조악한 아이리스나 이중노출, 소프트 필터, 어설픈 자막 삽입, 저감도 필름 혹은 8mm 필름에서 얻어지는 거친 그레인과 같은 초기 무성영화의 이미지로 물러선다면, 그것은 영화 자체를 그 자신의 오래된 시간, 즉 영화사조차 버려졌던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주워오기 위해서다. 그 쓰레기통이야말로 영화의 무의식이다. 이것은 마치 삶에서 잊혀졌던 사람들이 꿈을 타고 튀어나오는 것, 도시에서 사라졌던 쓰레기들이 홍수를 타고 쏟아져 나오는 것, 또한 이사하려고 가구를 옮기다가 오래전 잃었던 물건을 되찾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매딘의 영화는 신화의 영화이기도 하다. 이것은 너무나 오래되어 잊혀졌던, 그래서 그에 선행하는 어떠한 시간도 불가능한 최초의 시간에 속하는 영화다. 매딘 영화는 영화의 선사시대에 존재한다. 자궁의 빙하기. 8mm 그레인들이 눈보라치는.

그러나 그 신화엔 거주하는 자들은, 고상한 그리스 신들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것. 가이 매딘의 신화에는 아이스하키 선수들, 프로레슬러들, 점성술사나 미치광이 과학자, 음흉한 간호사들이나 가죽의상을 입은 변태들, 무엇보다도 조악한 옵티칼 효과를 입은 유령들이 산다. 꿈의 홍수를 타고 튀어나오는 것들은 짝퉁 프라이팬, 날짜가 지워진 새마을호 티켓, 코묻은 불량식품 포장지, 퇴폐이발소 언니들과 같은 쓰레기 혹은 싸구려들이지, 결코 단군, 이순신, 유관순, 대통령 혹은 영부인과 같은 거룩한 문화재 혹은 위인들이 아니다. 여기에 여타의 다른 꿈 혹은 신화 작가들과 매딘이 견지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고급신화로 꾸며지는 인간의 무의식이 아니라, 저급신화 즉 대중신화로 꾸며지는 영화의 무의식. 이것은 표현주의 카메라에 찍힌 멜로드라마, 혹은 방화가 되어버린 선데이 서울이다. 괴테 혹은 삼국유사는 그만큼 키치하지 않다. 싸구려만이 거룩해야 한다. 아마도 매딘이 정립한 가장 위대한 정식은 다음일 것이다: <영화의 무의식=대중의 신화>. 빙판을 미끄러지는 정충들은 아이스하키 선수들이다(<Coward Bends the Knees>).

만약 매딘이 언제나 키치로 신화를 꾸민다면, 그것은 기억을 잃어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싸구려만이 죽은 것이고, 잃어버릴 수 있고, 또 반복해서 잃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신화국(神話國)에 이주할 수 있는 유일한 여권이란 기억상실증이다. 신화는 기억나지 않을 만큼 기억의 끄트머리이고, 그보다 오래된 어떠한 기억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령들은 자신들이 죽은 것조차 잊어버렸기 때문에 돌아온다. 매딘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주요한 모티브는 그래서 기억의 오작동이다. 과대기억과 과소기억의 대결이 매딘의 유치뽕짝 결빙 멜로드라마를 사로잡는다. 한 여자만을 기억하는 강박적 신랑과 결혼한 것을 매번 잊어버리고 매일 결혼준비만 반복하는 바보 신랑의 쌍(<Archangel>), 복수심에 사로잡힌 메타와 바람둥이 어머니(<Coward...>)이 그러하고, 예수연기자와 장의사라는 두 형제(<Heart of the World>)도 그러하다. <Careful>은 그 중 가장 흥미로운 쌍일 것이다: 서로에게 기억상실을 요구하는 두 연인은, 사실 어머니의 자궁과 아버지의 정충에 이끌리는 과대기억 망상증자들이었다. 어떠한 경우든, 그 가능성과도 같을 “총체적 기억상실”에 이르는 것, 모든 얄팍한 기억을 휩쓸어 가는 중인 8mm 눈보라를 타고 기억의 빵구에 이르는 것, 나아가 스스로 그만큼 결빙되어 투명한 입자가 되는 것이 관건이다. 빙하기란 비기억immemory의 시대다. 하지만 바로 그 얼어붙은 것의 투명함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다. 크리스탈만이 자체발광한다(<The Saddest Music in the World>, <My Winnipeg>). 빵꾸를 통하지 않고서 우린 삶으로 돌아올 수 없다. 기억의 바닥을 치지 않고서, 우린 어느 하나 기억할 수 없다. 죽어보지 않은 자가 어찌 환생할 수 있단 말인가. 후굴되지 않은 자궁이 어찌 배태할 수 있을 것이며.

