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의 영화 속 이미지들이 요동치고 있다”

- 허문영 영화평론가 시네토크



지난 6월 23일 <천국과 지옥>의 상영이 끝난 후 허문영 영화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그는 구로사와를 ‘서양적’, 혹은 ‘동양적'이라고 섣불리 규정하는 견해에 반대하며 개별 작품이 가진 활기와 마주할 것을 제안했다.





동양적, 혹은 서양적이라는 선입견


허문영(영화평론가) : 구로사와 아키라와 같은 유명한 감독을 표현할 때 꼭 그를 수식하는 몇 가지의 명제가 있기 마련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를 말할 때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은 ‘서양적 영화미학에 동양적 미감을 결합시킨, 혹은 그 양자를 조화시킨 감독’이다. 이 표현이 물론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거미집의 성>이나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 같은 영화는 일본의 전통 연희극인 노(能)의 연행방식을 그대로 차용한 영화이다. 이뿐 아니라 

<란>이나 <꿈>을 설명할 때도 “동양적 정停의 미학과 서양의 동動의 미학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같은 표현을 쓴다. 


나는 이런 표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동양적인 미감이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흔히 떠올리는 것은 한때 오즈 야스지로를 이야기할 때 나왔던 유현의 미, 고요, 롱테이크, 여백의 미학이지만, 이런 요소들을 동양적인 미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전기 드레이어의 영화를 볼 때 그것을 동양적이라고 느끼는가. 상투적으로 동양적 미학이라고 말해왔던 요소들이 드레이어나 브레송의 영화에도 있다. ‘동양적 미’, ‘일본적 영화미학’과 같이 지역에 귀속되는 표현들은 저널리스트가 쓰기엔 편할 수 있지만 경계할 필요가 있다. 또 구로사와를 일본적 영화미학이라고 말하면서 오즈 야스지로를 일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오즈와 구로사와는 작법이 완전히 다르다. 오즈는 광적인 수준의 스타일리스트이다. 자신의 엄정한 형식적 도구를 구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감독이다. 오즈만큼 스스로의 양식적인 약속에 대해 광적으로 집착하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오즈가 일본적이라는 표현의 문제는 하스미 시게히코가 이미 통렬하게 비판을 한 바 있다. 미조구치 겐지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창안한 독창적인 시공간이 과연 동양적인 것인지, 일본적인 것인지 구분하기는 굉장히 애매하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구로사와에게서 일본적인 것을 굳이 찾아내서 일본적인 미학, 동양적인 미학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쓸모없는 일이다.


