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기념 특별 좌담 - 오시마 커넥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일본영화연구자인 히라사와 고를 초청,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오시마의 세계를 깊이 탐구해 볼 수 있는 특별 강연과 좌담을 마련했다. 지난 18일 오후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와 동아시아’란 주제로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진행 하에 히라사와 고, 변성찬, 후지이 다케시, 몬마 다카시 4명의 패널이 참석한 가운데 이어진 좌담은 오시마의 현재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현장의 일부를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지금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도 진행되고 있는데 구로사와의 영화에 비하자면 오시마 감독을 이해하는 것에는 난제가 있다. 당대의 현실과 긴밀한 접속을 이뤄낸 작가였기에 지금의 관객들에게 수용의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런 난제가 역설적으로 동시대성, 현재성의 문제를 재고하게 한다. 히라사와 고는 오시마를 개인-작가보다는 ‘운동체’로 보았는데, 오늘은 그런 접속들, 즉 ‘오시마 커넥션’이라 부를법한 오시마와 동아시아라는 커넥션을 살펴보려 한다.

후지이 다케시(역사학자):
전후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살지만 아무 권리도 행사하지 못했다. 60년대 이후 재일조선인의 생활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는데,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 <교사형>의 모델이 된 이진우 사건이다. 1958년 8월에 여고생 실종된다. 전화가 와서 옥상에 가보니 여고생이 있었다. 여고생의 유품인 빗이 장례식에 배달되어 왔다. 이진우라는 재일조선인 소년이 체포당하게 되는데, 추리소설의 애독자일 것이라는 추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문학애독자였던 소년이었다. 공상했던 것을 실제로 옮긴 것이라고 하면서 사건이 성립되었다. 물증은 없었고 자백만으로 재판이 진행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한국에서도 60년 11월부터 있었는데, 4.19혁명 이후라 재일조선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62년 7월에 다시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해 11월에 사형집행이 있었다. 이진우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예술적인 상상력을 자극했다. 한국에서도 영화화할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산됐다. 아마 유현목 감독의 작품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오에 겐자부로가 이와 관련한 단편소설을 썼었다. 그는 이진우라는 캐릭터에 관심을 보였는데, 일본의 장 주네로 본 것이다. 이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 사건을 조명한 게 오시마 나기사의 <교사형>이라 할 수 있다. 나로서는 <칼리가리박사의 밀실>과 유사한 것을 느꼈다. 교육부장은 칼리가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웃음) 세트장에서 표현주의적 배경으로 연극이 이루어진다. 이진우라는 소년을 구성하는 요소를 분해해서 다시 구성하는 영화로, 역사학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소재라고 본다.

