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출신 감독 빌 어거스트가 연출하여 그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정복자 펠레>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19세기 말 덴마크의 한 시골 농장으로 배경으로 한 영화는 노년의 스웨덴 노동자 라세(막스 폰 시도)와 그의 어린 아들 펠레(펠레 베네가르)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덴마크로 건너오면서 시작된다. 브랜디가 물보다 싸고 건포도가 들어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곳, 아이들이 일하지 않고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곳이라고, 라세는 덴마크로 향하는 배 안에서 어린 아들 펠레에게 희망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구간이나 다름없는 거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상이 된 가혹한 농장의 노동과 인간이기보다 짐승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농노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덴마크의 저명한 사회주의 작가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의 동명소설 중 1부에 해당하는 주인공 펠레의 어린 시절을 그린 <정복자 펠레>는 19세기 말 농장을 소유한 부르주아와 노동자 간의 불평등한 관계, 그로부터 파생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주목하고 있다. 한 폭의 회화처럼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북구의 시골 풍광은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정서를 반영하는 심리적 배경으로 존재한다. 탁월한 촬영이 돋보이는 영화는 펠레의 시선으로 농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지주의 아들과 사랑을 한 대가로 갓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살해하고 감옥에 가야했던 젊은 처녀 노동자, 끊임없이 바람을 피워대는 남편이 마침내 자신의 어린 조카까지 손을 대자 광기에 휩싸여 남편의 성기를 잘라버린 지주의 아내. 라세와 펠레가 머물고 있는 농장은 초기 자본주의 시대를 감싼 모순과 분노,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과 좌절이 어지러이 섞인 용광로로 묘사된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현재의 삶에 대한 분노를 생생하게 뿜어내는 펠레와 달리 아버지인 라세는 펠레 앞에서는 대담한 척 하지만 현재의 비루한 삶에 대항할 의지나 용기가 없는 평범한 하층민이다.


악랄한 농장 감독관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노동자 에릭은 펠레에게 희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2년 후 품삯을 받으면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라 세계를 돌아다니겠다는 그의 희망은 어린 펠레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감독관의 불공정한 태도를 참다못해 쿠데타를 일으키던 에릭이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불의의 사고로 머리를 다치면서 그의 원대한 꿈은 사라진다. 노동자들의 리더였던 에릭이 바보가 되고, 은밀히 감독관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본 펠레는 안주할 수도 있었던 농장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반항적이면서도 유약한 펠레의 여윈 얼굴 위에는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에서 보았던 소년 장 피에르 레오가 겹쳐진다. 그러나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오가 절망적으로 얼어붙었던 것과는 달리 펠레는 차가운 바닷가를 부지런히 걸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세상을 정복하고 전진하리라는 소년의 의지가 고스란히 영화의 의지로 표출되는 순간이다.

(by 장병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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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서 선택한 영화는 빌 오거스트 감독의 <정복자 펠레>(1989)다. 대학 시절 하숙집에서 브라운관으로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는 장준환 감독은 스크린의 필름으로 다시 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고 한다. 150분의 러닝타임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정복자 펠레>에 대한 소감을 나누면서 장준환 감독의 영화 창작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여기 그 현장 풍경을 전한다.


허남웅(영화칼럼니스트): 방금 보신 영화를 선택해주신 장준환 감독을 모셨다.
장준환(영화감독): ‘이것이 영화다’라는 주제에 저는 아직 영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데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정복자 펠레>였다. 대학 다닐 때 하숙집에서 형들이랑 두 권짜리 비디오테이프로 처음 봤다. 그때 이상하게 오래 남아있는 영화, 계속 마음속에서 어느 순간 떠오르게 되고, 되짚어 보게 되고, 어떤 장면들이 지워지지 않고, 그런 영화중 하나였다. 실은 제가 그때 열악한 환경에서 조그만 브라운관으로 본 영화를 필름으로 다시 보고 싶다는 개인적 욕심도 있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굉장히 좋다.

허남웅: 브라운관 이후에 스크린으로는 처음 보시는 건지. 아무래도 브라운관과 스크린의 감흥이 다를 것 같다.
장준환: 그때는 이렇게 긴지 몰랐다. 길지 않다고 느꼈다. 지루한 건 아니었고 많은 이야기를 한 영화 안에 담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북구의 몽환적인 자연의 느낌, 북쪽이어서인지 낮이 짧고 석양이 긴 점, 촬영의 묘미들이 필름으로 보니 더 자세하게 보인다.

