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후지와라'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3.02 “존 포드의 요소들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영화다”
  2. 2010.02.28 “가장 프리츠 랑다운 영화다”

<말 위의 두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본 비평가 크리스 후지와라의 존 포드 강연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대미는 미국의 비평가인 크리스 후지와라가 장식했다. 지난 26일에 이어 27일 저녁에는 그의 두 번째 선택 작인 존 포드의 <말 위의 두 사람> 상영 후 후지와라와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포드의 작품 중 가장 기이하다는 평가를 받은 <말 위의 두 사람>을 좋아한다는 크리스 후지와라의 강연은 <말 위의 두 사람> 팬들에게는 영화만큼 흥미로운 자리였으며, 존 포드 영화로는 이상하다고 여긴 관객들에게는 다시 한 번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말 위의 두 사람>이 갖고 있는 매력과 존 포드란 인물에 대해 꼼꼼하게 짚어준 크리스 후지와라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존 포드의 <말 위의 두 사람>을 이번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에서 평론가 크리스 후지와라 씨께서 선택해주셨다. 이 영화는 몇 분의 열렬한 지지층이 있는 반면 존 포드 영화중에서 가장 심심한 영화 또는 <수색자>라는 뛰어난 영화를 만든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이상한 컬트영화에 속한다. 포드 영화 같지 않다는 평도 들은 바 있고 작품에 대한 애호가 유독 나뉘는 작품이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가 흥미로운 자리가 될 것 같다. 이 영화를 선택하신 크리스 후지와라 씨를 모시고 존 포드와 <말 위의 두 사람>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크리스 후지와라(美 영화평론가): 이 영화는 좀 특이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포드 영화로는 마이너 영화로 간주되었고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의 내용을 가지고 비슷하게 반복한 영화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영화라고도 하였고, 상반되는 요소들이 많은 영화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포드는 이 영화를 통해서 이전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영화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하면서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포드는 이 영화를 통해서 미국과 개척사회, 백인들의 사회, 코만치 인디언들의 사회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포드가 만든 이상적인 서부영화에서 등장하는 군대도 등장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들의 많은 요소들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거기에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61년에 만들어졌는데 1956년에 만든 <수색자>와 굉장히 비슷하다. 두 영화 다 코만치 인디언들에 의해 잡혀간 백인 여성 또는 소녀들을 다시 찾아오려는 노력에 관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굉장히 다르다. <수색자>의 경우는 나탈리 우드가 열연했던 데비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 굉장히 감동적으로 환영을 받게 돼서 나중에 적응을 하고 사회에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에 이 영화에서 엘레나는 거부당한다. 엘레나라는 캐릭터가 코만치와의 육체적인 관계에 의해 정의 내려졌고 변절된 사람 더 이상 순결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수색자>에서 존 웨인의 캐릭터는 인종차별주의자로 인디언을 증오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끝에서는 그마저도 ‘데비를 죽이지 않겠다’라며 인종차별주의자적인 생각을 초월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방금 본 영화에서 러닝울프라는 10대 소년은 사형을 당하는데, 이것이 마치 심판과 변호인이 있었다는 정의로운 재판의 결과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백인들 깊은 내면에 있는 폭력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백인들의 타고난 폭력성이 발산된 장면에서 마치 공포 영화 같은 분위기가 된다. <수색자> 물론 무서운 영화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수색자>의 경우 최소한 같이 화합해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반면에, 이 영화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일부 비평가들의 말처럼 포드의 이전 영화와 다른 더 어두워진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서 인종들이 화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포드 영화에서 완전히 새로운 요소는 아니다. 거스리 맥케이브 역을 한 제임스 스튜어트와 엘레나가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끝 장면은 1939년에 만들어진 <역마차>와 비슷하다. <역마차>는 이전에 매춘을 했다는 이유로 사회가 버린 여자와 무법자 존 웨인이 마을을 떠나서 서부로 가는 모습이 나온다. 굉장히 유명해진 마지막 대사가 있는데 ‘그래도 최소한 이 사람들은 문명의 축복으로부터 구제를 받은 것이다’라는 말이다. 1939년에 만들어진 <역마차>에서조차도 백인들이 서부에 와서 보여준 사회의 모습이 이미 부패된 사회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위선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또 반복되는 요소가 있는데, 초반에 보면 제임스 스튜어트가 다리를 난간에 올려서 꼬고 앉아 있는 거다. 