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강좌] 오즈 야스지로를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기간 중에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세 차례의 영화사 강좌가 마련되었다. 그 첫 번째로 지난 9월 18일 오후 <동경의 황혼> 상영 후 시네마테크부산 관장을 맡고 있는 허문영 영화평론가의 강연이 이어졌다. ‘오즈의 이면’이란 주제로 펼쳐진 열띤 강연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허문영(영화평론가, 시네마테크부산 관장): <동경의 황혼>에는 오즈 야스지로의 유성영화 중에는 유일하게 겨울이 배경이고, 눈이 내린다. 오즈는 포커스 잡는 게 어려워지거나 하는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들 때문에, 영화에서 비나 눈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오즈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봄, 여름, 가을에 찍혀졌고 굉장히 밝다. 분위기나 주제에 있어서 밝다는 것이 아니라, 조명을 쓰는 데에 있어서 인물의 표정은 그늘이 없도록 가능한 밝게 처리한다. 그래서 일본의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의 촬영 방식의 특징을 가리켜서 ‘백주의 작가’, ‘한낮의 작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무성 영화시절에 겨울 장면이 나오는 영화들이 간혹 있었다. 예를 들어,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야>에서 눈이 나오는 장면은 의도하지 않은 장면이긴 했지만, 비애감을 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동경의 황혼>과는 다르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밤 장면이 유난히 많다는 것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이렇게 밤 장면이 많은 것은 이례적이다. 전후의 오즈의 영화에서 화면이 이만큼 어두운 느낌을 주는 영화도 없는데, 밤 장면이 많을 뿐 아니라 실내 장면에서도 얼굴에 약간의 그늘이 드리우도록 광원의 개수를 제한하고 있다. 마지막에 하라 세츠코와 류 치슈가 얘기를 나눌 때는 얼굴에 반쯤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동경의 황혼>은 1957년에 만들어진, 오즈의 마지막 흑백영화이다. 오즈는 이 영화를 끝으로 1958년의 <피안화>부터 그의 유작 <꽁치의 맛>에 이르기까지 여섯 편의 영화를 모두 칼라로 찍었다. 이 영화가 오즈의 마지막 흑백영화라는 점과 밤을 찍었고, 겨울이 무대고, 눈이 내린다는 사실들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오즈의 필모그래피에서 뿐 아니라 일본영화사에서 이 영화가 놓인 시점이라는 것은 약간 미묘한 점이 있다. 아시다시피 50년대는 일본영화의 황금기였다. 미조구치 겐지나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같은 감독들이 자신들의 최고의 작품들을 이 시기에 쏟아낸다. 거의 매주 영화사에 남을 만한 작품들이 극장에 걸리던 시기였다. 일본영화계의 가장 화려한 시기라고 할 수 있지만 50년대 후반에 이르면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영화사에서 보자면 전세계적으로 새로운 물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시작되며 일본 역시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하게 된다. 쇼치쿠는 오즈를 중심으로 한 서민극, 코미디, 현대극들 중심의 영화들을 채워왔지만, 닛카츠는 좀 더 도전적인 시도를 한다. 50년대 후반부터 쇼치쿠와 닛카츠의 시장 우위는 바뀌게 된다. 56년에 <태양의 계절>과 <미친 과실>같은 영화들이 나오면서 일본 영화계를 완전히 바꿔놓기 시작한다. ‘태양족 영화’라고 이름 붙여진 이 새로운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방종하고, 문란하며, 거침없는 젊은 세대인데 이들은 사회적 규범을 넘나들면서 범죄에 가까운 향락을 즐긴다. 염세적이고, 화려하고, 반항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렇게 태양족 영화들이 나오면서 일본영화계를 동요시키고 있을 때, 오즈는 이 <동경의 황혼>을 만든 것이다. <이른 봄>과 <동경의 황혼>은 당시에는 오즈의 실패작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이 영화들이 태양족 영화에 대한 지극히 보수적 반응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영화의 공통적으로 젊은 세대의 성적인 문란이 사건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직접적으로 서사 내에서 징벌이 가해진다. 그런 점들이 아마 젊은 세대의 등장에 흥분하고, 환호를 보내고 있던 당시의 풍토 안에서 보자면, 어딘가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자세로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오즈의 영화에서 <동경의 황혼>이 갖는 이상한 특징들이기도 한 밤, 겨울, 눈이 등장하는 순간 어딘가 오즈의 영화세계 전체를 흔들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흔들리는가. 사실 이 영화는 오즈의 영화 중 가장 이야기가 많은 영화이다. 