물론 이 모든 것은 매딘이 다른 풋티지 작가들과 공유하는 방법론이다. 그러나 풋티지 작가로서, 매딘의 고유성은 풋티지를 영화의 숙명으로 선언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매딘은 풋티지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반대로 영화를 풋티지로 만들고자 한다(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풋티징은 구스타프 도이치, 피터 체르카스키와 같은 오스트리아 전통에 견주어야 한다). 매딘의 가장 위대한 유머가 여기에 있다: 선사시대에 발견된 최초의 영화, 그것은 풋티지 영화였던 것이다(가장 담대한 시도는 단연 <Heart of the World>일 것이다). 어떤 영화도 원본이었던 적이 없다. 모든 영화는 풋티지 영화이며, 최초의 영화도 풋티지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영화는 태생적으로, 선험적으로 신화이며, 바로 그 신화를 통과하는 8mm 그레인들은 눈보라처럼 기억을 결빙시킨다. 신화제국, 그곳은 캐나다의 얼어붙은 두메산골, 위니펙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발명도 아닌 것처럼, 단지 발견은 아니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기억으로부터 분실되었던 8mm 눈보라는, 없던 것도 아닌 것처럼 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없으면서도 있었던 것이기에 무의식의 원소들이다. 매딘의 영화는 “영화를 처음부터 재발명하려는 시도”이고 “우주의 정중앙에 끝내 영화를 위치시키려는 경건한 신화”*다. 


김곡 / 영화감독


*Guy Maddin, "Very Lush and Full of Ostriches" in From the Atelier Tovar: Selected Writings, Coach house Books, 2003,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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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ץ�� �Хå� 2013.05.02 2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속하지만 각 사회의 발전형태에 따라 경제적

<괴물> 상영 후 김곡 감독 시네토크 지상중계

 

지난 8월 10일 존 카펜터의 <괴물> 상영이 있던 날, 국내 최고의 카펜터 팬이라 직접 시네토크를 자청했다던 김곡 감독이 극장을 찾았다. 이날의 시네토크는 그가 존 카펜터에게 바치는 애정만큼, 카펜터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자리였다. 그 이야기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곡(영화감독): 제가 마치 이 영화를 만든 감독처럼 나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다. 제가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에게 연락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카펜터 팬은 나인 것 같다’라고 하면서, 예정되지 않았더라도 꼭 좀 초대해달라고 떼를 써서 나오게 됐다. (웃음) 근데 저는 이 영화를 만든 사람도 아닐뿐더러 이 자리는 GV도 아니고, 솔직히 제가 뭔가 대답해드릴 건 없다. 여러분처럼 한명의 팬으로 와 있을 뿐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존 카펜터를 처음 만난 건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취미가 엄마가 외출했을 때 김선 감독이랑 같이 라면 끓여먹으면서 몰래 빌린 비디오를 보는 거였다. 그때도 좋아하던 작가가 몇 명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존 카펜터였다. 기억하기론 <괴물>을 보고 먹고 있던 라면을 반 넘게 남겼던 것 같다. 살이 갈라지고 하는 게 너무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제 인생을 이렇게 사로잡을 줄은 몰랐다. 그 이후 저도 모르게 친구들한테 <괴물>이란 영화 봤냐고 묻고 다녔고, 애들이 그게 뭐냐고 하면 꼭 보라고 계속 말하고 다녔다. 그때 같은 시기에 본 영화가 <비디오드롬>(1983)이었다. 그것도 아마 같은 날에, 아니면 이틀간 연달아 봤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크로넨버그와 카펜터의 팬이 됐다. 국민학교 5학년 때 크로넨버그와 카펜터가 만든 영화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 유년시절은 몇 명의 작가에게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게 존 카펜터, 데이빗 크로넨버그, 브라이언 드 팔마였다. 그중에서도 카펜터의 <괴물>이란 영화는, 그 영화가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마음속 깊이 나를 사로잡는, 매순간 나를 따라다니는 영화다. 그런 영화는 당연히 몇 편 안 된다. <괴물>은 그런 영화들 중 한 편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도둑이 될 수 있다면 세상에서 훔치고 싶은 단 하나의 네거티브 필름은 <괴물>이다. 저한테는 우상 같은 영화고, 거의 종교나 다름없다. (웃음)

 

 

존 카펜터 감독은 UCLA 영화학교 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각본가로도 활동했고, <다크 스타>(1974)라는 황당무계한 영화를 첫 번째 장편으로 만들었다. 이후 1978년 <할로윈>이라는 영화로 전 세계를 강타한다. <할로윈>은 촬영을 2주 만에 끝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찍은 영화다. <할로윈> 다음에는 <안개>(1980), <이스케이프 프롬 뉴욕>(1981) 등의 작품이 있다. 존 카펜터는 공포영화 전문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렇진 않다. 카펜터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는 하워드 혹스다. 그리고 하워드 혹스가 제작하고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1951년도의 <괴물>이 있다.