히라사와 고(일본영화연구자):
오시마와 동아시아를 생각할 때 <잊혀진 황군>은 필수불가결한 작품이다. 오시마가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은 그가 쇼치쿠 영화사를 그만두어 영화를 만들 수가 없었기에 그랬지만, 다른 한편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막 등장했기에 표현의 폭이 더 자유로웠다. <잊혀진 황군>은 전후 일본이 부흥하는 가운데에 전쟁책임을 잊고 살았던 일본인에 대한 통력한 비판을 다뤘다. 1965년에는 <청춘의 비>로 한국 고아원을, 한국에서 촬영한 스틸사진으로 <윤복이의 일기>를, 1968년에는 대동아전쟁 당시의 일본, 미국의 뉴스 영상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를, 1969년에는 모택동의 생애와 문화대혁명을 만들었다. 오시마는 일본이라는 범위에서 영화나 세계를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항상 한국을, 중국을 생각해 대문자의 일본과 민족을 비판해, 동아시아의 영화인, 지식인으로서의 영화를, 세계를 사고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몬마 다카시(일본영화연구자): 오시마를 우회로 해서 일본영화가 한국인을 어떻게 다뤘는지 말씀드리겠다. 오시마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다. 20세기 초의 일본 기록영화에서 먼저 조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을 소개하기 위한 것으로 왕실이나 아름다운 풍경들이 담겼다. 그러다가 조선인도 극영화에 등장하는데,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상호이해나 융화가 소박한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다. 크게 보면 국책영화라 할 수 있겠지만, 이 시기엔 비교적 호의적인 관점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두 가지 스테레오 타입이 생겼는데,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코미디 영화에서 실수하는 익살적인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 시기에 일본인은 조선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좋아하는 외국인 1위가 조선인이었다. 일제 침략기의 후반이 되면 황국신민으로 책임을 다하는 게 조선인에게 요구됨에 따라 국책영화에 나오는 조선인은 일본을 신뢰하고 협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일본인측의 바람이나 환상이었을 것이다. 이때까지 일본영화에서 조선인은 적대시되거나 노골적으로 차별받는 대상은 아니었다. 패전을 맞이해 그러나 영화계도 변화했다. 전쟁책임과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고, 이 점이 영화에 반영됐다. 이 시기부터 70년대, 80년대까지 한국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두 가지 생겼다. 남한이나 북한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재일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를 들자면, 재일 한국인을 올바른 성실한 사람으로 그리는 것과 반사회적인 무법자로 그리는 것이 있다. 어딘가 극단적인 모습이다.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재일조선인을 그린 것은 아마도 최양일의 <달은 어디에 떠 있나>가 처음일 것이다. 그 전까지 재일조선인은 특수한 존재였다. 오시마는 어땠는가 하면, 이러한 두 가지 입장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한국이라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매개였다. 조선이라는 것을 매개로 일본을 다시 보려고 했던 것이다. <교사형>을 통해 양쪽에 대한 비판을 봤을 것이다. 조선이나 한국은 60년대 일본인들이 잊고 싶었던 존재들이었다. 오시마는 일부러 제시를 하는 것으로 영하를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시마는 뛰어난 선동가였다. 그런 태도는 일관된 것이다. <잊혀진 황군>은 1963년 8월 16일, 즉 패전기념일 바로 다음날에 방영됐다.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에게 충격을 주기에 딱 좋은날이었다. <윤복이의 일기>가 개봉된 것은 65년 12월로, 그 직전 한일조약이 발효됐다. 이런 점에서 오시마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김성욱: 1992년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집회에서 오시마의 발언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그는 ‘일본인 제일의 결함은 우리가 과거에 다른 나라와 어떤 식으로 교류했는가를 완전히 잊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재일 한국인은 일본인의 거울이다’라고 말했다. <교사형>에서 나타나는 재일한국인의 얼굴은 그런 일본인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변성찬(영화평론가):
발표를 들으면서 한국영화에서 표상된 일본인의 모습은 어떠했는가를 생각했다. 90년대 이전까지 한국인은 착하거나 나쁜 스테레오 타입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타입 중에 굳이 깡패가 아니어도 일본인이 등장하면 뭔가 부정적인 이미지가 전부였다. 우리도 그런 문제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0년대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는 사실은 굉장히 낯설고 어렵다. 감정이입도 안되고 곤혹스러운 경험이 생각난다. <교사형>은 7년 전에 처음 봤는데, 가장 떠오르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에서 빛이 들어오는 순간이다. 중간까지는 대극점에 일본이 있는데, 마지막에 가면 일본이라는 호명이 국가로 바뀌면서 국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주인공 R이 장엄한, 영웅적인 패배를 맞는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그런 것으로 보였다. 인간의 개인적인 욕망이 범죄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국가라는 것이 그것에 대해서 처벌하거나 이럴 수 있는 것인가라는 전복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국가에 대한 질문으로 일종의 비약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오시마가 60년대 갖고 있었던 정치성의 강렬함 같은 게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후지이 다케시: 저도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마지막에 일본이 국가로 바뀌는 것은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한국이나 조선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못 벗어난 채로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조선의 아이로 죽어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양쪽에서 완전히 버림받고 죽어가는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다.


