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B급 영화의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었다”

- 이해영 감독이 말하는 스튜어트 고든의 '지옥인간'

 

지난 27, 이해영 감독의 추천작인 <지옥인간> 상영 후 시네토크가 진행되었다. 이해영 감독과 진행을 맡은 허지웅 평론가는 B급 공포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며 가볍고 활발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눴다.

 

 

허지웅(영화평론가): <지옥인간>을 극장에서 보니까 감회가 새롭다.

이해영(영화감독): 이 영화를 처음 본 게 10대였을 때였는데, 당시에는 당연히 극장 개봉은 못했고 대신 비디오테이프로 출시가 되었다. 그때는 비디오테이프의 전성기였으니까 비디오테이프로 이 영화를 접하게 되었다. 오늘 극장에서 다시 보니까 굉장히 새롭다. 이런 영화였나 싶다. 사실은 오기 전에 걱정을 했었다. 혹시나 이 영화가 너무 혐오스러워서 관객들에게 죄송스럽지나 않을까.

허지웅: From Beyond’라는 원제를 한국에서 비디오로 출시하면서 ‘지옥인간’으로 바꾸었다. 테리길리엄의<브라질>에 ‘여인의 음모’라는 제목을 붙이는 센스는 참 이상하지만, ‘지옥인간’이라는 제목은 꽤 괜찮은 것 같다.

이해영: 오히려 ‘From Beyond’보다 ‘지옥인간’이라는 제목이 이야기와 테마를 더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다. 잘 지은 제목이다.

 

허지웅: 제작자인 브라이언유즈너와스튜어트 고든 감독 간의 협업관계에서 시너지 효과가 잘 발휘된 영화가 <좀비오> <지옥인간>이다. 시네마테크에 추천한 계기는 무엇인가?

이해영: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여하게 된 게 이번이 세 번째이다. 일 년 동안 상영되는 영화들 중 ‘우아한’ 영화들이거나 읽어야만 하는 영화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런 류의 선택에 딴죽을 걸고 싶은 마음이 일단 있었다. 어설픈 완성도로 몇몇 장면에서 실소를 터트리게 만드는 이런 영화도 있을 수 있다는 걸 환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B급 영화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굉장히 작아졌고 다들 A급영화만 지향하는 세상에서 이런 영화들도 즐거움이 있었다는 걸 공유하고 싶었다.

 

허지웅: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감흥도 있다.

이해영: 요즘 영화들에 물리적으로 확 느껴지는 공포의 쾌감이 덜 느껴지는 이유가 CG 만능주의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아날로그 특수효과에 의존하고 있으며 CG는 거의 없다. 크리처들을 만들고 배우들과 함께 부딪히고 하는 부분들은 아날로그 특수효과를 사용하는 것이 보는 입장에서도 더 가깝게 느껴진다.

 

허지웅: 원작의 내용은 엄청 간단하다. 송과선에 대한 언급은 소설에서 한줄 정도 나오는데 이렇게 만드는 것도 멋진 각색이다.

이해영: 대중들에게 요구받는 몇 가지 코드가 있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로 잔인해야 하고 여성의 누드가 나와야 하고 이런 것들. 아이디어에 가까운 것을 부풀리면서도 제작자들의 요구를 완벽히 지키고 있다. 오늘 다시 보면서 이 사람들이 허투루 영화를 찍는 사람들이 아니구나 싶었다. 예전에 이 영화를 볼 때는 너무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테이프로 봐서 색에 대한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극장에서 다시 보니까 공진기를 돌리는 장면에서 파란색과 분홍색이 주된 색깔이더라. 배우들의 크레딧도 블루와 핑크로 포인트를 줬고, 미학적으로 좋은 조합이란 생각이 든다. 프로덕션 기간이 매우 제한적이었을 텐데 이런 식의 라이팅 컨셉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관객1: 인간의 욕망이라는 테마와 이 영화가 어떤 관련이 있을지.

