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주 감독과 배우 김민희가 이번 영화제에서 관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추천한 작품은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이다. 변영주 감독은 최근 개봉예정인 <화차>의 영화적 레퍼런스 중의 하나가 이 영화라 말했는데, 무엇보다 두 편의 영화에 시대의 공기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네토크는 자연스럽게 <차이나타운>과 <화차>를 오가며 진행되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더 많은 영화들과 만나고 싶다는 김민희와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시네마테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변영주 감독님의 말이 이어졌고, 시네토크가 끝나갈 즈음에는 <화차>의 초대권 행사로 많은 이들이 즐거워했다. 배우와 감독의 기운 때문이었을까. 당첨된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전부 여성들이었다.


허남웅(영화칼럼니스트): <차이나타운>을 추천했는데, 최근 개봉할 예정인 <화차>를 만들 때 참고를 했다고 들었다. 어떤 관련이 있나?
변영주(영화감독): 미스터리 영화 준비 중 이 감독의 최근작인 <유령작가>를 보았다. 거장이 '너네는 스릴러 만드는 게 어렵니? 이렇게 쉽게 찍을 수 있는데' 하며 만든 것 같았다.(웃음) <화차>라는 영화를 준비하면서 촬영감독한테 습한 느낌을 강조하는 것이 미스터리를 잘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차이나타운>은 우리 시대에 어울린다고 느껴져서 선택했다. 재산이 공유화되면서 자본가들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어떤 음모를 꾸미는가. 붕괴 이후의 행복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화차>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 우리 영화의 홍보를 위한 마음은 없다. (좌중 폭소)

허남웅: 김민희 배우님께서는 알쏭달쏭한 연기를 좋아하시고, <화차>에서도 그런 연기를 했다고 했는데, 이 작품에서 페이 더너웨이를 어떻게 보셨는지.
김민희(배우): 감독님이 이 영화를 보자고 해서 재밌게 봤다. 미스터리를 끌어갈 수 있는 집중력은 모호한 연기력에서 나온다고 봤다. 아버지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과 캐서린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대사가 인상 깊었다.

허남웅: 이 영화에서 “잊어버려, 여긴 차이나타운이야”라는 마지막 대사가 유명하다. 관객들이 보기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데, 감독님은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봤는지?
변영주: 차이나타운이 이민자들의 거주지, 관광지, 스타를 배출한 극장들, 이런 요소들이 섞이면서 미국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후반부에서 '재산이 얼마나 있나요,' '천만 달러인데 왜,' '대체 뭘 더 가지려고 하나요?' '미래를 위해서 투자해야지.' 라는 그 대사가 자본을 상징하는 것 같다. 누군가는 불행해지고 행복해지는 악귀의 공간이 바로 차이나타운이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마지막 대사보다 기티스가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대사가 영화하고 더 가깝게 느껴져서 인상적이었다.

허남웅: 느와르 영화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느와르의 어떤 요소들이 감독님을 매혹시키는지?
변영주: <차이나타운>은 전형적인 팜므 파탈의 연기인데, <화차>의 김민희는 좀 다르게 생활 밀착형 느낌이 들 거다. 많은 이들의 착각이지만 스타일은 멋있는 외관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시대의 공기를 어떻게 담아내는가에 관한 방법론이다. BBC의 드라마 셜록이 기쁨을 주는 건 그것이 우리가 안 만났으면 하는 범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가 사람이 나빠서라고 단순히 치부하는 게 아니라 이 범죄를 만드는 욕망은 어디서 나왔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장르가 시대의 담론을 제대로 읽지 않고 단순히 멋진 외관에만 것에만 집중하면 함정에 빠지는 것 같다.