혹스와 카펜터의 <괴물>은 존 캠벨의 <Who Goes There>이라는 단편 소설이 원작이다. 50년대 매카시즘 열풍 때문에 이런 소설들이 무더기로 나오기 시작한다. 혹스는 이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를 만든 것이다. 카펜터는 혹스의 <괴물> 팬이었는데, 시나리오를 받고 고민을 했다. 혹스의 영화처럼 그대로 만들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혹스의 <괴물>은 카펜터의 <괴물>과는 달리 믿음의 분기에 대한 성찰이 이분법적이었다. 외계인이 한명 떨어지는데, 그 외계인은 우리의 과학적인 발견이니까 보호해야 한다는 과학자 측, 그래도 죽여야 한다는 군인 측, 양자의 구도로 나뉜다. 전형적인 좀비적 구도다. 재밌는 건 혹스의 <괴물>은 괴물에 대한 연출이 굉장히 클래시컬하다는 점이다. 키 큰 거인처럼 묘사되는 게 전부다. 하워드 혹스와 크리스찬 니비는 공포물을 만들기보단 폐쇄 공간 드라마를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다. 카펜터의 <괴물>과 혹스의 <괴물>은 크리쳐에 대해서도 많이 다르다. 혹스의 영화는 아마 돈 시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혹스의 영화에선 크리쳐가 수동적인 식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복제라는 개념이 없었다. 피를 빨리면 그냥 죽어버린다. 근데 존 카펜터는 많은 해석을 가해서 공기감염을 접촉감염으로 바꾸고, 식물에는 없는 흡수의 내장을 만들었다. 정리하자면, 혹스의 <괴물>을 원작으로 봤을 때 카펜터의 <괴물>에서는 인물들의 내분이 여러 갈래로 붕괴되고, 흡수, 동화, 피와 내장의 개념이 들어온다. 즉 카펜터는 인간의 분열에 더 집중하고, 인간의 분열을 가속시키는 복제 개념을 들여와 진정한 전염병을 만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느낌은 눈에서 온다. 하얀색의 가장 차가운 눈, 우리의 시야를 불투명하게 가리고 모든 걸 희미하게 만드는 설원, 그곳에서 고립된 사람들. 이걸 제일 좋아한다. 그리고 가장 차가운 것 속에 가장 뜨거운 것이 있다. 대표적인 장면이 노르웨이 캠프에서 피가 얼어붙은 장면이다. 가장 뜨거운 것이 동결되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녹는 순간,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차가움이 인간의 불신을 이끌고 뜨거움이 괴물의 모방을 이끈다. <다크 스타>부터 최근작까지 카펜터의 영화는 항상 내부와 외부의 구도로 진행된다. 혹스의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구도다. 내부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있고 외부에서 무언가가 침입하는데, 둘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이 없어도 내부에서 뭔가 교란이 일어난다. 마치 뚜껑을 열지 않아도 냄비 안의 물은 흔들리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은 아니다. 밖에서 안으로 세균이 침투해오고 잔상이 남지만, 그것을 어떻게 추적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체들이 서로를 파괴한다. 자가전염, 자가면역증세 같은 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건 매카시즘 열풍에 저항했던 많은 공포영화 작가들이 선호했던 구도이기도 하다. 여기선 심지어 밖에 뭐가 있는지조차도 몰라야 자가면역이 세진다. 항원 식별이 안 되니까 항체끼리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다. 맥크래디, 클라크, 차일즈의 삼파전에서 괴물은 그저 보조를 맞출 뿐,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인간의 불신이다. 존 카펜터는 까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에이즈나 바이러스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바이러스를 목전에 둔 인간성에 대한 영화라고 이야기했다. 자기가 진짜로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문제는 어디 있는가’, 즉 문제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문제가 어디 있는지를 못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클라크 같은 경우인데, 클라크는 사람보다 개를 좋아하는, 따뜻하면서도 한편으론 적대적인 캐릭터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클라크는 사람이었고, 맥크래디는 살인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자가면역에 빠진 면역계이기 때문에 법은 무너지고, 살인도 무색한 상황이다. 또한 차일즈라는 캐릭터도 재밌다. 맥크래디와 대립을 이루면서 끝내 살아남는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너무 좋다. 혹스의 원작 영화는 신나게 끝나는 반면, 존 카펜터는 우수에 찬 엔딩으로 끝난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뭔 일이 일어나는지 보게.”

