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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talk

[시네토크] 작가들이 공유하는 공기가 그들 영화 특징을 만들어 낸다 - 이용철 영화평론가가 말하는 그의 'Unseen Cinema'

시네토크


작가들이 공유하는 공기가 그들 영화의 특


징을 만들어 낸다


이용철 평론가에게 듣는 그가 추천한 ‘Unseen Cinema’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 처음 친구로 참여한 이용철 평론가는 ‘Unseen Cinema’ 섹션에 포함된,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쉽게 만나보기 어려웠던 영화 세 편을 추천했다. 그리고 지난 7일과 8일 양일간 그가 선택한 세 편의 영화 <마르케타 라자로바>,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 <마을을 위한 레퀴엠>가 연이어 상영되었고, 8일 저녁 마지막 상영작인 <마을을 위한 레퀴엠> 상영 후 이용철 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영화를 선택한 개별적 이유와 각 영화들에 특징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그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이용철(영화평론가): 이번에 유운성 평론가와 함께 Unseen cinema를 맡게 됐다. 이번에 상영하는 작품은 <마르게타 라자로바> <마을을 위한 레퀴엠>,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 이렇게 총 세 편이다. 내일이 추석 연휴날인데 이런날 <마을을 위한 레퀴엠> 같은 영화를 배치한 시네마테크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웃음) 사실 개인적인 취향은 웨스턴과 느와르에 더 가깝기 때문에 이번에 뽑은 영화는 취향과 상관없는 영화다. 세 작품은 취향에 따라 선택한 게 아니라 개별적인 이유에 따라서 선택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강연의 전반부는 <마르케타 라자로바>,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후반부는 데이빗 글래드웰 영화의 특성을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마르케타 라자로바>는 몇 해 전 광주국제영화제에서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선택한 영화다. 2004년 광주영화제에서 시네마스코프 시절의 명작들을 상영한 적이 있었는데, 더글라스 서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니콜라스 레이의 <파티 걸>, 프리츠 랑의 <문플릿>과 같은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꼭 시네마스코프 작품뿐만 아니라 시네마테크를 다니면서 봤던 무르나우의 <파우스트>나 프리츠 랑의 <니벨룽겐> 같은 작품들이 줬던 스크린의 위대함과 거대함을 한 번 더 경험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마르케타 라자로바>.

흔히 체코 영화에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감독들은 이리 멘젤, 밀로스 포먼, 얀 네멕 등일 것이다. 프란티세크 블라칠은 서구에서조차도 많이 거론된 감독이 아니었고, 90년대 이후에 조금씩 거론되고 재평가됐다. 왜 블라칠의 영화가 묻혀 있었을까? 아마도 그의 영화가 체코의 뉴웨이브 작품들과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뉴웨이브 작품은 소련이나 공산당의 부패와 같은 현실적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비판을 했다. 반면에 블라칠 감독은 역사적 소재를 무게 있게 다루었다. 젊은 영화의 흐름에서 봤을 때 그의 영화는 구시대적 영화처럼 보였을 것이다. 블라칠이 관심을 가졌던 주제는 억압 받는 자유의 문제다. 이런 것을 시대극에서 표현하는 방식은 종교 문제를 다루며 이데올로기의 도그마를 비판하는 형식으로 드러난다. 블라칠은 그것이 아무리 선의에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자유와 영혼을 억압한다면 비판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의 영화의 가장 큰 특색은 정교하게 구성된 이미지에 있다. 다른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영화가 짧든 길든 한 장면도 허투루 만든 장면이 없다. 블라칠 영화의 이미지를 보면 그가 영화라는 미디어에 접근하는 자세를 볼 수 있다. 그의 이미지에는 이야기를 위해서 소모되는 이미지가 하나도 없다. 그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집과 도구, 그리고 자연을 비출 때 어떤 각도에서 어떤 속도로 보느냐에 따라 미적 외향을 갖춘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증명한다.

