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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한국영화아카데미, 그들의 데뷔작과 만나다

우리는 어떻게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첫 영화를 만들 수 있었나 ❹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데뷔한 임상수 감독 편

 

지난 16일부터 19일까지 나흘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한국영화아카데미, 그들의 데뷔작을 만나다’라는 제명으로 영화아카데미 출신 감독 4인의 데뷔작을 상영하고 매 저녁마다 관객과 아카데미 출신 선후배 감독들이 함께 만나는 특별 대담 행사를 가졌다. 마지막 날이었던 19일 저녁에는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상영한 후, 임상수 감독과 그의 후배인 <효자동 이발사>의 임찬상 감독, <회오리 바람>의 장건재 감독이 참여하여 대담을 벌였다. 며칠 전 여섯 번째 연출작인 <하녀> 촬영을 끝냈다던 임상수 감독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입담이 눈길을 모았던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 데뷔작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과정을 간단하게 들려 달라.

임상수(영화감독): 사실은 <눈물> 시나리오를 먼저 썼는데 투자자, 제작자들로부터 거절당해서 잠시 좌절의 시기를 보냈다. 그때 극장에서 혼자 <초록물고기>를 보면서 성묘사가 강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처녀들의 저녁식사>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오랫동안 많은 독서와 취재를 했다. 자기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여자들이 이 영화를 많이 비난했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여자들이 쓴 책, 여자들이 고백한 것들에 대해서 취재를 상당히 많이 했었다.

임찬상(영화감독): 영화를 다시 봤는데 지금 봐도 그렇게 촌스럽거나 담론이 뒤떨어진 영화가 아니었다. 감독님의 다른 영화와 비교해 봐도 이 영화가 고유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계사회를 추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당시는 불편한 면도 없지 않았는데 오늘 다시 보니 너무 좋다.

장건재(영화감독): 뒤에 만드신 <바람난 가족>이 많이 생각났다. <바람난 가족>이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눈물>을 거치면서 못 다한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했던 것인지 궁금하다.

임상수: 나는 뜻대로는 안 되지만 포부, 야심이 큰 사람이다. 내 영화가 한국 사회 젊은 남녀들의 성생활 패턴의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고 우기고 싶다. 나는 상업적으로 아슬아슬한 감독이고 거대한 혁명적인 영화를 찍는 감독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영화를 찍어보려고 했는데, 결과는 잘 모르겠지만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일정 정도 영향을 미쳤다 생각한다. 가령 어린 여자들이 내 섹스는 무엇이고 내가 상대할 남자의 섹스는 뭐냐를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면 더 이상의 영광은 없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꿈꿨던 거다.

 

장건재: 당시 배우들도 이런 연기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카메라도 인물에 밀착되어 있고. 또한 당시 진희경 씨나 강수연 씨 같은 경우 자기 위치를 갖고 있었던 여배우 같은데, 프로덕션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없었는지 듣고 싶다.

임상수: 진짜 어려웠다. 여배우들이 옷을 벗어야 했는데, 제대로 된 작품에서 벗으면 괜찮지만 영화를 찍는 동안에는 그게 제대로 된 작품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불안해했다.

 

관객1: 정작 담론은 여성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지만 여자들이 대상화된다는 불편함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신선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고, 재미있게 봤다.

임상수: 여성을 대상화했다는 비판은 영화를 찍었을 때부터 들었는데,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들의 육체를 찍기 위해서도 대단히 노력했다. 그런 비판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김성욱: 노출은 약한데 카메라 움직임이 의식적으로 가릴 수밖에 없는 위치로 이동하고, 그게 오히려 더 불편했다. 검열이나 영화를 찍는 환경이 그 정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점들이 더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느낌이 있었다.

임상수: 영화를 완성했을 때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심의필이 안 나와 문제가 되었다. 위원회를 찾아갔는데 이른 아침이고 아무도 우리를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에 (웃음) 제작자였던 차승재 대표와 함께 벤치에서 술이 덜 깨 자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학생들이 고다르에 대해 열심히 토론을 하고 있더라. 상당히 미묘한 경험이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비디오 출시되었을 때 멋대로 편집된 경험도 있고. 사실 오늘 내가 완결한 것과 얼마나 다른 판본이 틀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게 한국 사회에서 사는 슬픔 중의 하나다.

 

관객2: 연구를 많이 하셨다고 했는데, 기존 영화들도 많이 연구하시는지. 그리고 야망이 크다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야망을 다하신 영화를 만드셨는지 궁금하다.

임상수: 예술가들은 다른 예술가들을 베끼는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들키지 않고 베끼는가가 관건이다. 나는 영화를 베끼지 않는다. 야망이나 야심에 대한 얘기는 간단한 거다. 나는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어떤 사회적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제 작품이 예술 작품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겠지만 위대한 예술 작품이란 당대 사람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위대한 거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한 발 끼고 싶은 욕망이 있다.

 

장건재: 혹시 필생의 프로젝트가 있으신지.

임상수: 나는 사회적인 베이스를 갖고 계속 작품을 찍어왔는데 이제는 한국 사회에 대해 그만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너무 뻔하기 때문에. 한국이란 굉장히 작은 나라인데, 거기서 태어난 예술가가 세상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인지,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는 게 정답이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얘기를 해보려고 꿈틀거리고 있지 않나 싶다.
(정리: 홍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