관객1: 로만 폴란스키가 히치콕 감독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모든 스릴러 영화에선 히치콕 영화가 보이는데, 감독님도 히치콕에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또 김민희씨의 모호하고 멍한 연기를 좋아하는데, 연기할 때 실제로 어떻게 몰입하시는지 질문을 드리고 싶다.
김민희: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보여주는 연기보다 어느 정도 감추고 모호하게 하는 연기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그런 연기를 했을 때 관객 분들이 스스로 채우고 생각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변영주: 김민희는 자기를 규정짓지 않는 배우이다. 보통 작업할 때 할 수 있는 최대치를 그어놓는데, 그게 아니니까 깊어지기도 하고 방향을 잃기도 한다. 오히려 만족감을 향해 가는 길이 길어진다. 공부를 안 하는 천재처럼, 계산되지 않은 번뜩이는 재능이 보여 무서웠다. 내가 망치거나 혹은 발전시킬지도 모른다는 행복한 두려움이 있었다. 사실 <화차>의 현장을 되돌아보면 미치도록 행복했는데, 이게 모두 김민희 덕분이었다. 히치콕의 영향력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자면, 영향 받은 건 히치콕 뿐 만은 아니다. 결국 나이 들면 새로운 영화를 보기 보단 그동안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본다. 명장면은 그 배우와 그 동네와 그 대사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쇼트가 다른 배우나 다른 공간에서 하면 의미가 없어진다. 결국 어떤 배우와 어떤 이야기를 어떤 공간에서 찍는가의 문제이다. 영화 볼 때 옛날엔 이 사람은 어떤 식으로 찍었는가를 생각했는데, 요즘은 이 사람은 이 시대를 왜 이렇게 본 걸까라고 생각한다.

관객2: 김민희 씨가 등장한 <화차>의 예고편을 봤다. 모호한 연기였다지만 오히려 소설보다 김민희 씨 연기가 강하게 와 닿았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롤 모델의 캐릭터가 있었는지.
김민희: 뛰어가는 장면에서의 선영의 마음이 영화에서 가장 센 부분이라서 아마도 강렬했다고 느낀 것 같다. 롤 모델은 아니지만, <블랙 스완>의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와 <팩토리 걸>의 시에나 밀러가 선영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 두 영화를 다시 찾아봤다.

허남웅: 로만 폴란스키와 페이 더너웨이는 둘 다 괴짜라서 많이 부딪혔다고 들었다.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 더너웨이가 소변을 보고 싶다고 얘기했으나 감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여배우가 종이컵에다 오줌을 누어 감독에게 뿌렸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그의 연출 방법이었다고는 하는데, 감독님은 현장에서 작업할 때 어떤 편인지.
변영주: 접근법은 배우마다 다르다. 민희씨는 자기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나를 왜 좋아하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민희랑 작업하면서 관객이 너에게 연민을 느끼면 안되니 사악한 마음을 갖고 욕망을 표출하라고 얘기했다. 어떤 배우는 심하게 준비해오는데, 그러면 딴 생각을 하면서 연기를 하게 한다. 영화에서 메소드 연기를 안 믿는다. 영화 전체의 연기가 아닌 쇼트의 연기가 영화 연기다. 우리는 쇼트를 찍으니까.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순간이 진짜다. 그 캐릭터에 대해서 진정성을 준비해서 가는 건 자기기만이다. 진정성은 절대적이지 못해서 나와 세계관이 일치하는 사람들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김민희: 배우는 연기든 외모든 간에 관객을 사로잡고 전달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혼자 진정성을 가지고 연기해도 전달이 안 되면 좋은 배우라고 할 수 없다. <화차>를 하면서 현장에서 갑자기 생겨나는 에너지 때문에 즐거웠다. 오늘은 내가 이 정도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게 깨졌을 때 나온 새로운 연기가 더 좋다.



관객3: 우디 앨런은 입양인이었던 한국 여자와 결혼했고, 로만 폴란스키는 아내의 살해를 목격했고 아동 성폭행으로 물의를 일으켰는데, 이 두 사람의 심리가 이미지에서 비슷하게 나타났는지 묻고 싶다. 또, 영화를 선택하는 결정권은 여자에게 있다고 보는데 여자 감독으로써 여자 관객을 어떻게 끌어들일지 고민하는지 궁금하다.
변영주: 사생활 적으로는 엮이지만, 두 작가를 엮어본 적이 없다. 우디 앨런 영화는 관객으로서는 좋아하나 그처럼 만들고 싶지는 않다. 질문을 바꿔보면 감독이 자기의 삶을 결정한다고 본다. 영화보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내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며, 나의 세계관을 배신하지 않고 올바르게 사는가가 중요하다.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저렇게 변할 수 있냐는 말은 요즘 네 영화가 별로라는 말보다 치명적이다.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단하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나라도 결국 여자 친구가 선택하는 영화를 보는지? 예전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다고 본다. 영화를 만들 때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매혹 당하는지에 관해 깊게 고민하는 편은 아니다. 그 동안 여자건 남자건 관객 수는 적었다. 흥행 영화가 뭔지 모르겠다. <화차>라는 영화가 흥행한 후에 물어봐도 모를 거다. 그래도 <발레 교습소>가 사랑받지 못했던 이유와 부족한 점은 내가 가장 많이 고민하니까 잘 안다. 봉준호는 흥행 영화가 뭔지 알까?(웃음) 하고 싶은 것들을 향해 전진하면서, 관객들과 코드가 맞으면 행복해질 거고 아님 집에 가서 우는 거다.

