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영화제에 가면 일찌감치 매진되는 영화가 있다. 유명 감독의 작품이나 이름만 들어도 알 것 같은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 혹은 해외 우수영화제의 수상작들이다. 이렇게 검증받은 작품을 영화제에서 놓치면 그 뒤 극장에서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그래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서울아트시네마가 준비했다. 극장 상영을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영화 열 두 편을 한자리에 모았다.

‘21세기 우리 시대의 영화’라. 참으로 거창한 제목이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이를 ‘동시대에 꼭 기억해야 할 영화들’이라며 특별전을 소개한다. ‘21세기 우리 시대의 영화 특별전’을 기획한 서울아트시네마는 지난 10년간 국내에서 예술적 가치에 비해 쉽게 잊힌 영화를 고이 모았다. 사실 ‘21세기 영화계에 회자되는 영화를 만나는 프로그램’은 서울아트시네마가 지난해부터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기획이다. 작년에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골라 상영한 ‘스페인 영화 특별전’부터 ‘우리 시대의 프랑스 영화 특별전’과 올해 5월에 열렸던 ‘서울아트시네마 개관 8주년 기념 영화제’가 있었다. 이어 4시즌으로 10월 9일부터 17일까지 21세기 우리 시대의 영화 특별전‘을 개최하게 된 것.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2000년대 이후에 나온 예술 영화가 상대적으로 덜 논쟁적인 것 같다. 작가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전반적인 경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기획 의도를 전한다.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관람 전부터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러닝타임 88분이 한씬으로 이뤄진 <러시아 방주>(2002)가 대표적인 예)부터 해외에서는 호평받았지만 개봉 시기가 좋지 않아 국내에선 조용히 사장되어 버린 영화가 눈에 띈다. 이들 중 <쓰리 타임즈>(2005)<브로큰 플라워>(2005)<히든>(2005)은 선착순 무료 상영한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이번 기획전을 통해 상영작들이 다시 한번 비평적으로나 대중적으로 논의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명불허전’ 21세기 영화들을 준비한 그의 바람은 간결했다. 이제 상영작 전편에 걸쳐 그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를 꼼꼼히 살펴보자.

대만판 청춘 보고서를 그리다!


●밀레니엄 맘보 Millennium Mambo
허우 샤오시엔 | 대만, 프랑스 | 2001
몽환적인 음악과 함께 터널을 걷는 서기의 뒤를 따라가는 오프닝으로 유명한 영화. 호스티스로 일하는 비키와 그의 오랜 연인 하오하오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20대 청춘의 자화상을 그렸다. 2011년의 비키가 내레이션으로 2001년의 자신을 회상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청춘들의 불안한 심리를 대변한 듯 감각적인 영상도 필견 요소.

comment 너무 유명해서 상대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품들이 있다. 혹은 무엇이 어떻게 좋은지 충분히 언급되지 않고 있는 작품들이 있다.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가 그러하다. <카페 뤼미에르>(2003) <쓰리 타임즈>(2005)와 더불어 허우 샤오시엔의 현대 3부작이라 불리는 이 영화는 빛과 시간을 이용해 부유하는 젊은이들을 포착해 낸다.

●쓰리 타임즈 Three Times
허우 샤오시엔 | 대만, 프랑스 | 2005
1966년 당구장에서 만난 군인과 한 여자의 사랑을 다룬 ‘연애몽’과 1911년 유곽 기녀와 신지식인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 ‘자유몽’, 2005년 클럽에서 만난 남녀의 초점 없는 일상을 그린 ‘청춘몽’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다. 전체적으로는 러브스토리를 담았지만 당시 억압된 사회상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comment 누가 “지난 10년간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허우 샤오시엔은 빠질 수 없는 감독이다. ‘자유몽’은 그의 영화 <해상화>(1998) 같기도 하고 ‘청춘몽’은 <밀레니엄 맘보>의 연장선 같다. 그 중 으뜸은 ‘청춘몽’인데 지금 시대를 바라보는 허우 샤오시엔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다. 그의 현대 3부작에는 모두 혼란스러워하는 젊은이들의 초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단서를 갖고 추적하라!