오히려 이것과 상반된 견해도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철저히 서양의 영화미학을 따르는 서사 중심적, 혹은 고전기적 감독이라는 견해이다. 이런 표현은 구로사와의 영화를 말할 때 종종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구로사와는 재밌는 이야기, 쉬운 이야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오즈나 미조구치가 그들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개발하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소우주를 만들었던 것과 달리, 구로사와는 힘 있는 이야기, 좋은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를 영화화하기 위해 애썼다. 자연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시네필들에게는 덜 시네마틱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발언이다. 그 인상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것과 결부해서 일본의 영화학자들은 구로사와의 서구 지향성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라쇼몽>이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을 때에도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반면 서양에서는 <라쇼몽>에 오리엔탈리즘적인 호소력을 가지는 측면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양자가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양적인 미학이란 것을 규정하기 힘들다면 서구 지향성이라는 것도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기 힘든 표현이다. ‘서구적’, ‘동양적’이라는 표현은 기본적으로 적절한 의미를 지니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의 선입견에서 제거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보다 의미 있는 것은 서사 중심적, 고전주의적 감독이라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 말만으로는 구로사와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다. 첫 번째,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나 <거미집의 성>에서 보여주듯이 구로사와는 이야기를 중시하면서도 서사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숨은 요새의 세 악인>과 같은 뛰어난 오락영화를 만든 사람과 <거미집의 성>처럼 고도의 양식적 영화를 만든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는다. 무리하게 하나의 틀로 묶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1965년에 <붉은 수염>을 만들고 나서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자살 사건도 있었고 <도라 도라 도라>를 연출하려다 하차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 뒤 <도데스카덴>이라는 최초의 칼라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5년 뒤에 <데루스 우잘라>라는 영화를 만든다. 이 두 영화는 1960년대까지 만든 영화와는 기본적으로 다른 영화이다. <붉은 수염>까지의 영화가 고전적인 서사의 틀 안에서 곤란한 상황에 직면한 한 남자의 분투를 그린다면, <도데스카덴>이나 <데루스 우잘라>의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결 행위라는 것이 없다. <도데스카덴>부터 이미 구로사와는 고전적 서사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전 영화를 통틀어서 서사 중심적, 고전기적, 소설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안개, 비, 바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엘 버치가 구로사와에 대해 비교적 동의할 만한 요약을 했다. “내용에 봉사하는 형식이라는 서구의 주류 형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갔다”고 말한 것이다. 구로사와의 영화에 감동을 받는다면, 혹은 색다른 감흥을 느낀다면 그것은 구로사와가 굉장히 세련되고 능숙한 장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엘 버치의 말대로 구로사와는 궁극적으로 영화의 이미지, 사운드, 편집, 구도는 영화가 채택하고 있는 주제의식에 봉사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극한’이라는 표현에 있다. 구로사와의 영화 중 <거미집의 성>과 <천국과 지옥>, <데루스 우잘라>를 제일 좋아하는데 <거미집의 성>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거미집의 성>의 초반부에 안개가 잔뜩 낀 장면이 나온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시야를 가리는 물리적 장벽으로서의 안개, 혹은 그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안개로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측면에서는 안개가 이렇게 기능한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안개에 매혹된다는 것이다. 물리적, 상징적 의미를 떠나서 안개 자체가 주는 강력한 물질성이 우리를 매혹시킨다. <거미집의 성>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은 숲이 움직이는 장면이다. 이를 보고 있으면 약간 소름이 끼친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황홀하기 때문이다. 서사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힘들다. 숭고일 수도 있고 말 그대로 마취적인 강력한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구로사와의 영화가 충격을 주는 또 하나의 요소는 ‘비’이다. 비가 와도 너무 온다. 비가 올 때는 기계가 다 망가지기 때문에 비 오는 장면을 찍을 수 없다. 즉 비가 올 때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비를 뿌렸다는 것이다. 보통 비 오는 장면을 찍을 때는 경제적으로 프레임을 짠다. 그런데 구로사와의 영화에선 비가 미친 듯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진다. <라쇼몽>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서너 명의 인물들로부터 시작하는데 롱숏에서도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물론 다 서사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막상 비를 큰 화면으로 보고 있으면 비의 강력한 속도감, 물량감에 압도된다. 바람이 불 때도 그렇다. 세상을 덮을 듯한 바람을 불게 한다. 구로사와 영화의 바람은 자연풍이 아니다. <데루스 우잘라>도, <백치>도 그렇다. 비와 바람, 눈, 안개와 같은 구로사와 영화의 기후적 요소들은 서사적인 기능이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마력을 갖고 있다. 이 안에서 어떤 서사가 나오고 해결되더라도 비와 안개, 바람을 초과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윤리적 한계상황