허지웅: 공진기가 사람들의 어떤 규율에 의해 억눌려있던 욕망을 해방시켜주는 측면은 있다. 어떤 사람은 섹스를 하고 싶게 되고, 어떤 사람은 밥을 먹고 싶어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학대하고 싶어 하고.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 욕망이라는 텍스트로 정교하게 얘기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크레포드가 뇌를 먹게 되는 것은 욕망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좀비 코드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이해영: 영화에서도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라기보다는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은 지적 욕구 때문에 기계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욕망이라고 말하기는 정확하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 이 영화에서 자신의 욕망 때문에 스위치를 올린 것은 캐서린뿐이고 그녀가 이를 통해 자신의 몰랐던 자아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욕망과 관련된 텍스트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관객2: 저번 영화제에서도 <이블 데드>를 추천하려다가 <매드맥스>를 추천했다. 공포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가장 좋아하는 공포영화는 무엇인가?

이해영: <지옥인간>추천평을 쓰면서도 했던 얘기인데, 나의 10대는 영화나 음악에 대한 위악적인 취향을 숨기지 않고 즐겼던 시기였다. B급 공포영화를 좋아하였으며, 음악도 데스 메탈을 좋아하고 해골만 들어가면 “이 음악은 내꺼다” 그랬다. 하지만 취향은 계속 변하는 거다. 요즘은 호러영화는 역시 구로사와 기요시의 호러영화가 ‘역시’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로프트>를 다시 보면서 기요시는 모든 쇼트 하나하나가 배울 점으로 가득하구나 싶어졌다.

 

관객3: 감독님 영화에서 B급 취향이 폭발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이런 영화를 찍을 생각은 없는지.

이해영: 미국인으로 미국에서 영화를 찍었더라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B급 취향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도 이를 적절히 끌어내는 것을 고민했었는데 <페스티발>은 좀 많이 넣었다가 시장에서 철저히 사장되었다. 다음에는 철저히 B급 취향을 배제하려고 한다.(웃음)

 

 

관객4: <페스티발>을 처음 봤을 때 신선한 느낌을 받았는데 어떻게 만들게 되셨는지 궁금하다.

이해영: 조금 먼 얘기부터 시작하자면, <페스티발>을 만들기 전에 <26>이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었다. 리허설까지 다 마친 상태에서 촬영까지 일주일정도 남아있던 상태였는데 영화가 엎어졌다. 나에게는 정말 괴로운 영화였다. 다른 영화를 빨리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원래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척 살았다면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흥행이 안 될 것이라며 주변에서 많이 말렸다. 저예산으로 찍어서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15세 관람가의 라이트한 섹스 코미디를 만들자 해서 노출도 없고 행위도 없는 섹스 코미디를 만들었다. 결론적으로는 19세를 받았지만 말이다.

 

정리: 박민석(관객에디터) | 사진: 문지현(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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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후의 사나이> 상영 후 허지웅 평론가 시네토크 지상중계

 

지난 8월 4일, 무더위의 한 가운데 <지상 최후의 사나이> 상영이 끝나고 허지웅 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열렸다. 장르 영화에 대한 애착과 사유는 물론이고, 토크만으로 유혈이 낭자하던 즐거운 시네토크 현장을 전한다.

 

 