이것은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로 나왔던 헨리 폰다의 모습과 비슷하다. 여기서 왜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64년에 만든 <샤이안>에서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황야의 결투>에서 헨리 폰다가 했던 와이어트 어프 역을 맡은 바 있는데, 폰다와 굉장히 다른 것이, 폰다가 맡았던 와이어트 어프는 OK목장에 가서 적을 상대하고 서부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영웅이 되는 반면에, <샤이안>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맡은 와이어트 어프는 행동을 거부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냥 카드만 치고, 위기의 순간에는 떠나버려서 개입을 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이상 예전에 알려졌던 영웅이 아니고 이제는 안티-히어로 역할인 셈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는 결과다. 그래서 난간에 다리를 올리고 뒤로 기대고 있는 이미지가 반복되는 것을 과연 우리가 어떻게 받아드려야 되느냐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맥케이브를 <황야의 결투>에 나온 와이어트 어프와 비교해서 그보다 못한 사람으로 봐야 되는지, 포드가 자신을 비판하고 있는지라는 의문이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이미지가 영화 끝에 다시 나오는데 이번에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아니라 좀 더 어리고 우스꽝스러운 엉뚱하고 코믹한 캐릭터로 나온 워드다. 워드가 이제 보안관이 된 상황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는데, 워드가 이 자세를 취한 것은 포드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사람들에게 던진 대답이라 볼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이 포드가 자기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고 하는데, 포드는 이미지 그 자체로는 순수함이나 가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단지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언제든 차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보고 마음에 들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애착이 가는 캐릭터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그래서 행복하거나 만족한 상황에 머물길 원하는데, 포드는 이것을 거부하고 이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며 그런 것에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한다. 이런 이미지들이 꼭 필요한 이유는 다른 단계, 차원의 진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손짓이나 몸짓, 행동, 언어, 언어의 실패 또는 문제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 보면 내러티브 측면에서 몸짓이나 손짓, 행동 또는 언어에 있어서의 자유가 나타난다. 포드는 이전부터 추구하던 것들로 그의 초기 무성영화들에서도 특정 제스처가 나오는데 이 제스처들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 반복 되서 나타난다. 마치 의식과도 같아 보인다. 갈수록 그의 영화에서 이런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 <말 위에 두 사람>에서는 마치 그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과 캐릭터들을 보는 관점이 굉장히 포드답고 순수한 영화라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리처드 위드마크와 제임스 스튜어트가 타사코사 마을을 떠나기 전 강가에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3분정도 컷 없이 진행되는 장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이 장면을 거론한다. 여기서 두 사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지만 중요한 것은 위드마크가 스튜어트에게 결국은 왜 가기로 결정하기로 했냐는 질문이다. 스튜어트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긴 하지만 그 장면 길이의 3분이 거의 다 지나서야 대답을 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간접적인 접근 방식이 굉장히 포드다운 방식이다. 직설적으로 문제를 다루지 않고 오랜 시간을 걸쳐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끊기고 끊기면서 대화가 진행된다. 결국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중간에 끊기게 하는 것들에 집중을 하게 만든다. 시가를 피운다든가 벨이 다리에 차고 다니는 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든가 등 손짓, 몸동작, 겉으로 보기에는 즉흥적인 행동에 의해 계속 대화는 끊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결국은 대화 내용의 앞에 나서게 되면서, 스튜어트의 대답은 뒤로 밀려 끝에 나오게 된다. 이 장면이 대단한 것이 두 배우간의 리듬감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훌륭한 재즈 대가들이 같이 연주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즈 뮤지션들처럼 각자의 스타일로 연주를 하면서도 화합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위드마크의 경우 굉장히 단절되어 짧게 말을 하고 스튜어트는 광범위하게 편하게 얘기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느낌을 주는데 그 둘의 앙상블이 돋보인다. 이 장면은 제목과 관련된 것도 표현해 주고 있다. 