허남웅: 관객과의 대화를 하기에 앞서 감독님과 인터뷰를 했을 때, 영화 속에서 펠레가 친구를 때리면서 동전을 주는 장면이 가장 슬펐고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는데.
장준환: 감정의 층이 다양한 장면이다. 펠레가 그 아이를 때리는 심정이 단순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이해는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에게 동전 하나를 주면서까지 자기 삶에 대한 울분이나 답답함을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 저는 안타깝고 슬프다. 그 친구 아이도 동전 하나를 갖기 위해서 맞으면서도 동전을 쳐다보고 있다. 느낌들이 굉장히 섬세하면서 깊이가 있고,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허남웅:
한편으로는 <지구를 지켜라> 같은 영화가 갖고 있는 정서와 <정복자 펠레>가 가지고 있는 정서가 공유되는 지점이 있다. 약한 인물들이 좌절하게 되는 이야기다.
장준환: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서 보고 싶은 것은 너무나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보다는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어떤 감정들의 층위를 증폭시킨 것이라고 본다. 그것들을 보면서 쾌감 내지는 즐거움을 얻는 것 같다. 당연히 이런 인물들에 대해서 관심이 가고 특히나 어린 시절에, 흔히 성장 영화라고 하는 큰 사건을 겪으면서 세상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가 자꾸 저는 끌린다. 그래서 단편 때부터 어린 시절이 주는 트라우마나 그때 밖에 가질 수 없었던 즐거움, 감동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허남웅: 영화가 굉장히 슬플 수도 있는 영화인데 절제되어 있다. 좌절만 하는 아버지 역할의 막스 폰 시도우의 연기가 절제된 영화의 느낌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장준환: 감탄했다. 어떻게 저렇게 디테일하고 자연스러우면서 때로는 강한 느낌을 잘 표현했을까. 마지막에 같이 못 떠나겠다고 말하기 전 뒷모습으로 울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연기는 온 몸으로 하는 것이구나, 새삼 느꼈다. 사실 이 영화는 지구상에서 멀리 떨어진 북구의 영화지만 우리네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디 동네에서 봤을 법한 이야기, 자라면서 소설에서 봤든 일상이든 한번 봤을 법한 이야기다. 실제 외국에 나가보면 문화적으로 충격을 받을 때도 있지만 사는 게 다 비슷한 것은 아닐까 싶다. 마치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느낌도 든다. 다시 보면서도 참 재미있게 보았다. 처음 보신 분들의 소감이 궁금하다.

관객1: 아이가 매 맞는 장면을 보면서 공감했다. 우리는 채찍질을 맞지는 않지만 저런 감정들을 견디면서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번다. 매 맞은 아이가 매를 맞으면서도 반짝이는 은화를 보고 행복해한다. 우리에게는 돈보다 더 소중한 분노의 감정을 처리해야만 살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저 한 장면으로 돈에 대해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너무 놀라웠다. 여자로서 본 관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콩스트룹 부인이 콩스트룹을 거세하는 장면이 나온다. 혹시 남자들이 거세를 당하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는지. 거세당하는 남자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주시면 한국의 밤마다 울부짖는 부인들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좌중 웃음)
장준환: 소감 감사드린다. 처음 시작부터 펠레가 새로운 세계로 오는 건데 농장이 어떻게 보면 큰 다른 세계다. 그 농장에서 가지고 있는 권력, 남성성으로 인한 억압과 핍박이 모든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저는 난봉꾼 콩스트룹이나 콩스트룹 부인이나 모든 인물들이 나쁘게만 그려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당연히 여러 가지 차원들을 가지고 있고 그런 디테일과 사람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각, 이런 부분들이 있다. 거세에 대한 부분은 딱히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앞으로 가정이 평안하시길 바란다.
허남웅: 영화에서 가난한 스웨덴 사람들이 먹을 것과 일자리를 찾아서 덴마크로 온다. 그런데 펠레가 가지고 있는 꿈은 아메리카 정복이다. 마지막에 펠레는 아메리카로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 갔을 때 느끼는 감정은 덴마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성적으로 지배된 세계에서 여자들은 억압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도 이 영화가 잘 담고 있는 부분으로, 말씀해주신 부분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관객2:
인물들이 다들 자기 삶의 우여곡절을 갖고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캐릭터는 없었던 것 같다. 감독님께서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누구인지 알고 싶다.
장준환: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은 펠레다. 그가 이 모든 역경과 수난과 좌절 속에서 마지막에 자기 혼자서라도 떠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이 힘들 때마다 이 영화를 자꾸 생각나게 한다. 마지막에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 또 다른 세계에서 똑같은 일을 겪을지, 에릭처럼 될 것인지 그런 모든 부분을 열어놓고 영화가 끝났다. 이 결말이 영화 한 편의 완성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은 펠레는 관찰자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겪고 가슴 속에 깨달음 내지는 상처와 어우러진 또 다른 희망을 가지고 떠난다는 게, 그런 면에서 펠레가 제일 사랑스럽고 멋진 캐릭터다.