●히든 Hidden
미카엘 하네케 |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미국 | 2005
평범한 중산층 부부 조르주와 안나에게 어느 날 정체불명의 테이프와 쪽지가 배달된다. 어디선가 부부를 오래도록 찍은 테이프와 협박성 쪽지는 부부 사이에 불안감과 공포를 심어준다. 범인을 찾던 조르주는 결국 잊고 있던 자신의 과거와 조우한다. 관객마저 그들을 관찰하게 하는 카메라 워크가 섬뜩하다.

comment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가족에게 가해진 조그마한 위협도 상당한 폭력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 가정의 어떤 것도 잃지 않기 위해 가장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며 이 영화의 주제를 설명한 바 있다. 최근 개봉한 <하얀 리본>과 더불어 이 시대의 폭력과 윤리에 대해 성찰할 좋은 기회다.

●브로큰 플라워
Broken Flowers 짐 자무시 | 미국, 프랑스 | 2005
미래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즐기는 것이 신조인 돈 존스톤에게 열아홉 살 난 아들이 있음을 알리는 익명의 편지가 날아온다. 발신인을 찾으러 돈 존스톤은 과거의 여자들을 만나러 가지만 결국 아들에 대한 힌트는 얻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세월이 흘러 초라해진 자신을 보면서 그는 허망함과 씁쓸함을 느낀다.

comment <브로큰 플라워>는 짐 자무시 감독의 2000년대 이후 필모그래피 중 정점을 찍는 작품이다.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거장이지만 최근 들어 <커피와 담배>(2006)나 <리미츠 오브 콘트롤>처럼 대중에게 생소한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을 통해 짐 자무시 감독이 이 시대에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사나이 다시 태어나다!


●도쿄 소나타 Tokyo Sonata
구로사와 기요시 | 일본, 네덜란드, 홍콩 | 2008
평온하던 한 가정에 시련이 닥친다. 중견 기업에 다니던 남편은 실직하고 아내는 점점 일상의 권태로움에 우울해 한다. 큰아들은 미군에 입대해 이라크에 참전하겠다며 우기고, 초등학생인 막내아들은 난데없이 피아노를 배우겠다며 떼를 쓴다. 세대 간의 갈등과 권위의 상실, 소통의 부재를 함축적으로 가족 안에서 그려내고 있는 영화. 마지막 롱테이크로 담은 ‘소나타’ 피아노 연주 장면이 고난을 겪은 이들을 따스하게 위로한다.

comment ‘지금까지의 삶이 모두 꿈이고, 여기서 깨어나 다시 새로운 세계와 만난다면?’ <도쿄 소나타>는 빛과 어둠, 꿈과 현실의 경계를 통해 고독한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감독은 한 가정이 외부 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를 잘 다루고 있다. 국내 개봉시 주목받지 못했기에 재론이 필요하다.

●예언자 A Prophet
자크 오디아르 | 프랑스, 이탈리아 | 2010
이제 갓 청년이 된 말리크. 고아인 그는 정규 교육은커녕 소년원을 들락거렸다. 6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간 그에게 새로운 임무가 생긴다. 아랍인을 살해하라는 감옥 권력자(갱 두목)의 지시. 임무를 완수한 그는 점차 감옥에서의 생존법을 터득해 간다. 인물에 밀착한 카메라와 배우의 뛰어난 연기가 어우러져 감옥에서의 삶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comment 이 영화는 빛이 가장 인상적이다. 감옥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어둠이 있어 빛이 더욱 부각된다. 빛은 현실의 목표에서 해방된 순수한 상태 혹은 내면에 침잠한 인물을 표현한다. 자주 등장하는 죽은 자의 환영처럼 죽은 자와 더불어 살기 역시 이 영화의 주제다. 이는 전쟁과 테러 등 아직 청산되지 않은 현시대의 문제점을 반추한다.

●시리어스맨 A Serious Man
이선 코언, 조엘 코언 | 미국, 영국, 프랑스 | 2010
대학 교수인 래리에게 연이어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아내는 이혼을 선언하고 아이들은 사고만 친다. 심지어 교수 활동에도 위기가 닥치자 래리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 알고 싶어 신에게 물으러 간다. 하지만 그가 만난 세 명의 랍비는 우화만 들려줄 뿐 뾰족한 해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주인공이 처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실소가 나온다.

comment 일단 너무 재밌는 영화다. 코언 형제는 이 영화에서 부조리한 극에 재능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유대인 문제를 꼬집기도 한다. 성실히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닥친 악재에, 감독은 프롤로그의 우화를 통해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라’라는 유쾌한 조언을 던진다.

롱테이크를 견더라!