대체로 오즈의 영화의 이야기를 특징짓는 점들은 가족 문제들, 딸을 시집보내는 일, 홀로 된 아버지를 재혼시키는 것, 노부모를 누가 모시는가하는 문제처럼 일상적인 일들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진폭이 굉장히 좁은 편이고, 에피소드 중심적으로 구성한다. 그런 것에 비해 <동경의 황혼>은 굉장히 끔찍한 이야기들이 계속 나온다. 류 치슈의 아내는 오래 전 다른 남자와 도망갔고, 아들은 이미 죽었으며, 큰 딸은 결혼을 했지만 고약한 남편을 만나 집에 들어와 있고, 작은 딸은 낙태를 하고 결국 죽게 된다. 많은 사건들이 이 안에 담겨져 있다. 왜 오즈는 자신의 마지막 흑백영화를 만들면서 이렇게 끔찍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가. 게다가 오즈의 영화에서 종종 노부모가 죽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태아와 젊은 딸이 죽는다. 굉장히 끔찍한 선택이다. 그리고 이렇게 비극적인 사건들을 끌어들이고 나서도 오즈는 자신의 내러티브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 즉, 오즈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오즈의 모든 영화가 어떻게 보면 이야기라는 기준에서는 굉장히 불친절하며, 각 쇼트들이 구조적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동경의 황혼>은 끔찍한 이야기를 복수로 가져오면서도 그러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제시된 이야기나 갈등 중에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이들은 갈등을 해결할 의지조차 없다. 인물의 노력 뿐 아니라 서사적 진행이 갈등의 해결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마치 자신은 사건의 해결에는 관심이 없다는 오즈의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오즈는 그 갈등들을 무심히 쳐다만 보는 듯하다. 아키코의 죽음을 얼마나 간결하게 처리하는지는 정말 놀랍다. 딸이 죽는 그 중대한 장면을 담아내는데, 심지어 관객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다. 병상 장면 직후, 하라 세츠코가 걸어가는 장면은 음악조차도 명랑해 보인다. 그래서 그녀가 엄마 앞에서 아키코가 죽었다고 말할 때, 이러한 흐름 자체가 굉장히 끔찍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마치 오즈의 이야기하는 방식, 무심히 바라볼 뿐 사건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듯한 오즈의 이러한 방식을 과연 견딜 수 있을지, 관객을 시험하는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동경의 황혼>에서 오즈는 사건을 던져놓고도 자신의 고유한 내러티브 구조로 완강하게 버텨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맹렬한 요구와 자신의 완강함이 충돌하고 있는 것 같은 긴장을 준다. 이 긴장이 오즈 영화의 많은 부분들을 변화시킨다. 그 많은 것들이 아마도 눈, 겨울, 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오즈의 영화에서 날씨에 관한 말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추운 겨울에는 너무 춥기 때문에 그러한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의 영화에서 날씨에 관한 말들은 의미 전달을 위한 대화가 아닌, 교화적 기능의 대화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겨울에는 이러한 교화적 대화를 할 수 없다. 이 모든 끔찍한 사태를 초래한 이유는 이 영화를 겨울에 찍었기 때문이다. 대화를 할 수 없음이 오즈의 영화에서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먼저 공간의 기능을 변화시킨다. 오즈의 영화에서 중요한 공간은 술집과 집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술집은 남자어른들이 친구들 동창들 동료들과 만나서 남자들의 일종의 유사 공동체를 확인하는 공간이다. 집은 두 종류의 공간이 있다. 1층은 남자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공간이다.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을 불러내 인사를 하거나 밥을 먹는다. 딸들은 대부분 2층에서 잔다. 대부분의 경우에 아버지는 2층에 가지 않는다. 2층은 딸들의 공간이다. 그래서 남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가족들은 1층에 다 소집이 되어야 한다. <동경의 황혼>에서는 이러한 공간의 기능 분담이 완전히 깨져버린다. 오즈의 모든 영화 중, 술집이라는 공간이 이 영화만큼 범죄의 분위기로 가득 찬 것을 본적이 없다. 이 영화에서 술집은 비공식적·공식적 매춘이 일어나는 공간이며, 따라서 두 남녀의 은밀한 성적 거래가 잠복해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오즈의 다른 영화들에서라면 술집이란 공간은 류 치슈와 친구들이 뭔가 얘기를 나누는 공간이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전혀 다르게 등장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만큼 류 치슈가 일관되게 불행한 영화가 없다. 그는 완전히 고립된 존재로 그려진다. 어떠한 자신의 공간을 가지지 못한다.