김성욱: <교사형>에는 다양한 영화적 표현방식이 눈길을 끈다. R은 일종의 산송장, 미이라에 가깝다. ‘데드 맨 워킹’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형태의 스틸사진들이 또한 활용되고 있다. 오시마는 <닌자 무예장>이나 <윤복이의 일기>에서는 완전히 정지된 이미지로 영화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했다. 연극적 재현을 스틸사진으로 병치하는 장면도 있는데, 이러한 충돌성의 느낌은 파솔리니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연극적 재연인데, 이것의 의도는 전혀 기억을 갖지 못한 R에게 기억을 환기시키기 위해 진행되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이런 퍼포먼스를 거쳐 일본인 교도관들 모두가 재일 한국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영화말미에 ‘관객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관객들도 이러한 퍼포먼스에 참여하듯이 유도한다. <돌아온 술주정뱅이>들의 후반부에서 ‘당신은 일본인입니까’라고 물어볼 때, 모든 이들이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교사형>의 마지막 장면이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R이 멈추는 그 지점에서부터 뭔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히라사와 고: <교사형>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교사형>의 예고편을 보면, 이 예고편은 아다치 마사오가 촬영했는데(그는 이 영화에서 경비과장으로 출연한다), 교사형 집행을 할 때 오미사 목에 줄을 걸고 연설하는 장면이 있다. ‘국가가 있는 한 우리는 죽을 수 없다’고 말한다. 국가가 있는 한 우리는 절대적으로 무죄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연 국가가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예고편에서 던지고 있다. 당시에 영화비평가로 모든 범죄가 혁명적이라는 테제를 제시한 사람도 있다. 이게 옳은지를 떠나서 계속 영화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형>의 마지막에서 그가 밖으로 나가봤자 국가가 있는 한 마찬가지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상징적 장면이라 생각한다. <교사형>의 이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년>에서 떠돌이 일가는 계속 경범죄를 저지른다. 어딜가나 일장기가 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떠돌이 가족에게는 사실 국가가 상관없다. 그런데도 어딜 가나 국가가 따라다닌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런 것을 더 발전시킨 것이 <도쿄전쟁전후비화>에 나오는 풍경들이다. 국가 권력이라는 것이 경찰이나 국회 같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풍경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시마가 <도쿄전쟁전후비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평범한 풍경들이다. <교사형>에서 시사했던 국가를 더 발전시켜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교사형>에서 R이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과연 새로운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멈추고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김성욱: 오시마 영화의 커넥션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1960년대라는 시점에서 보자면 동시대적으로 베트남 전쟁, 중국의 문화혁명, 그리고 한국의 4.19 등의 정치, 사회적 격변이 있었다. 또한 천황제의 문제, 과거 식민지와 관련한 문제, 운동집단의 몰락 등의 다양한 사건들이 오시마 영화에 복잡하고 모순적인 접합을 이뤄내고 있다. 이러한 접속의 방식은 무엇일까? 동시대 유럽의 파스빈더는 과거 나치의 기억과 유대인 표상의 문제, 외국인 노동자 등의 문제를 영화에 담아냈다. 오시마는 이와 유사한 작업을 했지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히라사와 고: ‘접합’이라는 표현처럼, 오시마의 영화는 개인의 작가의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다. 항상 오시마는 작업을 할 때 집단을 형성해서 작업했다. 텔레비전이든 영화든 간에. 집단 속의 다양성이 있다. 다양한 사상들이 응축되어서 작품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때그때 일하는 비평가나 각본가의 사상이 거기에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그때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순적인 접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를 찍은 것은 물론 오시마라는 감독이지만, 거기에는 그 때 당시의 운동 상황, 정치적인 상황이 논의를 통해서 어떤 방향이 생긴다. 그렇기에 충돌하는 모순이 존재한다. 오시마는 충돌을 포함해서 하나의 영화운동을 제시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시마 같은 경우는 영화적으로 보자면 쇼치쿠 시기를 작가주의 시기, 이후를 지가 베르토프 집단과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몬마 타카시:
오시마가 60년대에 찍은 영화를 논의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 원인은 영화 속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히라사와씨가 지적했듯이 집단작업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여러 가지 요소로 조립된 작품으로, 깔끔한 논문처럼 정리되기 어렵다. 이 시기에 오시마가 만든 영화는 모순을 안은 채로 그 덩어리를 그대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질문을 던지고 선동하는 측면이 있다. 김성욱씩가 지적한 것처럼 퍼포먼스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돌아온 술주정뱅이>에 나오는 ‘당신은 일본인입니까’라는 질문은 보고 있는 관객을 불안하게 하는 질문이다. <교사형>의 맨 마지막에 ‘관객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은 이미 관객이 영호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교사형>의 논의는 사형제도, 재일조선인 문제 등으로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소재는 아니다. 일본인들이 잊고 지내고, 보기 싫은 부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그런 점에선 파스빈더와 비슷하다 생각한다.

