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작'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2.14 개막작: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
  2. 2011.07.27 빈센트 미넬리의 '브리가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채플린은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어머니를 봐야 하는 고통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어머니가 완전히 정신병원에 갇힌 뒤에는 경찰의 일제 단속에 걸려드는 고통을 겪었다. 그는 켄싱턴 로드의 벽을 따라 숨어 다니던 9살짜리 부랑아였던 것이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사회의 하층계급'에 속했다. 자주 이야기되어온 그의 유년 시절을 내가 다시 언급하는 것은 절대적인 빈곤 속에 폭발적인 것이 있음을 모두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쫓고 쫓기는 영화들을 찍기 위해 키스턴 영화사에 들어가려 할 때 채플린은 뮤직홀의 동료들보다 빨리, 멀리 뛰었을 것이다. 그는 배고픔을 묘사한 유일한 영화인은 아니더라도 그것을 겪은 유일한 영화인이기 때문이다. 1914년 그의 영화필름들이 유통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전 세계의 관객들은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 프랑수아 트뤼포, 앙드레 바쟁의 <찰리 채플린> 서문에서

2012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은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시대>다. 개막작 후보로 언급된 몇 작품이 있었지만 이견 없이 <황금광시대>로 모아졌다. '이것이 영화다'라는 이번 영화제의 콘셉트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었던 까닭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1925년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 90년 가까운 시간동안 전 세계 관객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으리라. 이는 어떤 점에서 <황금광시대>가 품고 있는 현대적인 면모의 한 증거이기도 하다. 한 예로, 지금의 주류영화라는 것은 일방적인 감정 전달 방식의 드라마투르기에 목매고 있는 형국이라 할만하다. 그 훨씬 이전에 찰리 채플린은 이미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 배우이자 연출가였다.

그 중 <황금광시대>는 채플린 본인이 후세에 이름이 알려질 작품이라고 자평했을 만큼 뛰어난 영화다. 희극과는 전혀 무관한 배경과 소재를 통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는 점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금을 손에 넣겠다며 광활한 설원을 찾은 수천 만 명 모험가의 광경을 담은 첫 장면의 풀 쇼트는 확실히 비극의 오라(aura)를 군데군데 담아낸다. 추운 날씨를 못 이겨,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대오를 이탈하는 이들의 모습은 당대의 노동자 혹은 서민들이 처한 녹녹치 않은 현실을 감지케 한다.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떠돌이 역시 그런 모험가 중 한 명이지만 특유의 우스꽝스러운 복장 - 중산모와 콧수염과 지팡이, 그리고 꽉 조인 재킷과 펑퍼짐한 바지 - 덕에 처음부터 비극적인 요소를 눈치 채기가 쉽지 않다.

서민의 모습을 염두에 둔 떠돌이의 복장은 그 자체로 희극의 소재지만 고단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장치로 고안됐다는 점에서 찰리 채플린이 가지고 있는 웃음의 철학이 농축된 미장센이다. 이에 대해 채플린은 <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 My Autobiography>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역설적이지만, 한 편의 희극을 창조함에 있어 그 희극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이용되는 것은 비극성입니다. 희극성이라는 것이 반항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전지전능한 자연 앞에 선 우리의 미약함을 발견하고 취할 수 있는 대처 수단이란 웃음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니면 미쳐버리고 말겠지요." 그러니까, 비극적인 떠돌이의 모습을 통해 많은 웃음을 자아내는 채플린의 영화 혹은 연기는 웃음과 눈물이 결코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원초적 감정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다.


<황금광시대>에 대해 가장 많은 이들이 언급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헌 구두짝을 삶아 먹는 장면이다. 설원을 헤매던 중 길을 잃고 찾아간 외딴 집에서 떠돌이는 어느 모험가를 만나지만 이들은 먹을 게 없어 굵어죽기 일보직전이다. 이때 떠돌이는 꺼진 등의 양초를 시험 삼아 씹어 먹다가 별 이상이 없자 구두 한 짝을 저녁식사로 해결하는 엽기적인(?) 행위를 선보인다. 스파게티 면발을 먹듯 구두끈을 후루룩 삼키고 못이 박힌 구두 밑창은 생선 가시를 골라내듯 발려 먹는데, 이 장면이 제공하는 웃음의 이면에는 인생역전을 꿈꿨다가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신세로 떨어진 보통사람들의 애환이 그림자처럼 엎드려있다. (촬영에 쓰인 구두는 감초로 만든 것이었다. 해당 장면의 촬영이 끝난 후 채플린은 3일 동안 복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웃음과 눈물의 밀접한 관계성을 기막히게 살려내는 찰리 채플린의 감각은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수인 아버지와 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각각 알코올중독과 정신분열을 겪는 부모 밑에서 지독한 궁핍과 허기에 시달린 불우한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다. 열 살 때 아동극단에서 탭댄스를 배우고 무대에 서게 되면서 그는 희극의 즐거움을 알게 됐는데 <황금광시대>에는 그런 경험의 소산이라 할 만한 장면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여인 조지아(조지아 헤일)와의 식사 장면에서 떠돌이가 그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두 개의 빵에 포크를 꼽아 탭댄스를 추는 장면이다. (이에 대한 당시 관객들의 반응이 얼마나 열렬했는지 극장 측은 이 장면을 연이어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고 한다.)


