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사상, 소멸되지 않는 우크라이나의 예술 정신

-알렉산드르 도브젠코의 영화 세계

지난 6월 4일, 알렉산드르 도브젠코의 <대지> 상영 후에 우크라이나 평론가이자 전 도브젠코 센터의 부소장이었던 세르게이 트로임바츠가 시네마테크를 찾았다. 강연에서 그는 도브젠코 감독의 예술 세계가 우크라이나의 전통과 문화에 기인한 것임을 역설했다. 상대적으로 문화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1920년대 ‘우크라이나 삼부작’의 성취에서 시작해 스탈린 시절 정치와의 불화로 극적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았던 도브젠코의 삶과 영화를 논했던 강연의 일부를 소개한다.


세르게이 트르임바츠(영화평론가) 함께해 주신 관객들과 이런 자리를 만들어 준 시네마테크에 감사드린다. 아마도 세계적으로 알렉산드르 도브젠코라는 이름은 러시아 감독, 혹은 소련 감독으로 알려져 있을 것이고, 러시아 내에서도 자국 감독으로 거론되곤 한다. 하지만 사실 도브젠코는 우크라이나 감독이다. 감독의 삶은 말하자면 극적 드라마 같다. 비극적 시기도 있었고, 그것이 도브젠코의 영화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브젠코는 1917년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열성적으로 환영했던 인텔리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는 김나지움의 교사로 일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적백 내전 당시 우크라이나 군대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포로로 사로잡히기도 했었고, 볼셰비키 비상정부가 도브젠코를 강제수용소에 수감시킨 적도 있다. 이러한 이력 때문에 그는 이후의 사회 생활에서 많은 이들에게 ‘민족주의자’라는 명목으로 밀고를 당하곤 했다.


수많은 세월을 공산주의의 적으로 살아왔던 도브젠코는 결과적으로 그 체제의 충실한 수하 역할을 했다.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당시 그는 우크라이나 볼셰비키당 소속 지인들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된다. 그는 처음 바르샤바와 베를린에서 외교관으로 파견된다. 1923년 우크라이나로 귀국한 뒤에 2년 정도 풍자만화나 삽화를 그리는 일을 했고, 1926년 오데사에 파견되어 처음으로 영화 촬영을 하게 된다. 영화 문외한이었던 도브젠코가 수습 스탭으로 시작해 감독의 자리에 이른 것은 3년이라는 짧은 기간의 일이다. 파리, 베를린, 프라하, 런던 등의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즈베니고라>, <대지>, 그리고 <병기고> 같은 작품들을 만드는 것으로도 그의 명성이 증명되었다.

도브젠코는 처음 코미디 영화 한 편과 모국 영화를 한 편 찍었고, 그 이후 <즈베니고라>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많은 영화학자들은 이 영화가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세계관을 반영한 최초의 영화라고 평가하고 있다. 영화에 담긴 세계관은 많은 부분 우크라이나의 작가 고골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즈베니고라>는 우크라이나가 가지고 있는 전통을 잘 담아내고 있다. 영화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선사 시대, 고대 시대, 현대 시대, 그리고 미래 시대로 구분한다. 영화 속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왕국이 잠들어 있고 왕국을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하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그 열쇠를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 계속된다. 그러면서 영화는 우크라이나를 부활, 재생시킬 수 있는 열쇠는 미래가 아니라 지나온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와 현대의 시간을 살아왔던 우크라이나를 미래에는 정작 찾아볼 수 없고, 그래서 우크라이나를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땅속에 묻힌 보물창고로 은유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미래에 부활할 우크라이나이다. 그리고 그 보물을 찾는 인물은 영생하는 할아버지다.

이와 비슷한 상상을 했던 작가로 러시아의 이반 부닌이 있다. 이 작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크라이나를 박물관 같은 나라, 모든 게 굳어진 나라로 표현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나라를 다시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고 오히려 그대로 놔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도브젠코는 그와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의 시각은 오히려 볼셰비키 정권의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의 볼셰비키 정권은 러시아 제국이 마치 잠들어 있는 에덴동산과 같기 때문에 그것을 깨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잠에서 깨우는 방법은 첨단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촌이나 마을이 배경인 영화를 보면 항상 트랙터 소리로 그 마을을 깨우는 듯한 장면들이 자주 나타난다.


<즈베니고라>


<즈베니고라>에서 이런 주제를 두 명의 손자에 반영하고 있다. 첫 번째 손자는 과거에서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 손자는 볼셰비키의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미래를 지향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영화의 결말은 당시의 관점으로 비춰볼 때 다분히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기차를 타고 할아버지가 어디론가 가는 장면으로 끝맺고 있는데, 당시에 기차는 진보를 상징하는 아이템이었다.