변성찬: 60년대의 오시마는 영화운동을 한다는 의식이 제작방식이나 영화에서 분명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의식> 이후 <감각의 제국>부터 보면 일정한 변화가 보인다. 히라사와 고씨는 미시정치로의 전환이라고 말했는데, 거기서 연속성을 강조하느냐 단절을 강조하느냐 라는 점은 오시마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절과 연속성, 이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히라사와 고 :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 같다. 물론 68적인 문제의식에서 본다면 <감각의 제국> 이후에 미시정치의 측면에서 오시마가 변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에도 그런 비판이 있었다. 한편에서는 <감각의 제국> 이후에도 일본에서의 대문자 정치에 저항을 하려고 했던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8년 당시에 오시마는 자기 영화에 대해서는 ‘예감의 영화’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정치나 사회가 먼저 있고, 그것을 영화가 표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오시마는 자기가 만든 영화는 영화가 먼저 앞서서 정치를 예감한다고 생각했었다. 70년대 <도쿄전쟁전후비화>는 전쟁이 끝난 지점에서 이제 영화에 대한 의미를 바꿔가려 한 점이 보인다. <그 여름의 누이>를 마지막으로 동시대를 그리는 것은 그만 두었다. 역사를 거슬러 가고 있다. 예감의 영화라는 입장에서 거슬러 올라가서 다른 각도에서 동아시아를 재검토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68전후 시기의 영화라는 것이 큰 자극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데, <감각의 제국> 등이 역사적인 재해석이라는 관점을 주고, 그런 데서 자극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고하토>는 68시기에 찍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의 영화다. <고하토> 이후라는 또 다른 흐름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리: 김수현)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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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강좌1] 일본영화계에 대한 단념, 극한의 데카당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영화사 강좌를 마련했다. 지난 14일 저녁 오시마의 가장 최근작인 <고하토> 상영 후에는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영화평론가 김영진 교수가 ‘오시마 나기사의 레퀴엠에 관하여’란 주제로 열띤 강연을 펼쳤다.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영진(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오늘 강연은 먼저 <고하토>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이야기하고, 오시마 나기사 영화의 전체적인 경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영화는 2000년에 칸영화제에 출품이 됐었는데 원래는 1995,6년에 제작하려고 했으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뇌출혈로 쓰러져서 반신마비가 되는 바람에 몇 년간 연기가 됐던 프로젝트다. 감독은 이 영화를 1999년에 완성했고, 2000년 칸에서 소개될 당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영화제를 방문했었는데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의존해 움직이던 모습을 봤던 기억이 난다. 히지카타 토시로를 연기한 비트 다케시는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 이후 두 번째로 오시마 나기사 감독과 작업한 거다. 비트 다케시와 최양일(콘도 이사미)을 캐스팅한 까닭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영화촬영 중 문제가 생겼을 때 대신 작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영화의 각본은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 나와 있는 시바 료타로의 <신센구미 혈풍록>을 토대로 했다. 사무라이들에 얽힌 많은 에피소드들 중에서 미소년 검객(카노 소자부로, 마츠다 류헤이 분)의 에피소드와 이노우에 겐자부로라는 나이든 사무라이 에피소드 두 개를 결합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원래는 이노우에와 함께 대결하러 가는 무사가 미소년이 아닌데 영화에서는 설정을 바꿨다. 이노우에는 콘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로에게 검술을 가르쳐줬던 사람인데, 이들은 이십대에 일가를 이루었지만, 이노우에는 그 후로 검술실력이 늘지 않은 채로 사십대가 되었다. 제일 어린 오키타 소지는 천재 검객이었다고 한다. 신센구미에 관한 얘기는 일본에선 굉장히 유명해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신센구미는 막부 말기에 존왕양위를 외치면서 교토에서 천왕을 위해서 일종의 치안조직처럼 활동을 한 보수적인 집단이다. 막부조직이 원활하게 가동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신 치안을 담당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좋아했고, 그 시기 사람들의 3분의 1정도가 길거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사회가 혼탁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예법이 발달한 이유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센구미는 정통 사무라이 집단이 아니다. 모집을 한 것이기 때문에 계통도 족보도 없었고 하급조직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만 공유되는 비밀인데, 이들은 신센구미 2세대이다. 원래 조장이 따로 있었는데 콘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로, 오키다 소지, 이노우에 겐자부로가 작당을 해서 조장을 죽였다. 영화의 스토리는 어떤 거대한 시스템이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시마 나기사는 왜 이 영화를 찍었는지, 신센구미 스토리의 어떤 점에 매혹되었는지가 궁금해진다. 물론 마지막에 히지카타가 벚꽃을 베는 장면에선 우리가 일본영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고, 그 점이 매혹적이기는 하다. 이 영화는 굉장히 데카당스하다. 남자 하나를 두고 남자들끼리 이렇게 질투하는 것을 처음 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감염되어 가는데, 히지카타가 벚꼿을 베는 것도 일종의 단념을 위한 행위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직에 대한 단념이기도 하고. 영화에서 미소년 검객은 기성세대의 사무라이에 비해서 굉장히 특이한 캐릭터이다. 신센구미에 입대한 목적이 없다. 단지 사람을 베어보고 싶어서 입대했다고 말한다. 콘도세대처럼 자기 나름의 명분이나 출세욕 같은 게 없다. 굉장히 유희적인 세대의 젊은이가 들어온 것인데, 이 점은 세대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00년 부산영화제에서 요모다 이누히코라는 일본의 학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이 점에 대해 “오시마 나기사가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일본사회 자체에 대한 단념이자 현재 일본영화계에 대한 단념”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오시마 나기사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일본영화의 적자는 다케시와 최양일이다. 조금 더 간다면 기요시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다케시나 최양일과 대비되는 미소년 검객은 오시마 나기사가 혀를 차는 이와이 순지 세대라고 볼 수 있다. 한 세대가 저물어서 새로운 세대가 올라오고 있는데, 그 상황에 대한 단념이라는 거다. 이런 과정을 이 영화는 굉장히 데카당스하게 보여준다. 60년대부터 오시마 나기사는 굉장히 전투적으로 영화를 찍었다. 일본사회에서 그만한 파워풀한 존재감을 지닌 감독은 없었던 것 같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을 하다가 그의 영화에 반발을 하고 나온 사람이다. 일본식 도제시스템에서는 그럴 경우는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는데, 오시마 나기사나 이마무라 쇼헤이 같은 거물들은 그들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다. 자주영화 시스템을 통해 실험적이고 힘겹게 영화를 찍었다. 영화의 화두도 시스템 내의 성과 폭력에 관한 것이었다. <백주의 살인마>를 보면 살인마를 파괴된 공동체, 실패한 역사로부터 나온 괴물처럼 묘사하고 있다. 오시마 나기사는 60년대에 사회적 균열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부분을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70년대 들어서면서 힘을 잃어버린다. 전공투의 실패 이후로 더 이상 출구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감각의 제국>을 만들 때까지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감각의 제국>의 소재인 아베 사다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한 실화인데, 실제로 로망포르노로도 만들어졌고 이와 비슷한 소재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감각의 제국>은 단념의 극단을 보여주는 영화인 것 같다. 폐쇄된 골방에서 자극적인 섹스를 하던 남녀가 퇴행해 가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게다가 성기를 절단까지 한다. 당시 오시마 나기사는 서구에서 일본의 장 뤽 고다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그런 감독이 포르노그라피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굉장한 스캔들이 되었다.

