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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그만 떠돌고 우리들의 집을 짓고 싶다



<사냥꾼의 밤>에서 로버트 미첨은 '돈'의 출처를 알기 위해 아이처럼 아이같은 방식을 구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을 꼬드기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는 신과 상의하여 새로운 카인의 기독교를 만들어낸다. 증오가 있고, 그제서야 선이 도래한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서야 세상의 선이 도래한다고 믿는다. 급조된 단체들이 그럴 듯한 계획안을 냈고 그것이 채택되었다. 그들은 여태껏 영화의 생명을 보존해온 울타리를 침범하고자 한다.

세상은 오래전부터 양을 탈을 쓴 늑대를,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지 못했다. 지도자에서부터 군중들까지 모두 실패했다. 진실을 보지도, 감각하지도 못했으며, 따라서 그것을 지켜내지도 못했다. 우리는 시대 속의 우리를 세밀하게 지속적으로 다듬지 않았다. 우리는 진정한 비판은 선을 위한 궁극적인 것이었음을 잃어버렸다. 우리의 선은, 우리의 도덕은 완전히 뚱뚱해졌다. 미세한 도덕이 나오면 이전의 도덕은 조잡해지는 것인데, 우리는 조잡한 도덕에 여태껏 두리뭉실 매달려왔다. 우리는 지속적인 가치를 믿지 않았다. 아니 영화의 약속을, 그것의 힘을 실제로 믿지 않았다. 우리가 믿어왔다고 믿은 대상은 실제로 현실에서 고초를 당하며 수시로 위기를 겪었는데 우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우리는 시대에 맞는 진리의 사수 방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들이 훨씬 더 교묘하고 똑똑하다. 우리는 이미 그들을 능가하지 못한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며칠 전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사냥꾼의 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릴리언 기쉬의 행동력을 시네필의 윤리와 연관지어 이야기했다. 릴리언 기쉬는 제 핏줄도 아닌 떠내려 온, 떠도는 아이들을 모아 돌보며 자급자족의 방식으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녀는 마치 이상적인 공동체의 어머니같다. 그녀에겐 아들이 있지만 그들은 크리스마스에도 카드 하나 보내지 않는 무심한 자식에 불과하다. 릴리언 기쉬는 '기대리 기대리'노래를 부르며 서부극의 존 웨인처럼, 마치 아이들을 지켜줄 해결사처럼 등장한 로버트 미첨이 단박에 선한 인물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그녀는 그로부터 필사적으로 아이들을 지켜낸다. 그녀와 아이들이 한밤중 창문으로부터 떨어져 총을 들고는 눈을 번뜩이고 서있는 장면은 서부극, 특히 <수색자>에서 보자면 인디언의 습격으로부터 집을 지켜내는 어머니를 위시한 아이들의 모습과 닮았다. 하지만 존 웨인이 위험에 처한 가정을 지켜주고는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집에서 쫓겨나 다시 말을 타고 하염없이 떠나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서부극의 신화를 뒤집는 결말이라 할 수 있다. 말을 타고 떠돌아다니며 말을 붙여오는 어른 남자에게 호의를 절대로 갖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홀리지 말것을 강력히 가르친다. 세상은 험하고 그들은 무언가를 지키는 사람이 더 이상 아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강탈하고 빼앗는 냉혈한들에 불과한 것이다.


릴리언 기쉬는 부모를 잃은 이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매일 밤 들려주는데 감독은 이 대목에서 모세로부터 이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사가 결코 혈연적인 것으로부터 발생된 것이 아님을 내비친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진 자'라는 뜻으로 아이를 죽이려는 음모가 판을 치는 가운데 물에 떠내려와 이집트 공주에 의해 건져져 왕자로 성장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탄생하였다. 릴리언 기쉬가 '기대리 기대리'란 노래를 부르며 등장하는 로버트 미첨과 중창을 부르는, 정확히 말해 외부가 아닌 집 내부에서 같이 따라 부르는 장면은, 사실 같은 대사가 아니다. 미첨은 '기대리, 기대리'만 반복하지만 기쉬는 '예수 품에 기대리, 예수 안에 기대리'라며 주어를 상정한다. 여기서 미첨의 노래에서의 생략된 주어가 궁금해진다. 그것은 예수와는 동떨어진, 카인의 신, 증오의 신, 결국 자신이 만들어 낸 신일 것이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표류하고 있는 아트시네마'란 표현을 썼다. 건져줄 공주가 필요할 것인가, 총을 들고 지켜 줄 릴리언 기쉬가 필요할 것인가, 그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줄 공동체가 필요할 것인가, 아트시네마가 메시아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진짜를, 선한 지도자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미 대선에서 우리는 그것에 실패했다. 군중의 습성은 스스로 실패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설문조사에 의하면 50퍼센트를 넘어섰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걸려든 경제적 효과이다.

 

듣도 보도 못한 심사위원들을 위시하여 영진위는 시네마테크 공모전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이미 독립영화전용관의 선례에서와 같이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진행된들 큰 충격은 아닐 것이다. 이미 정권은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주고자 거의 동정을 베풀고 있는 듯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들은 동정을 베풀 대상에 대해 착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매일 가난하지만 열심히, 꿋꿋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온 어린 가장들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터전을 (지들이 뭔데) 재개발하려고 눈독들이는 자들의 모양을 보고, 개발 의지가 돋보인다며 동정표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비판해봤자 별 수가 있겠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건 선과 악에 대한, 서두에도 언급했듯 로버트 미첨의 양 손에 적힌 hate와 love에 관한 두 가지 진실에 대한 싸움이다. 신의 눈을 피해 교묘히 속이다 발각되자 질투에 눈이 먼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바치던 아벨은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증오가 사랑을 낳은 것이 아니라 주체없는 사랑이 증오를 낳았다. 아트시네마를 영화의 순교자로 만들 셈인가. 눈먼 사랑은 진실에 대해서도 눈이 멀게 한다. 진리와 협상하려 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영화도 떠돌아다니고, 아트시네마도 떠돌아다니는데, 우리마저 사회 속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떠돌아 다니다가 만난 영화, 시네마테크, 그리고 친구들인 우리는 이제 그만 떠돌아다니고 싶다. 피맺음이 아닌 우정으로 맺어진, 그저 단순히 생명에 대한 동정으로 이뤄진 건짐이 메시아를 탄생시킨 성경의 서사를 내포한 영화를, 서울아트시네마가 올해에 선택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응답해야만 한다. 영화는 방황을 부추긴 적이 없다. 영화는 지금까지 우리가 방황한 것이었다고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김시원_네오이마주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