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시네클럽 활동은 1941년부터 시작했다. 나는 겨우 열두 살 소년에 불과했고, 유일한 동료는 스물다섯 살짜리 청년 조르쥬 메르시에였다.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사르당 시네마’라는 제작사를 차렸다. 조르쥬의 사촌이 소유하고 있는 차고를 빌렸고, 사르당 지역 주민들을 부추겨 주주로 삼은 뒤 지원금을 모았다. 차고에 의자를 배치하고 영사기를 들인 다음 본격적으로 사르당 주민들에게 영화를 상영했다. 처음에는 주로 16미리 영화를 상영했기 때문에 내가 영사기를 맡았지만 시네클럽이 번창하면서 사르당 지역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일주일에 네 번의 상영시간을 가졌는데, 금-토요일 밤과 일요일 오후를 활용하였다. 조르쥬가 주로 시네클럽의 책임을 맡았고, 내가 주로 영화 프로그램을 맡았었다. 나의 미숙함 때문에 때때로 엉뚱한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조르쥬는 나를 신뢰했다.

한번은 1930년대 독일 영화인 ‘베티붐의 미스터리’를 상영했는데, 영화 속에서 두 명의 흑인을 제외하고 백인 배우들 또한 얼굴에 시커먼 숯을 바르고 등장하는 영화다. 이렇듯 흑백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모조리 흑인으로만 구성된 영화는 촌구석 사르당 주민들에게 있어서 좀 무리였다. 식별할 수 있는 그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네 번째 상영한 날, 지역 주민들에게 ‘이런 영화를 다시 한번만 더 상영한다면 시네클럽이 텅텅 비게 될 것이다’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베티붐’은 관객동원에 있어서 최악의 영화가 되었다. 시네클럽에서는  일주일동안 평균 3000명 정도의 관객이 몰렸었는데 이 영화는 1800명 정도를 동원했을 뿐이다.

나는 기회를 만회하기 위해 마르셀 파뇰의 삼부작 영화를 구해 시네클럽에서 돌렸다.  일주일에 5000명의 관객이 몰려들었고, 사르당 시네클럽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당시 마르세이유에는 영화를 배급받기 위한 경로가 원활했었다. 나는 마르세이유에 있는 배급사에서 영화 카탈로그 등을 수급하여 사르당 시네필들에게 공급했고, 당시 독립 영화관들은 대형 영화관과 동일한 수준에서 보다 더 자유롭게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독일치하의 프랑스의 영화관에서는 독일의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하고, 쿼터제에 따른 영화 상영일수를 지켜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제한을 받기도 했다.

나야 물론 속이는 일에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으니, 쿼터제를 무시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고, 시네클럽 내에서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를 상영할 때는 관객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혼돈스러운 상황을 일부러 연출하기도 했다. 독일치하 프랑스의 비시 Vichy 정부를 나는 줏대 없는 작당들로 취급했고, 정부가 퍼뜨리는 친독 찬가 ‘각하, 우리가  있습니다’ 는 차마 듣지 못할 저급 노래로 치부하였다. 유태인을 ‘인류 최대의 적’ 으로 홍보하는 독일의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가 시네클럽에서 상영될 때는 순박한 사르당 지역 사람들은 곁눈질로만 쳐다보다가 ‘우리 이웃 아무개가 더 못돼 먹었던데 애꿎은 유태인을 가지고 난리람’, 이런 식으로 반응하였다. 

시네클럽의 프로그램뿐 아니라 홍보 또한 맡았던 나는, 좌석 예약제를 실시하였다. 오페라나 극장의 문화행사를 모르고 살았던 사르당 지역 주민들은 좌석을 미리 예약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시네클럽은 더 번성하게 되었다.  나의 모든 에너지는 이렇게 시네클럽에 쏟아 부어졌고, 덕분에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그중 미미 라로슈는 나의 절친이었다. 미미의 아버지 또한 레지스탕스로서, 클레르몽 페랑에서 활동 중이었다. 우리에게 페탱 (2차대전시 히틀러에 복종한 프랑스의 국방장관)은 절대적인 적이었다. 전쟁이 깊어갈 수록 사르당 주민들 또한 몰래 유태계 아이들을 숨기고 있었고, 우리의 부모님들은 대부분 비밀리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시절이었다.