다음에 만들어진 <열정의 제국>은 개인적으로는 대형스크린으로 처음 본 일본영화였다. 당시 프랑스문화원의 특별상영회에서 영화를 봤는데 시각적, 청각적으로 굉장한 자극을 받았고, 내용도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 때부터 오시마 나기사 감독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당시에는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볼 수는 없었다. 오시마 나기사와 친분이 있었고 60년대부터 계속 주목할 만한 평론을 썼던 사토 타다오라는 일본의 원로 평론가가 김성욱 프로그래머와 대담한 것을 보면 후기작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아마도 성과 폭력이라는 틀로 일본사회에 반기를 들었던 그가 점점 자기파괴적인 쪽으로 끌리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오시마 나기사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에 대해서는 매일 먹고도 질리지 않는 일본식 두부를 잘 만드는 감독이라고 말했고,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식으로 잘 로컬화시킨 스테이크를 만든 감독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독주에 가까운 일본식 사케를 만든 게 아니었을까라는 말을 했다. 그런 점에서 “영화라는 것은 사회에 독을 조금씩 흘려넣는 일이다”라고 얘기했던 스즈키 세이준과 비슷한 태도를 지닌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 실험과 주제적 실험을 병행하면서 좌충우돌한 감독이다. 60년대 모든 시도를 다 해 보고, 70년대 들어와서는 침묵했다가 그 후에는 극한의 데카당스와 자기파괴적인 충동에 자석처럼 끌려가듯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보이는 말년의 루키노 비스콘티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소멸해가는 육체와 그 반대편에서 커져가는 관능성, 생명에 대한 열정이나 탐닉을 데카당스하게 그린다. 퇴폐미를 통해 파괴의 극점에 도달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밟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된다. 지금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투병중인데, <고하토>라는 영화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보여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60년대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찍혀져 있고 영화 중간에 코믹한 요소들도 많이 있다.

