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의 존 포드는 양친에게 물려받은 아일랜드인의 뜨거운 피가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비록 미국에서 출생하긴 했지만 존 포드는 대다수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그러했듯 고향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지니고 있었다. 스물여섯이 되던 해인 1921년에 존 포드는 오매불망하던 고국 아일랜드를 처음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과의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던 탓에 아일랜드는 정치적 긴장상태로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예술가에서 그런 사회적 격변은 종종 긍정적인 창작의 열정을 부추기곤 한다. 존 포드는 이 여행에서 민감하게 느꼈던 것들을 나중에 작품을 통해 표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ey>(41)와 <조용한 사나이>(52), 그리고 <긴 잿빛 선>(55)과 같은 작품은 고국 아일랜드에 바치는 찬가로 그가 이 시기에 겪었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존 포드의 영화를 두고 전통과 현대의 충돌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지나가버린 과거에의 노스탤지어를 종종 말하곤 하는데 이런 특징의 상당부분은 아일랜드계 이민자로서가 그가 느낀 소수자, 국외자의 정서에서 기인한 것이다. 종종 그의 영화에서 통렬한 순간은 인물들이 고향을 떠나기 위해 가족과 작별을 고할 때에 발생한다. 19세기 아일랜드의 웰스 지방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광부의 가족사를 필연적인 해체의 과정으로 그려낸 걸작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탄광에서 해직된 두 아들이 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장면은 지극히 담담하게 묘사된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석별의 정을 토로하는 대신 성경의 구절을 읽어주고 어머니는 흔들의자에 앉아 미동도 없이 떠나는 두 아들을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마을을 등지면서 석양에 구부정한 그림자를 남기면서 저 멀리 두 아들이 사라지는 모습이 보인다. <수색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서부 저편으로 사라지는 존 웨인의 모습보다 더 통렬한 순간이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성장한 주인공 휴 모건(Huw Morgan)이 어릴 적 시장에 갈 때 어머니가 두르던 숄에 소지품을 챙겨 고향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정든 집을 떠나면서 그는 이제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결심 하는데 카메라는 이 때 집의 내부에서 빠져나와 창문을 거쳐 탄광촌 마을의 한적한 거리를 비춘다. 이미 폐광이 되어버린 탓인지 휑뎅그렁한 거리에는 오직 늙은 여인만이 누군가를 쓸쓸하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화면위로 ‘현재의 기억은 사라지지만 오래 전의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하다’라는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깔리면서 이내 화면은 과거 풍요롭고 초록이 무성했던 대지로 전환한다. 흑백영화이기에 휴가 기억하는 초록으로 가득한 계곡은 지각 가능한 것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흐릿한 기억처럼 추억과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또한 아일랜드의 대지를 감싸는 환경, 분위기, 숨결과도 같은 것이다. 존 포드가 그려내는 아일랜드인의 기질은 그런 초록의 대지와 호흡하며 탄생한다. 남성다움의 본성, 즉 의리와 자부심 말이다. 이는 남성들의 다툼과 싸움에서 드라마틱하게 표현된다. 이를테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휴는 저급한 탄광촌에서 왔다는 이유로 급우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는데, 그는 동네 아저씨에게 익힌 권투기술로 괴롭히는 친구들과 싸움을 벌인다. 이 때 싸움은 서로 주먹을 공평하게 교환하는 게임과도 같은 것으로 아일랜드계의 남자다움과 우정을 획득하는 통과의례와 같은 순간을 표지한다.

탄광촌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긴 행렬을 이루어 함께 노래를 부르며 퇴근하는 장면이 영화에서 몇 차례 반복적으로 보이는데, 꽤나 인상적인 순간이다. 이들은 모두 집 문 앞에서 기다리는 대지의 신과도 같은 어머니의 에이프런 속에 하루 벌어온 돈을 꼬박 집어넣는다. 근면하고 억척스런 어머니는 아버지만큼이나 자부심과 의지가 강한 존재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임금 삭감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인 마을 청년들이 완고한 아버지가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다며 비난을 퍼붓자 이에 참을 수 없었던 휴의 어머니는 파업참가자들의 회합에 참석해 수많은 사내들을 향해 ‘누구든 남편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소’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어머니의 분노와 의지의 표명이 휘몰아치는 겨울의 매서운 눈발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다. 그러나 가족애와 우애, 그들의 근면한 삶도 한번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세상사의 법칙을 넘어설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구는 경제적 곤란 때문에 집을 떠나고 누구는 결혼 때문에,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갱도에서 삶을 마감한다. 사건의 관찰자이기도 한 어린 휴의 순수성은 가족의 해체와 공동체 성원들의 멸시와 조롱, 형제와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하며 변모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휴의 어깨에 기대어 아버지가 삶을 마감하는 장면이 이것의 정점에 해당한다. 이 순간 휴는 망연자실한 듯이 빈 시선을 허공에 던지는데, 이 때 모진 현실은 저편의 기억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마치 꿈같은 세계가 펼쳐진다. 아버지와 푸르른 계곡을 함께 거닐던 행복했던 순간, 이혼 때문에 완고한 마을주민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한 누나의 귀환, 일자리를 얻기 위해 고향을 떠났던 형들이 저 멀리서 돌아온다. 행복한 기억이지만 동시에 비애로 가득한 숭고한 장면이 아일랜드의 거대한 하늘 아래에서 벌어진다.