허지웅(영화평론가): 좀비 이야기는 타자, 혹은 이방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결정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와 다른 것들을 죽이고 없앨 것이냐, 혹은 융합해 살아갈 방법을 모색할 것이냐 하는 두 가지 태도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또한 타자를 없앤다는 선택지를 골랐을 경우 그 과정 안에서 ‘우리는 과연 그것들에 비해 무엇이 나은가’,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조금 더 깊이 있는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보신 <지상 최후의 사나이>는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최초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매드슨의 단편들은 굉장히 기발한 설정을 통해 소름 끼치는 결말을 이끌어 내는, 짧은 이야기의 미덕을 가진 작품들이다. 반면 <나는 전설이다>는 중편으로, 기존의 매드슨 소설에서 느껴보지 못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54년 작, 이 영화는 64년 작이다. 이후 80년대에 찰톤 헤스턴을 주인공으로 한 <오메가 맨>으로 다시 영화화되었는데, 우리나라 공중파 TV에서도 자주 보여준 작품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 2007년에 <나는 전설이다>라는 제목으로 나온 작품까지 총 세 번 영화화되었다. 그나마 원작 소설의 내용을 많이 훼손하지 않고 영화화한 사례가 역시 <지상 최후의 사나이>인데, 매드슨이 이 영화의 각본을 직접 썼다. 그러나 오프닝 크레딧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완성된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이름을 뺄 것을 요구했고 대신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이 영화를 마냥 싫어했던 것은 아니고, 이 영화가 실망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지점을 지적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타당한 것 같다. 먼저, 주인공 빈센트 프라이스의 캐스팅이다. 프라이스는 B급 호러물의 영웅이자 아이콘인 위대한 배우였고, 많은 비뚤어진 감독들의 유년기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다만 워낙 유명한 스타다보니 약간 ‘꼰대스럽게’ 구는 부분이 있었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 시체들이 널린 디스토피아의 풍경이 펼쳐지며 모건이 트렁크에 시체를 싣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더미를 쓰면 더 많은 시체를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프라이스가 극의 완성도와 사실감을 위해 굳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써야 한다고 우겼다고 한다. 그래서 진짜 배우들을 쓰게 되었는데, 자세히 보면 프라이스가 극장에서 시체를 옮길 때 굉장히 조심스러워 한다. 시체가 널린 도로를 차로 달리는 부분에서도 굉장히 서행한다. (웃음)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 부분이 있었고, 결정적인 문제는 당대의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빈센트 프라이스는 목소리 자체가 브랜드화 되었던 사람이다. 당시 ‘페이머스 고스트 스토리즈 Famous Ghost Stories’라는 TV 쇼의 진행을 맡고 있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교할 대상을 찾기 쉽지 않은데, 굳이 말하자면 ‘전설의 고향’이 끝날 때 ‘이 이야기는 전남 순천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 시어머니가…’ 같은 내레이션을 하는 목소리 같은 것이다. <지상 최후의 사나이>에는 초반 내레이션이 굉장히 많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심각하게 몰입하기는커녕 키득키득 웃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매드슨은 미스캐스팅이라고 생각했고, 제작진을 많이 꾸짖었다고 한다.

 

 