관객4: <화차>의 예고편을 봤는데, 사라진 김민희 씨를 찾는 사촌형인 형사가 잭 니콜슨이 맡은 탐정 캐릭터와 유사하다고 느꼈다.
변영주: 어느 경우에도 영화의 이미지만 차용해서 설명하면 실패한다. <화차>의 원작은 90년대 일본 버블 경제 붕괴 후 형사가 사회 문제로 사람들이 불행한 거고, 개인 파산을 신청하라는 이야기다. <화차>는 이와 다르게 행복해지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범죄를 저지른 여자의 이야기이다. 2010년 서울에서는 욕망과 행복의 느낌을 줘야할 것 같아서 원작의 지혜로운 형사를 버렸다. 형사 역을 맡은 조성하는 찌질한 느낌의 형사이다. 열심히 살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남자가 그녀를 찾으며 다른 세상을 알게 된다. 아마 제 3자에 의해 설명되어지는 캐릭터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창조해냈으니까 김민희가 힘들었을 것이다.


허남웅: 마지막으로 두 분의 소감을 듣고 싶다.
김민희: 초대권을 더 드리고 싶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좋은 만남을 가졌으면 좋겠다. <화차>는 3월 8일날 개봉하는데, 감독님 최고의 작품이 탄생한 것 같다. 많은 기대와 관심을 가져달라.
변영주: 이 영화제를 개최하는 이유는 시네마테크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 같다. 한국 영화의 극장 점유율이 48%라고 들었는데, 이게 한국영화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고민했다.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지역성을 강조하는 독립영화를 많이 봤는데, 알렉산더 페인의 <디센던트>처럼 지역성이 잘 드러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다양한 영화를 보는 게 한국영화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는 관객들이 찾아와주길 바라서이다. 관객들이 결국엔 시네마테크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서울아트시네마를 사랑하는 길은 회원가입을 해서 이번 달에 서울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램이 적힌 팜플랫을 받아보는 거다. 여기가 서울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혼을 살찌울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내년에는 더 많은 감독과 배우들과 함께 좋은 영화를 만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정리: 윤서연(관객 에디터) 사진: 이호규(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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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LA, 사립탐정 제이크 기티스(잭 니콜슨)는 묘령의 여인으로부터 수력 자원부의 수석 엔지니어인 남편 홀리스 멀웨이의 불륜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제이크는 홀리스가 젊은 아가씨와 데이트하는 장면을 포착하고, 그가 찍은 사진은 신문에 대서특필된다. 당시 홀리스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발생한 LA의 물 전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얼마 후 홀리스의 진짜 아내인 에블린(페이 더너웨이)이 등장하면서, 제이크는 자신의 의뢰인이 가짜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홀리스가 익사체로 발견된다.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한 제이크는 홀리스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곧 에블린과 그녀의 아버지 노아(존 휴스턴)가 각기 다른 제안을 해온다.

실상 이 영화에서 '차이나타운'은 엔딩 신에만 단 한번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 내내 주인공들 사이에서 주문처럼 맴돌며 불길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제이크는 예전에 차이나타운에서 근무하던 경찰이었고, 거기서 어떤 여자를 보호하려다 실패한 다음 경찰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평범한 불륜이라고만 생각했던 홀리스 멀웨이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과거의 악몽이 자신을 향해 촉수를 뻗쳐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는 거기서부터 애써 달아나려 하지만 실패한다. "Cherchez la Femme(그 여자를 찾아내)." 모든 느와르 소설은 이 문구에서 시작한다. <차이나타운>도 마찬가지다. 영화엔 실체로서 등장하지 않는 제이크의 옛 여자, 홀리스와 함께 있던 젊은 여인, 에블린. 제이크는 영화 내내 이 세 명의 여성을 뒤쫓지만 그녀들은 자꾸만 미끄러져 달아난다. 그리고 가까스로 그녀들의 실체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자기파멸의 지옥을 마주하고 있음을, 자신이 다시 한 번 차이나타운에 와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가 (혹은 무엇이) 보이는 대로 믿지 마라. 적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고, 과거는 되풀이된다. 추적의 끝은 언제나 시작점으로 귀환한다. 그 모든 비밀이 밝혀지더라도, 끝에 이르러선 힘없이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잊어버려. 여긴 차이나타운이야."