실제로 구로사와 아키라는 운명론에 경도된 사람이기도 하다. 구로사와의 이야기를 관류하는 보편적인 제재가 있다면 물리적, 윤리적 한계상황에 직면한 한 남자의 선택에 관한 것이다. 이는 구로사와가 좋아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적 주제이기도 하고 미국 서부극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부극에는 한계상황의 정신성은 없으며 이것은 물리적인 한계상황이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와 구로사와의 이야기가 주로 다루는 것은 이 한계상황에 포함된 윤리적 딜레마이다. <천국과 지옥>은 그 적절한 예이다.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 보면 범죄 스릴러이지만, 곤도라는 인물의 윤리적 고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떤 것도 보장되거나 약속되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평생을 쌓아온 성취를 무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문제이다. <7인의 사무라이>가 흥미로운 것도 그 안에 사무라이의 윤리적 선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무라이들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공동체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 서부극에서는 그 공동체와 어떤 방식으로든 인연이 있는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데 <7인의 사무라이> 속 사무라이들은 공동체 밖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왜 굳이 죽음을 무릅쓰고 농부들을 구해야 하는가. 여기에 윤리적 고뇌가 등장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이야기에는 윤리적 한계상황이라는 것이 반드시 동반된다. 구로사와 영화의 정신적 측면이다. 한계상황을 만들어내는 모체가 굉장히 장르적일 때도 있다.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이 그렇다. 또는 제도의 잘못, 시스템의 잘못, 사회적 모순, 계급적 모순이 등장할 때도 있다. 60년에 나온 <나쁜 놈일수록 더 잘 잔다>에서는 명백히 부르주아 계급의 부패, 부정, 사악함 같은 것들이 불행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저항하기 위해 미후네 도시로가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한다. 이 사내를 등장시키고 패배시키는 것은 시스템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거대한 힘이다. 그것이 등장하는 경우에는 그가 셰익스피어를 가져올 때이다. <거미집의 성>이나 <란> 같은 작품들. 사람의 손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이 어떻게 해도 주인공으로 하여금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만든다. 장르적인 곤경과 사회적인 곤경과 운명적 곤경은 셋 다 다르기 때문에 이를 다 묶어서 구로사와 영화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인 가치관을 끄집어내는 것은 무리이다.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서 심오한 메시지를 읽어내기는 무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로사와 영화는 언제나 실패의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절대적 곤경에 처해있는 인물들을 그리며, 그것이 장르적이거나 사회적일 때보다는 운명이 부르는 느낌이 들 때 우리를 사로잡는다.


<붉은 수염> 이후의 변화


1965년에 <붉은 수염>을 만들고 나서 그의 영화세계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도데스카덴>과 <데루스 우잘라>의 공통점은 한계상황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도데스카덴>의 아이는 그냥 걸어다닌다. 모든 인물들은 그냥 자신의 생을 살아간다. <데루스 우잘라>는 주인공이 두 명인데 한 사람은 러시아의 대위로서 싸우는 게 임무가 아니라 지리를 측량하는 게 임무다. 또 그의 친구인 사냥꾼은 숲의 보호자 같은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은 무언가를 관찰하고 보호한다. 이 이행이 굉장히 중요하다. 행동주의자에서 보행자가 되고 관찰자가 된다. 이는 들뢰즈가 말했던 모던 시네마로의 이행과 같은 패턴이다. 문제는 구로사와가 자의식적으로 이행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은 나이가 들면 흔히 하는 관조, 해탈, 허무에의 탐미에 가깝다. <마다다요>를 귀엽다고 생각하고 재밌게 보긴 했지만 민망하긴 하다. 왜냐하면 그 영화의 주제는 노인이 자신의 장례식에 얼마나 많은 조문객이 올지에 대한 걱정이기 때문이다. 솔직하다면 솔직하고 귀엽다면 귀엽다. 이스트우드가 <그랜 토리노>를 만들 때, 임권택이 <천년학>을 만들 때에도 죽음을 생각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 사람들의 과감함에 비하면 <마다다요>에는 민망할 정도로 소심한 태도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구로사와가 <데루스 우잘라>에서 보여준 새로운 영화적 가능성을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퇴행했다고 보는 편이다. 구로사와의 영화는 인물 중심적이기 때문에 장소에 대한 감각이 풍부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장소에 대한 절대적 존중 같은 것이 있다. 기꺼이 길을 잃고, 길을 잃은 고통을 치르게 한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 영화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다.


정리 ㅣ 박민석 관객에디터 

사진 ㅣ 곽혜원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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