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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시네마테크 재개관 특별전 - 장 으스타슈 & 모리스 피알라

[리뷰] 반 고흐의 삶 자체를 바라보려는 숭고한 시도 - 모리스 피알라의 <반 고흐>

반 고흐의 삶 자체를 바라보려는 숭고한 시도

- 모리스 피알라의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는 기이한 일화를 많이 남긴 화가 중의 하나이다. 평전, 또는 심리학이나 종교 등 각종 분야에서 고흐의 삶에 대해 접근한 대부분의 시도는 자신의 귀를 자른 기행이나 첫사랑에 대한 과도한 집착, 그리고 고갱에 대한 열정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서투름,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염원한 코뮌적인 소망마저 개인적인 괴팍함을 전제로 깔며 결국 고흐는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한 불우한 예술가라는 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에 대한 고흐의 관점과 냉철한 분석보다는 가난에 시달리고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에 대한 한탄과 자기연민, 변덕에 주목하면서 ‘낭만적’인 천재성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살로 이어지는 예술가의 숙명으로 쉽게 귀결시키는 것이다.


괴팍하기로는 모리스 피알라도 못지않다. 모리스 피알라에 대한 편견도 그의 거침없는 언행과 자신의 그림을 불에 태웠다는 기이한 기질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두 예술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간의 소문이나 성마른 성격으로 인한 오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피알라가 화가로 살아갔던 점을 생각하면 그가 고흐라는 단독자에게 느낀 정서적 유사성과 고흐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영화관映畵觀을 더듬어 찾아내는 과정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피알라는 <반 고흐>(1991)를 통해 삶이 스치고 지나간 일상과 캔버스의 표면을 집요하게 바라봄으로써 이면에 스며든 감정의 틈을 노출시킨다. 피알라는 고흐의 삶에서 마지막 67일을 다루면서 화가로서의 삶뿐 아니라 그가 머물던 오베르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관찰한다. 피알라의 카메라는 고흐의 내면에 침투하려는 섣부른 의지를 드러내거나 그의 발작과 신경증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흐의 천재성과 왕성한 창작력에 대한 감탄도 배제한 그의 영화는 고흐가 마지막 나날을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좁은 방의 책상에는 책과 촛대, 잉크병이 놓여 있고 작은 수납장 위에는 세면도구가 있다. 허름한 거울과 작은 창문, 침대와 의자 하나가 전부인 그곳에서 그는 아침과 밤을 맞이한다. 그리고 라부 호텔의 식당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주사위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신다. 스케치를 하러 야외로 나갔다가 돌아오면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을 완성해 나가고 간간이 ‘라 무슈’의 창녀들과 만나 섹스를 한다. 자신의 병을 고쳐줄 가셰 박사의 집을 방문해서 그림을 그리고 가셰의 딸 마그리트와 강변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밀밭에서 그녀와 섹스를 한다. 피알라는 가십거리로 전해지던 고흐의 기행을 부각시키는 대신 그의 단조롭고 규칙적인 일상을 나열한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고 술 마시고 섹스하고 물끄러미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의 표정과 이웃들의 노동, 일상으로만 채워 나간다. 피알라는 어떠한 간섭이나 판단을 배제한 바라봄을 통해 고흐의 삶을 요란함이나 소동에서 비껴나간 곳에 위치시킨다. 이것이 <반 고흐>의 숭고함이다.