영화의 진행은 좀 루즈한 편이다. 당시에 표현할 수 있었던 기술적 한계도 있었고, 연출력의 문제도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시나리오 단계에서 제작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본래는 해머 영화사에서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이태리 합작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 어쨌든 64년, 즉 60년대 초반에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해주셨으면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건 엄밀히 좀비가 아니고,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좀비가 아니다. 하지만 좀비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이 영화를 빼놓을 수는 없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괴물에 대한 이미지는 명확한데, 제임스 웨일이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속편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의 첫 장면이 그것이다. 이 영화는 괴물이 마을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며 풍차에 몸을 숨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괴물은 우리와 다른 존재고, 아름답지 않은 외양을 가지고 있으며 소외 받는 존재다. 또한 우리가 기억할만한 유명한 괴물은 당시의 시대성을 담고 있다. 드라큐라나 미이라 같은 근대의 괴물들은 중세 이전의 세계관으로부터 오는 공포를 반영하고, 그 이후에는 환경오염이나 핵으로부터 비롯한 괴물들이 등장했다. 이런 소재성 외에 개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면 더 재미있어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괴물은 독자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1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좀비가 등장하며 괴물이 다수, 군중, 집단의 모습을 하게 된다. 개체적 공포보다 집단으로부터 오는 공포가 더 유효해진 것이다. 또한 그 좀비라는 유행은 68년도에 시작된 이래로 끊임없이 변주되고 확대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우리가 공포를 느끼는 존재는 여전히 개별화된 연쇄살인범보다는 무리와 집단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매드슨의 소설과 이 영화는 뱀파이어들을 다루고 있지만, 기존의 방식과는 굉장히 다르다. 신비주의적인 경로로 탄생하는 뱀파이어가 아닌 병균에 의해 전염되는 일종의 질병의 감염자들이다. 또한 이들이 마늘을 두려워하는 것은 신비주의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마늘이 함유한 특정 성분 때문이고,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토록 숭배하며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믿었던 신의 존재가 자신들을 내팽개친 것에 대한 무의식적 반감과 공포 때문이라는 것이다. 뱀파이어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하려고 한다. 결정적으로 무리를 지은, 군중에 가까운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매드슨의 원작이 최초였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은 후의 영화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조지 로메로 역시 <나는 전설이다>라는 텍스트로부터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이미지를 가지고 왔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자크 투르뇌르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를 비롯해 좀비가 등장하는 과거의 영화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에서 등장하는 좀비들은 부두교의 주술에 의해 만들어진 신비주의적 좀비였고, 대부분은 인종차별과 연관되어 있었다. 결국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좀비의 컨셉과 원형, 즉 물면 전염이 되고, 느리게 걸어 다니며 사람을 먹는 좀비를 만들어 낸 것은 68년에 조지 로메로가 만든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다. 결국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좀비 텍스트를 창조한 결정적인 동력이 소설 <나는 전설이다>와 영화 <지상 최후의 사나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전설이다>라는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정수는 괴물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즉 타자에 대해 어떻게 다룰 것이냐에 대한 문제를 명확히 꿰뚫는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역시 그렇게 뛰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괴물, 이방인에 대한 공포는 언제 어디서든 뒤집힐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지상 최후의 사나이>의 마지막 장면이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건 다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인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인간이 아닐 때 무엇이 정상이 되는 것인가. 저들이 절대적인 다수고, 내가 말 그대로 ‘지상 최후의 일인’이라면 내가 괴물이 되는 것이다. 로메로의 비전 역시 이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꾸준히 이어지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 같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도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는 좀비의 존재 자체보다는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이야기의 정수가 있다. 특히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흑은 벤이 민병대에 의해 좀비로 오인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는 부분이 중요하다. 당시 사회에서 흑인은 여전히 이방인이며 타자였고, 그렇기 때문에 좀비와 다를 것이 없다. 어찌 보면 굉장히 블랙코미디 같은 설정이다.

