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는 한 명의 영화작가가 얼마나 사랑을 가지고 그의 전 생애 동안 영화를 만들었는가를 보여준다. 사랑에 굶주린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했고, 영화로 만난 여배우들을 사랑했고, 사랑을 추구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400번의 구타>에서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앙투안 드와넬은 거리를 쏘다니다 몰래 우유를 훔쳐 마시는데, 벽에는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굶주림을 그린 위대한 희극왕에 대한 경배의 표현이다. 동시에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회에서 소외되어 불량소년으로 떠도는 인물의 삶이 채플린이 창조한 부랑자 찰리의 삶과 만나는 순간이다. 트뤼포는 이런 식으로 상실의 삶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기획으로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다.

 

트뤼포에게 영화는 수줍어하는 소년이 예쁜 소녀에게 고백하는 사랑의 감정 같은 것이다.그는 어린 시절 아벨 강스의 <잃어버린 천국>을 본 순간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전쟁 시기, 극장은 군인들로 들끓었다. 전선으로 떠나기 전 여자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온 군인들은 1차 대전의 비극을 그린 아벨 강스의 영화를 보며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그에게 어두운 극장은 감정의 제전이 벌어지는 장소이다. <앙투안과 콜레트>에서 앙투안은 극장과 유사한 음악 연주회장에서 건너편에 앉은 콜레트를 은밀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그녀에게 이끌린다. 관음증에 가까운 시선처럼 보이지만 요점은 극장의 어둠에 몸을 맡긴 수줍은 소년이 이러한 보기의 방식을 빌어 간신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트뤼포의 영화에서 우리는 영상을 점점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아이리스 기법처럼 감정의 표현이 다양한 영화적 기제들, 효과들, 장치들을 경유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에서 소심한 찰리의 감정은 건반과 현을 두드리는 해머의 무감한 메커니즘과 아이러니한 관계를 맺는다. 그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살결, 자신의 삶을 부드럽게 터치하지 못한다. <앙투안과 콜레트>에서 앙투안은 음악회에서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음악과 소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은 그가 묵묵히 도자기처럼 레코드판을 굽는 긴 장면과 미묘한 관계를 맺는다. <도둑맞은 키스>에서 앙투안의 소심함과 주저, 수줍은 고백은 낭만적인 편지로 전달된다. 트뤼포는 지하 수도관처럼 보이는 긴 파이프를 따라 낭만적인 감정이 담긴 편지가 전달되는 과정을 길게 보여준다. 내밀한 감정을 표현의 기계적 메커니즘을 통해 전시하는 이러한 장면들은 트뤼포에게 영화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또 다른 강렬한 순간이 있다. <아메리카의 밤>에서 영화감독으로 분한 트뤼포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400번의 구타>의 레오를 떠올리게 하는 꿈속의 소년은 조셉 루이스의 <건 크레이지> 속 소년처럼 거리를 걸어 나와 영화관에 걸린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의 포스터와 사진들을 훔친다. <개구쟁이들>에서도 그렇지만 트뤼포는 이미지를 훔치는 소년에의 매혹을 여러 번 보여주었다. 거리의 소년은 그 자신의 순수한 이미지일 것이다. 소년이 훔치는 영화 포스터와 사진들은 그가 가져보지 못한 삶의 이미지들이다. 트뤼포는 삶에 관한 생각들 대부분을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얻었고, 영화의 역사, 과거와 현재를 시네마테크에서 배웠다고 고백한 감독이다. 영화는 그에게 삶보다 거대하고 매혹적인 것이었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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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사랑이야

 

* 프랑수아 트뤼포가 1971년에 남긴 앙투안 드와넬 연작에 관한 노트 <앙투안 드와넬은 누구인가?>를 바탕으로 쓴 글임을 밝힌다.