다음 추천작은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 원래는 이 영화를 추천한 것은 아니었고 페이 모 감독의 1948년 작품인 <작은 마을의 봄>이라는 중국 영화를 추천했었다. 이 영화를 관객들과 함께 보고 싶었던 이유는 신파라는 것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일반적인 생각보다 신파라는 것에 훨씬 더 모던한 것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쉽게 폄하하는 신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봤으면 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상영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선택한 작품이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 조너선 로젠봄이 말했듯이,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야기의 재미와 연기를 떠나서 스토리텔링하는 방식에 있다. 특히 이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은 제리 가르시아와 루이스 부뉴엘이다. 부뉴엘의 <자유의 환영>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두 영화 모두 고야의 그림으로 시작하고 이야기가 뻗어나가는 방식도 유사하다. 물론 말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고전영화 중에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재밌다고 생각하는 영화는 막스 오필스의 <윤무>. 이 영화와 가장 전복적인 형태를 띈 영화가 <자유의 환영>이고, 그사이 어느 지점에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가 자리하고 있다.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와 매우 유사한 한국 영화가 있는데, 바로 손영성 감독의 <약탈자들>이다. 어쨌든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기발한 방식의 영화라는 측면에서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를 추천했다.



마지막 추천작은 데이빗 글레드웰의 1975년작 <마을을 위한 레퀴엠>이다. 영국의 정부 지원 하에 제작되던 다큐멘터리가 일정 부분 성공을 이루자 나중엔 각 산업별로 다큐멘터리 지원을 하게 된다. 데이빗 글래드웰은 이 다양한 분야 가운데 교통 산업 분야의 다큐멘터리를 담당하면서 1960년대부터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회화를 전공한 사람으로 그가 주로 맡았던 역할은 편집이다. 그가 편집을 했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린제이 핸더슨 <이프>라는 영화가 있다. 글래드웰이라는 사람이 공공의 선이나 교육을 위한 다큐멘터리에 투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적인 영화는 실험적이고 탐미적이다.

<마을을 위한 레퀴엠>에 대해 영국의 한 비평가는 이 영화가 선언이 아니라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바로 이점이 내가 이 영화를 여러분들과 함께 보고 싶었던 이유다. 보통 영화들은 자기가 고집하는 것에 대해 선언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을을 위한 레퀴엠>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영화라는 것이 굳어진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부드러운 유기체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예를 들면 과거와 현재, 사라진 것 다가오는 것, 침묵과 소음, 탄생과 죽음, 찰나와 기억을 강요하듯이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층을 쌓고 관객이 자연스럽게 그것에 스며들도록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감독의 생각에 동의를 할 수도 비판을 할 수도 있다고 본다. 특히 글래드웰의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슬로우모션이다. 그는 모든 영화에서 슬로우모션을 사용하는데 그가 슬로우모션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그가 다루는 대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가 사용하는 소재들은 항상 사라지고 있는 것들, 곧 잊혀질 것들, 곧 죽을 것들이다. 글래드웰은 그런 것에 깊은 관심을 가진 감독이다. 피사체들은 영화에서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곧 사라지고 죽을 것들이다. 이것들은 영영 보지 못하게 될 것들인데 글래드웰은 이런 피사체들에 가능한 긴 시간을 부여하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시간을 더 줌으로 인해 그들이 가진 시간을 늘려서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구스 반 산트의 <앨리펀트>도 이와 유사한 측면에서 슬로우모션을 사용한다.

요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들은, 소위 거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만나지 않고 직접 영화를 서로 보지도 않고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젊은 감독을 만나 예전에 내가 본 영화들과 당신의 영화가 비슷하다라고 하면 그 젊은 감독은 그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카피했다, 하지 않았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공유하는 것처럼 작가들이 공유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의 영화들의 특징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정리: 최혁규(관객에디터) | 사진: 이유정(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