결국 현실의 고단함을 이겨내는 것은 이를 잊게 해주는 웃음이다. 이 웃음의 정체는 혼자가 아닌 사람과 사람끼리 부딪히는 관계의 과정 속에서 생성된다. 안 그래도 <황금광시대>는 떠돌이가 부자가 되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실은 조지아와의 사랑이 맺어지는 구조로 진행된다. 이는 채플린이 <황금광시대> 이후 <시티라이트>(1931) <모던 타임즈>(1936) 등에서 일관되게 역설해온 바다. 돈이 잠시간의 행복을 가져올지 몰라도 해피엔딩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 오히려 <황금광시대>에서 우연히 금광을 찾아 부자가 된 떠돌이가 가장 기뻐하는 순간도 사랑하는 여인 조지아와 맺어지는 장면에서다. 그 둘은 미국으로 향하는 뱃속에서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고 마는데 한때 잘나갔던 조지아는 밀항자 신세로 전락한 상태다. 하지만 떠돌이는 이에 개의치 않고 조지아를 받아들이며 환하게 웃음 짓는다.

<황금광시대>에 대해 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부분 때문이다. 채플린의 영화가 어필을 할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는 날로 기계화되어 가는 시대 속에서 빠르게 잊히는 인간적인 가치에 대해 역설했던 까닭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현재도 물질의 가치에 현저히 밀리고 있는 인간성의 회복을 목격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이 대다수다. 그런 까닭에 최근 영화들 역시 메시지 전달보다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전달하는 이야기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채플린이 희극과 비극이라는 두 감정의 이미지 충돌을 통한 몽타주를 구사하며 영화적으로 관객을 끌어들였다면 현대의 영화들은 전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면서 감정을 전달하는 일방향 연출에 매진하는 추세다.

장 콕토는 "채플린의 도움으로 인류는 바벨탑의 건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면서 만국공용어로 작용하는 그의 연기와 영화에 대해 극찬을 표한 바 있다. 올해 친구들 영화제의 개막작 <황금광시대>는 '희극이라는 이름의 애수'로 불리는 찰리 채플린 영화의 정수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또한 상품으로 기능하는 현대영화가 잊은 '영화란 무엇인가'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을 제공할 것이다.

글|허남웅 영화칼럼니스트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브리가둔>은 브로드웨이 히트 뮤지컬을 원작으로 MGM 스튜디오 뮤지컬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빈센트 미넬리 감독과 진 켈리의 호흡이 빛나는 영화다. 뉴요커인 토미와 제프는 스코틀랜드 산 속으로 사냥 여행을 떠났다가 고요하고 아름다운 마을 브리가둔에 도착한다. 지도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마을 브리가둔의 사람들은 친절하고 소박하며, 피오나의 동생 진의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을 한 채 단결과 화합을 중시하는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 토미는 아름다운 마을 여성 피오나와 사랑에 빠지며 이 독특한 공간의 매력을 느끼지만, 어느 날 마을의 비밀을 알게 된다. 이곳은 마녀의 주문에 걸려 100년 마다 한 번씩 하루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을이었던 것. 이 마을에서 이튿날 아침은 실제로는 100년 후의 시간인 것이다. 토미는 뉴욕의 삶에서 피오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갈등한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게어슈타커가 쓴 소설 <게르멜스하우젠 Germelshausen>을 원안으로 하고 있다. 마법에 걸린 마을이라는 모티브는 새로운 발상이었지만, 2차 대전 직후 독일의 문학적 전통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이 원작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40년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던 작가이자 작사가인 알란 제이 러너는 이야기의 무대를 스코틀랜드로 번안했으며, 파트너였던 작곡가 프레데릭 로우와의 협력으로 이를 히트 뮤지컬로 만들어냈다. 브로드웨이에서 1947년 오픈해 580회 이상 공연된 이 작품은 미국 서부 지역에서도 680회 이상의 공연 기록을 세웠으며, 1954년 영화화에 이어 1966년에는 TV 시리즈로도 만들어졌다.

영화 <브리가둔>은 뮤지컬 영화감독으로서 빈센트 미넬리의 경력이 과도기로 접어들었던 작품이다. 진 켈리와 협연한 <파리의 아메리카인>(1951)의 대대적인 성공 이후, 미넬리는 <밴드 웨곤>(1953)에서 MGM의 여성 뮤지컬 스타였던 시드 카리스를 기용했으며, 이 두 배우를 <브리가둔>의 남녀주인공인 토미와 피오나 역으로 캐스팅했다. 여기에 역시 MGM 뮤지컬에서 진 켈리를 뒷받침하는 조연으로 자주 출연했던 밴 존슨도 제프 역으로 가세했다. MGM 스튜디오의 파워는 1950년대 후반부터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던 만큼, <브리가둔>은 MGM 뮤지컬 후반기 대표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영화 <브리가둔>은 인공적인 스튜디오 세트에 재연된 스코틀랜드의 산악 지대와 브리가둔 마을의 소박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다. 신비로운 안개에 둘러싸인 마을 브리가둔과 미스터리를 숨기고 있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면면은 영화 후반부 잠시 등장하는 복잡하고 현대적인 도시 뉴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브리가둔은 기적과도 같은 곳, 또는 진정한 사랑을 에너지원으로 하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급격한 현대화와 전쟁을 겪으며 인간의 삶의 리듬이 바뀌어가고 있던 20세기 초, 브리가둔은 누구나 회귀하고 싶어 하는 하나의 이상향 또는 정신적인 낙원이다. 인간의 낭만적 본능을 일깨워주는 여러 요소들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탭 댄스를 비롯해 다양하게 등장하는 춤과 노래 시퀀스는 진 켈리 본연의 재능을 감각하게 한다. 토미와 피오나의 러브 테마인 ‘Almost Like Being in Love’은 원작 뮤지컬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도 가장 널리 기억되는 곡으로 자리매김했다.

글/ 한선희(아트하우스 모모 시네마테크 사업팀장)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