오즈의 영화에는 원인이란 없다. 인과관계 대신 다만 어떤 계열이 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자각성의 계열을 구성하는 최초의 자리에 눈이 있다. 눈이 내리고 추위가 닥치자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다. 친구는 사라지고, 공간의 기능은 무너지고, 아버지는 완전히 무기력해지고, 대화 상대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실패한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중간에 사라져버린다. 마지막에 남겨진 두 인물, 류 치슈의 전 아내와 그녀의 새 남자, 이 두 사람은 홋카이도로 떠난다. 오즈의 영화에서 홋카이도로 떠난다는 것은 마치 유배를 가는 듯한, 멀리 떠나서 이제 도쿄의 사람들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것이다. 이들이 떠나는 장면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는 스키를 들고 기차에 오르는 젊은이들이다. 나이든 세대들은 마치 영원히 떠나기라도 하듯 비장함을 보여주는데, 젊은 세대는 놀러가듯 스키를 들고 떠난다. 여기에 오즈의 영화적 공간 안에서 생기는 이상한 이질성의 충돌이 존재한다. 이 익명의 젊은이들이 기차에 타는 순간, 두 남녀이 보여주는 비장함이라는 것은 굉장히 우스워진다. 딸이 죽었는데 류 치슈는 눈물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 뿐이다. 어떠한 해결 없이, 모든 것들이 인과관계 없이, 무언가 정해진 길을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에서 가장 잔혹한 것은 시간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아주 강하게 상기시킨다. 이 영화를 체험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은 눈이 내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공간은 어떻게 변해 가는가, 사건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운명을 맞이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구조는 어떤 것인가, 하는 측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정은정(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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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선택,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 시네토크