 

‘앙투안 드와넬 연작’은 애초에 한 편으로 예정되었으나 우연한 기회에 20년의 세월에 걸쳐 진행된 다섯 편의 영화 - <400번의 구타>, <앙투안과 콜레트>, <도둑맞은 키스>, <부부의 거처>, <사랑의 도피> - 를 말한다. ‘앙투안 드와넬 연작’은 낭만적이면서 고전적인 남자의 이야기다(트뤼포는 앙투안이 19세기 식의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앙투안은 소년 시절에 이미 발자크를 비롯한 고전문학에 매혹되었고 삶의 매순간마다 일기와 편지를 쓴다. 그가 장차 쓰게 되는 소설은 일기와 편지의 확장에 다름 아니다. 인터넷과 핸드폰의 시대라면 앙투안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앙투안 드와넬 연작’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성장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앙투안은 어른과 사회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기에 계속 공간을 이동하고 직업을 바꿀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인간관계와 사랑에 있어 도무지 성장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그것은 프랑수아 트뤼포가 이 시리즈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했다). 앙투안은 천성적인 현실도피주의자다. ‘앙투안 드와넬 연작’은 감독과 배우와 인물이 함께 엮어나간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다. 오디션에서 뽑힌 장 피에르 레오는 물론, 콜레트, 크리스틴, 사빈느 역할의 세 여배우 - 마리 프랑스 피지에, 클로드 자드, 도로시가 들락거리면서 다섯 편이자 결국에는 한 편인 영화를 완성했다. 배우들의 얼굴에는 세월의 자취가 남아 있으나, 그들은 배우가 아니라 실제로 그 인물인 양 자연스럽게 역할에 스며들었다.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1959)의 첫 촬영을 1958년 11월 10일에 시작했다. 그날 앙드레 바쟁이 40세로 생을 마감한다. 아버지로 여긴 바쟁의 죽음을 애도했던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를 그에게 바친다. <400번의 구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 앙투안은 슬프고 고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물에 변화를 가져온 건 장 피에르 레오라는 어린 배우였다. 오디션 당시 엄청난 열정으로 임해 트뤼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소년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트뤼포는 레오 덕에 각본보다 영화가 더 좋게 나왔다고 밝힌 바 있다. 트뤼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은, 레오가 첫 시사에서 보여준 반응에서 알 수 있다. 촬영 내내 밝은 모습으로 행동했던 레오는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속에 트뤼포의 어린 시절과 그의 현재가 함께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단편으로 기획됐던 영화가 장편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가 소년기의 아픈 경험들을 담기를 원했다. 십대에 이미 경찰서를 들락거린 트뤼포처럼, 13살 소년 앙투안은 가족과 학교가 공히 포기한 말썽꾸러기다. 거짓말과 가출과 도둑질로 인해 소년은 철창에 갇히고 감화원으로 보내진다. 앙투안은 말한다. “지겨워, 내 인생을 살고 싶어, 바다를 보고 싶어”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장면은 그 바람에 대한 대답이다. 해변으로 달려간 소년은 세상으로 향하는 모험의 문턱에 선다. 트뤼포는, 자신이 태어난 이듬해에 장 비고가 내놓은 <품행 제로>에 견줄 만한 작품을 만들었다.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의 속편에 대해 가끔 생각하면서도 속편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 두려워했다. 그의 두려움은 옴니버스 영화 <스무 살의 사랑> 중 프랑스 편을 의뢰받는 순간 사라진다. 그는 앙투안이란 인물을 다시 한 번 등장시키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자신의 과거를 살짝 변주하기로 한다. 영화에 미친 트뤼포는 음악에 빠진 앙투안으로 변했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릴리안 리트뱅을 만났던 기억을 음악회에서 앙투안과 콜레트가 눈길을 주고받는 것으로 바꾸었다. 17살 소년 앙투안은 레코드 회사에서 일하면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한다. 콜레트는 소년의 일상에 변화를 부른다. 소년은 소녀의 집 맞은편으로 숙소를 옮기고, 소녀의 가족과도 친해진다. 그러나 콜레트는 앙투안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그랬다. 아름다운 소녀 리트뱅을 놓고 경쟁했던 장 뤽 고다르와 트뤼포는 둘 다 쓴맛을 보고, 사랑의 실패는 자살 소동과 군 입대로 이어졌던 것이다(그러므로 다음 작품 <도둑맞은 키스>는 군인인 앙투안의 모습으로 발을 뗀다). 현실적인 소녀와 낭만적인 소년이 만났을 때 이미 예견된 첫사랑의 고통을 <앙투안과 콜레트>(1962)는 시리면서도 유머러스한 표정으로 전한다.