도브젠코는 그 이후 <병기고>라는 영화를 만든다. <즈베니고라>의 예술관이 <병기고>에서도 여전히 보인다. <병기고>는 독일식 표현주의의 스타일을 하고 있다. 제1차 대전 이후에 겪었던 비극적인 상황을 표현주의로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식 표현주의는 극단적인 형상화를 추구했다. 영화 초반에는 세계 대전이 종식되어 갈 즈음의 시골을 담아내고 있다. 그 마을에는 삶 혹은 영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영화는 어떻게 하면 생기를 잃은 삶을 회복시킬 수 있을지, 민중의 힘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지 고민한다. 영화가 제시하는 답은 명료하다. 메시아로서의 사명감을 가진 인간이 등장해야 한다. <즈베니고라>, <병기고>, <대지>. 이 세 영화는 하나의 맥을 잇는 삼부작으로 볼 수 있다. 세 작품은 당시 볼셰비키 정권의 목표와 사명, 다시 말해 생명력이 고갈된 인간에게 어떻게 생기를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이어지고 있다. <병기고>의 원제는 ‘아스날 Arsenal’이다. 키에프에 있는 한 공장을 일컫는 말로, 이 공장의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정부에 의해 잔인하게 제압된다. 결말이 굉장히 상징적이다. 주인공은 쏟아지는 총알에 절대 맞지 않고 있는데, 이는 영원히 죽지 않는 메시아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생의 테마는 <대지>에서도 지속된다. 이 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지>에서 주인공은 총을 맞고 죽게 되며, 장례까지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장례를 치름과 동시에 어머니가 그의 동생을 낳는 장면이 같이 나타난다. 주인공의 삶이 동생의 출생으로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는 주인공의 신부가 다른 청년의 품에 안겨서 청년에게서 죽은 주인공의 얼굴을 찾는 장면이 나타나기도 한다. 주인공은 죽었지만 여전히 삶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대지>라는 영화는 언뜻 선동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1930년대에는 영화가 정치적 선동 수단으로 활발히 활용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영화 감독들은 볼셰비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을 대중들에게 인식시키고 세뇌시켜야 한다는 과제를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본 스탈린은 굉장히 분노한다. 스탈린은 집단농장화, 계급투쟁을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고 도브젠코의 영화를 비판한다.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부농과 빈농 간의 싸움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영화 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열매 등으로 풍요로움이 나타나는 장면을 보면 굳이 싸울 이유가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집권 당국의 분노를 샀던 몇몇 장면들은 통째로 잘려나간 채 상영되었다. 그중 하나는 주인공의 신부가 장례에서 나신의 상태로 미쳐서 광분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인간의 개입으로 도전받은 자연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는 정치적인 선전성을 볼 수 없다. 서방의 영화 평론가들이 <대지>를 분석했던 의미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중요한 주제는 메시아니즘이다. 인간을 새로운 생명으로 만든다는 주제가 나타난다. 또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1920년대 오스발트 슈펭글러라는 서유럽의 학자가 『서구의 몰락』이라는 책을 펴낸다. 당시 러시아 혹은 우크라이나의 예술가들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쳤던 책이다. 이 책은 서유럽이라는 문명은 그것이 가진 힘을 모두 소진했고,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새로운 에너지를 끌어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시아는 러시아의 영토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이러한 사상은 우크라이나 민족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민족이라는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런 사상이 <대지>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대지>의 초반부에는 땅, 해바라기가 나타난다. 해바라기는 여기서 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체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우크라이나의 우주관이 담겨 있다. 그 세계는 죽음마저도 완전한 세계이다. 할아버지가 죽어가는 장면에서 그는 아주 평온해 보인다. 죽음은 동시에 영생의 시작이라는 신념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낙엽이 떨어져 거름이 되듯이 죽음은 자연스럽고 완전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보가 없고, 발전이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도브젠코는 볼셰비키의 입장을 대변한다. 자연이라는 완전한 세계가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자연 속의 인간은 너무나도 좋은 세계에 적응했기 때문에, 마치 황금 세상에 갇혀 있는데도 그 세상이 너무 좋아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시 구원자의 역할을 할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의 직업은 트랙터 기사이다. 그가 트랙터를 몰고 마을에 입성하다가 물이 떨어져 트랙터가 멈춰 버린다. 결국 도움을 받아 물을 채우고, 마을로 입성한다. 마을 전체가 그를 환영하고, 한쪽의 무리만이 아니꼬운 눈으로 주인공을 바라본다. 이 에피소드가 가지고 있는 모티프는 바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예수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이 고대 농업 문화의 대지-구원자 신화다. 대지로 들어가는 것은 남녀의 성관계처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이후에도 같은 논리로, 트랙터로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결국에는 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구원자라는 메시지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희생’이라는 모티프가 필수적이다. 구원자의 죽음이 없으면 마을이 부활할 수 없다. 그래서 주인공은 총을 맞고 죽게 된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죽음이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모티프가 반복된다. 죽음은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하듯 영화의 말미에 내리는 비는 대지에서 자라나는 과실을 적신다. 여기에서도 고대의 신화적인 논리가 다시 나타난다. 고대 신화에 따르면 하늘은 남자를, 대지는 여자를 뜻한다. 그 둘 사이의 매개가 비다. 하늘과 땅이 만나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주제가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대체 볼셰비키 정권은 이 영화를 보고 왜 분노를 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당시 볼셰비키 정권은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려고 했고 새로운 체계는 신화를 반영하지 않는, 객관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체계였다. 대중의 인식 속에 자리 잡아야 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신화나 신념이 아닌, 새로운 신화와 신념이어야 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주장을 상기해 보고 싶다. 문화라는 것은 인간과 자연을 최대한 조화롭게 만드는 시스템인데, 그것이 기력을 소진하고 기계와 기술, 그리고 스포츠가 주를 이루는 문명이 그것을 대신할 것이라는 주장 말이다.