신센구미가 몰락하기 전에 이미 시스템 내에 몰락의 징조가 있었고, 히지카타는 마지막에 그것을 예감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비트 다케시가 무표정하게 얘기하면서 검을 휘두르는 장면이 좋았다. 너무 많이 본 세팅이나 스토리라면서 칸에서의 비평적 평판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요모다 이누히코라는 일본평론가의 해석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검을 든 사무라이로 일본영화계에서 거의 단독자로 살아온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말년이 되어 단념을 영화적으로 매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한계를 넘을 만큼 넘어 본 감독이 <감각의 제국>을 통해서는 실제 정사를 표현했고, 이러한 불가능한 지점들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고 나서는 추동력을 상실해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오시마 나기사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와 더불어서 정말 대단했던 것 같다. 오시마 나시사의 전성기 영화들과 후기작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니 남은 기간 동안 즐겁게 관람하셨으면 좋겠다. (정리: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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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개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오는 7월 9일부터 28일까지 살아있는 일본영화의 거장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연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군국주의 일본의 국가와 사회, 광기와 검열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한 지적인 감독으로 5-60년대 새로운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을 무렵, 가장 전위에서 서서 세계영화의 한 흐름을 주도한 감독이다. 이번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에서는 쇼치쿠 누벨바그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걸작 <사랑과 희망의 거리>, <청춘 잔혹 이야기>, 60년대 일본열도를 뒤흔든 혁명운동에 대한 성찰이 담긴 <일본의 밤과 안개>, <신주쿠 도둑일기>, <도쿄전쟁전후비화>, 그리고 혁명적인 걸작인 <교사형>과 <의식>, 재일 한국인의 문제를 다룬 <윤복이의 일기>, <소년>, 성과 범죄에 대한 센세이셔널한 작품 <감각의 제국>, <열정의 제국>, 그리고 오시마 나기사의 팬들이라면 꼭 필름으로 보고 싶어하는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와 그동안 소개될 기회가 없었던 <열락>, <일본춘가고>,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 <닌자 무예장>, <여름의 누이>, <막스 내 사랑> 등 총 22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오시마 나기사는 전후 일본의 영화 지도를 완전히 뒤바꿔 버린 영화 감독이다. 그는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전후 일본의 새로운 시대적 기운을 영화에 담아냈고, 유럽 예술과 문화, 그리고 5-60년대의 지적인 기운을 섭취 대담한 영화를 만들어낸 창조자였으며 평생 성과 폭력, 죽음 그리고 일본에서 터부시되는 이야기들과 당시의 검열을 테스트하기 위한 일련의 작품을 만들어내며 가차없이 일본의 국가와 사회를 비판한 혁명가이다. 1959년 쇼치쿠 영화사의 중견 조감독이었던 오시마 나기사는 약관 27살의 나이에 연공서열을 무시하고 <사랑과 희망의 거리>의 감독으로 발탁되어 아버지의 세대에 반발하는 새로운 영화의 물결(쇼치쿠 누벨바그)을 만들어낸다. 가난한 소년의 희망의 좌절을 그린 <사랑과 희망의 거리>, 현대적 청년들의 기성도덕에 대한 반발을 격렬하게 그려낸 <청춘 잔혹 이야기>, 오사카 빈민가 똘마니들의 삶을 그린 <태양의 묘지>, 60년대 미일 안보투쟁을 다룬 <일본의 밤과 안개> 등으로 오시마는 2차대전의 패배, 책임을 방기하는 아버지 세대에의 반발, 급진적인 좌파 세력의 옹호 등으로 일본 영화사상 이전에 없었던 놀라운 영화들을 만들어낸다. 이 과격한 주장에 움찔한 쇼치쿠 영화사는 <일본의 밤과 안개>의 상영을 중지시켰고, 오시마 나기사는 그런 회사에 반발해 쇼치쿠를 그만두고 독립 프로덕션인 ‘창조사’를 세워 독립영화 제작과 배급에 참여하기도 했다.