2월 6일 토요일 오후, 홍상수 감독의 선택작 <오데트>의 상영 이후 허문영 평론가의 진행 하에 관객과의 대화가 펼쳐졌다. 느린 트래킹으로 시작한 영화는 보는 이를 유혹하기 위해 현란한 재주를 부리는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적의 순간에 가닿기 위해서는 긴 기다림이 필요했다. 하지만 영화가 마지막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우리 모두는 잉거의 부활을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20년 만에 <오데트>를 다시 보게 되어 너무 좋았다는 홍상수 감독의 애틋한 목소리에서도 마지막 순간의 떨림이 그대로 이어졌다. 허문영 평론가 역시 과도한 설명을 아끼려는 모습이었던 그 현장을 전한다.


허문영(시네마테크부산 원장, 영화평론가): 이 영화를 보신 많은 분들도 그렇게 느끼시겠지만, 다시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신비로운 영화인 것 같다. 먼저 감독님이 이 영화에 대해서 느끼시는 바가 궁금하다.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과 이 영화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신지.

홍상수(영화감독): 사실 관객 분들이 어떻게 보셨는지가 더 궁금하다. 이 영화를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 추천했고, 같이 볼 수 있게 돼서 좋았다. 스물일곱인가 스물여덟에 처음 봤고, 오늘 두 번째로 봤다. 대학원 다닐 때였는데, 소위 말하는 클래식이란 영화들을 찾아보고 있던 시기였다. 그 때 보자마자 평생 기억하고 있을 만한 영화라고 생각했고, 이후로도 가끔씩 생각했던 영화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학생으로서 중요한 레퍼런스 포인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게 이상적 표본이 된 영화 중 하나다. 이후에 가끔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면 카메라의 수평운동, 계속되는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과 긴 기다림이 기억난다. ‘긴 기다림이 있어야만 이 결말이 믿어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카메라 움직임부터 여기 나오는 인물들, 그들의 성격이나 인품, 단순한 세팅,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서 우리를 자꾸 어떤 믿음으로 몰고 가고 준비시킨다. 그리고는 아주 한참 걸려서 우리는, 물론 만들어진 그림이고 연기한 것이지만, 마지막 장면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것임을 믿게 된다. 다른 영화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정도의 기적은 많이 만들어지지만,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나 정말 믿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마지막 장면을 믿고 싶었고, 기적이 일어나길 기다렸고, 실제로 며느리가 다시 살아났을 때는 정말 믿었던 것 같다.

영화의 힘을 느꼈다. 이 영화에는 눈으로 기적을 볼 수 있게 만들고, 그것을 믿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영화는 만든 사람의 영악함이나 계산이 아니라, 만든 사람이 영화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이었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를 통해서 이런 것을 할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영화의 모든 부분들, 리듬이나 대사의 깨끗함, 인물들의 인품을 만들어낸 과정에서 만든 사람의 진지함, 충실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점들이 좋아서 칼 드레이어가 쓴 책을 읽어봤는데, 책은 좀 답답하더라. 좀 답답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충실함에 대한 바람, 관심, 열정이 있었던 사람인 것 같다. 충실한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우리는 그런 충실함으로부터 왜 멀어졌나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런 진심을 갖고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영화를 보고나면 내가 믿고 있는 헛된 잡소리들, 내가 쌓아놓은 관념적인 탑들, 사람들한테 잘 통한답시고 습관처럼 하는 제스처들, 과잉된 자의식 같은 것들 때문에 움츠러들어서 제대로 사랑해 주지 않은 내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봐도 이 영화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기독교 영화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이런 진지함과 충실한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영화다. 그런 중요한 문제를 환기시키고 건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화라 생각한다.

허문영: 말씀하신 것보다 더 나은 설명을 덧붙이기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몇 가지 질문을 드리긴 해야 할 것 같다. 기독교적인 부분들 때문에 얼핏 이 영화는 감독님과 안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굉장히 경건하고 금욕적인 분위기의 영화처럼 보여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 영화를 종교와 신앙 문제에 관해 고뇌하는 영화로 받아들이고, 잉거의 부활을 종교적 신앙의 실현, 믿음의 실현으로 이해하곤 한다. 기독교 영화로 보지 않으셨다면, 어떤 측면에서 이 영화를 보셨는지 궁금하다.

