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간 열리는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한국 시네마테크의 미래를 본다
2010년에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 찾아온다. 2006년 시네마테크의 설립취지에 공감하고 활동을 지지하는 영화인들의 참여로 처음 열린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는 영화인들이 직접 참여해 영화를 선택하고, 관객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독특한 형식으로 매년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렸다. 시네마테크로서는 연일 매진을 기록할 만큼 ‘흥행’ 영화제이자 영화를 추천한 영화인들과 관객이 만나 함께 대화하는 소중한 자리였다. 하지만 최근 시네마테크의 안정적 운영을 위협하는 대내외적 요인이 불거지면서 과연 이 친구들을 내년에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부터 든다. 그래서 이 영화제가 시작된 이래로 염원해온 ‘시네마테크 전용관’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이 이번 영화제를 통해 시작된다. 그동안 시네마테크를 후원하기 위해 모였던 영화감독, 배우, 교수, 영화평론가 등 영화인들이 참여해 ‘전용관을 설립하기 위한 추진활동을 개시할 예정이다. 1월15일 개막식과 후원의 밤을 시작으로 막을 열어 2월28일까지 약 두달간 종로 낙원상가 4층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우리의 친구들을 내년에도 만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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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식을 빛낼 작품은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1915)다. 민완 신문기자 필립 게랑드가 전직 범죄자인 마자메트와 함께 범죄집단 ‘뱀파이어’ 일당을 추적하는 이야기며,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제작된 총 10편의 무성영화 시리즈로 당시에 대중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후 프리츠 랑, 앨프리드 히치콕, 알랭 레네, 자크 리베트,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에 영감을 주었던 이 영화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된다. 개막식에는 10편의 에피소드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에피소드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과 <전우치>(2009) 등을 작업한 장영규 음악감독의 라이브 연주로 상영된다. 그리고 매년 시네마테크가 선택한 작품을 상영하는 메인 섹션 ‘시네마테크의 선택’으로는 시네마테크가 고전영화 라이브러리로 직접 구매한 찰스 로튼의 <사냥꾼의 밤>(1955)이 새로운 프린트로 처음 소개된다. 손가락에 ‘LOVE’를 새겨 넣은 로버트 미첨의 무표정한 스틸만으로도 인구에 회자돼온 <사냥꾼의 밤>은 히치콕의 <자메이카 인> 등에 출연하며 특이한 용모로 잘 알려진 배우 찰스 로튼의 유일한 연출작이자, 누아르영화 사상 가장 개성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친구들이 올해엔 더 늘었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 직접 자신이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선택해 상영하고 작품에 대한 소개를 진행하며, 상영 뒤에는 관객과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섹션 ‘친구들의 선택’은 알 만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예매를 서두를 정도로 가장 인기 높은 파트다. 이처럼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홍상수, 류승완, 안성기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인들이 참여해 그들이 선택한 영화를 상영하고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의 선택’, 관객의 손으로 직접 뽑은 영화를 상영하는 ‘관객들의 선택’ 두 섹션은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개최된 이래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선보인 프로그램으로 올해는 더욱 많은 친구들이 참여했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예수의 사도들과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신을 담아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문제작 <마태복음>(1964, 김지운 감독의 추천), 68혁명 이후 프랑스의 절망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70년대 최고 걸작 중 한편으로 평가받는 장 외스타슈의 <엄마와 창녀>(1973, 김한민·윤종빈 감독의 추천),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1993, 박찬옥 감독의 추천), 존 워터스가 ‘영화역사상 가장 상스럽고 더러운 영화’라는 평가까지 받은 <핑크 플라밍고>(1972)의 성공 뒤 2년 만에 내놓은 그와 별다르지 않은 저예산 장편영화 <디바인 대소동>(1974, 이재용·전계수 감독의 추천), 2002년 감독 복원판으로 특별 상영되는 <아마데우스>(1984, 배우 안성기의 추천), 가족의 해체를 다루는 존 포드의 휴먼드라마 걸작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 김영진 평론가의 추천) 등도 눈길을 끈다.
영화평론가 마스터클래스와 시네클럽
시네마테크가 2008년부터 매년 구축하는 고전영화 라이브러리를 2010년에도 관객에게 처음 소개할 예정이며, ‘카르트 블랑슈-시네필의 선택’에서는 국내를 대표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과 해외 게스트로 저널리스트, 편집자, 저술가로 활동하는 영화평론가 크리스 후지와라가 초청되어 그들이 선택한 영화를 상영하고 영화비평에 대한 마스터클래스를 개최할 예정이다. 정성일은 개막작 <뱀파이어> 외에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1936), 카르멜로 베네의 <카프리치>(1969), 크리스 후지와라는 프리츠 랑의 <이유없는 의심>(1956), 존 포드의 <말 위의 두 사나이>(1961), 테렌스 피셔의 <프랑켄슈타인 죽이기>(1969)를 각각 선정했다.