오시마 나기사는 이후 2차 대전 당시 추락한 미군 병사에 대한 시골 주민들의 증오를 통해 일본의 ‘범죄 행위’에 날카로운 비판을 담아낸 <사육>, 전쟁으로 인해 빈곤한 삶에 처했던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윤복이의 일기>,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 분별할 수 없는 시대의 고통과 그런 세계를 뚫고 나가려는 젊은이들의 위풍당당한 행진곡 <일본춘가고>, 그리고 두 명의 일본인 소녀를 강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1963년 사형 당한 재일 한국인 고등학생의 실화를 소재로 만든 <교사형>(1968)을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와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일본의 국가와 사회, 가족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감행한 오시마 나기사는 70년대에 들어 보다 인간의 내면에 집중, 성과 범죄에 대한 성찰과 인간이 긍정적 에너지를 표출하기 위해 성과 혁명을 결합한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1976년, 칸 영화제 감독 주간에 상영된 <감각의 제국>은 오시마 나기사의 명성과 그의 대중적 영향력을 세계에 알린 충격적인 작품이다. 그는 일본에 군국주의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1936년을 배경으로 기성의 도덕과 멀리 떨어진 채 단지 섹스와 사랑만을 추구한, 일본 연애사에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던 ‘아베 사다 사건’을 소재로 남녀의 사랑을 격렬하게, 하지만 매우 슬프게 그려낸다. 이 영화로 오시마 나기사는 재판에 회부되는 등의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2년 뒤에 만든 <열정의 제국>에서 다시 한번 섹스와 범죄에 대한 원숙한 예술적 표현을 성취,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1983년에는 데이비드 보위, 기타노 다케시, 사카모토 류이치 등 호화 배우들을 캐스팅해 일본인의 서양인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애증과 동성애를 다룬 아름다운 작품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발표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성과 정치, 범죄 등 그간 일본 사회에서 터부시되어 왔던 주제를 영화로 만들었던 오시마 나기사는 <막스, 내 사랑> 이후 근 13년간의 긴 공백을 깨고 사무라이 영화 <고하토>를 만들어 또 다른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SAC)