 

연작의 세 번째 작품 <도둑맞은 키스>(1968)는 앙투안의 새로운 사랑이 그렇듯 덜컹거리는 작품이다. 촬영에 들어가고 며칠 뒤, 그 유명한 ‘앙리 랑글루아 사건’이 벌어진 탓이다. 당연히 랑글루아를 옹호했던 트뤼포는 일련의 사태들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인과 투사라는 두 가지 생활을 병행했던 트뤼포는 촬영장에 매번 늦게 도착했고 심지어 참석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각본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겪어야만 했으며, 배우들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대사를 만들어 내어 연기했다. 그런 까닭에 영화에 참여했던 스텝들은 <도둑맞은 키스>를 ‘작은 기적’이라 부른다. 연작 중 첫 컬러 영화인 <도둑맞은 키스>에서 앙투안은 여자 친구 크리스틴과 여신처럼 아름다운 부인 파비앙 사이에서 뒤뚱거린다. 그의 뒤뚱거림은 극중 그의 직업이 군인, 야간경비원, 사설탐정, 신발가게 점원, TV 수리공 등으로 바뀌는 것과 대응한다. 청년이 되어서도 앙투안은 모든 것에 서툴다. 그래서 그는 사랑스럽다.

 

<도둑맞은 키스>의 속편 격인 네 번째 작품 <부부의 거처>(1970)는 부부가 된 앙투안과 크리스틴의 이야기다(두 사람이 결혼한 걸 보고 싶다고 랑글루아가 트뤼포에게 말했다 한다). 도입부에 흘러나오는 현대음악의 불안한 향기는 부부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한다. 크리스틴은 집에서 음악 레슨을 하고, 꽃 가게에서 일하던 앙투안은 사무 착오로 미국계 회사에서 일할 기회를 잡는다. 드와넬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나는 한편, 앙투안이 회사에 손님으로 온 일본 여자와 외도를 하면서 부부생활은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트뤼포가 <부부의 거처>에서 원했던 것은, 레오 맥커리, 조지 큐커, 에른스트 루비치가 연출한 미국식 코미디의 분위기였다. 실제로 영화는 일상의 웃음으로 넘친다. 부부가 사는 아파트의 주변인물도 그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에필로그에서 재결합한 앙투안 부부는 사이가 나빠 보이는 이웃 부부가 예전에 했던 것처럼 행동한다. 그때, 이웃 부인은 “두 사람은 이제 진짜로 사랑하게 됐어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부부의 거처>는 흐뭇한 미소로 마감된다.

 

 