위드마크의 ‘왜 가기로 했냐’는 질문을 바꿔서 얘기하자면 ‘왜 우리 두 사람이 타고 가야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 보면 말을 타고 어디로 간다는 것보다 둘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여정이 중심이 되는 내러티브를 가진 서부영화들, 특히 포드가 만든 영화들은 풍경의 아름다움이 중요시되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상징이 기본적으로 들어있다. 그러나 <말 위의 두 사람>에서 여정은 굉장히 단순하고 풍경에 대한 강조도 없으면 오히려 영화 안에서 여정은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아까 말한 것처럼 여기서는 말을 타고 어디 간다는 것보다는 둘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리차드 위드마크를 커플로 봤을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왜 둘이 친구인가’라는 점이다. 영화 초반을 보면 서로 이미 알고 있던 사이고 어느 정도 서로 애착도 있는 사이로 나타나지만 둘에 과거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그리고 영화 후반에 가서는 굉장히 적대적으로 변해서 우정이 계속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편에서 스튜어트가 겉치레식으로 경례를 하니까 위드마크가 그만하라고 하면서 우린 너무 오랫동안 친구였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스튜어트는 아니 도대체 우리가 친구라는 생각을 했냐고 반박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구나, 원래는 친구였지만 일어난 일 때문에 관계가 틀어졌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 후반부 무도회 장면에서는 적대적인 둘이 다시 친구가 되는데, 전에 싸웠던 것을 대화로 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시 친구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다시 친구가 되는 것이 포드다운 방식이다. 문제가 있었을 때 얘기하거나 해결하지는 않지만 이 두 사람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같기 때문에 다시 합칠 수밖에 없다. 둘의 우정은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전에 강가에서 둘이 대화하는 모습에서 강은 둘의 우정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포드가 갖고 있는 우정의 개념은 하워드 혹스와 비교하자면 굉장히 다르다. 혹스 같은 경우는 두 남자 사이의 우정에 관해서 직설적인 발언을 꼭 하게 된다. 그런 발언이 없을 경우에는 <스카페이스>처럼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죽이는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게 된다. 반면에 포드는 우정이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둘이 스크린에 모습이 나타나는 것만으로 우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어떤 대화나 의식이 전혀 없다. 그의 후기작인 <독수리의 날개>에서 존 웨인과 댄 데일리의 모습을 보면 진정한 우정 관계라고 볼 수 있지만, 둘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나 친밀감은 직설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둘이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만 묘사된다.

 

이제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많고 사랑받는 배우였다. 그렇지만 포드처럼 그의 연기를 지휘한 감독은 없었다. 그가 평상시에 말을 더듬고 주저하는 것처럼 반복하는 것을 극에 달하게 해서 일종의 비주얼 패턴처럼 보이도록 한다. 포드는 그의 말에서 보이는 언어의 매너리즘 조차도 제스처로 보이게 한다. 언어도 제스처처럼 개인적인 언어를 이용해서 말이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서부영화하면 떠오르는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에서 탈피한 듯 보인다. 그리고 일부 비평가들이 냉소적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일 텐데 오히려 저는 심오한 사실주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포드가 이전의 것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세계의 발달 과정에서 당연한 결과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 영화가 실제 만들어진 60년대 초, 그 때 당시 미국의 역사와 인종문제, 그리고 사람들 간의 분단을 다루고 있다. 또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사실주의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두 사람이 마을로 돌아온 다음에 존 맥킨타이어가 분한 프레이저가 말하기를 ‘내가 가르쳐주지 못한 것을 자네가 가르쳐주기를 바랐다’라고 했다. 이 말은 ‘신만이 신의 역할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이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대사를 듣고 떠오른 것이 <아파치 요새>에서 헨리 폰다가 말하길 ‘군대를 지휘하려면 제대로 지휘를 해라’라는 말인데, 말하자면 ‘신이 되려면, 신이 되어라’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할리우드라는 영화의 중심에서 가장 존경받는 감독인 존 포드가 신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존 포드인 나도 신의 역할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거와 같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영화 초반 맥케이브가 의자에 앉아있는 장면에서 맥케이브를 포드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포드는 30년 대부터 시력이 굉장히 나빴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60년대 가서는 거의 장님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점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자기가 못 봤다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봤다고 얘기해서 사람들이 무서워하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장님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봤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다면 저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것을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게 했다. 