존 포드는 거대한 하늘을 밑그림처럼 활용해 거기에 대지와 공동체, 인간사의 이야기를 숨결처럼 화면에 불어넣었던 영화작가로 서부극은 그런 에센스를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르였다. 2차대전이 끝난 뒤에 만든 서부극 <황야의 결투My Darling Clementine>(46)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다. 이 영화는 서부극에서 자주 회자되는 전설적인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그린다. 닷지 시티에서 유명했던 보안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형제들과 소를 몰고 떠돌아다니는 와이어트 어프(헨리 폰다)는 막내 동생이 톰스톤에서 클랜튼 일가의 습격으로 살해당하면서 복수를 결심한다. 서부에서 가장 거대한 무덤이 있는, 어둠과 타락의 마을인 톰스턴에서 와이어트 어프는 다시 보안관 배지를 달고 도박장을 운영하는 닥 할러데이(빅터 마튜)와 연대해 클랜튼 일가와 전투를 벌인다. 이런 복수를 둘러싼 이야기에 동부에서 톰스톤을 찾아온 아름다운 클레멘타인과의 미묘한 사랑이야기가 함께 한다. 

평자들은 존 포드의 서부극을 호메로스가 그리스의 신을 노래하는 것처럼 미국 개척기의 영웅들을 찬미하는 일종의 역사극으로 평가한다. 그의 영화에서 진정한 주인공들은 서부를 개척하고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이민자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노력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대중들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공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미국 남서부의 모뉴먼트 밸리가 그가 만든 서부극의 주된 장소다. 거대한 메사와 이를 감싸는 무한과 숭고의 감정을 불러오는 하늘이 있다. 그 아래에서 인간들은 공동체를 건설해 거주하고 경작하고 또 신을 향해 예배와 찬양을 벌인다.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와 클레멘타인이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들은 모뉴먼트 밸리를 배경으로 이제 막 건설 중이라 기둥만 세워져있는 교회에서 마을 주민들이 환호 가운데 조금은 어색하지만 흥겹게 춤을 춘다.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한 집합적인 상상력이 가장 적절하게 표현된 장면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영웅적이고 국민적인 통합의 신화는 공동체 내부에 내재한 갈등의 해소룰 통해 표현된다. 톰스톤에 처음 도착한 와이어트 어프는 총질이 난무하고 인디언이 바에서 소란을 피우는 장면을 묵도하며 연신 ‘도대체 뭐 이런 마을이 다 있냐’며 사람들에게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동생의 죽음 때문에 다시 보안관직을 맡아 마을에 머무는 것은 클랜튼 일가와의 최종적인 결투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존 포드는 공동체 내부에 스며든 어둡고 곤혹스런 문제들을 사회적 합의를 거쳐 해결해가는 과정을 외부의 적과의 단선적인 대결보다 더 중요하게 다룬다. 여기서 영웅은 한 명이 아니라 이중화되어 있다. 그 하나가 전통적인 관습을 중시하는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라면 다른 한 명은 리버럴한 독 할러데이다. 이 둘은 마을의 질서와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인다. 이는 법보다 도덕이 앞서는 다툼으로 증오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우정과 연대를 위한 통과의례이다. 동부에서 온 아름다운 여인 클레멘타인과의 사랑 또한 이중화되어 있는데, 시간의 서로 다른 두 방향과 연결된다. 그것은 과거(예전 독 할러데이는 동부에서 그녀를 사랑했지만 이미 그녀를 두고 떠났다)와 미래(톰스턴의 교사로 정착한 그녀는 어프의 미래의 여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로 열려있는 시간의 이미지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와이어트 어프는 막내 동생의 무덤가에서 묘비에 적힌 연도표기를 보며  짤막하게 한탄한다. ‘그래 18년을 살았구나.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났구나. 너 같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그런 마을이 될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란다.’ 어프의 다짐은 순수성을 지켜내겠다는 결의의 표현이다. 다시 무기를 손에 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종종 이 장면의 비극적인 정서를 두고 2차 대전으로 인한 전쟁의 상처가 영화에 기입된 것이라 말해진다. 클랜튼 일가와의 전쟁이 끝난 뒤, 질서가 회복됐을 때 와이어트 어프는 학교의 새 선생이 된 클레멘타인에게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약속하고 다시 서부로 말을 타고 떠난다. 순수성과 미래의 희망을 간직한 클레멘타인은 떠나는 그를 저 멀리까지 쳐다본다. 역시 행복과 비애가 가득한 숭고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김성욱)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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