■ 상영작 목록 ( 22)

사랑과 희망의 거리 希望 / Street of Love and Hope
1959 62min 일본 B&W 35mm 12세 이상 관람가

청춘 잔혹 이야기 靑春殘酷物語 / Naked Youth
1960 96min 일본 Color 35mm 12세 이상 관람가

태양의 묘지 太陽墓場 / The Sun's Burial
1960 88min 일본 Color 35mm 12세 이상 관람가

일본의 밤과 안개 日本 / Night and Fog in Japan
1960 107min 일본 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사육 飼育 / The Catch
1961 105min 일본 B&W 35mm 15세 이상 관람가

열락 悅樂 / The Pleasures of the Flesh
1965 91min 일본 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윤복이의 일기 ユンボギの日記 / Yunbogi's Diary
1965 24min 일본 B&W 16mm 12세 이상 관람가

백주의 살인마 白晝 / Violence at High Noon
1966 99min 일본 B&W 35mm 18세 이상 관람가

닌자 무예장 忍者武芸帳 / Band of Ninja
1967 100min 일본 B&W 35mm 15세 이상 관람가

일본춘가고 日本春歌考 / Sing a Song of Sex
1967 103min 일본 Color 16mm 15세 이상 관람가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 無理心中日本 / Night of the Killer
1967 98min 일본 B&W 35mm 18세 이상 관람가

교사형絞死刑Death by Hanging
1968 118min 일본 B&W 35mm 12세 이상 관람가

신주쿠의 도둑일기 新宿泥棒日記 / Diary of a Shinjuku Thief
1969 96min 일본 B&W/Color 35mm 18세 이상 관람가

소년 少年 / Boy
1969 97min 일본 B&W/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도쿄전쟁전후비화 東京戰爭前後秘話 / The Man Who Left His Will on Film
1970 94min 일본 B&W 35mm 15세 이상 관람가

의식 儀式 / The Ceremony
1971 123min 일본 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그 여름날의 누이 / Dear Summer Sister
1972 95min 일본 Color 35mm 12세 이상 관람가

감각의 제국 のコリ- / In the Realm of the Senses
1976 109min 일본/프랑스 Color 35mm 18세 이상 관람가

열정의 제국 亡靈 / In the Realm of Passion
1978 105min 일본/프랑스 Color 35mm 18세 이상 관람가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 戰場のメリ-クリスマス / Merry Christmas Mr. Lawrence
1983 123min 영국/일본 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막스 내 사랑 マックス モン·アム ル / Max mon amour
1987 98min 프랑스/미국 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고하토 御法度 / Taboo
1999 100min 일본/프랑스/영국 Color 35mm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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