미미와 나는 참 죽이 잘 맞는 친구였지만 우리 둘다 영악하기 짝이없는 청소년이었다. 사르당 촌구석에서 리버만이라는 순진하고 겸손한 유태인 친구가 있었는데, 미미와 나는 그를 천덕꾸러기로 삼아 가지고 놀았다. 우리는 그를 좋아했지만, 그의 나약함과 소심함은 견딜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런 점은 뜯어 고쳐야 한다고 믿었다. 리버만을 골려먹은 일 중 가장 최악은 다음과 같다. 할머니 집에는 몰래 도망가는 사람들을 숨겨주었던 밀실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는 그 방에 시네클럽의 멤버를 한명 숨겨놓고는 리버만에게 극우단체의 우두머리이자 반유태계 주의자인 펠푸와Pellepoix 후작이 숨어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닌게 아니라, 밀실에서는 이런 외침이 들린다. ‘펠푸와 후작, 당신이 정말 유태인을 경멸한다면 한대치세요!’, 그러면 방 속에 숨어있던 우리의 또 다른 친구는 퍽퍽 치는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들은 리버만은 거의 기절일보직전에 놓인다. 장난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이내 ‘나쁜 자식! 나쁜 자식!, 당신은 유태인들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죽이는 거야? ‘라는 외침이 들리고 퍽퍽 거리는 소리도 동시에 들린다. 리버만은 창백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좀 끔찍한 장난이기는 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리버만은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가 그를 구해주리라고 믿었다. 실제로 독일군이 사르당 촌구석까지 들이닥쳤을 때, 우리는 그를 숨겨주었고, 그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프랑스는 중학교가 4년제이다) 미미와 나는 그렇게 심한 장난질을 해대며 친하게 지냈다. 미미는 아버지가 살던 클레르몽 페랑으로 떠났고, 그러던 중 나는 나의 첫사랑, 위게트를 만나게 되었다. 위게트는 나와 미미를 동시에 좋아했는데, 미미의 부재로 인하여 그녀의 애정은 모조리 나에게로 향했다. 위게트는 나보다 세살이나 많았다. 보통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17-18세 남자 청소년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하는데, 훨씬 어린 내게 연애편지를 수두룩하게 손에 쥐어주자 나는 의기 당당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시네클럽 활동에다가 연애까지 하느라 나는 그만 중학교 졸업장은 땄지만 고등학교 입학 시험은 떨어지고야 말았다(당시 프랑스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존재했다) 결국 나는 재수를 하게 되었고 당연히 자유로운 시간은 더 많았다. 나는 공부를 마치자마자 위게트와 데이트를 즐겼고 이내 사람들 눈에 띄게 되었다. 난 사르당 지역의 유명인사였으므로 그 나이에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도 멋지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때를 맞추어, 사르당 지방에서 처녀가 임신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근친상간인지도 모를 그 사건은 사르당 지방의 카페에서 주민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지만, 사건의 내막을 밝히기는커녕 이내 흐지부지해지고야 말았다. 이상한 시절이었다. 전쟁 중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서로에게 약속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모두 동요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불안하게 이동하면서 살고 있었고, 위게트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였다. 위게트와는 그렇게 헤어져 몇 번 연통이 있은 뒤로 소식이 아예 끊기게 되었다. 우울해진 나는 고장난 자전거를 타고 배회하기 시작했고, 타이어가 낡아빠진 자전거를 끌고 7킬로미터를 꾸역꾸역 횡단하기도 하였다. 일종의 자학이었을까. 내 마음 속에 출렁이는 아픔을 그렇게라도 표현해야만 했다. 전쟁이 끝나가면서 나도 친구들처럼 사르당을 떠나야만 했다. (계속)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보러가기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