초반부 장면에 마을을 차지하러 온 두 도박사는 맥케이브를 무시하면서 ‘눈이 있지 않냐’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자면 ‘장님이냐 이 병신아’라는 심한 말을 하는거다. 맥케이브는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다 알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맥케이브가 하는 행동은 마치 감독이 하는 행동과 비슷하다. 맥케이브도 감독처럼 미션을 가지고 떠나는데 이것은 위험도가 높고 성공할 가능성이 낮으며,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예측불허의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만드는 것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을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서 관객에게 제시하듯이 이 영화 속에서 맥케이브는 두 명의 포로를 데리고 온다. 영화 속의 맥켄들러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자신이 부인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거짓말을 통한 위안이라고.” 부인에게 주는 것이 영화가 주는 거짓말과 같다. 특히 서부영화에서는. 그래서 관객이 받는 것 또한 거짓말 속의 위안이다. 현실감각이 뛰어난 포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대중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거짓으로 재현한 것으로 위안을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존 포드는 말하자면 의식의 대가이다. 왜냐하면 엔터테인먼트 역시 또한 의식이어서다. 이 의식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영화에서 재현되어서 잊을 수 있게끔 해주는 거다.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들 때 포드는 사람들이 과거의 일을 잘 잊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말 위의 두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본 존 포드 강연을 들어줘서 감사하다. (정리: 신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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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크리스 후지와라의 선택, <이유 없는 의심> 비평 강연

지난 2월 26일, 시네필의 선택 섹션에 마련된 프리츠 랑의 <이유 없는 의심> 상영 후 이 영화를 선택한 미국의 영화평론가인 크리스 후지와라의 비평강연이 있었다. 크리스 후지와라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프리츠 랑의 팬이며, 특히 <이유 없는 의심>을 그의 생애 베스트 10 편의 영화 중 한 편으로 꼽기도 했던 인물이다. 두 시간 가깝게 진행된 이날 강연은 프리츠 랑의 영화가 왜 위대한지, <이유 없는 의심>은 어떤 의미를 가진 영화인지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날의 강연 일부분을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시네필의 선택이라는 섹션을 마련, 두 분의 평론가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전에 국내 평론가로 정성일 씨를 모시고 두 차례 강연을 들은 바 있고 거의 마지막 행사로 이번에는 미국의 영화평론가이며, 자크 투르뇌르, 오토 프레민저, 제리 루이스 등에 대한 책을 쓴 크리스 후지와라씨를 모셨다. 방금 보신 랑의 <이유 없는 의심>이란 작품에 대한 후지와라 씨의 강연을 먼저 듣고 관객 여러분과도 다채로운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크리스 후지와라(영화평론가): <이유없는 의심>은 궁극적으로 프리츠 랑 감독다운 영화다. 영화의 정의를 내리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논리적이며 공포감을 조성한다. 특히 이 영화는 완벽한 스토리를 보여준다. 영화는 증거를 조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는 랑이 자신의 영화를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먼저 내러티브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작가에 관한 질문을 저절로 던지게 한다. 이 작품은 랑이 할리우드에서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이다. 저예산 영화이지만 여전히 상업영화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랑이 고른 것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만들라고 한 상업적인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랑에 대해 알고 있는 것, 랑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적합하게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놀랄 수밖에 없다. 랑은 미국에 건너가기 전 영화에 대한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랑은 독일에서 영광을 누리던 시절에는 UFA(독일의 영화사)에서 폭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배우도 그렇고 영화의 세부 사항을 완전히 통제했었다. 유명한 대작을 만들기도 했었고. 그런데 미국에서는 독재자 감독을 인정하지 않아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의 리듬과 연기 등을 조절했다.