연작이 이어지고 성공을 거두면서 드와넬이라는 인물과, 실재하는 두 사람 장 피에르 레오와 프랑수아 트뤼포 사이에서 웃기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트뤼포와 레오를 혼동한 카페 주인은 트뤼포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영화가 옛날에 만들어졌나 봐요. 그 때는 많이 젊어 보이더군요”라고 말했다. 신문 가판대의 남자는 먼저 왔다간 레오를 트뤼포의 아들로 착각하기도 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레오와 트뤼포가 앙투안이라는 가상의 인물로 융합되었음을 알려주는 예들이다. 트뤼포는 드와넬이 만화 캐릭터처럼 고정된 인물로 변하는 게 싫었던 것 같다. 게다가 <부부의 거처>를 마쳤을 무렵에 이미 트뤼포는, 레오라는 배우가 하나의 인물에 고착될까봐 걱정했다. 트뤼포는 <사랑의 도피> (1979)를 끝으로 앙투안이라는 캐릭터를 더 이상 영화에 끌어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사랑의 도피>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보다 이전 네 편 영화를 요약하고 총정리하는 쪽을 택했다. 전작에서 뽑아낸 장면(과 새로 찍은 몇 가지 장면)으로 플래시백을 완성하고, 등장했던 인물들의 관계를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그래서일까, 연작을 마무리한 뒤 트뤼포는 <사랑의 도피>가 진짜 영화처럼 보이지 않아서 불편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앙투안 드와넬 연작’이 어쩌면 실패한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앙투안 드와넬 연작’이 흥미롭고 재미있는 영화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사랑의 도피>에서 앙투안은 편지를 쓰다 엄마가 가르쳐 준 단 한 가지 진실을 떠올린다. ‘중요한 건 사랑이다’ 앙투안이 그토록 현실 안팎을 서성인 것도 다 ‘사랑’ 때문일까. 그는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으나, 그 시간의 자리엔 사랑이 남았다. <사랑의 도피>는 레코드점에서 키스하는 두 커플과 어린 앙투안의 모습을 교차하며 끝난다. 놀이기구를 타다 어지러워하던 소년은 삶과 사랑을 경험하며 더욱 심한 어지러움을 겪는다. 그 어지러움 속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면 그건 사랑 덕분이다. 20년의 기록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다.

 

(이용철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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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홍성남 영화평론가와 들려주는 트뤼포의 세계

매혹의 아프로디테란 부제로 열리는 ‘2010 시네바캉스 서울’ 상영작 중에는 특별히 여인을 사랑한 감독 프랑수와 트뤼포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나오는 작품이 3편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지난 8월 3일은 이 세 작품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이름하여 트뤼포데이 였다. 마지막 상영작인 <부드러운 살결> 상영 후에는 홍성남 영화평론가가 트뤼포의 영화세계, 그 중에서도 트뤼포와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재밌는 시네토크를 펼쳤다. 그 일부를 이곳에 옮겨본다.


홍성남(영화평론가): 이번 영화제에 상영하는 영화들 중에서 트뤼포 영화가 세편이 포함되어 있는데, 트뤼포가 좋아했었던 혹은 트뤼포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매혹되었던 여배우들에 주목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트뤼포의 영화세계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 트뤼포와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릴 수는 없겠지만, 트뤼포의 개인적 이야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측면에서 그의 전반적인 영화세계와 관련시켜 이야기하고자 한다. 트뤼포의 영화는 ‘대체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라고 질문해 볼 수 있다. 좀 더 간단하게 질문을 바꿔본다면 ‘과연 그의 영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범주로 나눠지는가’이다. 트뤼포는 언제가 감독의 첫 작품에는 감독의 영화세계의 모든 것이 담겨있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작품들은 그보다 더 나을 수도, 못할 수도 있지만 모두 첫 작품의 변주라고도 말했다. 모든 감독들에게 이 말이 적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떻게 보면 트뤼포의 전반적인 영화세계는 그 자신의 말을 확인시켜주는 과정이지 않나 싶다. 데뷔작인 단편 <개구쟁이들>(1957) 뿐 아니라 그 이후 장편 세 작품인 <400번의 구타>, <피아니스트를 쏴라>, <쥴 앤 짐>은 이후 트뤼포가 만들 영화들의 범주를 미리 알려주는 영화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400번의 구타>에서 처음 등장한 앙트완 드와넬의 성장과 사랑, 삶의 이야기는 이후의 영화들에서도 이어지면서 트뤼포 영화에 있어 하나의 범주를 이루게 된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와 같은 장르 영화도 있다. 이 작품은 그 안에 미묘하게 여러 장르들이 섞여있지만 특히 필름 느와르 또는 범죄 영화의 영향을 볼 수 있다. 트뤼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감독으로는 히치콕과 장 르느와르를 들 수 있는데, 트뤼포는 범죄드라마를 장 르느와르 식으로, 애정관계의 이야기를 히치콕 같은 방식으로 만들고 싶다며, 그것이 자신의 영화적 이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 번째 작품은 <쥴 앤 짐>인데, 과거를 배경으로 하면서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닌 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들의 범주에 속한다. 물론 이러한 범주들은 편의를 위한 구분으로, 트뤼포의 전체 필모그래피에서 보면 그 구분이 모호하거나 다층적이다.