피알라는 고흐의 일상을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흐를 만난 사람들의 관계가 틀어지고 악화되면서 감정이 폭발하는 지점을 디테일하게 따라간다. 가셰는 자신이 치료하는 환자만큼이나 불안하고 위태로운 사람이고, 테오는 고흐의 든든한 조력자라기보다 형이라는 존재와 집안을 채운 그의 그림들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화상으로 묘사된다. 고흐를 치료해야 할 책임이 있는 가셰는 그를 건강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방치한다. 그는 화가로서의 고흐의 능력에 감탄하지만 딸이 고흐와 가까워지는 것은 두려워하는 이중적 잣대를 지니고 있다. 미치지 않은 고흐, 증세가 호전된 고흐의 그림을 수집하고 싶은 예술애호가이자 아마추어 화가로서의 가셰와 광인을 집에 들이거나 그와 가까워지는 것은 피하고 싶은 가셰가 분리된 셈이다. 테오 또한 마냥 헌신적인 인물이 아니라 고흐와 비슷한 증상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로 드러난다. 그는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에게 고흐의 작품을 꾸준히 소개하는 등 그림을 팔려는 세속적 욕구가 강하지만 화상 볼라르만큼 성공하지 못했으며, 고흐의 그림을 파는 일만이 그에게 허락된 전부인 것처럼 치부되는 현실에 불만을 가진다. 형이 르누아르풍의 그림을 그려서 ‘잘 팔리는’ 화가가 되기를 원하는 욕망이 강해질수록 고흐에 대한 책임과 부담감의 강도는 세진다. 천재적인 예술가이지만 너무 조급하고 매사에 위태로운 형에 대한 불안과 강박증은 그와 조안나, 새로 태어난 아기로 구성된 가족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고흐를 버릴 수도, 영원히 함께할 수도 없는 상황은 형제로 구성된 고흐 가문과 새롭게 만들어진 가족이 공존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이처럼 고흐의 주변에 있는 남성인 가셰와 테오는 그와 비슷한 강박증과 결함을 지닌 인물이지만, 여성들은 삶과 예술, 사랑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지닌 강인한 인물로 그려진다. 조안나는 고흐만큼이나 삶에 지치고 비슷한 신경증을 앓는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고 가족을 위한 삶에 충실하기를 요구한다. 그녀는 남편이 고흐에게 돈을 주는 행위가 결국 테오의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임을 직시하고 그의 위선적인 태도를 비난한다. 고통에 빠진 예술가를 가깝게 느끼면서도 예술가가 될 수 없는 자들이 꿈꾸는 헛된 욕망과 불평을 참기 힘들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마그리트는 아버지의 비겁함과 태만을 비난하면서 고흐를 향한 사랑과 주체할 수 없는 정념을 토해낸다. 고흐라는 인물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른 차이는 남성들의 강박증적 히스테리, 무능함, 게으름이라는 태도와 여성들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표현, 정직함과 헌신에 기반을 둔 시선으로 나뉜다. 그렇기 때문에 고흐로 인해 불거진 가족 내부의 균열과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 여성들의 외침에 예술가 피알라와 냉철한 관찰자로서의 피알라가 덧대어진다.


이 영화에서 피알라의 세심한 손길이 드러나는 것은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는 회화적 구성이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는 인상파 화가의 그림과 그들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이미지의 구성, 고흐의 그림, 그가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인상파의 세계를 드러내는 배경이 된다. 또한 정물화처럼 구성된 프레이밍, 초상화와 같은 인물의 이미지는 피알라의 시선으로 포착한 구체적 현실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가셰의 집에 걸려 있는 그림을 바라보는 고흐의 반응과 그의 예술관이다. 특히 샤를르 메리옹의 판화 『시체 공시장』은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가셰가 치료했던 불운한 이 화가의 삶은 고흐와 유사하다. 메리옹은 정신질환을 겪었으며 색깔을 구분하지 못해 흑백의 판화로 파리의 도심지를 기록했고 말년에는 기이한 환영에 시달렸다. 가난으로 인해 좌절했으며 정신병원에 수감된 후 47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불길한 까마귀 떼라는 도상, 광기와 신비로운 미지의 존재에 대한 도취라는 불안한 경계는 두 화가가 공유한 운명이다. 메리옹이 검은색이 도달할 수 있는 심연을 포착했다면 고흐는 강렬한 색깔의 휘몰아치는 질감을 통해 자신의 광기를 뚫고 나간다(이때 피알라는 그림을 그리는 고흐의 모습을 묘사할 때 노동하듯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행위를 관찰할 뿐, 천재성을 지시하는 노련한 붓질이나 결과로서의 그림 자체를 부각시키지 않는다).




또한 고흐의 그림에 대한 건조한 묘사만큼이나 피알라가 이미지를 제시하는 방법이 흥미로운데, 이는 인상파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공간의 프레이밍과 배치된 사물을 정물화처럼 담아내는 쇼트에서 찾을 수 있다. 피알라는 르누아르의 그림으로부터 강가 풍경과 뱃놀이, 무도회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특히 사물에 반사되는 부드러운 햇빛의 질감이나 수면에 맺히는 빛의 파동은 화가 르누아르와 그의 아들 르누아르의 회화-영화를 이어주는 세계를 구성한다. 생동하는 사람들의 유흥은 원을 그리는 춤의 대열과 한가롭게 노를 젓는 뱃사공의 움직임을 고정된 그림에서 해방시켜 아름다운 지속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파리의 물랭 갈레트 Moulin de la Galette 는 로트렉의 그림을 기반으로 한 화려한 원색이 넘쳐나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등장한다. 내부를 에워싸는 로트렉의 그림과 그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들의 춤이 나른한 만취의 순간, 캉캉춤의 카오스적 향연, 2층의 매춘 장소로 이어지는 환락의 세계와 섞이는 긴 시퀀스를 지배하는 운동과 정지의 이미지를 눈여겨볼 만하다. 카메라와 인물들의 움직임에 따른 긴장과 완화, 육체적 접촉과 쾌락은 저속함과 성스러움을 끊임없이 오가면서 서로를 탐닉한다.