허남웅:
아무래도 이 영화는 기교보다는 캐릭터와 이야기의 힘을 가지고 2시간 40분을 끌고 간다. 감독님이 전에 기교보다는 캐릭터나 이야기를 통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장준환: 창작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겠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다양한 욕망들이 공존한다. 만들고 싶은 것과 만들게 되는 것과는 간극이 있다. 자꾸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고민하고 어떤 영화를 만들까, 어떤 즐거움을 같이 나눌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결국에는 캐릭터이고 이야기다. 그 부분으로 돌아간다. 그것 없이 어떤 스타일, 스펙터클은 많은 힘을 못 받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저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하는 거짓말을 잘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잘 할까 하는 부분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드린 말씀이다.


허남웅: 감독님이 이 영화를 대학교 하숙생 시절에 보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독님이 어떻게 영화감독이 되려는 결심을 하셨는지, 그 시절이 궁금하다.
장준환: 저는 영화광까지는 아니었지만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이긴 했다. 어렸을 때 독서실 간다고 하고 동시상영관에 갔다. 거기서 비디오 보고 영화 두 편 보고 집으로 가면 어머니가 공부 열심히 했다며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다. 그렇게 영화를 즐겨 보았다. 원래는 대학교를 그림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집안의 반대로 영문과에 진학했다. 그러다 대학교 4학년 때 우연히 영화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화에는 이런 또 다른 세계가 있구나 하는 걸 그때 깨달은 것 같다. 영화도 만들고 창작하는 일이고 그것이 굉장히 어렵고 힘들지만 충분히 재미있는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한국 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해 처음으로 필름을 만져봤다. 거기서 영화를 동료들과 재밌게 만들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화인의 길로 흘러들었다.

관객3: 창작을 하는 게 타고 나야 하는지, 아니면 많이 보고 느끼면서 그런 것을 키워나가면서 창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인지 궁금하다.
장준환: 타고난 자기 재능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고 꾸준히 열심히 해서 만드는 감독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영화는 창작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들어가 생기가 살아나는 유기체 같은 것이다. 자기 일부분을 떼어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재능이 있는 게 유리하다. 요즘에는 핸드폰이나 캠코더 등 누구나 손쉽게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대단한 영화를 만들려면 운도 있어야 하고 재능도 있어야 하고 자기 노력도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섞여서 나오는 게 아닐까 막연히 생각할 따름이다. 자기 비전이 있는 게 중요한 것 같다. 하고 싶은 게 있는 것이 재능을 떠나 그것을 계속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

정리|손소담 관객 에디터 사진|최미연 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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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작가를 만나다 -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지난 21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작가를 만나다’ 프로그램으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불멸의 걸작,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를 상영하고, 상영 후에 장준환 감독이 직접 참석하여 관객과의 만남을 가졌다.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진행으로 이뤄진 이 자리는 유수 영화제와 평단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개봉 당시 쓴 맛을 보아야 했지만 여전히 영화적 힘을 갖고 있는 <지구를 지켜라>에 관한 못다 푼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차기작이 기대되는 장준환 감독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그 현장을 전한다.