한편, 시네마테크에서는 시대의 고전을 소개하기 위해 2007년부터 고전영화의 프린트를 직접 구매하는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필름 라이브러리’를 운영해오고 있는데, 2009년에는 서부극의 거장 존 포드의 걸작 6편을 구매했으며 이번 영화제를 통해 ‘존 포드 걸작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프린트를 선보인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와 <철마>(1924), <굽이 도는 증기선>(1935), <모호크족의 북소리>(1939), <분노의 포도>(1940) 등 총 8편이다. 또한 이번 영화제 기간에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젊은 친구들과 봉준호, 류승완, 오승욱 감독이 참여해 영화 연출 및 시나리오 등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네클럽’ 행사가 처음으로 열린다.(주성철)
박찬욱 감독의 추천: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
Don’t Look Now
니콜라스 뢰그 | 도널드 서덜런드, 줄리 크리스티 | 1973년 | 110분 | 미국,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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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코트를 걸친 딸아이가 강가에서 혼자 놀고 있고, 그와 멀지 않은 집에서 교회 슬라이드 사진을 꼼꼼히 살펴보던 벡스터(도널드 서덜런드)는 잔을 엎지르면서 피 같은 얼룩이 슬라이드 표면에 번지자, 불현듯 밖으로 달려나간다. 물에서 이미 죽어버린 딸을 건져올려 울부짖는 벡스터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이 인상적인 오프닝은 강박관념과 죄의식이라는 테마를 풍부한 시각적 암시와 상징으로 묘사한다. 히치콕이 할리우드에서 만든 첫 번째 영화 <레베카>(1940)의 원작자로도 유명한 다프네 드 모리에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부부는 베니스로 이사를 가 슬픔을 잊어보려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심령술사 여성과 그 언니를 만나면서 그 아픔은 좀더 불길하게 번져간다. 심령술사가 죽은 딸의 영혼과 만나게 해준 것. 이런 음울한 환상과의 조우는 맨해튼의 아파트로 이주해 한 노부부와 가깝게 지내던 <악마의 씨>(1968)의 로즈마리 부부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불길하고도 강렬한 힘을 강화하는 것은 파격적인 교차편집이다. 그럼으로써 니콜라스 뢰그는 영화 속 인물들만큼이나 관객으로 하여금 보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기묘한 마술을 부린다. 특히 두 부부의 갑작스런 정사신은 영화역사상 가장 이상하고도 매력적인 정사신이라 해도 좋을 만큼 인상적이다. 낭만의 도시로 그려지던 베니스를 시체와 유령의 도시로 만든 음습한 공기도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예상 못한 반전에 비할 바 아니지만.
홍상수 감독의 추천: <오데트>
Ordet
칼 드레이어 | 한 아그센, 크리스틴 안드레센 | 1955년 | 126분 | 덴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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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겐 농가의 둘째아들 요하네스(프레벤 레도로프 라이)는 정신이 쇠약해진 뒤 자신이 예수라고 생각하며 여기저기서 성경구절들을 인용해 설교한다. 한편, 셋째아들 안데르스(케이 크리스티안센)는 종교적으로 대립되는 재단사 집안의 딸과 결혼하려 한다. 어느 날, 임신 중이던 장남 미켈(에밀 하스 크리스텐센)의 아내가 출산 도중 의식을 잃고, 보르겐가에는 신앙의 위기가 찾아온다.
목사이기도 했던 극작가 카이 뭉크의 <말씀>을 원작으로 삼은 <오데트>는 믿음에 관한 영화다. 아버지는 요하네스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지만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주변에서는 그래도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럼 여기서 기도를 멈춘다면 그때까지의 오랜 기도는 모두 물거품이란 얘긴가. 믿음에 회의를 지닌 냉소적인 아들과 다른 신을 섬긴다는 이유로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양쪽 집안의 아버지들. 그렇게 <오데트>는 믿음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흑백 영상에다 주로 실내 공간에서 촬영했지만 그 빛과 인물이 오가는 구도는 그야말로 경건하다. 믿음 없는 세상에서 바라보는 칼 드레이어의 최고 걸작.
봉준호 감독의 추천: 존 부어맨의 <서바이벌 게임>
Deliverance
존 부어맨 | 존 보이트, 버트 레이놀스, 네드 비티 | 1972년 | 110분 |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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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자가 급류 카누 여행을 떠난다. 댐 건설로 말미암아 수면 아래로 사라지게 될 강 주변 마을에서 그들은 남자다움을 시험하지만 곧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끔찍한 악몽으로 변한다. 에드(존 보이트)가 숲에서 변태적인 마을 주민 두명에게 성폭행당하기 직전 루이스(버트 레이놀스)가 활을 쏘아 한명을 살해한 뒤부터 예기치 않은 위기가 계속되는 것.