로만 폴란스키는 미국에서 만든 마지막 영화 <차이나타운>을 통해,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그 어떤 영화들보다 더 챈들러적인 본질을 꿰뚫는 걸작을 완성했다. 모든 대사와 쇼트들이 영화의 충격적인 반전을 향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잭 니콜슨과 페이 더너웨이는 산산조각나기 일보 직전의 표정으로 LA의 가뭄 속을 헤맨다. 수수께끼는 단순하지 않은 방식으로 증폭되며 인과응보의 해결을 조롱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창조주들의 죄악은 사막 위의 환영과도 같은 도시 LA에 피비린내 나는 악취를 심어놓는다. 느와르의 교과서라 불리는 <차이나타운>의 마지막 대사, 통렬한 비극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한 "잊어버려, 제이크. 여긴 차이나타운이야"AFI에서 선정한 '미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 100'에서 74위를 차지했다.

글|김용언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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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소녀 강간 혐의로 전 세계를 시끄럽게 했던 로만 폴란스키가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 신작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때마침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로만 폴란스키의 초기 걸작선’이 상영 중이다. <물속의 칼> <혐오> <궁지> 모두 세 편으로, 폴란스키를 대표하는 영화들이지만 40년 넘는 그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건대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폴란스키에 대해서는 좀 더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영화평론가 정지연이 로만 폴란스키의 비극적인 과거사와 영화 세계를 엮은 글을 보내왔다. ‘로만 폴란스키의 초기 걸작선’ 상영작에 대한 좀 더 세밀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뒤에 실린 리뷰를 참조하시길.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쓰>(1971)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왕비의 죽음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한밤 중, 고성의 숨 막히는 적막을 가르는 여성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홀로 남은 맥베스는 나지막이 읊조린다. “이제 공포는 실컷 맛보았다. 살기등등한 생각도 이제 예사가 되어 그 어떤 무서운 일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게 되었다” 차가운 돌바닥에 관절이 끊어지고 시뻘건 피를 뿜으며 처참하게 죽은 왕비의 시신을 확인한 왕은 역시 태연하게 말한다. “언제든 죽어야할 사람이었다. 한번은 듣게 될 소식 아니었던가.”

맥베스의 심리적 공포를 극적인 스펙터클로 몰아붙였던 구로사와 아키라나 오손 웰즈의 버전과 비교했을 때,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쓰>는 가장 건조하지만 살의는 강렬하다. 여느 호러 영화에서도 쉬이 등장하지 않았을 정도로 처참한 주검을 묘사해놓고 폴란스키는 정작 그것을 목격하는 맥베스의 무심한 태도를 연출한다. 그것이 단순히 영화적인 연출의 방식이었다고 한다면 그리 주목할 만한 것이 못된다. 하지만 그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까지 수상했던 <피아니스트>(2002)를 상기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의 영화보다도 더 비극적이고 센세이셔널 했던 삶의 연대기까지 보태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연출의 방식이 아니라 그의 역사 혹은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증언적 태도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피아니스트>는 폴란드계 유대인이자 피아니스트였으며, 모든 가족을 아우슈비츠에서 잃고 그 홀로 게토에서 살아남은 스필만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지점은 학살과 폭력, 그리고 폴란드인들에게 멍에로 남은 죽음에 대한 무력한 순응과 방조에 대한 증언적 이미지다. 이것은 확실히 <쉰들러 리스트>(1993)와 같은 그간의 유태인 수용소 영화들의 그것과는 차별된다. 이러한 영화들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독일인의 잔악한 폭력과 유태인들의 비극적 삶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애도를 전면으로 내세웠다면, <피아니스트>에는 연민과 분노가 부재한다. <피아니스트>를 지배하는 가장 압도적인 이미지는 주검과 폭력에 대해 살아남은 자들이 보여주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무심한 태도들에 있다. 그들은 그 모든 폭력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 모든 폭력은 이내 일상이 된다. 이윽고 그 비좁은 게토에서 조차 부유한 자와 굶주리는 자가 나뉘고 장사치가 넘쳐난다. 거리 여기저기에는 어린 아이들을 비롯한 시신들이 흔한 돌멩이처럼 널브러져 있다. 악취를 내며 썪어가는 시신들을 삶의 조건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인 게토 안 유태인들의 모습은 흡사 공포에 무심해진 맥베스의 고백처럼 체념적이다.