일단 이렇게 세 개의 범주로 나눠진 것이 트뤼포의 영화 세계라고 가정한다면, 그 다음엔 그것들을 관통하는 전체적인 주제나 요소 혹은 모티브에 대해 질문해 볼 수 있다.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에서 장 피에르 레오는 극 중 반복해서 ‘과연 여자는 마술적인 존재인가’ 라고 묻는데, 어떻게 보면 그 질문이야말로 트뤼포의 전체 영화세계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트뤼포는 기본적으로 <여자를 사랑한 남자>라는 자신의 영화제목처럼 여성을 사랑하고 여성을 탐구하고자 했던 감독이기도 하다. 트뤼포의 영화를 보면 여성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답을 내놓기보다는 질문을 위한 탐색을 위해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행위하고 사고하는 것이 트뤼포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것 같다. 트뤼포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런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영화와 맞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치이론이나 사회이론에 더 맞는 사람들일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예술을 배반하는 사람들일 거라 말했다. 트뤼포는 정치적인 연설이 이뤄지는 광장이나 사무실 혹은 공장, 회의장에서 이루어지는 일보다, 침대에서 이뤄지는 일이야말로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러한 것들이야말로 영화가 담아야 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언젠가 데이비드 린의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콰이강의 다리>의 시나리오를 열 명의 감독들에게 보낸다면 모두 똑같은 영화가 나올 테지만, 반면에 <밀회>의 시나리오를 열 명의 감독들에게 보낸다면 열 편 모두 다 다른 영화가 나올 것이라고도 했다. 그만큼 남녀의 문제란 사람들에게 있어 각각의 관점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트뤼포의 영화들 속에서 절대적인 것과 잠정적인 것 사이의 구분과 대립이라는 문제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절대적인 것 혹은 절대적인 것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서 고정되고 영원하고 명확하다고 여긴다. 그에 비해 모든 것들은 가치가 되었던 범주 개념이 되었든 고정되고 영원한 것은 없다고 여기는 것은 잠정적인 것 혹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과 관계된다. 잠정적인 것은 사랑의 감정과 관계라고 하는 것이 변화하는 것이며,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과 묶일 수 있다. 트뤼포는 자신의 영화에 나온 많은 배우들과 관계를 맺곤 했다. 그는 자신의 영화 제목처럼 여자를 사랑한 남자였고 그의 영화적 분신인 앙트완 드와넬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도덕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런 관계에 대해 책임감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트뤼포의 영화에는 절대적으로 혐오하거나 미워할 만한 인물이 없다. 트뤼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한 장 르느와르는 모든 인간은 각자의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소중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트뤼포다. 트뤼포는 잠정적인 인물들에 대해 나쁘게 그리지도 않지만 언제나 선하게 그리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충분히 동정하고 공감을 살 수 있는 인물로 그리면서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약점을 잘 그려내기도 한다.

