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자 펠레>는 19세기 말 덴마크의 집단 농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스웨덴에서 늙은 아버지와 함께 덴마크의 작은 항구도시로 이민 온 소년 펠레는 집단 농장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고향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곳에서의 삶이 척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펠레는 바다를 건너는 배 위에서 아버지에게 ‘아이들이 일하지 않고 종일 놀기만 하는 곳’을 원하지만 그의 소망은 이내 좌절된다. 그들이 도착한 농장에서 그들은 축사의 한편에 거처를 마련하고 끊임없는 노동을 부과 받는다.


19세기 스웨덴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 농업 국가였던 스웨덴은 산업혁명과 함께 봉건 제도가 붕괴되면서 농촌의 빈곤화가 일어났고 많은 스웨덴인들이 기근에 시달리다가 덴마크나 미국 등지로 이주해야 했다. 영화 속 펠레와 그의 아버지가 바로 그 스웨덴인들 중 하나이다. 영화는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덴마크 소설가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의 자전적 소설이 그것이다. 영화는 커다란 역사의 한 프레임 속에서 한 소년에게로 초점을 맞춘다.




<정복자 펠레>를 성장 영화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성장 영화가 가지고 있는 필수적인 요소를 이 영화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 영화는 인물의 입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사건과 갈등은 성장의 동력이 되고 소년과 소녀들은 점차 어른이 되어간다. 마찬가지로 소년 펠레를 둘러싼 세계도 펠레에게 성장할 것을 요구한다. 펠레가 살아가는 집단 농장은 작고 폐쇄적이지만 그 안에는 탄생과 죽음, 기대와 좌절이 충만하다. 또한 스웨덴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멸시, 집단 농장 안의 권력 구조가 속속들이 드러난다. 19세기에 이르러 봉건 체제가 무너졌지만 다시 부르주아 계급과 빈곤한 농민 계급으로 나누어진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 부유한 농장주의 위선적인 삶과 가난한 농장 일꾼들의 노예 같은 삶이 바로 그것이다. 원작 소설의 작가인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가 사회개혁을 옹호한 덴마크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소설가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성장 영화에 있어서 또 다른 요소는 조력자의 존재다. 영화에서 소년의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는 그의 조력자가 되지 못한다. 그는 너무 늙었고 글도 읽지 못하며 부당함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능하고도 슬픈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신 농장에서 함께 일하는 젊은 스웨덴 일꾼 에릭은 부당함을 참지 않고 저항한다. 소년 펠레에게 농장 바깥의 삶, 미지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도 그이다. 그는 펠레에게 자신은 뱃삯을 모으기만 하면 농장을 떠나 전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비극적인, 한편으로는 희극적인 한 사건으로 인해 무산되고 만다. 그 사건으로 인해 에릭은 정신적으로 박약 상태가 된다. 이제 더 이상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는 그는 늘 마구간 안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다. 창문이 사람이 출입하는 문과 다른 것은 안에 있으면서 밖을 보는, 전망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전망이 있었던 젊은 에릭은 더 이상 창문 밖의 세계를 정복할 수 없다. 결국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복자의 지위은 조력자 에릭에게서 소년 펠레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영화는 소년이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밤은 농장 여주인이 괴로움에 못 이겨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잠이 들지 못하고, 어떤 밤은 혼자만의 상념에 젖어 달빛을 바라본다. 그의 아버지는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한 계절이 자연의 시퀀스라면 영화는 소년 펠레가 잠 못 드는 밤에 이르러서 한 꺼풀의 성장이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삶에 무관심한 자는 불면의 시간을 결코 얻을 수 없다. 그렇기에 잠 못 드는 밤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생생한 증거가 된다. 그런 점에서 잠 못 드는 밤은 일종의 선택 받은 자의 특권이다. 그에게는 아이들이 일하지 않는 세계, 아메리카, 정복할 세계에 대한 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소년 펠레는 결국 농장을 떠난다. 그는 늙은 아버지에게 함께 떠나자고 제안하지만 아버지는 더 이상 떠돌아다닐 힘이 없다. 두텁게 쌓인 눈밭 위에서 펠레는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눈다. 4부작으로 구성된 원작 소설에는 이후의 여정을 다루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다. 영화를 보는 사람의 자유에 따라 그곳은 미국이거나 호주, 중국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고향 스웨덴이 될 수도 있다.


카메라가 덴마크의 목가적인 풍경을 원거리에서 비출 때 관객은 스크린을 거대한 캔버스 삼아, 한 폭의 풍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에 걸린 그림들을 감상하듯 장면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150분의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에 일조한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들판의 밀이 황금빛으로 익고, 눈이 쌓이고, 다시 얼었던 강물이 녹아 흐르는 동안 자연에는 갈등이 없다. 반면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들 속 인간의 삶에는 언제나 갈등과 긴장이 배치되어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이 더욱 처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손소담: 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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