주성철(씨네21기자):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지구를 지켜라>가 2000년대 한국영화 중 크게 흥행하진 못했지만, 끊임없이 얘기되고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컬트영화가 아닌가 싶다. 병구는 지구를 지키느라 애썼는데 우리는 이 영화를 지키지 못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큰 충격을 받았었다. 모든 장르를 아우르면서도 그 어떤 장르도 아닐 뿐 더러, 병구의 개인사로 시작해 인류의 역사로까지 나가는 영화였기 때문에. 너무 슬퍼 울었던 기억도 난다. 처음엔 단지 개인적인 복수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지구를 폭파시키는 장면으로 까지 나아가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마케팅이나 홍보 방식에 있어 좀 더 다른 방향으로 했었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감독님은 처음에 어떻게 이 영화에 접근했었는지 궁금하다.
장준환(영화감독): 영화를 보시고 영화 마니아가 만든 게 아닐까 많이들 생각하시는데, 자라오면서 봐왔던 영화들이 자연스럽게 시나리오에 녹아든 것 같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주성철: 유인원 연기를 신하균 씨가 직접 하셨다고 들었다.
장준환: 그 땐 왜 그랬는지 고집을 피웠다. 병구와 유인원의 눈빛이 연결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신하균 씨가 꼭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웃음) 태안반도의 해수욕장에 암석이 많은 곳이 있는데 거기서 마지막 촬영을 했다. 찍고 보니까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정말 비슷하더라. 전엔 그렇게 까지 비슷할 줄은 몰랐었는데 말이다.

주성철:
백윤식 씨의 출세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장준환: 사실 그때만 해도 배우들이 영화와 텔레비전의 활동 구분이 많았는데 백윤식 씨는 삼십 몇 년간 텔레비전 활동만 거의 하셨다. 백 선생님이 맛깔스럽게 연기하시는 부분들이 좋아서 백 선생님께 배역을 드리기로 마음먹었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다. 옷도 거의 못입고. (웃음) 근데 데뷔작이라 열의가 너무 많아서 일부러 제가 고생시키는 줄 아시고 사실 초반엔 오해도 좀 있었다. 머리를 면도하는 것도 그렇고, 많이 괴롭혀드렸는데, 너무나 열심히 하시고 끝날 때는 영화적으로 친구가 되었다.

주성철: <지구를 지켜라>는 얼마 만에 다시 보시는지?
장준환: 저도 극장에서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오늘 보니까 영화의 강도가 최근의 <악마를 보았다>라든지 <아저씨>같은 영화들 못지않은 것 같다. 인육을 개한테 먹이는 장면도 있는데 <지구를 지켜라>에선 안 잘리고 들어가 있다. 강도 높은 장면들 중 고심 끝에 뺀 장면들도 있다.
주성철: 그 당시에는 연쇄살인마의 공간 같은 것을 이렇게 미술적으로 표현한 영화가 거의 없었는데 오히려 지금 다시 보니 놀랍다.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관객1: 캐스팅하실 때 배우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장준환: 신하균 씨 같은 경우는 꼭 같이 하고 싶었다. 신하균 씨의 취향이 이런 류의 영화를 워낙 좋아하는 것 같다. 작업하면서 신하균 씨는 완전 영화에 빠져있었고, 결과도 너무 흡족하다. 백선생님은 당시 시나리오를 받고 하루는 하고 싶다가도 하루는 너무 힘들 것 같아 망설이고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다가 아드님이 특이하고 재밌을 것 같다고 추천을 해서 결국은 함께 작업을 하게 됐다. 그리고 목화라는 극단에 박희순 씨와 친구여서 자주 가서 공연을 봤는데, 황정민 씨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저 친구는 꼭 한번 같이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순이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남자가 가지는 ‘대지와도 같은 구원의 여인’이라는 판타지가 들어가 있다.

관객2:
2003년 봄에 개봉 당시 함께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이 영화를 대부분 코미디영화라고 생각했다. 호러도 나오고 SF도 나오고 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장준환: 당시 조폭 코미디를 비롯해서 코미디 영화가 대세였다. 마케팅팀에서도 이 영화를 보고 어디에 맞춰야 할지 난감해하다가, 코미디가 대세니까 그렇게 밀고가자고 했던 것 같다.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그건 사실 영화에 대해 거짓말을 한 거였다. 한 부분만을 뽑아서 그게 전부인 것처럼 설명한 셈이니까 말이다. 마케팅 업계에서는 이 영화가 실패의 한 사례로 계속 회자되기도 했다. (웃음)