영화는 유려한 풍경의 강 상류로 시작하지만 이내 폭파와 벌목 등 개발장면을 군데군데 삽입한다. 곧 수몰될 자연과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면서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스러져가는 인물들의 모습이 무척 상징적이다. 패기 넘치는 영국 감독이 비판적 시선으로 완성한 영화이기에 댐 건설을 둘러싼 파괴의 풍경은 ‘위대한 미국’이라는 허울 좋은 신화와 자연스레 겹친다. 밴조를 연주하는 정신지체 소년, 내부를 들여다보기 힘든 숲의 정경은 그 어느 영화보다 음산하고 공포스럽다. 와이드스크린으로 담아낸 급류 강 장면이 감탄을 자아내며 서서히 광기에 휩싸여가는 존 보이트와 버트 레이놀스의 모습은 단연 압권.
오승욱 감독의 추천: 조셉 로지의 <트로츠키 암살>
The Assassination of Trotsky
조셉 로지 | 알랭 들롱, 리처드 버튼 | 1972년 | 103분 |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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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암살>은 실제 1940년 8월 멕시코에서 살해당한 유랑의 혁명가 트로츠키의 마지막 몇달간의 기록이다. 스탈린은 자객을 보내 트로츠키의 암살을 지시했고 결국 날카로운 등산용 지팡이인 피켈로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사건에 이르기까지 비어 있는 시간들을 조셉 로지 특유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했다. 그것의 가장 극명한 예는 트로츠키 암살을 위해 보내진 자객, 심지어 알랭 들롱이 연기하는 ‘프랭크 잭슨’의 존재다. 그는 또 다른 트로츠키 신봉자 여성을 유혹해 트로츠키 일가에 접근한다. 레인코트를 입고 트로츠키의 주위를 맴돌다, 결국 스스로 번뇌에 빠져 자신의 임무에 갈등하는 그의 모습은 스탈린이 아니라 장 피에르 멜빌이 보낸 킬러 같다. 아니, 예정된 운명 앞에 심각한 회의와 비탄에 휩싸인 햄릿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잭슨이 여자와 함께 투우를 보러 간 장면이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소의 모습은 누가 봐도 트로츠키에 대한 은유다. 그 음산하고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와 음악은 압도적이다. 이처럼 표현주의적인 장면들이 뒤섞인 영화를 보다보면 마치 조셉 로지가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만난 것 같은 느낌이다. 트로츠키만큼이나 그 역시 지역적 감성에 녹아들었던 걸까. 그렇게 조셉 로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영화를 하나의 ‘의식’처럼 완성했다.
류승완 감독의 선택: 왕가위의 <열혈남아>
旺角下問
왕가위 | 유덕화, 장만옥, 장학우 | 1987년 | 94분 |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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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 소화(유덕화)에게는 창파(장학우)라는 고향 후배가 있는데 늘 말썽만 부려 골치다. 그러던 중 란타우섬에 살고 있는 아화(장만옥)라는 먼 친척이 찾아온다. 왕가위 감독 스스로도 밝혔듯 <열혈남아>는 홍콩 누아르라는 선배들의 자산 위에 마틴 스코시즈의 <비열한 거리>(1983)와 <천국보다 낯선>(1984)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장학우는 충동적이고 다혈질인 <비열한 거리>의 자니 보이(로버트 드 니로)와 닮았고, 장만옥의 존재는 잠시 함께 머물다 떠나간 <천국보다 낯선>의 사촌 여자 에바(에스터 벌린트)와 비슷하다.
왕가위의 데뷔작 <열혈남아>를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다만 상영 버전은 기존에 개봉한 대만 버전이 아닌 홍콩 버전(감독판)으로 엔딩 등 일부 장면이 다르다. 그래서 왕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유덕화와 장만옥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엔딩은 포함돼 있지 않다. 그럼에도 유덕화가 장학우의 복수를 위해 포장마차에서 펼치는 스탭프린트 ‘활극’ 등의 감동은 여전하다. 시작은 선배 영화들로부터의 탈주였으나 이후 아시아 감독들에게는 또 하나의 ‘전범’이 된 청춘잔혹 영화.
최동훈 감독의 선택: 더글러스 서크의 <바람에 사라지다>
Written on the Wind
더글러스 서크 | 록 허드슨, 로렌 바콜 | 1956년 | 99분 |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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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회사 사원 미치(록 허드슨)와 난봉꾼인 젊은 사장 카일(로버트 스탁)은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다. 미치는 방계 회사의 비서인 루시(로렌 바콜)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카일을 택하고 미치는 친구를 위해 물러선다. 하지만 루시의 불임으로 카일은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고, 급기야 루시를 싫어하는 카일의 여동생은 미치가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자 가까스로 임신한 루시의 상대가 미치라고 카일에게 말한다.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영화는 당대 그 누구의 멜로영화보다 낭만적이고도 화려한 세트를 선보였지만, 결코 그 낭만성에 잠식당하지 않았다. 가령 <바람에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인공호수의 외관을 보라. 공간이 화려할수록 인물들의 비극성은 더욱 강조됐다. 무엇보다 그의 영화들은 수많은 현대 감독들이 리메이크에 공을 들일 만큼 세련된 태도와 기품을 품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당시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에 대한 비판을 내재하고 있으면서 또한 당대 최고의 흥행작들이기도 했다.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1955)과 더불어 더글러스 서크의 최고 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