<대지>


<대지>를 제작한 이후에 도브젠코는 서유럽 국가들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 여행을 통해서 <대지>라는 영화가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다. 그 이후 도브젠코는 프랑스나 독일에서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그러다 1930년 9월에 서둘러서 귀국하게 되는데, 정부에서 소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환된 직후 정부로부터 수력발전소의 선전 영화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결과 탄생한 영화가 <이반>이라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지도부의 반감을 샀고, 그로 인해 다시금 총살 대상에 포함되게 된다. 그래서 감독은 자신의 배우자인 율리아 솔른체바와 함께 도망가려 했지만 모스크바의 슈바츠키라는 감독이 다시 그를 불러들인다. 이 과정에서 도브젠코는 모스크바로 가게 된다.

하지만 도착하고 보니 자신을 부른 것은 슈바츠키라는 감독이 아니라 스탈린이었다. 독재자 스탈린과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만남을 통해서 스탈린은 <이반>의 유료 상영을 지시했다. 스탈린은 도브젠코와의 대화를 즐겼다. 도브젠코는 18세기 유토피아주의자들이 내놓았던 새로운 도시에 대한 이상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스탈린과 함께 나눴다. 스탈린은 아시아, 다시 말해서 러시아의 극동 지역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내용의 영화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이것은 아시아 르네상스라는 사상을 부활시키는 계기가 된다. 제2차 대전 이후에 도브젠코는 아시아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표현하기 위해 중국에 대한 영화를 찍고 싶어 했지만 정부는 그의 중국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그가 구상했던 영화는 <아에로그라드>라는 영화에서 나타나는 주제를 이어가려고 한 것이었다.

‘아에로그라드’는 하늘의 도시를 뜻한다. 땅이 아닌 하늘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내려진다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이 영화를 본 스탈린이 굉장히 좋아했고, 그래서 도브젠코에게 적백 내전을 영화화하라고 지시한다. 당시까지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나오는 혁명 영화가 없었던 때이다. 왜냐하면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볼셰비키 혁명을 환영하는 편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신화를 만들라고 주문한 것이다. 그 결과 만들어진 영화가 <시초르스 Shchors>(1939)이다. 스탈린은 이 영화를 보고 굉장히 흡족해했고, 도브젠코를 개인 자가용에 태워서 배웅을 해주기도 하고, 저녁 산책을 함께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도브젠코는 스탈린을 향해서 자신의 인생의 수호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53년에 스탈린의 사망 이후, 도브젠코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제 누가 나를 구해주지?’라는 염려를 적기도 했다.

흐루시초프가 우크라이나 공산당 위원회를 맡고 있었던 사람으로 도브젠코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도브젠코는 1943년에서 1944년 인생의 또 한 번의 전환점을 겪는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시기이다. 우크라이나가 소련과 독일이라는 거대 제국과의 싸움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도브젠코는 이 시기를 굉장히 힘겹게 보낸다. 1944년 1월 말에 스탈린이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고 그 자리에 도브젠코와 우크라이나의 몇몇 작가를 함께 소집한다.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도브젠코를 비난하게 된다. 하지만 정치국 회의 이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체포, 총살, 혹은 유배가 아니었다. 스탈린은 굉장히 간교한 사람이었고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였다. 도브젠코를 다시 집에 데려다주고, 작별인사를 건넨다. 스탈린은 “당신이 저지를 일에 대해서 언젠가 대가를 치르겠지만, 그때까지는 일을 계속하시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스탈린은 도브젠코를 좌지우지하면서 언제든 끊어낼 수 있게 한 것이다. 체포도, 유배도 당하지 않은 그는 영화를 계속 제작하게 된다. 하지만 도브젠코는 죽기 직전까지 평정심을 잃고 살아간다. 도브젠코는 공산주의라는 이념, 스탈린과의 친분 속에서 혼란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부활에 대한 신념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정확한 증거는 그가 생전에 남긴 일기장이다.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기록물이며 출판되어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미래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미래까지 그려보는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정리 ㅣ황선경 관객에디터

사진 ㅣ주민규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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