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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꼬방동네 사람들> - 일찌감치 드러난 배창호 감독의 개성


<꼬방동네 사람들> 특별 상영 - 꼬방동네 사람들 (디지털 리마스터링) 

People in the Slum (Digital Remastered)


1982│108min│한국│Color│DCP│청소년 관람불가

연출│배창호

출연│안성기, 김희라, 김보연

*후원│한국영상자료원

상영일정ㅣ 1/24 18:40(시네토크_배창호, 안성기), 1/30 19:40

지난해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연출 당시 감독이 의도했던 빛과 색을 되찾은 <꼬방동네 사람들>을 특별 상영한다.




일찌감치 드러난 배창호 감독의 개성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1982)은 이동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1980년대 시대상을 반영한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다. 결혼에 실패하고 꼬방동네에 흘러든 여성의 기구한 인생을 통해 도시빈민의 삶을 다룬다. 이 작품은 엄격한 검열에 의한 타협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당시 검열에서 작품의 제목을 ‘검은 장갑’(주인공 명숙은 상처를 가리기 위해 늘 검은 장갑을 끼고 다니며 검은 장갑은 그녀의 별칭이다)으로 바꿀 것과 몇몇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덜어낼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영화는 명숙을 사이에 둔 두 남자의 이야기로 좁혀졌는데 이러한 영화의 타개책은 지금의 시점에서 돌이켜 볼 때 영화의 중요한 개성을 만들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서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는 인물을 그릴 때조차 그들의 연대 가능성을 옅게 남겨두는 방식을 취한다. 명숙(김보연)의 전 남편 주석(안성기)과 두 번째 남편 태섭(김희라)의 관계는 여느 삼각관계에서 그려지는 적대관계와는 다르다. 소매치기 전과범 주석에 이어 태섭 역시 살인으로 구속될 것이 예정되면서 두 사람은 비슷한 운명을 나눠 가진다. 태섭이 주석에게 아내를 돌봐줄 것을 당부하면서 하는 대사, “내가 다시 돌아올 땐 자네 입장이 되는 거요”는 두 사람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좀 더 명확히 한다.


명숙을 사이에 둔 주석과 태섭의 삼각관계가 비교적 두드러지는 편이라면 명숙과 길자, 그리고 태섭에 의해 남편을 여읜 아낙의 관계는 숨겨져 있다. 이들은 깨진 거울 이미지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명숙이 아들과 함께 마을을 떠나면서 바닥에 떨어진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며 우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이때 거울은 공목사(송재호)가 길자(김형자)를 몰아붙이는 장면에서 등장한 깨진 거울을 연상시킨다. 길자가 거울 속 자기 모습을 직시한 이후 회개했듯이, 명숙은 이 장면 이후 아낙에게 전 재산에 가까운 돈을 쥐여주며 대신 용서를 구한다. 이름처럼 길에서 떠도는 여인 길자, 그리고 생계를 위해 각자의 수레를 짊어진 채 만난 두 여인을 통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운명 공동체를 그린다.


이와 더불어 주목해야 하는 것은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장면의 노련함이다. 최초의 플래시백은 명숙과 재회한 날 밤, 택시를 몰던 주석이 뒷자리 손님을 훔쳐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린 아들과 부부의 행복한 모습은 주석과 명숙의 잃어버린 미래이며, 키스를 나누는 남녀 손님은 주석과 명숙의 잃어버린 과거다. 이러한 전조 덕분에 명숙과 행복했던 한때로 향하는 주석의 회상신은 정당성을 가진다. 이와 더불어 전반적으로 풍기는 리얼리즘적인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실험적인 장면과 상징적인 수법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태섭의 꿈 장면의 독특한 분위기와 복선, 주석이 우연히 발견한 명숙을 쫓는 골목길 장면, 명숙이 처음 주석과 마주치는 장면에서 명숙의 얼굴로 줌인하는 카메라 등을 보면 영화가 주인공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이 때문에 영화는 내재된 정치성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사적인 작품으로도 보인다. 어쩌면 이 영화는 ‘민중’으로 대표되는 8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슬쩍 90년대적 ‘개인’을 앞당겨 소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소희 『씨네21』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