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6 시네바캉스 서울

[2016 시네바캉스 서울] 현대 미국의 공포를 내다보다 - 존 카펜터의 <안개>와 <뉴욕 탈출>

현대 미국의 공포를 내다보다

- 존 카펜터의 <안개>와 <뉴욕 탈출>


지금 1980년대의 존 카펜터 영화를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존 카펜터는 1980년대에 주옥같은 영화들을 만들며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와 같은 지위를 누린 감독이었다. 이 지면에서는 당시 대표작 중 <안개>(1980)와 <뉴욕 탈출>(1981)을 살펴볼까 한다. 두 작품은 각각 36년과 37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는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안개> - 미국인에게 재현된 피의 역사

시계가 자정을 알리자 작은 항구 마을은 순식간에 안개에 휩싸인다. 오늘따라 안개가 심한 걸,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도 잠시. 안개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파괴와 살인의 흔적으로 얼룩진다. 그 시각 교회에 홀로 남은 말론 신부에게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벽 일부가 갑자기 무너지더니 그 안에서 할아버지가 숨겨둔 일기장이 발견된다. 마지막 페이지에 쓰여 있는 한 마디. ‘신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사연을 밝히기 전, 존 카펜터의 작품 성향을 알고 있는 팬들이라면 <안개>의 설정이 노리는 바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존 카펜터는 당대 미국인의 무의식에 잠입해 있는 공포를 밖으로 끄집어내 구체화하기를 즐겼던(?) 감독이다. <안개>의 안개가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는 건 이 항구 마을의 100년 전 사건이다. 스페인 해적들이 가지고 있던 금을 말론 신부의 할아버지가 주축이 된 항구 사람들이 빼앗아 숨겨두었던 것. 이에 스페인 해적들의 원혼이 안개에 숨어 피의 앙갚음을 시도하는 것이다.

외부 세력에 대해 느끼는 미국의 공포는 유명하다. <안개>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터. 특이한 건 그 대상이 스페인 해적이라는 데 있다. 유령의 형태이지만, 그들이 바다를 통해 해변 마을에 들어와 이곳 주민들을 학살하는 설정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당시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 미국 역사의 기원이 가해와 피해의 대상을 바꿔 <안개>에 제시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미국이 초래한 당연한 결과이다.  

인디언에게서 뺏은 땅 위에 꽃피운 피의 역사를 미국이 개척정신으로 포장한 건 유명하다. 안 그래도 이 해변 마을에는 하나뿐인 라디오 방송이 있다. 이곳 방송을 주도하는 여자 DJ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팝 음악을 라디오 전파에 실어나른다. 자정을 밝혀주는 팝의 선율 밑에서 자행되는 스페인 해적 유령들의 폭력 행위는 개척 정신으로 숨겨온 미국 학살의 역사적 맥락을 센스 있게 우회한 설정이라 할 만하다.

<안개>가 개봉했던 1980년은 구(舊)소련과의 냉전이 한창인 시기였다. 밖으로는 핵 공격의 위협에, 안으로는 사회적 약자들의 반발에 힘을 앞세워 방어하던 시기였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안개’ 정국. 그에 대한 미국인의 공포의 기원을 존 카펜터는 <안개>를 통해 드러낸다. 피로 흥한 왕국은 피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피로 망할 수밖에 없는 법. 존 카펜터는 <안개> 이후 차기작으로 발표한 <뉴욕 탈출>에서 자유의 여신상으로 대표되는 뉴욕을 지옥으로 변모시킨다.


<뉴욕 탈출> - 감옥으로 들어간 미국 대통령

<뉴욕 탈출>을 두고 혹자는 9.11 테러를 예견한 영화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극 중 비행기가 뉴욕의 고층빌딩과 부딪히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까닭이다. 개인적으로 과장된 평가라고 생각하지만, <뉴욕 탈출>이 보여주는 것처럼 9.11 이후 뉴욕은 마냥 평화가 넘치고 예술이 넘실대는 도시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1988년, 미국 정부는 뉴욕의 범죄율이 400% 이상 증가하자 아예 봉쇄하기로 한다. 뉴욕은 이제 도시 자체가 감옥이 되었다. 그로부터 9년 후인 1997년. ‘스네이크’로 불리는 플리스켄은 한때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지금은 연방은행을 털다가 감옥에 갇힌 신세다. 그에 맞춰 에어포스원이 테러범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테러범들은 대통령 전용기를 몰고 뉴욕의 고층빌딩을 향해 자폭 테러를 감행하고 대통령은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불시착한 곳은 뉴욕. 범죄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다.

이는 꽤 상징적인 설정이다. 존 카펜터가 <뉴욕 탈출>에서 묘사하는 미국 대통령은 이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뉴욕의 수감자들에게 인질로 잡혀 벌벌 떨지를 않나, 그를 구하려는 아군은 나 몰라라 먼저 도망치기도 서슴지 않는다. 소인배 같은 대통령이라니, 백악관보다는 감옥이 더 어울려 보인다. 그런 의도였을 테다. 영화는 대통령을 구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임시로 손잡고 뉴욕에 잠입한 ‘범죄자’ 플리스켄에게 관객이 응원하게끔 이야기를 끌고 간다.

대통령을 대하는 플라스켄의 태도 역시 정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플라스켄에게 대통령은 그동안의 범죄 행적을 지우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 플라스켄에게는 대통령 구하기가 방점이 아니라 지옥 같은 이 현실을 탈출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이다. 한때 뛰어난 군인이었던 플라스켄은 어쩌다가 은행 강도로 전락했을까? 영화는 이에 대해 설명하지 않지만, 플라스켄이 악한이 아니라 그렇게 몰고 간 환경에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관객이 짐작하게끔 분위기를 유도한다.

뉴욕에 불시착하기 전, 미국 대통령은 여러 나라의 정상들과 핵 문제에 대해 논의하러 가는 중이었다. 핵 문제에 신경을 쓰는 동안 미국 내부는 범죄 문제로 완전히 곪아터진 상태다. 이의 원흉은 냉전에만 몰두하느라 정작 자국민의 안전은 챙기지 못한 대통령에 있다. 죄를 물어야 할 대상은 대통령이다. <뉴욕 탈출>의 설정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결국, 미국 대통령이 있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감옥이다!

<안개>는 에드가 앨런 포의 시 「꿈속의 꿈」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우리가 보거나 그렇게 보이는 모든것이 단지 꿈속의 꿈에 불과할까?’ <안개>와 <뉴욕 탈출>에서 존 카펜터가 묘사하는 미국의 공포는 그저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영화라는 꿈이 아니라는 얘기다. 존 카펜터가 묘사한 것처럼 현대의 미국은 여전히 외부의 공격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뉴욕은 여전히 테러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그렇게 <안개>와 <뉴욕 탈출>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현대 미국의 공포를 적확하게 꿰뚫어보는 동시대성을 유지하고 있다. 존 카펜터의 영화가 여전히 소환되는 이유다.


허남웅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