하지만 피알라는 기계적인 차가움으로 그 공간을 횡단할 뿐 향연의 대열에 동행하지 않는다. 압생트와 음악, 춤과 섹스에 탐닉한 환각의 순간이 로트렉의 회화에서 비롯된다면 조안나의 목욕이나 노동하는 여인의 이미지에서는 드가의 이미지, 또는 쇠라의 희미한 점처럼 묘사된 인물의 얼굴과 같은 부동의 순간도 엿볼 수 있다. 고흐의 생전에 유일하게 그에 대한 글을 썼던 오리에와 테오의 집을 방문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르네 쉬첸베르거에 이르기까지 19세기 말,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운동의 세계를 구성했던 요소들이 피알라의 세밀한 시선 아래 재배치된다.

그에 따라 형성된 전원의 휴가 풍경, 매독이라는 흔한 질병, 오베르나 퐁투와즈 등으로 모여든 화가들의 행렬은 그 시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특히 밀밭에 앉아 빵을 먹거나 화구를 옆에 둔 고흐의 얼굴과 물랭 갈레트에 모여든 인물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순간을 화폭에 머물게 하려던 인상주의자들의 초상화로 변형되고, 피알라가 포착한 얼굴들은 결국 불멸의 존재가 된다. 환락의 공간에 속한 창녀의 피로감과 나른한 표정, 수많은 화가들의 모델이자 그녀 자신이 화가였던 쉬잔 발라동의 얼굴은 당대 미술계의 편견에 가로막힌 예술가의 자화상이 된다. 또한 가셰의 집에 놓인 사물들이 세잔의 정물화처럼 배치된 쇼트가 제공하는 아름다움도 놓칠 수 없다. 피아노 위에 놓인 꽃병, 부엌에 놓인 사과 세 개, 포도주병과 물병, 식탁에 놓인 반짝이는 그릇과 먹을 것의 배치가 가정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라면 물랭 갈레트에 등장하는 압생트 술잔과 투병한 컵들, 재떨이는 흥청거리는 쾌락의 물살을 붙들어 매는 사물의 공허한 표정이 담긴 정물화로 제시된다.


고흐의 죽음을 서술하는 <반 고흐>의 다큐멘터리적 재구성은 피알라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신화, 소문, 평판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서 고흐를 관찰하던 그의 시선은 고흐가 죽기로 결심한 날과 죽음에 이르는 3일간의 기록에 충실하다. 꼼꼼하게 얼굴을 씻고 면도를 하는 고흐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본다. 그리고 바로 배를 부여잡고 피를 흘리는 고흐의 쇼트로 이어진다. 이러한 편집은 총을 발사하는 지점을 생략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이미 선고된 것임을 드러낸다. 피알라는 고흐의 자살에 대해 원인을 분석하거나 가설을 세우는 대신 죽음에 대한 비밀을 훼손시키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고흐는 수술을 거부한 채 죽어가는 상태를 온전히 몸으로 받아들인다. 가셰를 내치는 손짓과 테오의 손을 잡는 클로즈업, 버려진 짐승처럼 웅크린 몸은 가혹할 정도로 냉정하게 고흐의 임종을 지키는 피알라의 시선에 포착되어 날것의 현실이 되어 버린다. 그가 죽은 후에 라부 호텔 주인은 창을 활짝 열고 청소를 한다. 테오는 주인에게 금전적 계산을 마치고 주민들은 변함없이 일을 한다. 아이들은 뛰어놀고 가셰는 고흐가 그려준 초상화를 가지라는 테오의 말을 들으면서 비루한 표정을 짓는다. 고흐의 장례조차 생략된 이 영화의 마지막은 검은 옷을 입고 베일로 얼굴을 가린 마그리트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와 만나는 장면이다. 오베르에 머물렀던 위대한 화가들의 이름 끝에 고흐가 언급된다. 젊은 화가는 반 고흐를 아느냐고 묻고 마그리트는 그는 내 친구였다고 대답한다. 피알라가 제시하는 고흐의 삶과 죽음은 단련된 육체 노동자이자 자신의 그림에 손대거나 장난으로 화구를 만지는 것에 화를 내는 진지한 화가의 길을 따른다. 피알라는 예술적 포부로도 감출 수 없는 가난과 모멸감을 떨치지 못했지만 죽어가는 순간까지 명징한 정신을 지녔던 위대한 인간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박인호│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