<이유 없는 의심>을 랑의 전제 작품 맥락 속에서 얘기하자면, 랑이 미국으로 건너와 처음 만든 영화인 1936년 작 <퓨리(fury)>와 비슷하다. 두 영화 모두 살인을 다루고 있고, 외모로는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살인자로 등장한다. 관객은 이 살인자가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곧 잊어버린다. 그래서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더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살인을 했다니!’라고 말이다. <퓨리>에 등장하는 스물 두 명의 용의자들을 묶어서 모두 ‘존 도우(John Doe)’라고 부르는 것이 이런 점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 다나 앤드류스가 맡은 캐럿의 외모는 지극히 평범하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이란 상징성까지 갖는다. 이를 통해 영화는 우리가 ‘평범’이란 것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에 비판을 가한다. 역시 랑이 1956년에 만든 <도시가 잠든 사이에(While the city sleeps)>에서 다나 앤드류스는 언론인으로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평범하고 특징 없는 외모에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랑은 이런 이미지를 역이용해서 우리가 너무나 끔찍하게 여기는 것을 못 알아차리게 한다. 당시 미국관객들이 다나 앤드류스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걸 모르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를 생각해보자. 스펜서가 결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자고 하자 캐럿은 누구에게 씌우냐고 묻는다. 그러자 스펜서는 ‘바로 자네’라고 답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캐스팅 단계와 같다. ‘살인자 역을 누구에게 맡기지?’ ‘바로 자네’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는 캐럿을 선택한 이유를 나열하는데 그 이유들이란 것이 용의자와 비슷한 차를 탄다거나 회색 코트를 입는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건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특징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 범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나 앤드류스가 실제 살인자임에도 그가 범인에 적임자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불분명한 형체를 가진 사람이 살인자가 된다. 또한 이 영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이 된다. 첫 번째는 스펜서와 캐럿의 내러티브다. 이 영화의 재판 장면은 가장 지루한 장면이지만 이는 단점이 아니라 영화에 꼭 필요한 장면이다. 기계적으로 스펜서와 캐럿의 작전이 진행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뒤집어 완전히 반대로 보여주는 것이 스펜서와 캐럿이 뒤에서 증거를 만들어내는 장면이다. 랑은 증거를 조작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작업에 관객을 참여시켜 관객이 스릴과 힘을 느끼도록 했다. 그래서 지루한 재판 장면과 이 장면이 대조를 만든다.



이제 직접 영상 클립을 보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보시는 장면은 스펜서와 캐럿이 시체가 발견된 곳으로 가서 캐럿의 라이터를 놓고 오는 장면이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시점의 상대적인 높이를 이용한다는 거다.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는 앵글을 낮게 해서 스펜서가 수상해 보이도록 한다. 랑이 후에 직접 언급했듯이, 관객들로 하여금 혹시 스펜서가 범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반면 스펜서가 사진을 찍는 순간에는 오히려 높은 각도에서 롱숏으로 두 사람을 보여준다. 이는 관객이 스펜서에게 공감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스펜서의 뒤에서, 위에서 찍은 것이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 신문의 날짜를 잡히게 할 수 있느냐란 대화를 하지만 카메라는 오히려 더 멀어진다. 랑은 여기서 ‘가깝다, 멀다’에 대한 유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야외에서 촬영한 유일한 씬이다. 이 영화는 랑에게도 후기 영화이지만 고전 할리우드 시스템의 후기에 찍은 작품이기도 하다. RKO 부도 직전에 찍은 영화인데, 이 영화는 한 시대가 죽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할리우드의 한 장르가, 또 그 장르의 스타들이 끝났고 이미 구시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장면을 야외에서 촬영했다는 것은 랑 자신도 할리우드의 폐쇄된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이제는 실제 사회가 이미 할리우드로 침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야외에서 촬영한 장면이라는 것은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 다른 요소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서 사용한 하이앵글은 이 장면에 캐릭터 외의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신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증거를 조작하는 스펜서와 캐럿의 행동이 도를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기준에서뿐만이 아니라 신의 기준에서도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란 걸 암시한다. 나는 이 장면이 이 영화가 비극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신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과 신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스 비극에서는 마스크를 사용했었다. 즉, 결백의 가면과 유죄의 가면이 있는 것이다. 결백이나 유죄냐 라는 것의 외적인 모습이 바뀔 수 있고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이 영화의 핵심은 결백과 유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정말 캐럿이 유죄인지 질문을 던진 후 여기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이 영화의 드라마를 조성한다.



김성욱: 프리츠 랑의 영화에 대해 스콜세지가 2000년에 했던 말이 기억에 난다. ‘랑의 후기작들을 보면 실험실의 작업을 지켜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시시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랑이 위대한 이유는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크리스 후지와라 씨가 얘기한 것도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이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이 있다면 부탁한다.

크리스 후지와라: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건 고전적인 것도 현대적인 것도 아닌 그 경계에 선 제 3의 영화들이다. <이유 없는 의심>도 경계에 선 영화의 훌륭한 예이다. 이런 영화를 통해서 다른 영화들이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자크 리베트의 영화도 랑의 영향을 받았다. 그 누구도 제 2의 랑이 될 수는 없겠지만 많은 감독들이 그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리: 김보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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