반면 그러한 잠정적 인물에 반해 절대적인 것 혹은 그러한 가치에 속할 수 있는 인물은 어떤 사람들일까? 사랑의 가치를 영원한 것으로 믿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부드러운 살결>의 프랑카 같은 인물이다. 그러한 인물들은 대체로 영화 안에서 적대 혹은 심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트뤼포의 <상복을 입은 여인>이란 영화에서 잔 모로는 결혼을 앞두고 남자의 죽음을 맞게 되자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한 사람씩 살해하는 여성을 연기한다. 혹은 <아델 H의 이야기>의 이자벨 아자니는 결국 스스로 광기에 빠질 정도로 한 남자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러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절대적인 가치 혹은 사랑에 빠져 있으며 결국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인물을 그릴 때조차도 트뤼포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인물에 대해서 적의나 혐오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공감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동정심을 가지고 묘사한다.

이러한 문제는 트뤼포의 전반적인 영화세계와 연관 지었을 때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 지하철>은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한 극단의 이야기다. 이 영화에 대해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라는 역사적 배경을 통해 중요한 역사적·정치적 문제를 질문하지 않을까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 영화에 대해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홀로코스트의 문제나 반유대주의 문제를 소소한 가정 비극과 같은 것으로 떨어뜨렸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도덕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단순한 것이 아니냐하는 것이었다. 선과 악의 축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명확하게 그려져 있다는 거다. 그러나 그 영화는 절대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대립이 중요한 모티브인 영화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악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치 협력자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맹신이 전체주의와 연결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선이라고 할 수 있는 극단 사람들이 있다. 연기를 한다는 것은 정체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역할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이므로 이들은 잠정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극단의 배우이기 때문에 역할을 맡을 때와 실생활에서의 정체성이 다르기도 하지만, 나치 정권 하이기 때문에 실생활에서도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연기를 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유동성이라는 이 영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시간이 흐른 후 두 남녀 주인공은 재회하게 되는데 연극 속의 장면이 연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픽션과 리얼리티 사이의 유동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아메리카의 밤>에서도 트뤼포가 보여주는 것은 영화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사이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거다. 절대적인 것은 그 어떤 영화의 주어진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는데, 시나리오를 가지고 곧이곧대로 영화로 만든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트뤼포가 추구했던 영화 만들기는 그와는 달랐다. 물론 기본적으로 시나리오가 주어지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 계속해서 적응하면서 변화해간다는 것이다. 물론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는 더 이상은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 논리로 생각하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이 영화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완성된 한 편의 영화 안에서도 절대적인 것과 잠정적인 것이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뤼포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태어난 사람이란 것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에게 있어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했다. 그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결국 생겨나는데 그가 바로 앙드레 바쟁이었다. 또한 트뤼포는 장 피에로 레오와도 일종의 부자관계 형성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 찾기와 아버지 되기였는데, 단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버지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화 안에서도 아버지가 없다는 것, 아버지가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은 굉장히 중요하다. 트뤼포에게 어울리는 명칭은 혁명가보다는 개혁가가 아닐까 싶다. 편의상 구분을 해보자면, 트뤼포와 자주 비교되곤 하는 고다르가 ‘혁명가’라면, 트뤼포는 오히려 시스템 안에서 더 나은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개혁가’라고 할 수 있다. 라울 쿠타르는 ‘나는 필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시네마를 만드는 사람이다’라고 했던 고다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보자면 트뤼포는 분명 필름을 만든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 편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 갔던 사람이 트뤼포라고 한다면, 영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영화란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 사람이 고다르였다는 의미인 듯하다.

트뤼포는 대중적이며 장르적인 영화를 만들면서도 작가적 시각과 예술영화의 품격, 프랑스적인 멜랑콜리가 같이 한 데 섞인 영화를 만들었다. 제임스 모나코는, 트뤼포라는 사람은 사람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일까에 대해서 가장 내밀하면서도 보편적인 논리를 갖고 경박하지 않은 유머와 관능성과 영화적 재미를 함께 갖춘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트뤼포가 영화역사상 가장 뛰어난 감독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가장 많은 애정을 받고 있는 감독이지 않을까 싶다. (정리: 장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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