프리모 레비(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작가)는 수용소의 대학살에 대해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 남은 자의 이야기는 죽음의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을 누군가 재현한다면 현존하는 감독 중 폴란스키를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33년, 파리에서 폴란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로만 폴란스키는 3살이 되던 해 폴란드로 이주한다. 그리고 8살 때, 게토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던 죽음의 열차에서 폴란스키의 어머니는 그를 열차 밖으로 밀어내 살려낸다. 혼자가 된 어린 폴란스키는 감시를 피해 노숙을 하며 고향으로 달아났고, 그곳에서 가톨릭계 폴란드인 가족의 도움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살아 남았다. 미국의 평론가 짐 호버만은 <피아니스트>에서 강제노역장으로 이주하던 가족들에게, 캐러멜 한 조각을 비싼 값으로 팔아치우던 어린 소년이 어쩌면 폴란스키의 자화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역사적 학살의 순간에 폴란스키가 목도하고 각인했던 것은 거대한 폭력의 구조였으며 죽음 혹은 생존이라는 백짓장 같은 양면을 지닌 처참한 삶의 몸부림 이었을 것이다. 이 트라우마는 이후 폴란스키 겪게 될 또 다른 비극들 (만삭의 아내 샤론 테이트가 찰스 맨슨의 신봉자들에 의해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당한 사건과, 이후 13세 소녀 강간혐의로 30년이 넘도록 미국 사법부에 의해 수배 등)과 더불어 그의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주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는다. 제한적 공간이 압박하는 폐소공포증, 죽은 자들의 망령들, 가학의 기묘하고도 본성적인 쾌락들, 그리고 이성적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신경증과 강박증, 자본주의 정치체제라는 거대한 구조 내 옥죄인 숙명적이고 비극적인 인간들이 그것이다.

유령과 공포, 숙명의 서클

<유령 작가>(2010)는 미국 누아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했던 그의 걸작 <차이나타운>(1974)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전통적인 누아르 영화들이 팜므파탈의 덫에 걸린 남성들의 곤경을 흑백의 숙명론적 미학으로 묘사하면서, 웨스턴과 갱스터의 영웅이 기묘하게 얽혀있는 자기 파괴적인 고독한 남성 영웅이라는 캐릭터를 창출해냈다면, <차이나타운>은 선악의 이분법과 캐릭터를 역전시키는 것으로 구조화한다. 전통적 누아르에서 보험금과 치정으로 얽혀있던 사적 욕망들은 멕시코 접경지역의 수력발전을 둘러싼 이권 사업과 연결되면서 공권력 및 자본의 문제로 확장되고, 탐욕스런 욕정과 물욕의 화신이었던 여성들은 남성 가부장적 자본주의 권력 구조의 비련한 희생자로 묘사된다. 또한 잭 니콜슨이 연기하는 냉소적인 사립탐정은 진실의 주변을 맴돌지만, 결국 예정된 운명의 서클 안에서 탈주하지 못하고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실패하는 사나이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를 대표하는 예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탐욕스러운 자본가 아버지로부터 강간당해 딸임과 동시에 동생을 낳게 되는 비련의 여주인공은 모든 추악한 권력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달아나지만, 경찰의 총탄에 결국 살해당한다. 이 장면에서 경찰은 탐정에게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여기는 차이나타운이야”라고 말한다. 이것은 위로와 치유의 말이 아니라, 그가 넘어설 수 없는 권력과 공간의 정치에 관한 충고이자 체념이다.