이번 시네바캉스에서도 90년에 톰 새비니가 리메이크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상영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원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왔고, 로메로가 상당부분을 함께 만들었으니 보시면 좋겠다. 이 리메이크판을 포함해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에 좀비 영화들이 굉장히 각광받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영웅 같은 감독들이 대거 등장했다. 스튜어트 고든, 샘 레이미, 피터 잭슨, 잭 스나이더 같은 감독들은, 어찌 보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나는 전설이다>라는 텍스트 없이는 등장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반지의 제왕>을 못 봤을 수도 있다는 건 약간 무시무시한 일이다. (웃음) 아무튼 어렸을 때부터 불우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감독들에게 이 텍스트들이 좋은 학습효과를 주었다는 점, 그래서 좀비 영화는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보는 안보든, 싫어하든 좋아하든 영향을 끼쳐 왔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또한 좀비 영화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지속적으로 걸출한 작품들이 나와 주었기 때문이다. 그 중 대니 보일의 <28일 후>도 꼽을 수 있는데, 그 영화에서는 좀비들이 뛰어다닌다. 아, 정말 무서웠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원래 인터뷰도 잘 안 하는 로메로 선생님께서 여기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비추고 말았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대체 왜 좀비가 뛰는지 알 수가 없다, 좀비는 이미 죽은 시체라 뛰면 당연히 관절이 분리될 수밖에 없다’는 오타쿠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웃음) 아무튼 이렇게 좀비 영화의 계보 안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한 실험적이고 멋진 영화들은 좀비 영화에서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지점들, 즉 괴물과 타자에 대한 태도라는 문제를 지금 우리의 현실에 맞는 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놀랍게도 한국영화를 이에 대한 적절한 예로 들 수 있다. 최근에 만들어진 <이웃집 좀비>의 후반부 에피소드는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했다가 마침내 개발된 백신으로 정상화 된 사회를 그리고 있다. 과거에 좀비였던 사람들도 백신을 맞고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흔적이 남아있다. 얼굴이 약간 썩어있다거나 비뚤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전에 국회의원이고 변호사였던 사람도 일용직 노동자가 되고, 그마저도 고용인이 그가 좀비였다는 사실을 알아채면 그대로 해고된다. 왜냐하면 좀비였으니까, 괴물이었으니까. 이는 노골적으로 우리가 이주 노동자를 다루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관객1: 오늘 강연의 주제가 ‘좀비의 정치학’인데, 인터넷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때 ‘좌빨 좀비’ 등의 좀비라는 키워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허지웅: 집단은 분명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 안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목소리만 강성하게 들려오는 경우 좀비 영화의 이미지가 떠오를 때가 분명히 있다. 그걸 좌빨 좀비, 수구 좀비, 뭐라고 부르든 아예 맥락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커다란 광풍이 몰아칠 때 사람들은 두 가지 타자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하나는 선의를 투영할 수 있는 우상으로서의 구루와 같은 아이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종류의 공포와 부조리를 덮어씌울 수 있는 괴물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들어낸다고 하는데, 이런 부분이 이번 정권 들어 여러 가지 상황이나 현실로 드러난 것이라 생각한다.

 

관객2: 괴물이나 타자를 대하는 선택지에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아우르려는 쪽을 선택하는 영화들도 있는지 궁금하다.

허지웅: 있다. 앞서 말씀드렸던 <이웃집 좀비>처럼 영화 속에서 좀비가 취급되는 방식이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취급하는 방식과 명백히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저들이 괴물이냐, 아니면 저들을 괴물로 다루는 우리가 괴물이냐’라는 질문을 던지며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려는 영화들이 있다. 또는 아예 직접적으로 이야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는 좀비가 된 친구를 쇠사슬로 감아 같이 살지 않나. 또 한국에 <리빙 데드3>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던 브라이언 유즈나의 영화가 아마 방금 질문하신 의도와 가장 부합하지 않을까 한다. 좀비가 되어가는 여자와 그의 연인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피해 함께 도망 다니다 끝내 용광로에 함께 몸을 던지는 내용이다. 좋은 영화니 꼭 보셨으면 좋겠다.

 

정리: 박예하(관객 에디터) | 사진: 박지연(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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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네바캉스 서울’ 영화제가 시작된 첫 주 주말이었던 지난 7월 29일 오후, 존 카펜터의 <괴물> 상영에 이어 변영주, 이해영 두 영화감독이 진행자로 나선 세 번째 오픈토크가 열렸다. 이번 토크의 주제는 ‘우리 시대의 불안과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고 초대손님으로는 공포영화에 대한 식견이 풍부한 허지웅 영화평론가와 <습지생태보고서>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만화가 최규석 작가가 함께했다. 그 날의 이야기를 일부 옮긴다.

 

 

변영주(영화감독): 오늘 이 자리는 구성이 재밌다. 공포영화 전문가 허지웅 평론가와 현재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이해영 감독, 그리고 공포영화를 잘 안 보고, 안 좋아하는 최규석 작가와 제가 함께 하게 됐다. (웃음) 최규석 작가님은 <괴물>을 어떻게 보셨는지.