 

카펜터는 몽타주를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빠르게 가면서 뿜어내는 소비에트 몽타주고, 또 하나는 어둠속으로 묻히게 하고 서스펜스를 주는 독일 표현주의 몽타주다. 그리고 자기가 <할로윈>에서 썼던 것은 독일 표현주의 몽타주라고 한다. <할로윈>은 존 카펜터를 전 세계에 알린 영환데, 살인이 일어나는 장면은 여타 지알로 필름과 비슷하다. 슬래셔 필름과 그다지 다를 바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말로 무서웠던 건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카메라였다. <할로윈> 같은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카펜터는 진짜 공포의 성질은 단지 피가 많거나 잔인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작가는 정말 별로다. 우리가 공포영화 거장이라고 생각하는 감독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다들 심오한 피의 철학, 본다는 것과 안 본다는 것, 외부와 내부에 대한 철저한 존재론을 갖고 작업한다. 마리오 바바, 다리오 아르젠토, 존 카펜터 등의 작가들에게서 강력하게 나타나는 시간관이 있는데, 카펜터의 경우는 안 보인다는 것이다. <할로윈>의 마이어스가 딱 좋은 옌데, 안 보인다는 게 단지 어두워서 안 보인다는 게 아니다. 안 보이는 건 보이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다.

 

 

<할로윈> 바로 다음 작품 <안개>에서는 불투명한 안개가 나오는데, 거기에다가 존 카펜터가 추가했던 건 안개가 빛이 난다는 거였다. 안개는 너무 잘 보여서, 눈이 부셔서 안 보인다. 가장 불투명한 것이 뭔가를 숨기고 있지만 사실은 숨기고 있지 않은 거다. 왜냐면 그 자체로 발광하기 때문이다. 안개는 그 자체로 너무나 빛이 나고, 우리는 그 빛을 따라가야 악의 실체를 알게 된다. 이 관념이 카펜터의 후기작을 점령하는데, 영화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빛’에 악마가 숨어 다니게 된다. 존 카펜터의 인터뷰에 의하면, 인간에게 가장 크게 운명 지워진 건 우리는 우리의 신체 안에 갇혔다는 것이며, 그리고 진짜 악마는 어둠이 아니라 빛에 갇혔다고 하는 것이다. 괴물의 주제도 우리 시선 속에 있는 악마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괴물은 우리 바깥에 있지 않다. 내가 저 괴물을 쳐다보는 순간 내 시선은 감염된 것이다. 어둡다고 생각한 것은 우리 시선 안쪽에 있다. 만약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저는 이 개념을 ‘투명하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투명하다는 건 안 보이지만 너무나 잘 보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다. 82년도는 카펜터에게 악몽 같은 해로, 관객도 비평가도 모두 <괴물>에 등을 돌린다. 이후 카펜터는 몇 년을 방황하고, 그 사이에 빛 속에 있는 악마를 표현하는 좋은 영화들이 나오게 된다.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1987), <매드니스>(1994) 등이 그렇다.

 

존 카펜터는 다른 공포영화 작가들과 달리 피에 별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 그리고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지각의 차원을 깊이 고민했던 작가가 존 카펜터다. <다크 스타> 때부터 그런 것 같다. 오히려 마리오 바바 같은 작가들이 피에 정말로 관심이 많았다. 두 감독의 피의 사용 방식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카펜터는 <괴물>에서 피를 단지 테스트의 용도로만 들여온다. 제작자 래리 프랑코와 존 카펜터가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가장 공들였던 것이 피 혈청 테스트 장면이다. 반드시 잘 찍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고 들어갔던 장면이고, 혹스의 원작엔 없는 장면이다. 공포 영화에선 정말 드문 장면이기도 하고, 카펜터가 피를 쓰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생각이란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카펜터를 사랑하는 비평가들도 버린 <저주받은 도시>(1995)라는 영화가 있다. 어느 날 시간이 정지하고 마을의 여성들이 동시에 임신하는데 태어난 애들이 다 외계인이다. 이 외계인들은 사람들의 생각을 조종한다. <화성인 지구 정복>(1988)에서도 외계인이 우리 생각을 조종한다. <투명인간의 사랑>(1992) 같은 경우도, 나의 존재를 정의하는 나의 생각이 투명해질 때 느껴지는 공포가 있다. 카펜터는 한 축으론 전염에 대해 다루지만 다룬 한 축으론 생각에 대해 다룬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뇌란 무엇인가’라는 주제가 카펜터의 필모그래피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정리: 송은경(관객 에디터) | 사진: 김윤슬(자원 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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