<유령작가> 역시 권력과 욕망의 구조 안에서 이용당하고 결국 실패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학살극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전직 영국 총리가 대필 작가를 통해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 거의 완성단계에서 작가가 사고로 죽게 된다. 그러자 그 업무가 새로운 유령작가(이완 맥그리거)에게 맡겨진다. 그러나 정계의 복잡한 권력관계, 그리고 영국과 미국을 둘러싼 전쟁의 밀약들, 심지어 총리와 그의 아내 및 비서 간에 얽혀있는 치정 드라마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연을 알 수 없는 음모에 휩싸인 미궁이다. <유령작가>를 누아르의 계보에서 <차이나타운>에 비교한다면, 캐릭터와 관계들은 다시 한번 전도된다. 눈에 보이고 명백한 권력들은 허상이자 꼭두각시며, 진실은 언제나 추악한 욕망과 함께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 ‘유령’이라 말하는 작가는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차이나타운>의 변주이다. 작가는 총리의 회고록 출판기념파티에서 총리의 아내에게 진실을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파티장을 나선다. 그리고 거리로 나서는 순간 교통사고를 당한다. 이때 사고를 알리는 충돌 음이 들려오고, 그가 지녔던 회고록 원본이 공중으로 흩날려 사라진다. 극중 자신을 언제나 ‘유령’이라고 소개했던 남자는 이 순간 흩날려 쓰레기로 전락하게 될 진실의 조각들과 함께, 그의 전임자가 그랬던 것처럼 진짜 유령이 되어 공중으로 부유한다.

이 기이한 주술적 운명의 실타래는 폴란스키의 오컬트적 취향과 유령에 대한 매혹, 그리고 현대사에 대한 은유로서 지속적으로 관철된다. 유령들은 자신이 죽어간 자리를 배회하고, 산자들은 망령들에 의해 그 공간에 강박된다. 유령은 진실을 알고 있으며, 진실은 산자에게 속삭여지지만(<유령작가>에서 전임 작가가 남긴 메시지들, 자동차에 입력된 네비게이션의 주소지, 그의 행적들을 알리는 우연적 사건들), 산자가 진실에 다가가는 순간 이는 죽음이라는 실타래가 되어 그의 운명을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유령작가>에서 서로의 운명을 속박하며 위장하는 권력자들의 진실은 오로지 유령들의 발자취에서만 드러나고, <차이나타운>에서 모든 진실은 결국 어둠 속에서 살해되고 잊혀진다. 결국 폴란스키에게 유령은 비극에 죽어간 자들이자,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며, 산자에게 속삭이나 그것이 결국 죽음을 재촉하는 망령의 저주와도 같은 것이다.

결국 <유령작가>를 지배하는 숙명적이고도 음모론적 세계는 폴란스키에게 있어서 오컬트적인 마녀들의 주술적 세계의 동어반복이다. 현대 자본주의 정치사회를 음모론적 세계의 학살과 폭력으로 형상화한 <유령작가>의 계략들은 결국 <맥베쓰>에서 왕좌에 대한 무한한 권력과 탐욕을 자극했던 주술적 파워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주술에 의해 사탄의 권력을 부여받고자했던 <악마의 씨>(1968)와 <나인스 게이트>(1999)에 묘사되는 음모로 연결된다. 폴란스키의 영화적 세계에서 이 모든 음모 혹은 주술은 평범한 일상 속에 은폐되어 있으며, 그것이 특정한 순간에 인간의 선악이라는 본성을 구분하지 않고 출몰한다. 그 욕구는 절대적 폭력, 가학의 쾌락으로 형상화된다. 가장 역사적인 테제로서 <피아니스트>는 나치가 수행했던 ‘악의 평범성’에 대한 가장 직설적 묘사이다. 또 다른 정치적 버전으로서 <시고니 위버의 진실>(1994)은 폭력과 악의 상징을 잔혹했던 군부정권의 반인륜적 행위로 한정하지 않고, 그 희생자가 같은 방식으로 폭력을 앙갚음하고자 하는 가학의 쾌락과 피학의 트라우마가 어떠한 방식으로 순환하는지 보여준다.