최규석(만화가): 재밌게 봤다. 외계인 얘기는 왜 나오며 괴물들의 목적은 대체 뭔지, 안 풀리는 떡밥들이 너무 많아서 헷갈리긴 했다.

허지웅(영화평론가): 공포영화는 늘 그 시대의 가장 무서운 것들을 끌어온다. 존 카펜터의 <괴물>(1981) 이전에 하워드 혹스의 <괴물>(1951)이 한 편 더 있다. 이 두 영화는 둘 다 존 캠벨의 「거기 누구냐?」는 중편소설이 원작이다. 하워드 혹스의 영화가 다루는 것이 외부로부터 온 우리와 다른 것, 당시로서는 공산주의, 즉 레드 콤플렉스에 대한 메타포였다면, 존 카펜터의 영화는 우리 사이에 언젠가부터 같이 존재해왔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어떤 다른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피아를 식별할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공포라고 할 수 있다.

이해영(영화감독):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존경한다. 초반에 괴물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와 긴장감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 교과서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변영주: 이 영화에서 신기했던 건, 보통의 신체강탈자가 굉장히 공격적인 반면 이 영화에서의 변이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시치미를 떼거나, 자신들도 전혀 모르고 있다.

허지웅: 캠벨의 원작 소설에서 인물은 외계인에게 자기 몸을 뺏기고 나면, 자신이 외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인간일지,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이해영: 최규석 작가님은 공포영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셨다. 이런 식의 신체강탈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최규석: 어렸을 때는 필립 K. 딕 소설 처럼, 과거 S.F.소설들에서 자기 정체성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에 많이 공감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현실이 아닌 요소에 대해선 흥미를 느끼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영화를 보면서 놀래지 않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공포영화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의 기복보다 훨씬 더 담담하게 본다.

이해영: 워낙 작가님의 만화가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작가님의 작품 성향과는 정반대에 있는 것일 수 있겠다.

최규석: 오히려 침입으로 인한 공포 같은 것 보다, 굉장히 작은 실수로 인해서 편하게 살고 있던 자신의 인생이 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런 것이 제겐 가장 큰 공포인 것 같다.

허지웅: 개인적으로 끔찍한 장면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나 대사에서 공포를 느낄 때가 많다. <신체강탈자의 침입>(1956)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에 ‘그들이 여기에 있다’고 끊임없이 외치는 장면이 있다. 갑자기 화면을 향해 달려오면서 관객을 바라보며 소리 지르기 시작하는데, 너무 소름끼쳤다. 약간 초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변영주: 저는 타임슬립이 무섭다. 내가 가고 싶은 시대로 가면 상관없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는 공포다.

이해영: 요즘 유독 타임슬립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지금 복고라는 코드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 시대에 소외 받거나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것을 과거의 낭만이나 추억으로 보상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는 것 같다.

허지웅: 원래 사람들이 불행하면 과거를 끄집어낸다. 반면 행복하면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공간, 우주 같은 곳에 가보자는 프런티어 정신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요즘 한국 사회는 굉장히 불행한 것 같다.

이해영: 타임슬립이라는 코드는 굉장히 슬픈 것이다. 현재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지웅: 70년대 후반 이전까지는 영화에서 괴물이 카리스마를 가진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70년대 후반 갑자기 좀비라는, 군중으로서의 괴물, 무리로서의 괴물이 나타났다. 그게 한 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텍스트 속에서 변형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부분이 의미심장하다. 사실 어느 사회든 괴물은 소수이기 때문에 지탄을 받게 된다. 그런데 만약에 괴물이, 좀비가 절대다수가 되고 나 혼자 사람으로 남게 된다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누가 괴물일까. 이번 상영작 중 하나인 <지상 최후의 사나이>라는 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규석: 카리스마적인 괴물이라고 한다면 위에서 군림하는 권력 혹은 외부의 적일 수 있는데, 이후에 누가 괴물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상황은 그만큼 민중들 사이에서의 신뢰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뭔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는 불신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허지웅: <괴물>에서 피아식별이 안 되는 것에서 오는 공포도 그렇고,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더 많이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주변에 적, 또는 적은 아니더라도 나와 생각이 너무 많이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이 느슨한 계율에 의해서, 이를테면 같은 정당이라는 이름으로 묶여버리고 그러다 이제 와서 어떤 식의 커밍아웃에 의해 굉장히 큰 분쟁을 만들어내게 된다.