홍상수: 이 분이 어떤 배경에서 이 영화를 만드셨는지는 모르겠다. 기독교적 신앙이 있는 분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에서는 저 빌딩을 돌아서면 적이 있고, 적들을 죽이려면 오른쪽으로 돌지 왼쪽으로 돌지를 고민한다. 전쟁 얘기면 전쟁가지고 얘기하는 것이고, 연애얘기면 연애가지고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다루는 문제가 어느 정도의 현실 속 리얼리티를 갖고 있느냐하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이 영화도 기독교와 상관없이 봐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분이 정하신 주제의식과 환경, 재료들이 있는 것이고, 그것들로 만들어낸 인물들과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것들이 부딪히면서 어떤 작용을 일으키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너무 잘 만들어진 영화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음속의 충실함이란 것에 도달하려는 사람들이 회의를 느끼는 모습들이 여러 인물들에 잘 나뉘어져 있다. 첫째아들과 아버지, 반대편에 있는 재단사, 그 모두를 다 사랑하는 며느리, 미친 사람 취급받는 남자에 잘 나눠져 있다. 그들이 믿음에 관해 하는 얘기도 전혀 교조적이지 않다. 아마 영화를 보시면서 충분히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계속해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여하고 있는데, 작년에는 에리히 본 스트로하임의 <탐욕>, 재작년에는 장 비고의 <라탈랑트>, 그 앞에는 브뉘엘의 <절멸의 천사>를 고른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 추천작들을 보면 <오데트>를 포함해서 모두 무성영화거나 무성영화 시대에 자신의 이력을 시작한 감독들의 영화다. 무성영화의 자장 안에 있는 영화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본인은 유성영화시대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난 뒤에 영화를 시작해서 유성영화를 만드는 감독인데, 무성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호가 있는 것 같다.

홍상수: 무성영화를 많이 보지는 못했다. 추천작들이 오래된 영화들이기는 하다. 보신 분들은 어떠실지 몰라도, 그 무렵의 영화들이 좋다. 보고 진짜 훌륭하다고 느끼는 영화들은 이런 옛날 영화들이더라. 자연스럽게 나에게 박힌 영화들이 있다. 굳이 얘기하자면 뤼미에르 형제가 맨 처음에 만든 짧은 단편들을 좋아한다. 영화관에서 틀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쇼트들인데, 보고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안개 낀 부둣가에서 남자들이 배타고 가는 것을 찍은 쇼트가 있는데, 움직임 자체가 주는 느낌만으로도 예쁘고 아름다웠다. 영화의 원류가 된 분들의 영화에 많이 끌린다. 물론 초기 영화감독들도 전시대의 화가나 소설가에게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들이 영화적 완성도에 도달하면서 영화의 위치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계속 다시 보고 싶다고 느끼는 영화들은 대부분 그런 분들의 영화다. 그 이후의 감독들은 시기적으로 늦게 태어나서 할 수 없이 그 전의 것들을 흡수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단지 흡수한 것을 여러 가지로 섞을 때 자신의 태도가 반영되고 재능이 표현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은 공교롭게도 ‘말’이라는 뜻의 <오데트>다. 이 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은 우리가 보통 접하는 유성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런 점에서는 감독님의 영화에서 대사를 다루는 방식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듣기에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조화의 느낌이 있다. 대사가 정보 전달이나 의미 전달의 기능을 한다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육체로, 혹은 배우라는 육체에 부착된 물질적 음성으로서 감각된다. 듣고 있으면, 저 음성과 저 방식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말의 물질성, 육체성을 중시하는 점이 공통적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드레이어는 영화를 찍을 때 현장에서 음성을 매치시켜 보고 잘 안 맞다 싶으면 대사들을 빼버렸다고 한다. 감독님은 이 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셨는지.

홍상수: 개인적으로는 말들이 듣기에 너무 좋았다. 귀가 편했다. 내용은 자막을 통해서 이해했지만, 말들 한 마디 한 마디가 딱 있을 것만 있는 느낌이다. 인물들의 인품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하나도 거슬리는 것이 없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음악 같다고 할까. 쓸데없는 것이 붙은 곳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인물들도 무척 좋았다. 저런 시대나 장소가 실재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하나의 가치관 속에 묶여 살면서 그 속에서 서로 더 충실하려고 애쓰고, 가끔은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부닥치기도 하는 커뮤니티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오즈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도 현실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쁘지 않나. 하나의 큰 가치관 속에 묶여 있으면서 서로 충실하려는 사람들이고, 어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걸 극복하려는 애씀 자체가 예쁜 인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말하셨듯이, 물결이 조용히 흐르는 것 같은 카메라의 수평 트래킹과 롱테이크가 특히 인상적이다. 물론 롱테이크나 트래킹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이 영화에서는 각별한 느낌을 자아낸다. 드레이어는 영화사상 가장 격렬한 몽타주 영화 중 한 편인 <잔 다르크의 수난>을 만든 사람이지만, 전체 필모그래피에서 <잔 다르크의 수난>은 좀 예외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이 영화에서와 유사한 카메라 워크와 롱테이크를 더 선호했었던 것 같다. 드레이어 본인도 인터뷰에서 “나는 롱테이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다”고 밝힌 바가 있다.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청년시절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트래킹과 롱테이크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궁금하다.

