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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시네바캉스 서울

[2016 시네바캉스 서울] 주물의 매혹 - 존 카펜터의 <크리스틴>

주물의 매혹

- 존 카펜터의 <크리스틴>



영화의 도입부, 카메라는 배기음 소리와 함께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으로 안내한다. 각종 자동차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장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크리스틴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로 자신의 첫 대사를 들려준다. “어떻게 될지 얘기해 줄게. 나한테 곧 반하게 될 거야.”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크리스틴>은 사람을 유혹하는 자동차 ‘크리스틴’에 관한 영화이다. 소심한 고등학생이었던 어니는 크리스틴을 만나 그(녀)의 육체에 사로잡힌다. 크리스틴에 대한 사랑은 어니에게 강력한 남성성을 부여해 주지만 동시에 서서히 그를 비정상적인 망상과 편집증으로 몰고 가면서 기어이 스스로를 파국으로 향하게 만든다.

이 유치하고 황당한 이야기의 얼개와 개연성을 정색하고 따져 물을 필요는 없다. ‘자동차가 살아 움직이는 살인기계가 된다면 어떨까?’라는 지극히 스티븐 킹스러운 상상 앞에서 관객은 통제되지 않고 폭주하는 자동차의 난폭한 운동에 감동하고, 이를 막아 세우고 처치하기 위해 온갖 안간힘이 펼쳐지는 광경을 신나게 구경하면 된다. 더불어 이 영화에서 카펜터는 자동차의 차체를 온전히 보여줄 수만 있다면 어떠한 도착적인 장면이라도 연출해내고야 말겠다는 페티시즘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의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2.35:1의 화면비율은 크리스틴의 육신을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선택되었음이 틀림없다. 크리스틴이 부서진 자신의 부품을 자가 복구하거나,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에 이르면 그 우스꽝스러운 설정에 아연하면서도 자동차라는 주물이 내뿜는 육중한 에너지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틴>에서는 쏟아지는 액체의 이미지가 몇 차례 반복된다. 어니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 그가 들고 있던 음식물 쓰레기가 쏟아지고, 동급생과 시비가 붙는 대목에서 나이프에 의해 찢겨지는 도시락 봉지에선 요구르트가 쏟아져 나오며, 차량 추격전 끝에 크리스틴에게 포획된 상대의 자동차에서는 기름이 흘러 나온다. 물론 그 기름은 주유소를 폭발시키는 용도로 기능한다. 액체는 불완전하며 종종 파국을 가리키는 기호로서 나타난다. 액체 이미지의 반대에 위치하는 대립항에는 크리스틴을 비롯하여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존재감을 발산하는 각종 주물의 물신성이 자리하고 있다. 첫 시퀀스에서 예고되었던 대로 영화는 견고하고 매끄러운 차량의 육체에 매혹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크리스틴의 주요 살해 방식은 압사(壓死)이다. 크린스틴이 자행하는 살해 행위는 액체가 들어설 틈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지극히 금속적인 페티시즘에 빠져들게 한다.

생각해 보면 이 영화에선 인간과 인간 간의 성행위가 이뤄지지 않는다. 크리스틴의 ‘질투’에 의해 어니와 그의 여자 친구 리의 성행위가 중단되는 기이한 상황은 대표적으로 이를 나타낸다. 심지어 영화는 어니로 하여금 “차 안에선 못하겠다.”는 리의 말에 다른 장소로 가서 성행위를 진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차와 여자 친구 중 한 쪽을 선택하게끔 만든다. 성행위가 부재한 자리에는 대신 자동차라는 주물과 인간의 살갗이, 혹은 금속과 금속이 부딪혀 어느 한 쪽이 부서지는 순간의, 죽음의 성질을 닮은 파괴의 섹슈얼함이 존재한다. 어니가 선택한 것은 바로 이 파괴의 섹슈얼리티이다.



크리스틴의 매혹과 기괴한 능력은 누군가의 원한이나 사연이 덧붙여지면서 시작된 게 아니다. 크리스틴은 디트로이트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순간부터 보닛으로 노동자의 팔을 다치게 했고, 자신의 육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질식사시킨 바 있다. 크리스틴이라는 주물에 대한 매혹은 서사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화가 강조하는 주물성이 극단적으로 발휘되는 순간의 쾌감 역시 서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크리스틴이 복수를 감행하는 후반부의 장면에서, 자동차에게 추격을 당하는 이가 선택하는 동선은 하필이면 자동차가 지나다닐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다. 추격 시퀀스의 클라이막스로 부여된, 크리스틴이 부품을 파괴해 가면서 막다른 길에 몰린 인물을 살해하는 장면은 그 동선의 작위가 동원되지 않고서는 가능할 수 없는 장면이다. 여기서 카메라는 오로지 추격당하는 자의 뜀박질과 추격하는 자동차의 운동에 사로잡힌 채 상황의 핍진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내달린다. 목표물을 향해 달려가고, 끝내 마치 예정된 종착지처럼 막다른 길에 도달하여 목표물을 박살내 버리는 그 운동의 수행만이 이 시퀀스의 유일한 목적이다. 또는 불도저에 의해 크리스틴의 차체가 완전히 박살나 버리는 장면을 예로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크리스틴의 유언처럼 라디오에서 연주되는 “로큰롤은 영원히 불릴 음악” 따위의 노랫말이 담고 있는 지나친 친절함을 차치해 둔다면, 이 장면의 파괴적인 감각은 거의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영화의 서사를 작동시키는 거의 유일한 기호나 다름없던 크리스틴이 불도저에 의해 뭉개지면서 무참히 박살나 버리는 모습에서 관객은 지금까지의 서사를 완수해 버리는 파괴와 훼손의 후련한 쾌락에 사로잡힌다. 크리스틴이 움직임을 멈춤에 따라 영화도 종료된다.



정차되어 있는 자동차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고, 라이트를 켜고 대상을 향해 돌진하는 자동차의 움직임만으로 공포를 느끼게 되는 대목에 이르면 그저 한 명의 인물과 한 대의 자동차라는 단순한 조합으로 이토록 강렬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카펜터의 솜씨에 경탄할 수밖에 없어진다. 이 순간 헤드라이트는 마치 자동차의 눈을 보는 것만 같고, 터져 버린 타이어로 스멀스멀 다가오는 모습은 영락없이 장르 영화 속 악인들의 비장한 최후와 닮아 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뻔한 전개와 B급 하이틴 호러 영화 특유의 얄팍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애정을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자동차의 운동이 자아내는 순수한 활력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작에 부여된 여러 설정들을 잔가지처럼 잘라내고 밀도를 높인 각색을 어느 정도 눈감아 준다면 스티븐 킹과 존 카펜터 양쪽의 팬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흔치 않은 결과물이다.

김병규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