관객3: <지구를 지켜라>가 영상적으로도 뛰어나지만 스토리가 굉장히 독특한데, 어떻게 구상하시게 되었는지? 그리고 처음에는 병구라는 인물의 복수극으로 착각했다가 결국 모든 게 진실인 것으로 가는데, 처음부터 염두에 둔 것인지?
장준환: <미저리>란 영화를 너무 재밌게, 손을 땀을 쥐며 봤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결국에 미저리가 처참하게 죽게 되는데, 가슴에 뭔가 남게 되었다. 영화에서 케시 베이츠는 악녀, 미친 사람으로만 표현되어있다. 그 사람이 그 정도까지 갔다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슬픔이나 어떤 고통이 있었을 텐데,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고 끝나버리는 부분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그들의 입장에서 풀어나간다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지구가 폭파되고 병구의 다큐멘터리 같은 일상사가 보여진다는 것은 이 영화의 스토리를 생각하면서 분명히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어려웠던 것은 관객들과 일종의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관객4: 감독님 팬으로서 차기작이 기대된다. 요즘의 큰 관심사는 무엇인지?
장준환: 오랜만에 필름 작업한 게 있다. 부산프로젝트라고 해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기획한 영화다. 한국, 태국, 일본의 세 감독이 부산을 배경으로 만드는 사랑이야기다. 올 겨울에 만들었고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이게 된다. 제목은 <러브 포 세일>이라는 SF다. 머릿속의 사랑의 기억을 사람들에게 팔게 되면서 그것이 상품이 되고 밀거래가 되기도 한다. 최근의 관심사는 제 다음 작품은 뭘까이다. (웃음) 사실 솔직히 요즘 ‘나는 왜 하고 싶은 얘기가 없지’ 이런 생각이 든다. 뭔가 나를 막 끌어 오르게 하는 그런 게 안 생기는 게 요즘의 고민이다.

관객5:
영화를 보면서 설마 했던 일들이 진짜 진행되어 놀라웠다. 일종의 자신감의 표출이었을 것 같고, 사람들이 이래서 천재감독님이라는 얘기를 하나보다 싶었다.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에게 제일 망설여졌던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장준환: 제일 망설여졌던 부분은 마지막에 지구를 폭파하는 장면이었다. 여러 가지 필터가 자꾸 걸리면서 이렇게 까지 하려면 내가 이 영화에 진실한 감정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 안에 웃음도 많고 패러디도 많지만 이 영화를 장난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진심을 가지고 마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세상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 어떤 메시지를 담았다기보다는 제게는 이 영화가 어떤 물음표다.

주성철: 병구의 노트는 직접 다 만드신건지?
장준환: 제가 한 부분도 있고, 미술팀이 한 것 도 있다. 그 작업도 해보니까 상당히 쉽지 않더라. 병구의 마음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작업이다. 나름대로 즐거운 작업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 노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관객6: 감독님 영화엔 판타지의 경향이 많은데, 원래 판타지 문학도 좋아하는지?
장준환: 사실은 책도 많이 안 읽는다. 우연히 보다가 재밌는 거 같으면 좀 읽고 하는 식인데, 아이작 아시모프 단편 같은 걸 굉장히 재밌게 봤다. 인류사 같은 종류의 책들을 관심 있게 본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어렸을 때부터 과학 잡지들을 좋아하고 재밌게 보곤 했다. 지금도 인터넷 뉴스를 보면 과학 기사들을 재밌게 보기도 한다.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관객7: 지구를 폭파하고 난 이후에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왕자는 지구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저지르는 포악한 짓에 병구는 저항을 하는데, 왜 병구의 그런 저항을 보면서도 희망이 없다고 하는지 궁금하다.
장준환: 영화상에서 설명되는 것으로는 고통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유전자 결합구조가 느슨해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실험대상으로 쓰게 되고, 그 유전자 구조가 바뀔 수 있으면 성공이니까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았던 거다. 괴롭힘을 일부러 주기도 했었다는 부분도 있다. 이란의 사람들이 치타들을 관리하듯 관리하다가, 병구에게 납치 되는 것을 계기로 인간의 마음이 되어서 느끼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병구의 일기를 보면서 울부짖는 장면이 있습니다. 관리직으로서 실험대상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짜 희망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식으로 감성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성철: 마지막으로 못 다한 말씀이 있다면 해달라.
장준환: 더운데 많이들 오셔서 이 오래된 영화를 봐주시고, 질문도 해주셔서 실은 저한텐 좋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한다. 즐거운 부담이라고 생각한다. 할 이야기가 없어 고민이었는데, 제 안에서 이제는 조금 시동이 걸리는 것 같다. 다시 좋은 영화로 찾아뵐 수 있기를, 무지개 너머 어디에 더 재밌고 아름다운 영화가 있기를 바란다. (정리: 장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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