최규석: 그런 것 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형태의 공포인 것 같다. 어떤 지역사회에서 사람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을 때가 아닌, 도시에 나와서 따로따로 살게 되면서 갖는 타인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가 생겨난 것이다. 예전에는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는 식의, 집단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존재했었는데, 그런 신뢰 자체가 깨져버린 상황이 아닐까.

 

 

허지웅: 그런데 그런 신뢰라는 것이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

변영주: 그런 신뢰라는 것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영화로 보면 <마더>가 굉장히 상징적으로 느껴진다. 공동체, 관계, 신뢰, 혈연이라는 것들이 폭력적인 것이고, 원시적이고 괴물 같은 것, 무서운 것을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줬던 것 같다.

허지웅: 갈수록 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신념을 현실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야기 속에서 찾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다크 나이트> 3부작 같은 경우도 내내 공동체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해, 매번 어떤 신념이 깨어졌을 때 다른 신념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래서 좀비영화 같은 경우 급진적인 대안으로서의 공포물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싶다.

 

허지웅: 이 영화의 특수효과는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날로그 특수효과를 사용했다. 얼마 전에 나온 <괴물>의 프리퀄 영화에서는 괴물을 CG로 처리했는데, 정말 너무 안 무서웠다.

이해영: 영화에서 시각효과의 날이 무뎌지기 시작한 건 영화인들이 CG가 만능이라고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시각효과는 실제로 어떤 물건을 만들어 놓고 찍은 것이기 때문에 가상의 그래픽이 절대 대체할 수 없다.

최혁규: 특수효과 보다도 디자인이 정말 훌륭한 것 같다.

허지웅: 특수효과와 디자인을 모두 롭 보틴이 담당했다. 상대적으로 이름은 덜 알려져 있지만, <로보캅>이나 <세븐>, <파이트 클럽> 등의 영화를 했었다. 훌륭한 장인이다.

최규석: 특히 개가 갈라지는 장면은 정말 인상 깊었다. (웃음) 보통 괴물이라고 하면, 원래 존재하는 생물의 디자인을 변형하거나 결합하는 형태로 만들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던 맥락과 전혀 다른 형태가 나온다. 창조적이다.

 

관객1: 이런 장르의 영화들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다. 혹시 추천하는 공포영화가 있나.

허지웅: 가장 좋은 건, 영화의 원작들을 찾아보면서 비교해보는 방식이다. 만약 오늘 존 카펜터의 <괴물>을 보셨다면, 하워드 혹스의 이전 작품을 찾아보시고, 두 영화의 원작 소설을 같이 찾아본다면 정말 재밌다. <신체강탈자의 침입>의 경우, 50년대 돈 시겔 감독과 70년대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버전이 있고, 최근에는 다니엘 크레이그와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 <인베이젼>이 있다. 원작 소설인 잭 피니의 『바디 스내쳐』도 번역이 되어 나와 있다.

 

관객2: 최근 공포 영화의 경향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변영주: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 소설에서 주인공 여자아이는 원한을 가진 영혼이 누군가에게 들려져 있는 상태를 해결하는데, 그녀에게 어떤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일본사회는 이제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듣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최근에 영미권 장르작가들의 단편을 모아 펴낸 책을 읽었는데, 종말을 묘사하는 방식이 특징적이다. 이전과 같은 거시적인 방식이 아니라 아주 내밀하고 사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정리: 장지혜(관객 에디터) 사진: 황초희(자원 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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