홍상수: 처음 봤을 때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 그 답답함도 필요했었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 보면서는 훨씬 편했다. 나이 탓도 있겠고, 생각이 달라진 탓도 있을 것 같다. 그 때 놓친 것이 많았던 것 같다. 오늘은 인물들도 구경하고, 인물들이 만들어나가는 관계도 봤다. 사이사이에 구경하고 쳐다볼 게 너무 많아서 답답함을 못 느꼈다.

 

관객1: 영화를 본다는 체험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주는 위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신이 있나 없나를 따지기 보다는,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어떻게 관객이 체험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트래킹과 긴 호흡을 통해 보여준 좋은 영화인 것 같다. 보면서 베르히만의 <처녀의 샘>이 계속 떠오르더라. 그 영화도 굉장히 호흡이 길면서 마지막에 큰 울림을 주는 영화였는데, 보셨다면 어떤 느낌이셨는지.

홍상수: 그 영화도 봤지만, 이 영화를 훨씬 좋아한다.

허문영: 실제로 드레이어가 좋아했던 영화 중 한 편이 <처녀의 샘>이었다.

 

관객2: 작년에 필름포럼에서 <오데트>로 강연하실 때 마지막 키스가 주는 육체적 느낌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오늘 보니 훨씬 더 이상하고, 훨씬 더 육체적인 느낌이 든다. 마지막에 신을 부르는 대신 삶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이상하게 다가온다.

허문영: 마지막에 나오는 잉거의 키스 장면은 너무 외설적일 정도로 적극적이다. 아기가 네 동강이 나서 죽었다는 끔찍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다시 애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동물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 느낌까지 드레이어가 계산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이 영화에는 관능적이고 외설적이면서 육체적인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3: 진심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데, 믿음은 이성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순수한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 일어나야 가능한 것 같다. 공통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비슷한 것 같다. 영화에서 어린 딸이 신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엄마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라는데, 그런 순수함이 기적을 가능케 한 것 고, 거기서 오는 감동이 있다.

홍상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고, 그렇지만 잡으려면 잡을 수 없고, 또 있으면 엄청난 힘을 얻고 너무 편안해 지는 것이 믿음인 것 같다. 믿음은 특권 같다. 특권은 권리가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분석을 통해 믿음을 확보하는 방법을 찾거나, 증거가 있으니까 믿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제일 온전한 상태일 때 자기가 느낀 것, 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한다. 내가 본 것과 느낀 것을 통해서 이미 생각하기도 전에 내가 그것을 믿고 있는 거다. 하지만 내가 불안하고 흐트러져 있을 때는 온갖 잡것들이 낀다. 그러면 온전한 상태에서 느끼고 본 것을 자꾸 분석하려고 든다. 증거를 대야 믿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있어서 결국 못 믿게 만드는 거다. 믿음은 확고하거나 자물쇠로 채워놓은 것도 아니고, 내가 딴 생각이나 딴 짓거리 하고 다녀도 그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믿으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온전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내 속에 계속 믿음이 있을 수 있다. 믿음은 너무 많은 것을 주는 큰 행복이기 때문에 그것에 증거를 댈 필요도 없고, 그것을 남에게 자랑하고 팔고 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정리: 이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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