●제리 Gerry
구스 반 산트 | 미국 | 2002
영화 시작과 함께 두 청년이 ‘어딘가로’ 향해 황망한 사막을 걷는다. 걷다가 길을 잃기도 하고, 목마름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카메라는 한 컷당 기본 3분이 넘는 롱테이크로 이들의 모습을 묵묵히 따라간다. 대사도 적고 음악도 없다. 와이드로 잡은 화면이 대자연 속 청년들의 모습을 더욱 더 작게 만든다.

comment <제리>는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최근작 중 유일하게 개봉하지 않은 영화다. <엘리펀트>(2003)의 학생처럼 이 영화의 두 청년은 길을 잃고 방황한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자신을 형사 콜롬보에 비유해 세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유심히 관찰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제리>에서도 감독은 형사 콜롬보처럼 모르는 척 진행되는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다.

●러시아 방주 Russian Ark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 러시아, 독일 | 2002
무려 한 쇼트로 88분간 진행되는 놀라운 영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궁을 배경으로 18세기 러시아와 현재의 러시아가 교차로 등장한다. 유려한 카메라 워크를 따라가다 보면 표트르 대제가 집권하던 시기 화려한 무도회와 이제는 적막한 미술관이 되어버린 현재 궁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안내자로 나오는 유령과 주인공은 궁을 돌면서 사라져가는 러시아 예술의 정신을 그리워한다.

comment 예전에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회고전’이 열리긴 했었지만 여전히 그의 세계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아직 한국에서는 낯선 감독이기에 이번 상영회 중 유일하게 감독의 영화 세계를 말하는 토크를 준비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미클로시 얀초,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다루었던 시공간적 연속성을 디지털 카메라로 한 번에 구현해 낸다.

형식의 신선함을 느껴라!


●침묵의 빛 Silent Light
카를로스 레이가데스 | 멕시코,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 2007
보수적인 메노나이트 교도인 요한은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와 외도하면서 주체할 수 없는 괴로움에 빠진다. 메노나이트 교도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교단으로 마을 주민이 실제로 영화에 출연한다. 자연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이들을 롱테이크로 담았다. 국내에 심의 논란이 됐던 감독의 전작 <천국의 전쟁>(2005)에 비해 고요하며 정적이다.

comment 1971년생인 멕시코의 이 신예 작가는 아직 우리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카를로스 레이가데스는 화면에 자연과 빛을 담아내는 것이 특징인데, 그 세계는 더 나은 세계이자 기적의 세계다.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1954)의 세계에 접근하려는 야심 넘치는 영화다. <침묵의 빛>은 꼭 극장에서 보길 바란다. 내용보다는 풍경과 자연의 빛과 소리에 집중해 보자.

●마음 Private Fears in Public Places
알랭 레네 | 프랑스, 이탈리아 | 2006
형제 혹은 연인, 직장 상사와 부하로 얽혀 있는 여섯 명의 파리지앵이 각자 상대방과 소통하고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 연극적인 세트와 조명이 영화 속에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런 효과는 인물의 고독하고 외로운 마음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연극으로도 세워진 알렌 에이크번의 희곡을 원작으로 했다.

comment 프랑스의 거장 알랭 레네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1960~1970년대에서 멈춘 것 같다. 특히 <멜로>(1986)나 <우리들은 그 노래를 알고 있다>(1997) 이후의 알랭 레네는 분명히 다른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이번에 상영하는 <마음>을 시작으로 그의 후기작을 다시 한 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거장은 거장대로 최근에 어떤 영화를 다루고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더 차일드 The Child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 벨기에, 프랑스 | 2005
‘애가 애를 낳았다’라는 표현이 적절한 영화다. 스무 살의 청년 브뤼노는 직업도, 삶의 뚜렷한 목표도 없는 미숙한 어른이다. 뜻하지 않게 여자친구 소냐가 임신하고 아이를 낳자 그는 부담감에 짓눌려 괴로워하다 아이를 팔아버린다. 뒤늦게 그는 잘못을 깨닫고 아이를 찾으러 다니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감독은 <로제타>(1999)에 이어 시종일관 관조적인 시선으로 젊은이들을 바라본다.

comment 다르덴 형제 감독의 핸드헬드 카메라는 눈앞의 사건을 즉흥적으로 파악하는 듯하지만 거기엔 섬세한 연출이 숨어 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배우와 카메라의 공동 작업으로 뚜렷한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감독의 행보를 살펴보자. 벨기에 젊은이들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어 그런 혼란함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 이 글은 2010년 10월 13일에 발행된 영화주간지 무비위크 448호에 실린 것을 게재한 것입니다.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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