가학과 피학에 관한 섹슈얼한 버전은 <비터문>(1992)이다. 이 영화는 남자와 여자의 지배와 소유가 어떤 식으로 역전되는지, 어떤 식으로 극단화되어 죽음의 제의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외설적인 욕망의 진술이다. 결국 폴란스키는 모든 인간의 평범한 일상에 내재된 폭력적이고 악마적 본성은 사소한 계기들에 의해서도 충분히 돌출되리라 확신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결국 <시고니 위버의 진실>의 엔딩 시퀀스에서, 가학자와 피학자는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며 공존한다. 절대적 가학자와 절대적 피학자를 구분하지 않는 이러한 공존은 학살의 시대를 경험한 감독의 냉소적이고 비관적 세계관 그 자체이다.

신경증과 강박증

폴란스키 영화의 여성들이 신경증 환자라면 남자들은 강박증 환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특정한 공간, 폐쇄적인 공간의 내부에 직접적이든 은유적이든 감금이라는 형태로 속박되어 있다. 먼저 신경증 환자로서의 여성 이미지는 <혐오>(1965)에서 잘 드러난다. 카트린느 드뇌부가 연기하는 캐롤은 성적 욕구와 결합에 대한 과민한 공포와 불안으로 스스로를 아파트에 감금하고 그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남성들을 살해한다. 그것은 <차이나타운>의 에블린(페이 더너웨이), <맥베쓰>의 왕비, 그리고 <비터문> <나인스 게이트> 등에서 연기했던 폴란스키의 세 번째 부인이자 여배우인 엠마누엘 세이그너의 캐릭터 등과 연결된다. 또한 흥미롭게도 이 모든 여성들은 신경증 환자임과 동시에 남성 성애적 대상이며, 그 이상화 과정에는 폴란스키의 소녀성애를 의심케 할 정도의 백치적 순수함이 부과된다.

반면 거의 예외 없이 죽음과 실패를 향해 가는 폴란스키의 남성 캐릭터들은 <물속의 칼>(1962)에서 거만하고 과시적이지만 정작 젊은 소년의 육체와 치기를 질투하는 부르주아 남성의 좌절감, 혹은 아내의 실종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도움주지 않는 낯선 타국에서의 분투를 다룬 <해리슨 포드의 실종자>(1988)의 인텔리 남편, 유령적 환영과 현실의 경계에서 분열하는 <테넌트>의 세입자, 성공을 위해 아내를 악마에게 바치는 <악마의 씨>의 연극배우 남편(존 카사베츠), 그리고 거대한 권력 속에서 패배와 무력감의 극단을 경험하는 <차이나타운>과 <유령작가>의 그들처럼 하나같이 자신들의 내재한 욕망과 공포에 의해 사이킥한 감금상태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이 모든 유폐는 그것이 신경증 환자인 여성이거나 강박증 환자인 남성이건 모두 제한된 공간으로 심리적 상태를 투사하며 발생한다. <물속의 칼>이나 <비터문>에서 인물들을 세계와 차단하고 고립시키는 요트 혹은 거대한 유람선, <궁지>와 <맥베쓰>에서 지배와 감금이 이루어지는 고성들, <피아니스트>에서처럼 거대한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여 아무도 쉽게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게토 혹은 수용소 등 이 모든 폐쇄적 공간들은 그 자체로 폴란스키 영화의 캐릭터가 되어 주인공들의 심리적 강박과 공포의 근원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의 영화 속에서 이미 죽은 자들은 유령이 되지만, 아직 살아남은 자들은 경계에서 망연자실한 상태로 주저한다. 하지만 폴란스키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을 도와준 나치 장교는 그와의 마지막 대면에서 “이제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살 것인지” 질문한다. 스필만의 대답은 간단하다. “피아니스트가 되어 다시 연주할 것이다”. 삶과 죽음, 진실과 은폐, 산자와 사자(死者), 구조와 개인, 폭력과 치유, 망각과 상실은 언제나 경계를 넘나들며 삶의 조건 속에 스며 있다. 일상은 그저 무심히 진행될 뿐이다. 무력하지만 그 안에서 그저 살아갈 뿐이다. <유령작가>에서 흩날리어 결국 쓰레기로 치워질 진실의 회고록 원본은 주검과 함께 유령이 되어 거리를 부유할 것이다. 험한 세상을 체감한 노장의 숙명적이고 냉소적 세계관이 여전히 쓰디쓰고 섬뜩한 이유다.

글/ 정지연(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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